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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불평등 불감증은 왜, 누가?

[책하나객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이른바 돈 많은 부잣집의 자제로 태어나 (경제적부족함 없이 살고 있음을 비유한다대부분의 우리는 부러움의 의미를 품고 그렇게 이야기한다나라고 다를까은수저 물고 한 번 태어나봤으면 어떨까허구 한 날 노동에 짓눌려 보낸 날이면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런데그 말참 흉포하다태어날 때부터 불평등을 구조화한다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일까그렇다면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대부분의 우리는 맨입으로 세상에 나온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을 감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불평등에 쉬이 분노하는 것 같지만깊은 불평등구조적인 불평등에 대해선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 우리다고작해야 새치기 당할 때 눈을 부라리고 목청을 돋우는 게 고작이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보니 불평등은 나름 정교하게 직조된 구조물이다인간 사이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입한 협잡의 산물이다이 책은 명확하게 주장한다.

 

인간은 원래부터 불평등하다는 주장은 궤변이다불평등한 세상을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한 프레임이 경쟁과 질서였다피라미드 구조가 그것을 대변한다위로 향할수록 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피라미드는 사회적 위계를 구조화했다불평등을 감수하도록 만든 셈이다


반대와 저항의 가능성을 감소시키고 실패에의 투항과 체념의 고통을 견디기 쉽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도착점에서 만나게 되는 무시무시하게 부풀어 오른 엄청난 불평등을 감수하게 만든다요컨대 그것들은 사회적 불평등이 지속되고 심화되는데 이바지한다.”(p.88)

 

삼성의 이건희는 과거에 말했다. 1명의 천재가 1만 명(수치는 정확하지 않다!)을 먹여 살린다과격하게 말해서소수의 능력자에게 다수가 매달려 뒷받침해주고 떡고물이나 받아먹으라는 계시(?)소수의 능력자와 다수의 비능력자로 세상을 단순 구획하는 발언이다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것 또한 불가피한 것으로 여긴다


그 결과, 우리가 당면한 것이 격차사회인류 역사상 이렇게 격차가 커진 적이 없었다책이 수치로 제시한 부분은 놀랍다그렇게 경제성장 지상주의로 밀어붙이건만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 총체적으로 경기를 활성화시키게 된다는 낙수효과(트리클 다운)는 없다빈곤은 사라지지 않고 더 커져가는 현실이다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살던 시대계몽주의 시대더 나아가 헤겔이 살던 시대까지만 해도지구상에서 생활수준이 가장 빈곤한 지역의 두 배 이상인 곳은 전혀 없었다그러나 오늘날 세계 최고 부국인 카타르의 1인당 소득은 최빈국 짐바브웨의 428배에 이른다.”(p.10)

 

그럼에도 그 불평등에 대해 우리 대부분은 행동하지 않는다많은 부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포기한다책을 읽자니우리가 현실적이라는 이름 앞에 얼마나 무릎을 꿇고 있는지 그림이 그려진다부정의의에 대한 교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셈이다현대판 미신이다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이 조장한 주입식 세뇌작업그 믿음은 의외로 단단하다. ‘현실성이 없다라는 이름으로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는 능력을 잃게 만들었으니까상상하지 못하는 질서에 갇힌 세계의 언어적 표현이 현실감이다바우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적 소망을 방해하는 외적 저항에 붙이는 이름이다장애물들의 저항이 강할수록장애물들은 그만큼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p.41)

 

대중을 쉽게 현혹했던 피와 인종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나치가 공식적인 국가관으로 구현했다면불평등은 신자유주의가 공식적인 경제관으로 확립시킨 것이 아닐까인간 사이의 불평등이 정당한 근거가 없음에도이 허튼소리는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자리매김했다인간의 힘으로 맞서거나 바꿀 수 없는 당연한 세상의 이치가 됐다어리석은 일반화다악랄한 조작이다인류가 전쟁을 피할 수 없고억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궤변과 같은 맥락이다. ‘경쟁은 전쟁의 순화된 대체물이 맞다인류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단정의 근거에는 인간이 전쟁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그릇된 믿음이 있다.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정부가 행동에 나서서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믿게 할 수 있는 헛소리의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불평등이라고 다르지 않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로 정부는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다더 나아가 자본의 헛소리 영역은 정부조차 무력하게 만든다전쟁이든 불평등이든 우리가 그것을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그릇된 미신이 가져온 부당한 믿음이다.

 

불평등 불감증에 걸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여럿이 있겠지만우선적으로 질문이 아닐까불평등을 이대로 감내한 채 그릇된 미신에 종속돼 살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질문처럼. GNP(국민총생산)과 GDP(국내총생산)의 수치에 배제된 부의 배분 방식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그토록 경제성장을 지속하고풍요로워졌다는 세상에서 나는 왜 배제됐는가물어야 한다소수에게만 부가 편중되는데나의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은 왜 자꾸 떨어지는가질문해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믿음을사람들은 바로 이런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이라고 결론을 짓는다옳은 결론이다그리고는 이런 종류의 세상에서는 어떠한 대안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결론짓는다잘못된 결론이다.”(p.47)

 

각종 경제위기 상황에서 더욱 창궐하는 긍정주의’ 역시 경계해야 한다그 지긋지긋한 긍정 찬가는 모르핀이다불평등에 대한 거짓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긍정의 힘을 설파한다불평등 때문에 터질지 모르는 분노의 뇌관을 잠재우기 위함이다불평등의 희생자들이 되레 불평등을 옹호하고 평등의 외침을 비웃는 기이한 현상


그것을 깨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불평등에 희생당하고 있는 우리의 질문과 성찰이다. ‘슈퍼 갑의 사회를 깨뜨리는 출발은 을의 성찰이다바우만은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대신 그는 권한다어떤 식으로건 문제를 회피하지 말 것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사유할 것책의 제목처럼 우선 질문하자회의하자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우리의 불평등 불감증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썼고, 내 감상 그대로를 긁적였다.) 


Posted by 스윙보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렇다(물론 나도 포함된다). 스무 살이 넘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아주 드물게 예외적인 인간이 있을 뿐이다. ‘사실’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도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나에게 유리하면 사실은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실 따위는 개에게나 줄 먹이거리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여기의 ‘종북’이라는 딱지다. 종북(從北)이 말 그대로, ‘조선노동당과 그 지도자의 외교 방침을 추종하는 경향’을 뜻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냥 자신(의 정치적 견해)과 다르면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유행’이 됐다. 다른 이유는 없다. 종북의 근거나 이유를 발견해서가 아니다. 그냥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종북이라는 유행어를 갖다 붙인다. ‘듣보잡’ 변희재는 그래서 낸시 랭에게 ‘종북’이라는 레떼르를 부여했다.   

 

밑도 끝도 없는 종북놀이를 보면서 지젝의 말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입증해줄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념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품고 있는 확고부동한 무언가가 있다. 삶의 맥락에서 다져온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에 충돌하는 사실을 제시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사람은 신념을 바꾸기보다 그 신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종북이 그런 것이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가 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경제적으로 상층으로 올라서려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수입의 불평등을 드러내는 도표를 제시하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보다 당신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가능성이 크단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아마도 종북과 같은 딱지가 붙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자기를 기만해서라도.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도 그것을 설명한다. 긴장이나 불안 상태로서 경험하는 심리적 모순을 가리키는 ‘인지 해리’를 통해서다.

“인지 해리를 줄이려는 욕구는 우리가 새 정보에 반응하는 양상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자신의 편향을 확인받고 싶어 하며, 행복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 들어오는 정보를 기꺼이 조작하고 무시한다. 이런 일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강하게 일어나기에 이름까지 붙여졌다. 바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것이다.… 합리화하는 성향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증거는 종종 즉각 비판, 왜곡, 배제와 맞닥뜨리고는 한다. 더 많은 해리를 겪을 필요가 없도록 하거나 견해를 바꿀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p.246) 

 

이 책은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다. 인간뿐 아니라 생명이 기만과 자기기만을 통해 진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를 로버트 트리버스 저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도 들먹이면서 언급한다. 


거칠게 말해서 인간은 속여야만 산다. 불편부당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힘든 것을 피하려는 노력이 다양한 기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이해하기 힘드니까, 종북이라고 레떼르만 붙이면 되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고, 생명일지도 모른다. 

 

로버트는 부모-자식 갈등 문제를 연구할 때 자기기만의 단초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책에도 그것을 일부 언급했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혼내거나 매를 들면서, 혹은 사교육 등으로 내몰면서 부모들은 하나같이 외친다. “이게 다 네가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내가 잘 되려고 이러는 거니? 다 널 사랑하니까 이런 거야.” 

 

진심 묻고 싶다. 정말로? 부모도 알 것이다. 깊은 자신의 내면에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용기나 준비가 안 돼 있을 뿐.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을 위해 기만과 자기기만을 이용해 아이의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권력을 쥔 자의 횡포다. 그러니 권력은 자기기만의 중요한 지점이 된다. 권력은 자연 사람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사람이 달라졌다느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느니,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다. 권력은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약화시킨다. 로버트는 권력이 자기기만에 작동하는 메커니즘도 언급했다.

