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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여지없이 흘렀다.
2006년 8월. 누나가 떠난 이후로 2년.
내 생도 그랬지만 세상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눅눅하고 부조리했다. 한여름이 그러하듯.

그렇지만 꿈을 꿔야했다.
그 어느해 <정영음>에서 파업전야를 전파에 띄우던 날.
누나는 늦기 전에 시작하자는 이야기를 건넸다.
"한방울의 물이 모여서 거대한 폭포가 이루듯
우리 한 사람의 힘이 점점 파문을 일으키면 뭔가가 변화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라며 우리를 선동(!)했다.

누나의 2주기. 그때 나는 다음에 있었다.
8월은 어김없이 다가왔고,
누나가 다시 찾아왔다.
어쩔 수 없다.
한여름이 닥치면, 8월이 오면,
나의 대뇌피질은 파블로브의 개처럼 조건반사한다.

영상회가 있다고 했다. 궁금했다.
정은임이, 정은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만났다.
추억으로 박제된 정은임을.
정은임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여러 이름을.
그래. 누나는 천국으로 떠나서도 선물을 줬다.
우리가 누나를 떠올리며 추억을 나눌 수 있도록.
하지만, 슬픈 건 어쩔 수 없다.
1년이 흐르고, 2년이 흘러도.
같은 하늘 아래 있지 못한 슬픔도 고스란히 우리 몫이었다.

그날. 누나는 우리 목소리를 들었을까?
그 이야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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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금요일 저녁 홍익대학교 부근. 폭염에 폭격당한 도시이지만 홍대 앞의 밤거리는 각기 다른 목적과 모습을 지닌 사람들로 들끓는다. 사람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상을 관통한다. 홍대 앞을 꽉꽉 매운 일군의 사람들 중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그마한 카페에 모여있다. 각자 안면도, 일면식도 거의 없었던 사람들. 그들은 왜 모였을까.

그들을 한자리에 묶은 것은 고 ‘정은임’ 누나였다. 2년 전 같은 날, 세상을 떠났던. 2004년 7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던 누나는 팬들의 열망을 뒤로 하고, 천국을 장식하기 위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하루, 이틀.. 1년, 2년.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일상은 굴러간다. 웃고 떠들고, 슬퍼하고 우울했던 사람살이. 그럼에도 그들에게 8월4일은 각별한 날이다.

누나가 떠나던 날의 풍경  ☞ 라디오시대 마지막 스타가 떠났다
그리고 1주기  ☞ 고 정은임 아나운서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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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모임장소를 알리는 종이  ⓒ 김기중

정은임 누나를 추모하기 위한 자리. 정은임추모사업위원회(준)(정은임.com) 회원과 추모영상회를 가진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이 모였다. 지난해에 이어 아름다운 가게와 바자회를 열었고, 영상회를 가졌다. 각자의 추억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어쩌면 너무도 아픈.

김지미 영화평론가는 이런 말을 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추억을 나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사람들의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아프게 만든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는 추억을 되짚었고, 그만큼 웃었고 아프기도 했다.


영상으로 만난 은임이 누나

저녁 8시. 30여명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은임이 누나가 예전 모습 그대로,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스크린 속의 은임이 누나는 웃고 있었고, 낭랑하지만 결기 있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정은임의 FM영화음악’(정영음)의 예의 그 익숙한 ‘You are so cool’<트루로맨스>OST )이 흘러나왔고, 무엇보다 거기엔 누나가 있었다.

스크린을 통해 은임이 누나는 정영음과 함께 수다쟁이가 됐다고 토로하고 있었다. 주변의 친한 사람에게도 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는다던 누나는 라디오를 통해 마음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단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모습. 정영음은 곧 정은임이었고, 정은임은 다시 정영음이었던 하루하루. 그리고 그런 누나와 새벽녘에 사랑에 빠진 사람들.

