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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소믈리에'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9/07/02 글쓰기를 잘 하고픈 당신에게, “실질적으로 정직하라” (2)
  2. 2007/08/13 [한뼘] 미디어의 포로에서 벗어나는 법
  3. 2007/07/25 비판매체 극복법 그리고 미테랑의 상상력 (6)
  4. 2007/06/01 시대의 요구, ‘디지털 저널리즘’을 구현하자
  5. 2007/06/01 콘텐츠가 미디어다 (하)
  6. 2007/06/01 콘텐츠가 미디어다 (상)
  7. 2007/04/18 내가 곧 미디어로소이다!

말하자면, 이 '필살기' 참여취재기!
사진 중에 나으 뒷통수가 나온다.
찾아 보시려우?ㅎㅎ


글쓰기를 잘 하고픈 당신에게, “실질적으로 정직하라”
[독자만남]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저자 이만교


지금 ‘글쓰기’는 하나의 트렌드이자, 매혹이다. 서점만 둘러봐도, 글쓰기와 관련된 책은 차고 넘친다. 글 쓰고 싶어 하고,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도 커졌다. 과거 글쓰기는 전업 작가 등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됐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디지털카메라가 사진을 좀더 대중화시켰듯, 블로그 등 디지털미디어의 확산은 글쓰기를 장삼이사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글쓰기 바람은 다양한 분야로 파생되고 있다. 블로그(blog)와 책(book)의 합성어인 ‘블룩(blook)’은 이미 출판계의 트렌드가 됐다. 글쓰기를 통한 심리치료를 포함하는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가 있고, 각종 문화센터 등을 통한 글쓰기 강좌도 늘어나는 추세다. 뇌의 노화를 늦추고 두뇌를 개발하기 위해 글쓰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얘기도 있다. 글쓰기는 이제 특정 직업군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편으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 되기도 한다. 고인이 되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언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렇다. 한 사람의 생을 지탱하거나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당연히 고민도 따른다. 어떻게 글쓰기를 할 것인가.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왕 하는 글쓰기, 잘 하고 싶은 열망이야 누구나 가질 법 하지 않은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지만, 글을 잘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프란츠와 카프카와 같은 대문호도 늘 걱정했다. 원하는 수준을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는 『변신』을 탈고한 뒤에도 시간이 없었다며 변명하고 스스로 책을 혹평했다. 하물며 대문호도 글쓰기를 걱정했는데, 우리 같은 필부필부야 오죽하겠나.

글쓰기를 걱정하고, 잘 하고 싶은 당신을 위해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작가, 이만교가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이만교 지음/그린비 펴냄)를 내놨다. 그는 지난 2006년부터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일반인 대상으로 글쓰기를 강의해왔다. 이 책은 이 시간의 축적물이다. 그리고 지난 6일 서울 신촌의 아트레온 토즈에서 책 출간기념으로 ‘저자 이만교와 함께하는 글쓰기 워크숍’을 열었다.

글쓰기 강좌를 통해서나 이 책을 통해, 그는 기술이나 기교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삶의 태도로서의 글쓰기를 강조했다. 본질적인 자기 창조의 과정을 동반하는 글쓰기. 곧, 자신의 삶 전체를 살피고 생의 진심을 담은 그런 글쓰기. 이날의 워크숍도 그런 맥락에서 진행됐다. 그리하여, 아래는 좋은 글쓰기를, 실질적 정직을 담보로 한 글을 짓고 싶은 당신을 위한, 이날의 기록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재삼 확인한 그의 글쓰기 지론을 살펴보자. “글쓰기 수업이 단지 등단을 위한 과정이나 절차일 수만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재삼 확인했다. 꼼꼼히 읽어 보면, 잘 쓴 글이든 못 쓴 글이든, 쓴 사람 특유의 감각과 사유, 상처나 희망 등이 언어습관을 통해 총체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작가 지망생의 습작 과정 그 이상을 의미한다. 글쓰기 훈련은, 감각하는 방법, 사유하는 방법, 상상하는 방법, 그리고 실천하는 방법까지도 스스로 다시금 점검하고 익혀 나가는, 무척이나 섬세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하고도 원대한 여정일 수밖에 없다.” (p.6)


이만교, 글쓰기 강좌를 통해 새로운 배움을 얻다

이만교는 우선 책의 제작과정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2000년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이른바 ‘뜬’ 작가가 된 그는 2004년까지 정신없이 보냈다. 4권의 책을 출간하고, 박사 논문에, 신문기고․라디오진행․영화칼럼까지. 그러다보니, 에너지는 고갈됐고, 본업을 위해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월악산으로 집필 작업 차 떠났다.