“사람들에게 권력을 쥐었다는 느낌을 갖게 하면, 그들은 남의 관점을 취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자신의 생각을 중심에 놓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그 결과 남들이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이해할 능력이 줄어든다. 무엇보다도 권력은 남에게 무신경하게 만든다.”(p.47)

 

권력을 쥐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던 사람이 남의 관점이나 감정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줄어드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하고 있다. 선거 전후의 정치인이 달라지는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없을 때래야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정성 원리를 고수하고, 남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더 쉽다는 사실은 참 아픈 현실이기도 하다. 

 

기만과 자기기만이 스스로를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한 행위라는 것은 그만큼 인간에게 요구되는 성찰의 지점이 있음을 방증한다. 성찰하거나 자기기만을 제어하지 못할 때, 자기기만이 야기하는 엄청난 파급에 대해서도 책은 언급한다. 전쟁이나 학살 등이 그것이다. 개인 생활에서야 경우에 따라 귀여운 행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집단이나 조직, 국가적인 자기기만이 이뤄지면 인류 전체에 큰 위협이 되는 사건이 된다. 인류 문명의 발생 이후 벌어진 모든 전쟁이나 학살이 그러했고, 최근 우리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전쟁이 아니다!)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등 인류의 대비극은 집단적인 자기기만을 토대로 한다.

“9/11 사건이라는 가짜 구실을 내세운 그 전쟁은 석유 및 관련된 경제적 자산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주둔 기지를 건설하고 맹방인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의도적인 선택에 따른 전쟁이자 공격전이었다. 물론 뻔한 거짓 핑계를 내세웠다. 훗날 이 전쟁은 기만과 자기기만을 수반한 어마어마한 군사적 실책의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학교에서 가르치게 될 것이 확실하다.”(p.406) 

 

저자는 특히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자기기만의 위험성을 경고했다.(“많은 종교가 지난 한 가지 결정적인 능력이 있다, 바로 독선이다.”(p.470)) 이것은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뿐더러, 종교나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기만이 우리를 점점 옥죄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러온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기만의 언어가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지 않는다. 되레 실제 가르침을 소홀하게 만든다. 신성에 대한 믿음 여부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기만이 불러올 부정적인 영향이나 파국을 염려한다. 그러면서 자기기만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또한 개인적이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기만이 늘어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란다. 그는 자기기만으로 일련의 작은 편익들을 맛보다가 큰 코를 다친 경험을 종종 했다고 토로한다. 착각을 즐기다가 급격한 반전에 이른 경험들이다. 자기 과신에 취해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크게 대가를 치르기 전에 되돌아보고 성찰할 것. 명상, 기도, 친구와 상담자 등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자기기만을 통해 진화해왔다곤 하나 우리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다고 로버트는 믿는 것 같다. 그 믿음 또한 자기기만이 아니길 나도 바란다.  

“자기기만은 쓰라린 결말로 이어질 때가 종종 있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만이 아니라 잘못 판단한 전쟁과 경제 정책 같은 거대 사건들에도 들어맞는다. 우리는 남과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일시적인 혜택을 누릴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대가를 치른다. 나는 이것, 즉 무지의 비용은 나중에 치르는 반면, 자기기만의 혜택은 즉시 볼 수 있다는 것이 삶의 일반 법칙이라고 믿는다.”(p.506)

 

지난 연말 즈음, 많은 사람들이 자기기만을 한 탓에 의무보육(언론에서는 '무상보육'이라 부르는)과 노인연금이 입길에 오르고 우리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렇게 자신을 속여야만 했을 거다. ㅂㄱㅎ가 우리를 잘 살게 해 줄 거라는 집단적인 자기기만.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무지의 비용은 나중에 치른다. 아니, 지금부터 우리는 앞으로 5년이 채 안되는 시간동안 치르게 될 것이다.  


다만 이 책, 누구에게나 쉬이 권하지는 못하겠다. 띄엄띄엄 관심사에 따라 챕터별로 읽는 것은 나쁘지 않겠으나 가독성이 좋은 편은 아니다. 번역이 마냥 매끄러운 느낌도 아니다. 내가 지닌 과학적 상식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중간중간 턱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술술 잘 읽히거나 즐거운 책 읽기는 아니었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썼다. 내가 느낀 그대로를 긁적였다.  



Posted by 스윙보이

대한민국 언론은 왜 폭력의 대명사가 되었나! 

[책하나객담] 《폭력의 자유》


이 책, 제목부터 명확하게 의도를 밝힌다. 그렇다. 언론을 다뤘지만, ‘언론의 자유’가 아니다. 폭력의 자유다! 언론이 아닌 왜 폭력으로 제목을 잡았는지, 잡았어야 했는지, 책은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 한편으로 오욕이다. 명예를 더럽히고 욕되게 함. 


근대화를 자주적으로 이끌지 못한, 일제강점기가 36년이나 지속된 것에는 언론도 한몫했다. 아니, 언론의 역할이 아주 컸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발목을 잡는 한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가 망가지고, 양극화사회 혹은 격차사회로 진행된 것에 언론은 지대한 역할을 했다. 


언론이 사회의 ‘공기’라거나 ‘목탁’이라는 말, 당연해야 할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보자니, 언론은 사회의 ‘폭력’이다. 권력(지배세력)에 빌붙어 주구 노릇을 하는데, 이게 전형적인 용역깡패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용역깡패 짓거리를 하면서 욕심이 생긴 거다. 명령 받아 움직이는 것도 신물이 난 것일까. 권력을 조정하는 권력 그 자체가 됐다. 정치권력의 비위를 맞추거나 주구로 존재하면서 특혜를 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권력이 된 경우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아닌 찌라시 깡패들이 그것을 대변한다. 


세상은 본디 폭력과 이권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내게, 하긴 언론이라고 다를까마는 문제는 그들이 반성도 성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론이 맞는가. 좋은 언론이란 무엇일까. 그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매일 바삐 기사를 쓴다는 명목으로 정당화할 뿐. 스스로에 대한 감시나 성찰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주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권력으로 육화한 언론은 무소불위의 존재가 됐다. 독자들이 감시하고 견제하지 않느냐고? 에이, 농담하지 말자. 독자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독자의 신뢰를 잃으면 끝이라고 말하지만, 입 발린 소리요, 아주 늦게나 씨가 먹힐 소리다. 진짜 그렇다면 조중동은 이미 망하고도 남을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문이었어야지. 


책에 의하면, 권력과 언론, 불가근불가원이었어야 할 존재들이 밀착했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직전 생겨났던 언론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의 길을 확립하기 전에 권력에 굴종하는 법부터 배웠다. 동아일보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역사가 있다. 일장기 말소 사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그의 옷에 걸린 일장기를 지운 사건인데, 김종철 저자는 이것의 속살을 알려준다. 이것은 동아일보가 의도한 것도 아니요, 처음 했던 것도 아니었다. 한 편집기자의 의해 돌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는데, 동아일보는 이 기자를 파면했고, 당국에 백배사죄했다. 비굴했던 오욕의 역사인데도, 동아일보는 그것을 지운 채 현상만 놓고 자가발전하고 있다. 쪽 팔리지도 않은가? 


“동아일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신문이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배자들에게 강력히 저항한 대표적 사건으로 ‘일장기 말소’를 내세웠다. 조선중앙일보가 훨씬 먼저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은 물론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가 총독부의 압력에 굴복해서, ‘일장기 말소’를 주동한 젊은 언론인들을 강제 해직한 것은 덮어둔 채 동아일보사가 주도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자랑했다.”(p.34) 


문제는 뻔뻔함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의 독재정권들에 이르러 권력 지향적 야합을 일삼던 언론의 DNA에는 분명 뻔뻔함이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현장성 넘치는 저자의 이야기에선 그것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아프다. 권력에 대한 부역을 일삼은 언론인에 대한 청산을 제대로 못한 역사 때문이다. 반민특위의 해체는 이 사회 전체를 지금에까지 왜곡에 이르게 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일 텐데, 언론계라고 다르지 않다. 저자도 그 지점을 아쉽게 토로한다. 혹은 비통하게. 