정영음은 여느 (라디오)방송 프로그램과 달랐다. 대부분이 잠든 새벽녘, 그저 편히 잠을 청하거나 귀를 간질이는 음악을 들려주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팝콘 프로그램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이, 아니 으레 한국의 방송에서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의 발언과 이야기를 뛰어넘는 독특한 위치. 그 안에는 세상이 담겨있었고 사람들이 숨을 쉬고 있었다. 좀 과장해서는 <볼륨을 높여라>(Pump up the volume)나 <굿모닝 베트남>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의외성에 빠진 청취자들도 많다. 격한 구호를 부르짖었던 정영음에 많은 청취자들은 지지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지만. 정영음은 그렇게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파고들었고, 은임이 누나는 ‘대장님’이었다. 그리고 정영음의 1995년 첫 종방사건“(!) 이후, 당시 4대 통신을 중심으로 전무후무한 청취자운동이 벌어졌던 기억. 정영음은 90년대를 관통하는 문화운동의 한 아이콘이었다.

누나는 당시의 종방에서 흐느끼며 말하고 있었다. “방송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고 “‘좋은 세상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끝까지 우리를 꼬드겼다. 울먹이는 목소리는 더욱 이를 가슴깊이 새기게끔 만들었다. “...여기서 인사드릴께요”라던 작별 인사를 고하던 그 목소리 말이다. 은임이 누나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좋은 세상’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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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회를 가지기 전 모습  ⓒ김기중

간혹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박제된 은임이 누나의 모습과 목소리에서 감정이 복받치는 건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르겠다. 은임이 누나는 여전히 웃고 있다. 당초 이 영상은 정영음과 팬들의 자취를 좇아가고 있었다. 종방 이후 정영음의 의미와 복귀를 추진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상은 당초 1차 편집을 끝냈으나 정영음이 갑작스레 복귀하고 또 은임이 누나가 사고를 당하면서 편집방향이 바뀐 것이라고 했다.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것은 최초라는 것과 함께.


“한 사람 한 사람 정은임이 되길 바란다”

이 자리에는 영화평론가 정성일 선생이 함께 했다. 정영음의 고정 패널로서 은임이 누나의 영화 친구. 다큐 상영이 끝난 뒤 “솔직히 힘들다”고 심경을 토로하던 그가 털어놓은 정은임 혹은 정영음. (때론 정확하지 않은 멘트가 있을 수도 있음.)

“(이 다큐는) 처음 봤는데 찍혀진 것은 사고 전이다. 정영음이라는 프로그램은 흔히 아는 라디오프로그램과 달랐다. 당시 4대 통신을 통한 연대, 새로운 코뮌을 만들 수 있지 않나하는 기대도 있었고, 좋은 세상을 믿는 사람들의 약속 같은 거 아니었나 싶다... 정은임씨는 항상 Hot한 사람이었다. Cool한 태도를 경멸했고 Cool이란 단어를 싫어했다...

다큐를 보면서 생각나는 건, 1992년부터 시작한 정영음은 본인이 제일 열심히 하고 아끼며 최선을 다했던 프로였다. 시간과 갖은 노력을 다 들였다. 라디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는 대부분 앵무새인데 정은임씨는 달랐다.

특히 라디오방송이어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영화를 설명하는 코너가 있었다. 많은 청취자들이 없애자는 코너였다. 없애자는 엽서도 많이 왔고. 정은임씨는 엽서가 오면 다 읽었다. 예쁜 박스에 넣고. 악랄할 엽서도 굉장히 많았다. (이런 엽서를 보면) 힘들어했고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 코너를 없애는 것은 내 눈을 빼앗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 그 코너를 지켰다. 그래서 (그 코너는) 없어지지 않았다. 당시 PD를 맡고 있던 홍동식 PD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라디오 방송에서 절대적 방송권은 PD가 갖고 있다.

나는 굉장히 감동했다. (정은임씨는) 여차저차 TV에 갈 수 없었던 사람이었고 라디오를 해야 했었고, 입사하자마자 영화음악실을 맡았다. 사실 새벽 1~2시 프로그램은 입시생, 고시준비생 아니면 잘 듣지 않는다. 직장인들은 다음날 회사 출근할 것을 생각하면 12시에 자야한다.

한번은 (정은임씨에게) 내가 받은 비수 같은 엽서를 보여주기도 했다. 제대해서 (정영음을) 처음 들었다는 그 사람은 MBC 주파수와 교육방송 주파수가 바뀐 줄 알았다고 했다. 내용도 어렵고 센 발언도 많고.. 그런데 사실 이렇게 지지자들이 많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영상을 보면서 이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봤다. 훌륭하다고 생각한 특히 나이 어린 사람이 떠나면 참 힘들어진다. 사는 게 덤처럼 느껴진다. 고인이 된 뒤 식장에 도착했더니 그 무덥고 화창했던 날씨가 비가 쏟아 붓고 있었다. 거기 있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했다.