그러나 정작 글을 쓰려고 하면 몸이 아팠고, 비염까지 걸렸다. 1년 이상 글을 쓰지 못하는 참혹한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에는 운동을 하다가 고꾸라지기도 했다. 불교공부를 위해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렇게 월악산에서 3년 여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 시간을 인생에서 가장 큰 공부를 한 기회였다고 회고했다. 그런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수유+너머에서 글쓰기 강좌를 제안했고,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글쓰기 강좌의 시작이었고, 3년 여를 부지런히 강연을 한 결과, 지금 책까지 펴내게 됐다.


글쓰기 강좌는 그에게도 배움의 과정이었다. “글쓰기에는 성장과정, 인식(사유)구조, 욕망실현방법 등이 다 걸려있다. 글쓰기를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면 깊이 있게 만나게 된다. 단편소설은, 상담으로 치면 1개월에 한번씩 갔을 때 3개월의 상담효과가 있다. 그만한 분량이 나온다.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에겐 나름 사연이 있고, 심리적 왜곡이 있으며 정상인이 하나도 없음도 확인했다. (웃음) 사람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인간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이 글쓰기 교본은 그에게 소중한 책이 됐다. 아는 동생은 “소설보다 더 잘 썼다”는 했단다. “소설이냐, 글쓰기 책이냐는 상관없다. 나는 이것을 곁다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책이다. 앞으로 목표는 (글쓰기의) ‘기초서’라고 할 만큼의 책을 내는 것이다.” 이만교에게 글쓰기는, 이제 필생의 과업이 됐다. 행여 앞으로 그의 소설을 만날 수 없다손,  슬퍼하지는 마시게. 그는 더 크고 넓은 글쓰기의 전도사가 됐으니. 글쓰기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길이 있을 터이니. 그의 배움을 나눌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실질적 정직, 글쓰기의 가장 기본

이만교가 글쓰기에서 가장 강조한 대목은 ‘실질적 정직’이다. “‘실질적 정직’이란 내 안의 생각에 정직해지라는 말이다. 옆집 아가씨가 샤워를 하는데 훔쳐보고 싶으면 훔쳐봐라. 그리곤 그 감정을, 죄의식까지도 솔직하게 적어라. 계속 실질적으로 정직해야 한다. 우리 욕망은 억압하면 반드시 귀환한다. 실질적 정직을 추구하면 글쓰기에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실질적 정직은 그렇게 내 안의 감각과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사물을 정밀하고 섬세하게 보는 게 기본이다. 책을 볼 때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감응을 준 실질적인 반응을 놓치고 굉장히 거칠게 바라보고 사유해서 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다거나, 그게 장르가 어쨌다거나, 작가의 등단 나이 등을 따지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거칠게 사유하지 말고 정밀하게 사유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밀하게 사유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는 일반적으로 생의 전체나 일반적인 통념․편견으로 사유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우선 말한다. 가령, 장남이나 출신지역 등 검증되지 않은 편견에 휘둘려 사유하는 것. 그 다음으로 3~4년 등 시간의 단위로 묶어서 사유하는 것 또한 거친 사유라고 지적한다.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사유하는 게 좋다. 그런 면에서 일기를 쓰는 것이 좋다. 하루 단위로 사유할 수 있으니까. 자기 전체를 놓고 사유하지 말고, 지금 즉시 내가 어땠는지를 사유해야 한다. 더 정밀하게는 하나의 사건에도 여러 이유나 감정이 섞여 있으니까, 그것을 조각조각 사유하는 것이 좋다. 시인이 감각적으로 예민하다지만, 감각적으로 예민한 모든 사람이 시인이다. 모든 사람은 감각적으로 예민해야 한다.”

그렇다. 인간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한 가지 사유를 할 때도, 샛길로 빠지는 것은 예사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념들이 곳곳으로 가지를 뻗치게 마련 아닌가. 생각해보라.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도, 우리는 저 멀리 다른 세계로까지 사유의 촉수를 뻗친다. “무념․무상을 하려고 명상을 11~12시간해도 안 되더라. (웃음) 그 망상덩어리를 적었다. 정리해보니 내 욕망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탈 때도 온갖 망상을 다 한다. 그것이 실질적 욕망이다.” 그는 새소리에서 시작한 명상이 딸, 전원주택, 1억, 베스트셀러, 로또, 한국사회의 병폐, 범죄자 욕까지 꼬리를 무는 망상의 예를 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평소 사유들은 아무 근거도 없고, 생산력이 없다. 이걸 해체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그게 돈이면 돈으로, 여자면 여자로. 하루, 사건 단위로 사유하고 혼재된 감각을 사유하고 미망의 흐름까지도 보면, 사유체계를 다른 방식으로 이끌 수 있다. 실질적 정직을 통해 자신을 면밀하게 보는 작업. 그게 필요하다. 도덕적 정직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억압할 수 있다. 글쓰기에는 라이프스타일이나 욕망구조가 나와 있다. 자기 삶을 돌아보는 키워드가 실질적 정직이다. 거친 사유는 틀린 것이고, 정직한 것이 아니다.”