“반민특위의 강제 해체는 결국 부일 혹은 친일 세력의 영속적인 세습을 불러왔다. 조중동 같은 족벌언론에서는 지금도 친일파의 후손들이 경영권과 인사권을 장악한 채 입맛에 맞는 정권과 결탁해서 온갖 특혜를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저자는 다른 책을 인용해 프랑스의 경우를 드는데, 우리의 역사가 왜 여전히 왜곡을 일삼고 권력의 입맛에 맞춰 흔들리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성찰과 반성을 못하는 사람, 조직에겐 청산이라도 필요했던 것인데, 우리의 역사는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드골의 나치 협력자 대숙청은 단순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도덕적 차원의 해석보다는 ‘반역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후세에 중대한 교훈을 남겨준 사실에서도 큰 의미를 찾는다.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드골의 나치 협력자 숙청은 잘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주섭일, 사회와연대)


물론, 일부 언론인들의 바람직하고 당연한 저항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결의문을 발표하거나, ‘언론의 정도를 지키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뜻으로 사표를 냈으며, 제작에 불참했다. 정보기관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이 뻔한 데도 자유언론실천의 깃발을 들고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을 정면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결기가 있었고, 정신이 있었으며, 실천할 줄 아는 행동력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도,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도 언론에는 그런 낭만이 있었다. 패할 것을 알면서도, 산산이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그래야만 했던 비장미 섞인 낭만.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변곡점은 IMF 직후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판단해보는데, 이제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그냥 회사의 직원이자, 더 심하게 말하면 노예다. 세상에 대한 단독자였던 기자는 이제 한갓 회사 입장을 대변하는 타이피스트로 전락했다. 한 기자 친구가 내게 토로했었던 말이 생생하다. “말만 기자지, 왜 이렇게 비루한 걸까.” 비루한 기자. 이 어울리지 않는, 형용 모순이 지금의 기자를 대변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1970년대 겪은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근무환경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그때는 기자들에게 단독자 정신, 기자 정신이 살아있었지만, 지금 대부분 기자들, 모르긴 몰라도 ‘먹고사니즘’의 노예다. 


“근무조건이 제일 낫다는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가장 불만을 품고 있던 것은 사주와 경영진이 사원들을 ‘마름’이나 가속(家屬)처럼 다룬다는 사실이었다.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사용자와 노동자가 아니라 봉건적인 상하관계가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pp.190~191)


이제 언론은 정치권력보다 자본의 노예다. 독립 언론을 선언한 몇몇 언론은 늘 자금압박에 시달린다. 독자들의 호응도 예전 같지 않다. 언론 전체의 신뢰가 떨어진 까닭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것이 있다면, 저자의 말마따나 자유롭고 독립된 언론의 길을 가는 사람에겐 박해와 탄압이 가해진다는 것. 참으로 슬픈 일이다. 비통한 일이다. 


《폭력의 자유》는 현대 언론의 역사와 권력의 역사를 일제강점기부터 이명박 정권까지 짚어보는 여정이다. 한때 언론인이었으나 재능과 능력도 딸리는데다, 자본과 권력에 예속돼 움직여야 하는 현실에 더 이상 자신을 끼워 맞추기 싫었던 나는 새삼 이 책을 읽고서 저자의 말에 절실하게 공감했다. “언론은 권력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언론 자체가 권력이 되어서도 안 된다.”(p.595) 


며칠 전 책을 덮은 뒤, 정독도서관에 갈 일이 있었는데,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라는 표지가 있었다. 정독도서관 앞이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라는 것을 처음 알았는데, 그만 침을 뱉었다. 누군들 이 책을 읽고 그러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제대로 언론의 길을 걷게 만들 수 있을까. 동아일보가 부당한 광고탄압을 받던 시절, 저자가 겪은 한 에피소드가 그것의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격려 광고를 내려는 시민들의 소리를 기사화하기 위해 일요일에 회사에 나간 저자. 어느 날 저녁,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머뭇거리며 사무실을 찾아왔다.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며 독재정권과 싸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무작정 서울에 상경해 하루 종일 시내를 걸어 다니며 행상을 하는 사람이었다. 저자는 가슴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렇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언제 올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단언컨대,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그것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그리고 질문하고 문제제기 해야 한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저렇게 죽음의 길로 내모는 나라와 권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이웃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언론은 또 무엇인가? 돌아보고 성찰하며 되짚어 봐야 한다.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저자의 삶을 바꾼 것은 한 권의 책이라고 했다. 《친일문학론》(임종국, 평화출판사, 1966).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은 동아일보 사주이자 ‘민족운동 지도자’로 알고 있던 인촌 김성수의 적극적인 친일행각이었다. 위인으로만 알고 있던 자신의 직장 사주가 친일을 넘어 부일을 했다는 사실이 그를 황망하게 만들었고, 그는 진짜 언론인을 고민하며 이후 자신의 삶을 거기에 맞춰 살아온 것 같다. 이 책도 어느 누군가의 삶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진짜 언론인을 고민하는 사람이나, 고민하지 않았으나 고민하게 된 사람이나. 


언론의 악행의 평전과도 같은 이 책을 보면서, 지금 찌라시 깡패들의 소멸을 생각해 봤다. 이들이 없어지면 시민들이 좋아할까? 어쩌면! 그때 그 시절처럼 말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1940년 8월 12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민족지’가 없는 언론의 암흑시대가 계속되었지만, 두 신문이 부르짖던 ‘언론 보국’과 ‘천황 폐하 만세’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 조선인들이 많았을 것이다.”(p.40) 


아, 조중동이 문을 닫아도 분명히 새로운 포스트 조중동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 나도 안다. 그땐 그때 가서 또 생각해 보자. 폭력(과 이권)은 세상을 움직이는 근간이니까. 새로운 폭력은 당연히 나온다. 독재정권(전두환)에 부역했었던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지닌 김훈의 말이 맞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썼으나, 그에 상관없이 내 감상만을 적었다.


Posted by 스윙보이

다행이다. 올해가 가기 전, 박래군 선생님을 뵀다. 소식이야 각종 미디어를 통해 보고 듣지만, 1년에 한 번이라도 눈 앞에서 알현해야, 뭔가 빠트리지 않고 한 해를 보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분 중의 한 분이다. 인권운동가다. 인권재단 사람의 상임이사. (물론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다. 혼자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ㅋ)

그런 타이틀보다 래군 선생님의 학교 후배인 김별아 작가가 쓴 칼럼을 읽어도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김별아 작가 칼럼 중 하나. ☞ 래군이 형 / 김별아

중요한 건, 지금 래군 선생님은 인권센터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계시다. '100일의 기적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인권센터 막바지 모금활동, ‘100일의 기적’ 프로젝트 돌입

나 같은 장삼이사가 할 수 있는 일. 기적의 저금통이다. 

동전을 모으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길에서 10원짜리라도 떨어져 있으면 낼름 줍는다. 인권센터에 보탬이라도 될까봐.ㅋ 

얼마나 모일지는 모르겠으나, 모여도 아주 적은 금액이겠으나, 내 작고 사소한 저금통이 인권센터의 벽돌 한 장에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

인권센터 건립기금 모금에 관심이 있거나 주춧돌을 놓는데 동참하고 싶다면, 인권재단 사람의 홈피(www.hrfund.or.kr 혹은 www.hrcenter.or.kr)를 방문하면 된다. 인권센터 건립에 관한 자료와 모금관련 정보 등을 확인하실 수 있다.

어쨌든, 지난 4일 서대문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실, 텍스트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나오고 있는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필자들과 래군 선생님이 함께 하셨다. 인권센터 관련 응원의 말씀이라도 드리고 싶었으나, 수줍은 내 성격상 말씀을 결국 못 건넸다.^^;;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뵀으니 괜찮아!

아래는 그날을 기록한 기고 원문인데, 원고가 게재됐을 땐 앞 부분이 뭉텅 빠졌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게 그 부분인데, 어떤 이유에선지 빠졌다. 매문하는 입장에서 원고를 넘기면 편집권도 훌러덩 넘기는 지라, 항의 같은 건 않지만, 아쉽다. 왜 그 부분이 빠져야했는지 메일을 통해 한 줄 정도라도 알려주는 편집자의 센스가 없어서. 설마 정치적인 글이라고 오독해서 빠지진 않았겠지? 그렇게 믿고 싶다. 보랏빛 볼드체가 매체에서 훌러덩 삭제된 부분이다. 인권센터 건립이 잘 됐으면 좋겠다.

노동·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 우리 사회의 희망이 되는 일!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김류미 박래군 손문상 조약골 한윤형


김진숙, 내려오다.
이 말은 아마 2011년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쇳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309일 동안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의 복직 등을 위해 고공농성을 해야 했던 김진숙 위원이었다. 돈과 권력에, 1%에 일방적으로 밀려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던 99%가 일군 아주 드물고 사소한 성공의 사례.

물론 이 사소한 성공을 위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힘과 비용을 쏟았는가. 가카 덕분에 모든 것이 암담한 시절, 5차례에 걸친 희망버스가 희망을 굴리고자 안간힘을 썼다. 물대포와 캡사이신이 희망을 저항했고, 사법처리 등의 협박이 난무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진중공업 해고자의 1년 내 복직 등을 뼈대로 하는 노사 잠정합의안이 마련됐고, 시민활동가 출신의 원순 씨가 서울시장이 됐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99%의 처지에 동감했다.

한진중공업 노조원의 한 아내는 이리 말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하고 있는데도 우리 문제를 사람들이 몰라줘 답답하고 힘들었을 때 희망버스가 찾아왔다. 희망버스 행사가 한두 번 열리고 끝나겠지 했는데,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와 응원을 해주니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맞다. 99%가 서로가 서로를 놓지 않고 1%에 저항한 덕분이다.