정은임씨는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착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좋은 세상에 대한 신념이 있었고 그것보다 더 큰 신념을 갖고 행동했던 사람이다. 곁에 있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만날 수록, 과장 없이, 향이 느껴지고 깊어지는 사람이다. 이건 고인이어서가 아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가도 갈수록 시들해지고 맛이 가는 경우가 많은데 정은임씨는 달랐다. 그래서 (정은임씨는) 살아가면서 몇 되지 않은 멋진 만남이었다.

정은임이라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건 기억하는 것이다. 잊으면 정말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것이다. 단지 기억하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 다 정은임 같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향을 낼 수 있는, 나눠줄 수 있는. 어린 사람이지만 많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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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바자회  ⓒ김기중


“정은임은 아직 살아 있다..”

정 선생을 통해 그 전에 알던 ‘정은임’ 이상의 ‘정은임’을 알게 됐고, 그 마음을 품고 몇몇 사람들이 가진 뒷풀이. 그들은 하나같이 정은임 누나의 ‘진심’을 이야기한다. 과연 그 진심이 무엇이길래, 그들은 ‘정은임’을 혹은 ‘정영음’을 잊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까. 이날 모인 정은임.com의 회원들이 이야기하는 정은임 혹은 정영음.

최두은씨가 생각하는 정영음은 자신의 삶의 좌표였다.
“그 덕에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일종의 해방구였다. 졸업하고 나서도 한동안 방황했지만 예전 얘기를 되씹으면서 힘을 얻었다. 정성일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가장 기억에 남고 앞으로도 품고 살 것이다. 언니가 죽고 나서 한번도 (라디오방송을) 못 들었다. 1주기 바자회 때 다른 사람들과 공개된 자리에서 듣기도 했으나 목소리만 들으면 눈물이 난다. 오늘도 훌쩍였다...”


영상 관련 공부를 하는 김기중씨는,
“정은임씨가 가진 세계관과 개인적인 정치성은 반대이긴 하나 방송에 나온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에 찬반을 떠나 공감하게 됐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배웠다. 정은임씨는 내게 선생님이었다...”


김정민씨에게 은임이 누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다.
“엽서를 쓴 적도, 했던 것도 없지만 9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정영음은 친구다. 정은임씨는 (방송에서) 애청자 이름을 얘기하면서 ‘들리세요? 듣고 계세요?’라며 직접 소통을 시도했는데, 이건 작가가 쓴 게 아니라 진심으로 얘기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정영음을 안 들어본 사람은 이런 얘길하면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이라 그랬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확고한 것은 진심은 통하고 그것이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돌아가신 후 (방송을) 못 듣는 분도 있지만 난 잘 들었다. 정은임씨가 방송할 때만 접했지만, 접촉을 못해도 여전히 있는 분이고 감사한다. 지금보다 어릴 때 어른들, 특히 보수적인 어른들이 듣기엔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젊은 치기라고 했지만 지금 30대가 됐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공감한다. 잊고 살다가도 링크된 것이나 스크랩된 것을 보면 가슴이 뜨겁게 느껴진다. 정은임씨 생각에 공감하고 기억하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나는 절대로 정은임씨를 못 잊을 것이다...”


윤종선씨에게도 은임이 누나는 잊기 힘든 사람이다.
“처음 동생을 통해 (라디오방송을)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집에 들어가면 12시가 넘으니까 자연스럽게 듣게 됐다. 당시 방송이 새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송이나 아나운서라면 제한된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깨어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 했다.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돼 보고 싶었다. 만나보진 못해도 지금도 살아가는 동안 만나기 힘든 사람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에 감사한다. 잊혀지기 힘든 사람 중 하나다...”