실전 1. ‘언어+생명’과 ‘언어+사건’


인간에게는 2개의 중요한 요소가 있단다. 언어, 생명체. “우리는 안경, 운동화, 카드, 컴퓨터 등 늘 기계와 접속해 살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나 마음 속에도 이식된 기계가 있다. 그게 언어다. 문법구조를 가진 시스템이자, 넓은 의미의 기계다. 사유방법시스템이랄까. 내 마음의 흐름을 컨트롤 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통해 우리는 사유한다. 우리는 그래서 ‘언어+생명 사이보그’다. 다른 동물과 다른 지금의 인간을 만든 것이 언어다. 언어는 또 인간문명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시스템이다. 인간은 언어로 존재하는데, 모든 사건을 사건 자체가 아닌 언어로 본다. 즉, ‘언어화된 사건’이다.”

아래의 보기를 보자.

보기)
ⓐ 마음을 바꿔먹어라.
ⓑ 우리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들은 그 문제들이 발생한 때 갖고 있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듣자. “ⓐ, ⓑ는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이다. 다만 ⓐ는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이다. ⓑ는 의미상으로만 보면 ⓐ와 같지만, 상투적인 문장이 아니어서 새롭고 명료한 표현으로 다가온다. 그렇다 보니 ⓑ가 한결 더 정확하고도 강렬한 메시지로 전달될 여지가 크다. 이처럼 같은 사건이나 같은 의미의 문장을 얘기해도 어떤 언어로 얘기하느냐에 따라 다른 강도와 충격을 준다. 언어는 희한하고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독서할 때 좋은 문장은 공들여서 꼼꼼히 읽어야 한다. 모든 사건은 언어화된 사건으로 인식하는데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건 글쓰기 이전의 삶의 문제다.”

또 다른 보기.

보기) 
ⓐ 홍대 앞의 프린스 카페에서 나는 미숙을 한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 홍대 앞의 프린스 카페에서 미숙에게 바람 맞았다. (혹은 차였다.)
ⓒ 미숙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참담한 작별을 고했다. 그날 이후 나의 순수했던 청춘도 내 인생으로부터 멀어져갔다.

다시 설명. “이들 보기는 사건이 가진 풍요로운 의미나 그 다음 삶에 대한 힌트를 주지 못한다. ⓐ는 기계적인 사실 전달에 그치고,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애절한 심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는 비속한 인식을 드러낸다. ⓒ는 감성적인데 거친 문장으로 미화한 자기 기만적 글이다. 비속어를 자주 쓰면 자기 삶도 비속해진다. 요즘 좋거나 나쁘거나 놀라는 일 모두 ‘대박이다’ 혹은 ‘빠밤~’이라는 말을 쓰는데, 일상에선 좋다. 그러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진심을 펼치기엔 부족하다. 거친 일상적 상식에 묶이면 자기가 경험한 것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지점을 놓칠 수 있다.”

이어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의 일부를 보여준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같은 내용이라도 ⓐ, ⓑ, ⓒ보다 좋은 예. “다소 감상적이긴 해도, 화자가 실질적으로 느낀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는 실질 언어를 사용한 좋은 예입니다.”


실전2. 다양한 잠재성으로서의 ‘언어+사건’


글쓰기를 위한 또 하나의 팁. ‘감각을 깨우라.’ “인간은 감각기관을 깨우면 엄청난 일이 가능한 풍요로운 존재다. 인간에게는 무수한 잠재성이 안에서 들끓고 있다. 이면적 진실까지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 가능하면 삶이 풍요로워 진다.”

초코파이를 둘러싼 다음의 보기들을 살펴보자. 

보기)
ⓐ 초코파이는 오리온 초코파이가 제일 맛있어.
ⓑ 군대 있을 때 초코파이 정말 많이 먹었는데.
ⓒ 러시아에서 요즘 초코파이가 불티나게 팔린대.  
ⓓ 초코파이엔 초콜릿이 없대. 대신 화학 처리된 유지가 들어있대. 

“사람들 반응이 ⓐ~ⓓ처럼 제각각인 것은 그들이 초코파이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와 관심의 초점이 달라서다. 늘 다양함을 인식해야 한다.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한 문장 한 문장 다양한 표현이 있고, 그 표현마다 뉘앙스가 다르다. 하나의 사건을 놓고도 무한한 변형 문법이 가능하다. 인지감각을 섬세하고 풍요롭게 하면서 뭐가 나를 즐겁게 하고 고양시키는지,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야 한다.”