지난 13일, 41주기를 맞이한 전태일 열사와 지난 9월3일 소천하신 이소선 어머니도 천국에서 미소를 지어주셨으리라. 그렇게 전태일을 떠올리는 시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소식이 퍼지고 김진숙 위원이 땅을 밟은 날, 쌍용자동차에선 19번째 죽음소식이 날아왔으니까. “해고가 살인”임을 알면서도 자본은 스스럼없이 살인을 자행한다.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된 제주, 그곳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담당하는 강정마을을 파괴하고자 하는 국가(군대)와 자본의 협잡과 침탈은 또 어떻고. 우리는 구럼비의 울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99%의 일상을 흔들어놓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그냥 놔둬도 좋을까. 희망버스가 향할 곳은 아직 많음을 보여준다. 사소한 성공을 이어야 할 이유까지.  

지난 4일, 서울 서대문 서울빌딩, ‘2011년 한국, 젊은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저항’이 울려 퍼졌다. 젊은이들은 어떻게 현실에 대응하는지, 저항은 어떻게 조직되는지, 우리가 삼아야 할 희망의 근거가 무엇인지, 텍스트의 연작시리즈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의 필자, 김류미․조약골․한윤형과 박래군 인권운동가가 손문상 화백(프레시안)의 사회로 이야기를 풀었다.


박원순 후보의 압승으로 서울시장 선거가 끝났다. 어떤 변화를 목격하는 것 아닌가?

조약골(이하 골)
할 말이 별로 없다. 현재 나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있다. 마을 일이 바빠서 투표를 하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보니, 사람들이 아나키스트는 선거를 안 한다고 생각하더라. (웃음) 아나키스트라고 모든 선거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편의상 날 아나키스트라고 부르나 그보다 넓은 개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크게 관심을 갖지 못했다.

한윤형(이하 형) 이번 선거 핵심은 2002년 시작됐던 20~30대 연합이 참여정부를 지나면서 해체됐다가 안철수라는 키워드를 통해 다시 이뤄졌다. 세대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번 정권하에서 공통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졌다고 볼 수도 있다. SNS라는 매체를 통한 연합도 생각해볼 수 있을 테고. 안철수라는 아이콘이 세대를 통합하는데 어필한 것 같다.

김류미(이하 미) 희망청 활동가였으나 현재는 큰기업의 핵심부에 있다. 그 갭이 크고, 옮긴 것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일상에서 이번 선거가 가진 의미를 개인적으론 말하긴 어렵다. 물론 관심은 있고,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박래군(이하 군) 앞으로 정치권의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거라고 보는데, 아주 어렵게 상식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으론 안철수, 박원순 같은 사람들이 보수정당을 하고 이에 맞서는 진보정당이 있어야 한다. 박원순 시장이 진보적이라는데, 내가 보기엔 진보적인 사람은 아니고 합리적인 시장주의자다. 그러나 우리나라엔 합리적인 시장주의자가 없다.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쪽도 낡은 틀에 있고, 그런 틀이 깨져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박 시장은 오세훈 전 시장이 벌여놓은 부채문제 등을 정리하다가 임기가 다 끝날 것 같다. 특정세력이 부와 권력을 장악한 틀을 깨는데 얼마나 기여를 할 것인지는 회의적이다. 재벌과 맞설 수 있을까, 이런 부분. 앞으로 변화의 과정을 지켜봐야할 것 같다.

이번 선거도 20~30대 표심이 많이 좌우했다는 분석이 있는데, 어떻게 보나?

(형) 우리나라 정치담론에선 지지자가 있다면 새로 유입되는 사람이 더 큰 발언권을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기존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 오늘부터 정치가 중요하게 깨달았다는 얘길 하면 환호받는다. 정치세력을 대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새로운 사람을 요구한다. 정치인이나 정치적 지지자를 대할 때마다 리뉴얼하겠다는 욕망이 강하게 나타난다.

세대론 자체도 그런 욕망과 비슷하다. 정치를 일신하고 싶은데, 새로운 세력을 찾아내려 하고, 구별 짓기도 생긴다. 계속 리뉴얼을 요구하는 게 정치적으로 좋다고 얘기할 순 없다. 우리나라 정치도 새로운 인물만 유입되다보니 관료들에게 휘둘리기도 하고. 이 욕망을 조건으로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정치적 요구를 대변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고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세대를 통해 정치가 새롭게 구성된다는 언론 보도에서도 이런 지적이 안 나오고 있다.

(미) 박원순 시장의 당선을 젊은 세대의 정치의식으로 분석하는 건 와 닿지 않는다. 결국 투표라는 것이 쿨 해보였던 것 같다. 연예인이 투표를 하니까, 박원순이 쿨 해보이고, 안철수는 워너비고. 그래서 이번 투표를 문화적 소비와 비슷하게 했단 생각이 든다. 정말, 정치적 주체로 참여해서 결과를 내놨느냐? 나는 회의적이다. 다음 선거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젊은이들의 지금 정치형태는 트렌드화 되어있지 않나하는 생각도 든다. 젊은이들의 정치의식이 실체는 없는 것 같다.

(군)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 없다는 건 상대적이다. 아마도 80년대와 대비해서 그런 것 같은데, 요즘 투표장에 가는 걸 보면 정치에도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론 지금이 워낙 절망적인 상황이잖나. 우리 때는 일자리에 대해 고민 안 했고, 낭만, 열정이 있고, 폼 나게 데모도 나가고. 싸워서 이긴 경험도 있고. 그러나 요즘 세대는 그렇지 않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희망적일 것이다.


이번 선거에 SNS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요즘 소통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골) 강정마을에서도 SNS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새로운 소통방식임에는 틀림없다. 잘 활용하면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매체 혹은 수단이다. 강정마을에 사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이전과 약간 다른 분위기나 성향을 갖고 있다. 하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거나 저항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새로운 흐름이 강정마을에서도 나타나고, 올 초부터 외부세력이 참여하면서 외연이 확장되고 많은 소식이 퍼져나갔다. 

(형) SNS와 관련, 말이 많이 나온다. 이전부터 뉴미디어 정체성을 갖고 얘기하는 게 반복돼 왔다. SNS 자체가 진보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 등도 처음 수용될 때도 진보적인 공간이었다. 이후 평준화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트위터도 이전처럼 평준화 될 것으로 본다.

새로운 매체가 생겨서 돌파구를 마련하고, 자본의 통제가 따라오는 것도 반복되지 않을까. 다만 강화되는 게 있다. 개인에게 수용되는 정보의 틀을 개인이 조절하는 추세다. SNS는 자신에게 동의하는 사람들 혹은 정보소스를 통해 정보를 유통하기 때문에 파편화되는 한편 예전과 달리 자신이 동의하거나 구미가 당기는 정보만 선택한다.

개인의 정보선택의 자율성이 높아지는 한편 그 가능성을 제대로 실현하는지는 의심스럽다. 사려 깊은 판단도 할 수 있지만, 구미에 맞는 정보만 확대재생산할 수도 있다. 그런 양날의 검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정보가 유통되고 공유될 수 있는 활동을 만들어야 한다.

(미) 나는 SNS에 깊이 관여한 경우다. 30대가 SNS를 많이 한다고 큰 범주에서 말하나, 대학생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그리 많이 하지 않는다. 이력서나 스펙을 위해 SNS를 많이 하나, 그전까지는 별로 필요하지 않다.

아울러 네트워크를 통한 평판사회가 더 강화될 것으로 본다. 그래서 가능한 영역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일반적인 사람과 트위터에서 말을 섞다보면, 나의 견해를 이해시키기 위한 것을 찾는 것에서 희망을 보고 있다.

(군) 나는 기성세댄데, 변화속도가 빨라서 따라가기 힘들다. (웃음) 트위터는 안 하고 페이스북만 하고 있는데, 기존 언론사에서 제공하는 정보보다 각자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이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선 긍정적이다. 그러나 나중에 자본에 흡수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스마트폰이 나오고 지하철에서 책 보는 사람이 줄었다. 직접 대면해서 관계를 맺는 것에 소홀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골) 강정마을 청년들은, 다 SNS를 한다. 조그만 마을이라 서로 매일 보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SNS를 통해 확인한다. 직접 마주보고 소통하는 것보다 그 사람 근황 등을 살피고 소통할 수도 있다. 마을주민이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나온 경우가 있었는데, SNS를 하는 사람들은 이를 공유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어서 마을 주민들에게 트위터 사용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서 의미가 있고, 한진중공업 등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해들을 수 있는데, 현장에 가지 못하나 같이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받을 수도 있다. 나도 소식을 올리면, 같이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 잘 버텨달라고 응원을 많이 보내준다. 그런 것을 통해 나도 안도하고 응원을 보낸다. 그런 점이 좋다.


온라인상의 연대와 저항을 어떻게 보나?