정은임.com의 운영자를 맡고 있는 최진욱씨는 사후에 빠져든 경우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직장동료가 있었는데 ‘정영음’ 이야길 하게 됐다. 그리고 사후에 (라디오방송을) 들었는데 진심이 와 닿았다.” 그리고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지경까지 갔다.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구는 방송을 듣고 깊게 빠져서 친구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대성리 묘소에도 갔고, 결국 정은임추모사업회(준)(정은임.com)을 이끄는 운영자 노릇까지 하게 됐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다른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서 동료가 퇴직할 때 정영음방송분을 CD로 구워서 선물하기도 했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TV에 잘 나오질 않아서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을까 고민한다...”

장애인 분야에서 일을 하는 김윤삼씨는,
“정성일 선생님이 얘기하신 이야기에 공감한다. 좋은 사람에게 결정권이 많이 가고 그러면 세상이 나아진다. 그렇게 돼야 한다.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가끔씩 (정은임 아나운서를) 잊게 될 때도 있으나 가끔 이런 모임이나 사이트를 통해 되새김질하면 좋을 것이다...”

이날 8개월여 만에 대성리 묘소를 다녀왔다는 임병배씨. 그에게 ‘정영음’과 ‘정은임’을 어땠을까.
“그 전에는 라디오를 듣지 않았다. 조금 알고만 있었다. 은임이 누나가 돌아가신 이후 2000년 이후 방송은 다 들었다.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이 많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달랐고 그의 말은 진심으로 와 닿았다. 그래서 (나도) 무언가를 해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 은임이 누나를 보러 갔을 때, 휴가철이다보니 그 주변에 차들이 아주 많이 막히고 그랬다. 그 가운데 절반, 아니 아주 조금이라도 여기를 찾아와준다면 은임이 누나가 바라던 그런 세상이 더 가까이 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추억담 들으셨나요?

누나를 품고 있는 각자의 방식은 다르고 다양하지만, 정은임 혹은 정영음이 자신의 삶에 어떤 존재였는지, 이 비루한 삶을 어떻게 위로했는지도 다르지만, 그들은 누나를, 정영음을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정은임 아나운서를 누나, 언니라고 부르며 언제든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정 아나운서는 아직 각자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사람이었고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좋은 세상을 꿈꾸게 만든다. 그들은 정영음, 은임이 누나와의 만남을 통해 좋은 세상을 꿈꾸게 됐는지도 모른다.

사람살이는 대체로 비루하기 그지없다. 개인에 관계없이 움직이는 세상은 무엇 하나, 개인의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어떤 이들에겐 은임이 누나는, 정영음은 삶이란 치명적 질병에 맞설 유력한 백신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삶의 모든 순간이 기적이 될 수는 없지만, 찰나처럼 지나가는 행복감을 기적이라 부르지 말란 법이 없다면, 정영음은 혹은 은임이 누나의 존재는 기적이라 부를 수도 있을지도...

주저함이 없는 실천적 삶을 살았던, 물론 내부에서는 꽤나 많은 고민이 오갔을, 은임이 누나의 있을 곳은, 그를 기억하고 추억할 사람들의 가슴 속이다. 은임이 누나가 세상과 이웃의 고통에 침묵하지 않았고, 의문을 제기했듯, 그를 기억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과제는 주어졌다. 은임이 누나가 바랐던 ‘좋은 세상’은 아직 요원하지만, 세상을 덜 슬픈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은임이 누나의 몫은 남은 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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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pay it forward)로 만들어진 원작「트레버」는 작은 행동의 실천이 만드는 큰 힘을 보여준다. 이른바 ‘사랑의 다단계 판매’. ‘Pay it forward’라는 말은 은임이 누나의 의지를, 좋은 세상에 대한 바람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은임이 누나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눠야 할 덕목이다. 세상은 그러면 그렇게 시궁창인 것만은 아닌 곳으로 변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 부시정부와 이스라엘의 협잡이 공공연히 세상을 우울하게 만드는 즈음. 비정규직이란 이름의 이웃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시기. 은임이 누나는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 당신이 아는 정은임은 어떤 말을 했을 것 같은가.  

비록 디지털로 박제된 소리지만, 누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어느 순간.

누나는 제 목소리 들리세요?

누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추억담 들으셨나요?

보.고. 싶.고.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감히 말한다. 모든 방송의 오프닝을 통틀어 이보다 더 최고일 수는 없는 오프닝.(2003년 10월 22일)  ☞ 이 날의 방송 듣기  

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 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세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2006. 8)
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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