(형) 처음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쓸 때는 아이디를 썼다. 온라인 세상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오프라인과 다른 짓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군대를 갔다 오니 실명을 쓰더라. 매체가 바뀌면서 양상이 바뀌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게시판 문화에선 안티조선운동을 할 때는 텍스트가 길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짧게 올리면서 구체적인 연대를 할 수 있는 활동이 각광을 받는다. 매체 특성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미) 내가 설득하고 싶었던 친구는, SNS를 해보라고 했더니, 거기에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더라.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사람도 정해져있다. 수용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 나는 RT를 하는 게 면죄부를 주는 것 같다. 개인적으론 다소 걱정된다.

(골) 참여는 넘치는 것 같다. 면죄부를 주는 것일 수도 있는데, 정말로 강정마을에 오는 경우도 많이 봤다. 트위터를 보고 온 사람들 되게 많다.

(조약골에게) 아나키스트라고 스스로 규정했는지, 아니면 바깥에서 불러줬는지?

(골) 19세기 아나키즘이 무장투쟁을 주창했고, 2차 대전이후 아나키즘은 비폭력 직접행동주의를 주창한다. 무장투쟁은 일부분이었다. 아나키즘은 여러 뿌리에서 발생한 것인데, 무장투쟁만 확대재생산 됐다. 그건 아나키즘의 부정적인 측면을 확산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 같다.

운동으로서 직접 행동을 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주장을 한다. 직접 행동이라면 대의 정치를 통한 정치활동보다는 세상을 바꾸는데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선 내가 활동하는 방식과 비슷한 점도 있으나 나는 다양한 영향을 많이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다. 다른 운동이 엄숙주의적이고 개인의 희생을 요구한 측면이 있는데, 내가 원해서 즐기면서 한 저항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많이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인가 등을 끈질기게 밀고 나가다보니까 지금처럼 살고 있다. 아나키즘을 하나의 이념으로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대추리, 용산, 두리반, 한진중공업, 강정마을 등으로 이어지는 인디문화, 비주류문화의 실체가 어떤 것이고 저항성은 어떤 것인지,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알려 달라.

(골) 여러 측면이 있는데, 하나의 대안 공간을 만드는데 매력을 가지는 것 같다. 기존 사회와 다른 가치를 통해 운영을 해 가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경쟁보다는 사회적인 연대와 상호부조를 통해 즐거움과 재미를 찾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전과는 다른 저항방식이다. 이전은 저항이 즐겁거나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어느 순간부터 재밌고 신나지 않으면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재미, 흥겨움으로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를 나는 고민했고, 그 답으로 우리 스스로 대안 공간을 만들어냈다. 

저항의 방식으로 글쓰기를 했다. 글쓰기의 한계나 불편함 같은 건 없었나?

(형) 글쓰기가 사회운동의 참여 면에선 회의가 많은 작업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글쓰기는 우리사회 공동체의 원칙, 가치를 의견을 나누면서 정하고,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어야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떠들거나 말거나 세상이 돌아가지 않나. 이를 테면 한국의 통치 자체가 담론적인 이데올로기로 지탱이 된다면 싸워볼 수 있으나, 보수는 말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몸을 공격한다. 사회가 원칙이나 가치를 토론하는 장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회의는 트위터 100개를 쓰면 사람들 마음에 맞는 부위만, 구절로서만 소비한다. 그런 회의를 하면서 하는 작업이 글쓰기다.

68세대나 386세대는 자본이 뭔가를 내놓을 수 있는 시점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좀 더 엄혹하다. 우리가 사는 동안, 세상이 좋아지기보다 조금씩 더 가라앉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좌파는 국가나 자본가 계급을 욕한다. 그러나 국가나 자본가를 악마나 적대적인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 몫이 나오고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설계하지 않으면 투쟁도 어렵지 않을까. 그래서 글쓰기 등을 통해서 그런 것을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20대를 규정하는 많은 책이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어떻게 생각하나?

(형) ‘88만원 세대’라는 규정이후, 그 규정에 대한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규정하는 것 자체가 싫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온 적도 있다. 세대론은 책임론으로 흐르기 쉽다. 특정한 세대에 책임을 떠넘기는. 특정 세대를 지목해서 죄를 부여하는 방식은 좋지 않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보다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방식이다. 세대론이 그런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군) 이른바 ‘386세대’는 굉장히 모순적이다. 진보적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는 걸 보면 보수적이고 친자본적이다. 한때는 친구들을 만나기가 싫었다. 만나면 증권, 골프, 교육 얘기를 하는데, 정치의식은 또 달랐다. 우리 세대가 자기들이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젊은 세대에게 강요하는데, 자기들의 경험이나 틀에서만 바라보니 젊은 세대와 맞질 않고 소통이 안 된다. 젊은이들이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나꼼수’에 열광하는 것이 젊은이의 저항의 실체일까?

(형) 한 번도 안 들어봤는데, 그건 나꼼수에 대한 열광보다 기존 제도가 약해져 있다고나 할까. 나꼼수의 역할이 있고, 기존 언론의 역할이 있는데, 기성의 텃세가 전혀 작동을 않는 거지. 나꼼수를 들어보질 못했으나, 나꼼수를 받아들이는 언론에 대해선 비판하고 싶다.

(군)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자기 방식대로 얘기하는 모범을 만든 것 같다. 그런 방식으로 하는 것도 유효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한편으론 아슬아슬하다. 쓰는 언어 등에선 마초적인 부분이 많다. 대신 욕을 해주는 거라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아무나 욕한다고 들어주는 것 아니지 않나. 이것도 유행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점령하라(Occupy)’ 등의 운동이 있다. 우리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변화의 조짐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혹은 젊은이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면?

(군) 서구의 사회복지국가가 가능했던 건 노동조합의 힘이었다. 우리는 다르다. 노동조합의 힘이 부족한 채로 사회복지 국가로 가자고 얘기한다. 갈 수도 있겠으나, ‘점령하라’가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것은, 과거부터 다져서 지금의 힘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러나 흉내만 낸다. 혁명과 운동은 수출되는 것이 아니다.

‘점령하라’는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의 본질을 공격하는데, 우리는 그 수위까지 올라가 있지 않다. 우리는 타깃을 어디에 맞춰야할지 고민해야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 번도 청산되지 않은 권력과 소수가 갖는 부를 어떻게 깨느냐가 중요하다. 1%만 누리고 있는 권력과 이익 구조를 깨는 것이 가능하다면, ‘점령하라’뿐 아니라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FTA(자유무역협정), 강정 싸움일 수 있다. 올 들어 곳곳에서 노동문제가 부각되고 있는데, 노동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가깝게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이런 것이 긍정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골) ‘점령하라’가 한국 사회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있었던 게 2008년 촛불이다. ‘점령하라’는 리더가 없는 운동이다. 이게 중요하다.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1999년 시애틀에서 WTO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리더가 없는 수평적 네트워크가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운동을 한다는데, 대중적인 저항운동을 끊임없이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선 궁금하다. 지금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스스로 참여하고 도구를 이용하면서 저항운동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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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엔 외롭다는 말, 하지 않을게요.
8월4일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서 제7회 정은임 아나운서 추모바자회 개최

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 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지난 8년 전, 2003년 10월22일, 심야의 아나운서가 우리에게 건넸던 말이다. 지금이라고 우리는 다르지 않다. 심야의 아나운서가 조곤조곤 들려준 그 말이 유효하리란 생각,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지상으로부터 35m, 한진중공업의 85호 타워크레인. 2003년 故 김주익씨가 있었고, 지금 김진숙 씨가 아무 죄도 없이 잘려나가는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대신해 올라가 있다.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희망버스가 달려간다.

지금 다시, 정은임 아나운서는 어떤 멘트를 남길까요? 여전히 외로움을 투정할 수 없는 시절, 그 사람의 목소리가 자꾸만 그리워집니다. 당당하면서도 따듯한, 그럼에도 단호하고 분명하게 우리의 심장을 깨우는.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은 없다. 지난 7년여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아름다운 하루가 열린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팬들이 오는 4일(목),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에서 제7회 추모바자회를 연다. 8월4일은 정 아나운서의 기일로, 추모바자회는 ‘정은임 아나운서 팬페이지’(www.worldost.com)가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 등과 함께 열고 있는 행사다. 매년 기일에 맞춰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가게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루’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터치할 수 있는 기회다. 스마트폰의 터치감보다 훨씬 좋다. 

바자회는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참여로 이뤄진다. 행사 당일 아름다운가게에 모여 봉사활동과 수집된 물품을 판매한다.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 가능하다. 수익금은 아름다운가게에 전액 기부하고 있다.

지난 1회 바자회 수익금 전액(200만원, 특별후원금 70만원 포함)은 아름다운가게 수해지원금에 포함됐으며 2회 때는 바자회 행사와 추모영상회를 가져 바자회 수익금 전액(182만7천원)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성금으로 활용됐다. 3회(136만2천원), 4회(155만4450원) 5회(187만2010원) 6회(111만원) 바자회 수익금 전액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 성금에 보태졌다.

추모바자회에 물품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름다운가게 대표번호(1577-1113)로 전화하면 무료택배(기증량 1~2상자)를 이용할 수 있다. 물품을 보낼 경우,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9 지하1층, 02-765-6004)으로 보내면 된다. 단, 보낼 때 [정은임 아나운서 동숭동헌책방 행사물품]이라고 써야 한다. 기증방법이나 기증받지 못하는 품목 등에 대해서는 관련사이트(http://www.beautifulstore.org/Join/Giving/Process.aspx)를 참조하면 된다.


추모바자회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정대철 씨는 “추모바자회는 정은임 아나운서가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로 올해도 기일에 맞춰 열게 됐다”며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다음은 7주기 추모행사 내용이다.

1. 행사일 : 2011년 8월4일 목요일
2. 행사장소 :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9 지하1층)
약도 : http://www.beautifulstore.org/AgaOrg/GetInfo.aspx?SerialNo=1000000134
3. 아름다운가게 기증 방법 : http://www.beautifulstore.org/Join/Giving/Process.aspx

관련사이트

http://www.worldost.com  정은임 추모 사업회
http://www.cyworld.com/bastian2004  정은임 미니홈피

Posted by 스윙보이
정은임, 정든님이여.

지금, 입을 봉쇄당하고, 생각을 통제당하고 있는 우리.
그래서, 당신이 더욱 그립습니다.

6년이 흘렀습니다.
다시 여름이며, 다시 8월4일이 옵니다.

정은임을 기억하는, 정영음을 추억하는,
그의 목소리에 교감하고 그의 마음에 공명했던,
당신의 작고 사소한 참여를 기다립니다.

당신과 나는, 그렇게 우리입니다.
정든님 정은임을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당신의 작은 참여, 기다립니다. ^^
 
은임 누나는,
제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 누나이기에, 일년에 한 번이지만,
나는 그 하루를 누나를 그리워하면서 보냅니다.

www.worldost.com


 지금, 말 못하는 우리는 정은임이 그립습니다
8월4일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서 제6회 정은임 아나운서 추모바자회 개최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회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것을 영화로 풀어내며 음악을 들려주던 목소리를 가진 사람. 그 어느 날 새벽, 100여일을 고공 트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던 그 목소리.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는다며,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 말하던 사람. 그리고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우리들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려준 사람이다.

그 사람, 정은임 아나운서다. 말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지금, 그 사람의 당당하면서도 따듯한 한 마디가 그리워진다.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은 없다. 지난 6년여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아름다운 하루가 열린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팬들이 다음달 4일(화),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에서 제6회 추모바자회를 연다. 8월4일은 정 아나운서의 기일로, 추모바자회는 ‘정은임 아나운서 팬페이지’(www.worldost.com)가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 등과 함께 열고 있는 행사다. 매년 기일에 맞춰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가게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루’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바자회는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참여로 이뤄진다. 행사 당일 아름다운가게에 모여 봉사활동과 수집된 물품을 판매한다.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 가능하다. 수익금은 아름다운가게에 전액 기부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는 공정무역 커피회사 카페 티모르(www.cafetimor.com)도 커피 등을 통해 행사에 참여한다.

지난 1회 바자회 수익금 전액(200만원, 특별후원금 70만원 포함)은 아름다운가게 수해지원금에 포함됐으며 2회 때는 바자회 행사와 추모영상회를 가져 바자회 수익금 전액(182만7천원)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성금으로 활용됐다. 3회(136만2천원), 4회(155만4450원) 5회(187만2010원) 바자회 수익금 전액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 성금에 보태졌다.

추모바자회에 물품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름다운가게 대표번호(1577-1113)로 전화하면 무료택배(기증량 1~2상자)를 이용할 수 있다. 물품을 보낼 경우,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9 지하1층, 02-765-6004)으로 보내면 된다. 단, 보낼 때 [정은임 아나운서 동숭동헌책방 행사물품]이라고 써야 한다. 기증방법이나 기증받지 못하는 품목 등에 대해서는 관련사이트(http://www.beautifulstore.org/Join/Giving/Process.aspx)를 참조하면 된다.

추모바자회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정대철 씨는 “추모바자회는 정은임 아나운서가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로 올해도 기일에 맞춰 추모바자회를 열게 됐다”며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다음은 6주기 추모행사 내용이다.

1. 행사일 : 2010년 8월4일 수요일
2. 행사장소 :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9 지하1층)
   약도 :
http://www.beautifulstore.org/AgaOrg/GetInfo.aspx?SerialNo=1000000134
3. 아름다운가게 기증 방법 : http://www.beautifulstore.org/Join/Giving/Process.aspx

관련사이트
http://www.worldost.com  정은임 추모 사업회
http://www.cyworld.com/bastian2004  정은임 미니홈피

Posted by 스윙보이

5년이 꾹꾹 흘러갔습니다.  
'무심하게'라는 말로, 그 5년을 무책임하게 말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 5년이라는 시간, 누군가에겐 세계가 바뀌고,
자신의 생태가 달라진 시간이었을 테니까요.

내일 8월4일.
(정)은임 누나가 우리에게 작별을 고한 지,
천국을 장식하기 위해 떠난 지,
5년이 되는 날입니다.

늘 이맘 때면 생각나는 그 사람.
허허, 어쩔 수 없습니다.
내 생체시계는 그렇게 돌아가도록 5년 전부터 프로그래밍 돼버렸거든요.

그리하여, 다시 정은임입니다.
내일(4일) 누나를 만나러 갑니다.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점에서 누나를 그리는 사람들이 모여,
추모바자회를 엽니다.
저녁시간엔 누나를 함께 그리는 시간도 갖겠지요.

1년 여 동안 쌓아온 시간을,
누나에 대한 켜켜이 쌓인 기억을 풀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다시 1년을 버티고 견뎠습니다.
참, 대견한 일입니다.
시간을 그렇게 버티고 견디면서,
각자의 생을 살아온 것이.

지난해 행사를 마치고선,
은임 누나를 기억하고, 추억하고픈 사람들만이라도 추모문집을 만들고 싶어,
의견을 내서 올해 추진해보겠다고 공언했지만!
5주기 행사가 닥친 지금,
내 눈 앞에 닥친 일에 허덕거리다 결국,
보도자료 작성과 배포만 하고,
추모문집은 '언젠가'로 미루고 말았어요.

뭐, 어떻습니까.
누나도 이해해줄 겁니다.

그보다 누나는,
철탑에 올라간 노동자들의 아우성과 비명이 계속되고 이 현실에,
더욱 안타깝고 애타는 눈빛과 목소리를 건넬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누나에게 미안해집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랄까요.

혹시나,
내일 추모바자회에 참여할 수 있는 분들은,
작은 정성을 함께 맞들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아니면, 함께 누나를 추억하고 그릴 수 있는 시간을 함께 나눴으면 좋겠어요.

그도 아니라면,
그저 내일 짧은 찰나라도,
누나 한번 떠올려 주세요. ^.^

누나~ 안녕!
킁,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 거죠? ^.^


P.S. 문집이 만들어졌다면,
저는 누나 떠나던 그 해, 눈물과 함께 긁적인 이 글을,
담고 싶었어요.
라디오시대 마지막 스타가 떠났다(2004. 8)

이하, 행사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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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정은임 아나운서 추모바자회 개최
오는 4일 광화문 아름다운가게

지난 5년여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아름다운 하루가 열린다.

‘정은임 추모사업회(준)(www.worldost.com)’은 오는 4일(화)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점에서 제5회 추모바자회를 연다. 이 추모바자회는 ‘정은임 아나운서 팬페이지’가 사망1주기를 맞은 2005년 ‘정은임추모사업회(준)’로 이름을 바꾸면서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와 함께 열고 있는 행사다. 매년 정은임 아나운서의 기일(8월4일)에 맞춰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가게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루’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지난해(2008년) 4회 추모바자회 행사 사진


바자회는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참여로 이뤄진다. 행사 당일 아름다운가게에 모여 봉사활동과 수집된 물품을 판매한다.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 가능하다. 수익금은 아름다운가게에 전액 기부하고 있다. 아름다운가게도 정은임 추모바자회 때 영화관련 물품을 지원해 영화와 연애했던 정은임 아나운서의 뜻을 기리고 있다.

지난 1회 바자회 수익금 전액(200만원, 특별후원금 70만원 포함)은 아름다운가게 수해지원금에 포함됐으며 2회 때는 바자회 행사와 추모영상회를 가져 바자회 수익금 전액(182만7천원)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성금으로 활용됐다. 3회(136만2천원)와 4회(1,55만4450원) 바자회 수익금 전액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 성금에 보태졌다.

추모바자회에 물품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름다운가게 대표번호(1577-1113)로 전화하면 무료택배를 이용할 수 있다. 물품을 보낼 경우, 아름다운가게 신광화문점(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24번지 르메이에르종로타운 지하2층 B215-1, 02-733-6004)로 보내면 된다. 단, 보낼 때 [정은임 아나운서 팬클럽 신광화문점 행사물품]이라고 써야 한다. 기증방법이나 기증받지 못하는 품목 등에 대해서는 관련사이트(www.beautifulstore.org/donation/method.asp)를 참조하면 된다.

행사 관계자는 “정은임 아나운서가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인 추모바자회를 통해 정은임 아나운서를, ‘정은임의 FM영화음악’(정영음)을 기억하고 있다”라며 “영화인 정은임, DJ 정은임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관련사이트
http://www.worldost.com  정은임 추모 사업회
http://www.cyworld.com/bastian2004  정은임 미니홈피

다음은 5주기 추모행사 내용이다.

1. 행사일 : 2009년 8월4일 화요일
2. 행사장소 :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점 (서울 종로1가24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B215)
3. 아름다운가게 기증 방법 : http://www.beautifulstore.org/donation/method.asp

 

Posted by 스윙보이

4월7일. 52주년 '신문의 날'.
일제 주구 노릇을 했던, '독립신문' 창간일을 신문의 날로 존속시키는 것은 웃기지만,
신문의 굴절이 가져오는 세계관의 굴절이 나는, 무섭다.

'신문을 읽어야 세상이 보이'고,
'세상을 읽어라 신문을 펼쳐라'(올 신문의 날 표어 대상)에는 분명 공감하지만,
그 세상을 제대로 담아, 독자와 소통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지금-여기의 많은 신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 할 판이다.

늘, 신문들은 땅에 떨어지고 있는 '독자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동어반복을 씨부려대지만,
그 신뢰회복을 위한 공동의 노력은 거의 없다. 오직 자사 이익만을 향한 이전투구가 물밑 전개될 뿐.
일선 현장이나 기사에서 일부 매체를 제하고, 그들은 이미 오만방자한 권력이고 계몽주의자들이다.

세계관이 서로 '다른' 것은, 세계관이 분화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매체의 개성과 편집방향에 따라, 독자의 취향과 세계관이 영향을 받는 것은 재밌고,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지금-여기의 신문들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취향과 세계관의 분화이전에,
당연히 전제돼야 할 공공성에 대한 기본조차 잊은 '망각 저널리즘'의 토대 위에서,
내가 펼친 신문을 통해 이 세상을 제대로 보고 읽고 만날 수 있을지 당최 의문이다.
많은 기자들을 알고 있지만, 나는 솔직히 그들 중 다수를 '기자'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월급쟁이'요, '타이피스트'요, 혹은 '양아치'로 생각할 뿐.
아니면, '친구'일 뿐, '기자'라는 타이틀을 붙여줄 수 있는 자들은 소수다.

한때, 기자였던 나는, 그 세계에서 튕겨져 나온 '패배자'에 불과하지만,
나름 변명을 하자면,
그 세계에 계속 있다가는, 스스로 그어놓은 마지노선 밑으로 투항해서 절대 타협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기자를 해야 하나, 미디어에 있어야 하나, 싶은 선까지 거의 도달했기에,
그냥 때려쳤다. 점점 더 나락 속으로 빠져들 것 같은 그런 절박함.
그렇다고 이른바 '투철한 기자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은 절대 아니고.
뭐, 사실은, 능력 부족에, 처신 부족이지.

어쨌든 나는,
누군가가 어느 매체를 주로 보느냐가, 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판단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일부 신문들을 제하고는, 세계를 왜곡하고 굴절시키기만 하니,
그것이 내게 신문 펼치기를 주저하게끔 만든다. 그렇지 않은 신문을 보는 것도 점점 어려워질 판.
그렇게 형성된 세계관은, 점점 더 이 세계를 슬프고 암울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한 사람의 세계관을 바꿔놓는 건, 결국 세계를, 세상을 바꿔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착한 신문이, 착한 세계관을 만들어 놓을 터.
그래서, 나는 착한 신문을 많이 펼치면서 세계와 만나고 싶다.

허허. 공연한 잡설이었다.
그런데, 신문의 날은 진짜 바뀔까.

P.S... 이 씨잘데기 없는 씨불렁거림에서, '신문'은 단순히 종이신문만을 일컫는 것은 아님.

2007/05/21 - ['착한' 미디어] - 성년의날에 생각하는 미디어와 세계관

Posted by 스윙보이
때에 맞춰 언급을 하고 싶었지만, 좀 늦어졌네.  
영화 < 주노 >를 보고나니, 이야기가 좀더 명확해질 것 같았다.


'계모는 악녀다?'

얼마전, 울산에서 실종됐던 여섯살배기 어린이가 결국 살해된 것으로 밝혀진 사건, 들었지?
폭행에 의한 내장파열과 출혈이라는 부검결과가 있었잖아. 천인공노할 일이지.
어떤 사연이 있든,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지. 더구나, 이를 은폐하려고까지 했으니.

뭐, 결정적으로 이 사건이 부각됐던 건, 어린이 살해의 주체가 엄마였기 때문이지.
물론 보도된 대로 그냥 '엄마'는 아니었지. '계모'라는 이름의 엄마. 그렇지. 의붓어머니.
그런데, '계모'라는 사실이 왜 그렇게 부각되던지.
대다수 신문방송 보도의 제목은 온통 '계모'에 방점이 찍혀 있는거 아니겠어!
다들 '친모'밑에서 잘 자라서 그런가봐.-.-;  

사실 이젠 별로 놀라지도 않아. 그런 보도 행위들.
그래도 한숨이 나오더군. 휘유...
시대착오적인 제목들이 선정적으로 나부끼는 것을 보니.
'계모=악녀'라는 통념을 더욱 강화해줬으니.  
다른 선량한 '계모'들이 당할 부당한 시선을 생각하자니.

한 신문의 독자 지적마냥,
많은 보도들은, "마치 '계모'라는 조건이 아이를 살해하는 이유와 동기를 말해주는 듯" 했다규.
인면수심 계모, 잔인한 계모... 등등
그리고 나부끼는 댓글 등을 보자면,
계모에 대한 편견과 악견이 꾸역꾸역 자기증식 하는 꼬라지.
"역시 계모는 악녀고,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무책임한 결론은 대체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나쁜 동화, 계모를 내치다

보도가 나올 무렵,
한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우연찮게 이 사건이 화제로 나왔지.
그 친구, 말하더군.
"정말 계모 무섭지 않냐? 핏줄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이만 불쌍하게 됐지..."
흠, 순간 나는 그 친구가 가진 편견이 더 무서웠다규.

그건 대개의 우리에게 똬리를 틀고 있는 통념.
'나쁜' 동화들과 '혈연'에 치우친 가족의 개념에서 파생된, 계모에 대한 불편부당한 대우.
어쩌면 그런 사회적인 편견과 삐뚤한 시선이 악순환을 조성하는 건 아닐까.

어릴적, 우리가 주섬주섬 줏어읽었던 어떤 동화들, 나는 그들이 참 나쁜 동화가 아닌가 싶어.  
콩쥐팥쥐, 장화홍련,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백설공주 등등.
'계모'의 악행을 부각했던 동화들.
그러고보니, '좋은' 계모를 다룬 동화는 기억에 없어. 넌 혹시 있니?
물론 착한 계모의 전형을 다룬 이야기도 분명 있겠지만,
이들 나쁜 동화의 강력한 전파력과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지.
그들이 어쩌면 '못된' 계모보다 더 많을지도 모를 '착한' 계모를 내친 건 아닐까 싶어. 우라질.
이들 동화는 제발 좀 전복 시켜야 돼.
그 '모성'이라는 것도, 혈연에 많이 기댄 채 '계모'를 왕따 시키고 있는 것 같구.
'계모는 모성이 없어서 그런 일을 저지른다?' 무서운 발언이야.  

'계모'라고 똑같진 않아~


이번 사건, 간단해. '계모'가 주체가 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악행일 뿐이야.
한 개인의 특정 행위에 지위나 신분을 지나치게 결부하려는 태도, 좋지 않아~
가령, 마약을 한 전문직이나 교사 등을 더 부각하는 것도 선정적이야.
그래야 더 많이 읽히고, 배설할 수 있는 쾌감을 느끼겠지만.
기사나 글을 쓰는 사람의 태도나 인성이 중요한 건 그래서지.
"역시 계모라서 어쩔 수 없군"이라는 편견이 작동하는 한,
그의 기사는 선량한 계모의 심장에 바늘을 찌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규.  
그래서 그런 유혹에서도 벗어나는 것, 중요하지.

물론 계모가 친모보다 아이를 학대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순 있겠지. 그걸 부정하고 싶진 않아.
설마 통계가 있을까.ㅋ
그렇다고 친모라고 그러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 경우들 충분히 보아왔잖아.

그런 면에서,
< 주노 >에서 열여섯, 주노의 계모는 이런 편견과 무관한, 통쾌한 캐릭터였어.
계모 캐릭터의 편견을 무너뜨려주는 킹왕짱 엄마.
친모, 계모 구분할 것 없이, '좋은 엄마'의 표상이 아닐까 싶었다규.
의붓딸인 주노의 임신 고백에 새엄마는 다부지다며 주노를 격려하고 주노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막 느껴져. 막그래, 막그래...
특히 초음파 검사에 같이 간 새엄마의 활약이 오나전 킹왕짱!!!
"10대 미혼모들은 아기 키우기에 '꽝'"이라는 한 초음파 기사의 말에 새엄마는 딸을 위해 아주 통쾌하게 쏘아붙여주시거든.
또 배가 불러오는 주노를 위해 고무줄 바지도 만들어주고,
개에 대한 알러지가 있는 주노를 염려해서 그렇게 좋아하는 애완견도 기르지 않아.
대신 강아지 사진을 모으고 수를 뜨는 새 엄마.
주노에 대한 애틋한 애정의 수액이 곳곳에 뿌려져 있더라.


물론 주노가 있는, 미국은 이혼과 재혼이 일반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이같은 관계의 설정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우리도 좀더 문을 열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히나, 사회적인 영향력이나 파급력이 큰 언론이나 미디어가,
과거의 볼썽사나운 편견에 얽매인는보도를 하는 건, 후져. 후져.


또, 이율배반적인 시선 하나.
입양 말이야.
입양에 대해선 개거품을 물고 "가슴으로 낳은 아이"니 뭐니 신성시해대면서,
의붓부모에 대한 시선은 대체 왜 그런거야.
계부,계모 입장에서 보면, 아이는 입양을 한 셈이잖아.
제발 시각을 넓혀줘.


한 개인의 행위를 그 사람의 지위나 신분과 연결해 지나치게 확대해석하거나 일반화하지 말아줘.
그럼, 계모를 부탁해~

Posted by 스윙보이
다소 늦어졌지만, 한국이 약간 떠들썩했다.
동갑내기 셀레브리티이자 패셔니스타, 패리스 힐튼과 비욘세 놀스가 한국을 방문한 탓에.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나 한국에서의 Talk, Play에 그닥 관심은 없지만, 미디어들은 역시나 집중포화를 부어대더군. 뭐 덕분에 심심찮게 그들의 패션이나 행보를 살짜기 엿봤다.

비욘세는 일단 차치하고, (그는 나의 열입곱번째 뮤즈 정도 되시겠다.ㅎㅎ)
패리스 힐튼. 나는 그를 아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영화(<하우스오브왁스>)에 나온 그를 보고, 앞으로 연기는 엔간하면 안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도. 갠적으로 호감가는 연예인은 아니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주변에 패리스 힐튼하면 짜증내는 사람들도 꽤 많고, '머리가 비었다' 등으로 괜한 우월감을 확보하려는 사람들도 봤다.

그는 호감과 비호감이 극명하게 갈리는 연옌이 아닌가 싶다.
연출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사고뭉치' '무개념' '무뇌' '철부지' '백치미' '된장녀' 등 부정적인 뉘앙스의 레떼르가 그를 규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아마, 멍청하다. 그것이 그의 명백한 상품가치다. 현실과 유리된, 쇼윈도의 공주님 같은 인상도.(그는 어쨌든 '힐튼호텔' 체인의 상속녀 아닌가!) 그런 한편으로 천부적이 아닐까 싶게, 미디어플레이에 능수능란하다. 미디어를, 사람들을 꼬이게 하는 재주, 그 하나는 끝내준다. 물론 제대로 전략을 짜서 하는 것 같진 않다. 섹스동영상이 발각되자, 이를 DVD로 제작 판매하던가, 음주운전에 따른 감방생활 경험을 팔아먹거나, 르완다로 가서 봉사활동 하겠다고 선언하다니.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어떻게 소비되는지 알고,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것 같다. 아니면 주변에서 누군가 도와주거나. 미디어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거나. 오죽하면, 미국의 한 일간지가 말했듯, "패리스 힐튼에게 최악의 보도란 그녀를 보도하지 않는 것"이라지 않은가. AP가 일주일간 패리스 힐튼에 대해 보도하지 않겠다는 '실험'도 하고, 한 여성 뉴스진행자는 패리스 힐튼 보도를 않겠다고, 방송에서 선언함으로써 엄청난 화제를 모으지 않았던가. 역시나, 놀라운 패리스 힐튼.

어쨌거나, 나는 그를 평가하거나 재단할 생각은 없다.
세간의 평들이야 어쨌든, 나는 가끔, 패셔니스타로서 패리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가끔, 멋지단 생각도 한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패션을 통해 전달하는데 탁월한 면이 있다. 멍청하다는 그 이미지까지도! 무엇보다, 나는 패리스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데 동의한다. <어글리 베티>의 아메리카 페레라가 "대단하다"고 멘트했던 것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게 어떤 대단한 진실이나 생의 숨겨진 비밀을 캘 필요는 없다.
그건 그걸 잘하는 사람들이 해 주면 된다. 패리스의 역할은 분명 다른 것이고.
그는 아마, 계속 사고(!)를 치고 다닐 것이다. 사치하고, 파티 즐기고, 수시로 연애파트너를 바꾸고, 음주운전도 다시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식적인 고개 숙이기나 악어의 눈물을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것이 그답다. 미디어들도 패리스에게 '공인'이라는 말도 안되는 잣대를 들이대며, 어떤 책임을 요구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한국의 연옌들이 안스럽기도 하다.
이혼한다고 기자회견까지 해 대면서, 할 말, 안할 말 모조리 까발리고. 별로 그네들 사생활 알고 싶지도 않은데, 굳이 큰 소리로 말씀까지 하시고. 진상 미디어들은 그걸로 장사해 먹겠다고 혈안이고. 물론 연옌들 사생활은 어느 정도 까발려질 수밖에 없지만,
아쌀하게 패리스처럼 하던가, 아니면 조디 포스터처럼 입에 자물쇠를 채워놓던가. 미디어들도 좀더 솔직해지고.

그러다, 이런 기사도 마주쳤다.
이효리, 6일 약속대로 국민연금 납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당날짜, 한 포털사이트의 메인에 볼드체로 아주 강조를 해 주셨더구만. 이전에 어떤 맥락이 있었는지 몰랐다. 국민연금을 아마 안 냈던거 같은데, 약속까지 하셨나보다 했다. 관련기사 제목을 대충 보아하니, 이 기사가 시발점이 된 듯 했다. '단독확인'하셨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취재력인가. -.-
[단독확인] 이효리, 국민연금 장기체납…"1년 이상 미납부" 물의

보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얼척 없었다.
"...스타들의 도덕 불감증이 위험수위를 넘어선지 오래다. 1년에 수십억원을버는 그들에게 매월 32만 4,000원(최대 납부액)은 큰 금액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깜빡했을 수도 있다. 적어도 자신의 이름앞에 붙은 공인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으려면 설령 그 법이 악법이라 해도 사회적책임을 갖고 먼저 이행해야 한다. 그것이 공인이라는 자의 의무다..."

물론 이효리쪽이 기본적으로 잘못한 거다.
하지만, 생각해봐라. 32만4000원을 일부러 안 냈겠나. 그걸 악법이라 생각해서 버텼겠나. 과연 이효리가 국민들을 위해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공인이었나. 이걸 도덕불감증과 접목하는 저, 놀라운 센스! 후지다. 정말. 완전 후진 엄숙주의. 기사를 조용히 1단으로 처리하던가, 이효리 쪽에 살짝 언급만 해줘도 될 문제를 저렇게 후지게 다루다니. 지들이야말로 사회의 공기로서 제대로 의무나 역할을 하는지, 먼저 자문해봐야는 거 아닌가.

아이비는 또 어떤가.
연애한 게 무슨 죄라고. 그렇게 꽁꽁 숨어야되나. 죄라면, 그딴 남자를 연애상대로 택했다는 것 정도지. 동영상이 있니, 없니, 그게 뭐니. 둘 사이의 연애사를 시시콜콜 캐고, 동영상 찾아 헤매는 이 후진 미디어들. 하이에나 습성이지. 남들 먹다버린, 썩은 음식만 찾아 댕기는. 쯥.

21세기에도 여전히 후진 건 어쩔 수가 없다. 이 땅에 자유연애는, 1920년대에 기지개를 폈다. 당시 신여성이었던 나혜석은 "내 몸이 제일 소중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자유연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후진 미디어들이 있는 현실, 나혜석은 이 꼬라지를 보면 뭐라고 할까.

이 땅의 연옌들은 패리스 힐튼이 아마도 부러울 것 같다. 아싸리 몸뚱아리를 국가에 헌납하고 연옌 생활을 하는 편이 훨 낫겠다. 후진 미디어들도 아예, 스스로 '옐로 페이퍼'라고 커밍아웃하던가. 괜히 엄숙한 척 하지 말고. 솔직한 애들이 되레 착해보인다니까. 기계적인 엄숙함을 강요하는 자들은 너무 끔찍해.
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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