감각기관을 열어놓고 촉수를 세운 뒤, 필요한 것은 언어다. 물론, 그 언어도 내 안의 정직한 언어라야 할 테다. “언어 선택만 잘하면, 엄청 무섭거나 슬픈 사건도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 하나의 사실조차 매우 다양한 서술이 가능하다. 양자역학에서 관찰자 위치에 의해 입자의 실체가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나듯, 화자가 문장을 서술하는 방식에 따라 사건과 의미는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난다. 언어는 한 구절 한 구절 민감하고 삶에 밀접해 있다. 글쓰기란 사물과 세상을 감지하고 그중 어떤 관심사항에 언어로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고로, 일상어, 즉 통속어나 상투구를 그대로 쓰면 그 글쓰기는 거칠게 다가오고 반복하면 글쓰기는 엉망이 된다. 주어를 반복하거나 간투사(글쎄 등)를 자주 쓰는 것은 비경제적인 문장이 되고, 의성어․의태어 혹은 비속어를 쓰는 것보다 ‘정확하게 언어를 써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


버려야 할 리얼리티와 찾아야 할 리얼리티

이만교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리얼리티’를 다루는 문제. 일상적이고 모범적인 리얼리티는 버려라! 개연적이고 역동적 리얼리티를 찾아라. “일상에서는 일상 언어가 20%의 의미만 담보해도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렇지 않다. 일상어에 오염돼 있어서 글쓰기가 제대로 되지 않기도 하는데,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상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일상적 리얼리티를 벗어나 개연적 리얼리티를 찾아야 한다.”


정리하자면, “글쓰기는 일상적 리얼리티를 벗어나는 일이다. 동시에 개연적 리얼리티를 확보해야 한다.” 개연성을 확보한 글쓰기가 읽는 사람의 호응을 얻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모범적 리얼리티도 감흥이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역동적 리얼리티. 역동적 리얼리티는 역설과 아이러니를 품는다. 이는 곧 세심한 관찰력에서 온다. 불경이나 성경 등의 경전에 이 같은 역설이 많다.

“역동적 리얼리티까지 가면 글의 힘이 세어진다. 모든 존재는 다발성이 있고, 어마어마한 잠재성이 있다. 인간은 결코 변하지 않는 지점이 있지만, 어떤 지점은 점층적으로 변화한다. 어떤 것은 직선으로 쭉 간다. 어떤 것은 생겨났다 죽었다, 나타났다 죽었다 한다. 여러 층위가 다양한 방식으로 변한다. 내가 공부하는 만큼 달라지고 그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언어사용도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깥에 핑계대지 마라. 자신이 열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쓰기. 허투루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온몸으로, 삶으로 밀어붙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저 컴퓨터 앞에 앉았다고, 자판 두들긴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실질적 정직’이 글과 합일될 수만 있다면. “글쓰기는 인류가 만들어낸 소중한 유산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빼놓고 얘기해선 안 된다. 이 공부는 공평하다. 책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마음을 열고, 다른 이와 치열하게 나누고, 잘못된 부분 인정하고, 새로운 창의성으로 접근하면 된다. (글쓰기는) 온 몸으로 헤매는 수밖에 없다. 온갖 헤맴 속에서 우발적으로 나온다.”

또 하나의 팁을 더하자면, 줄거리로 사유하지 않기. “인생에서나 글쓰기에서나 줄거리 중심으로 사유하지 말자. 살면서 자신의 서사를 미리 만들지 말아야 하듯, 글쓰기에서 전체 줄거리부터 짜놓지 말자. 줄거리로 사유하면 모든 명작들조차 B급 잡지에서나 다룰 줄거리로 전락한다. 줄거리를 이루는 구체적인 사건, 인물들의 성격과 고민 등에 집중해야 한다. 정서로 사유해야 한다. 구체적이고 정서적인 감각을 가동해야 한다. 갈등이나 사건을 통해 줄거리는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다시 글쓰기다. 한 작가는, 이도저도 다른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끝물이 글 쓰는 직업이라고 농(?)을 던지기도 했지만, 글쓰기는 재능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세계를 향해 밀어붙이는 작업이자 태도가 아닐까. 소설가 김훈은 언젠가, 밥벌이 뿐 아니라, ‘글쓰기의 지겨움’을 털어놓으면서도 “글은 몸속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해내는 악보”라고 말했다. 온몸으로 헤맨다는 말은, 그래서 사실이다. 

당신이 하는 일부터 세상 모든 것이 나름의 가치를 나름의 형식에 담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최종적 가치를 획득하는 건, 문자의 세계, 그러니까, 그것에 대한 글쓰기가 아닐까. 자신이 속한 세계를 좀더 드러내거나 표현하고, 혹은 영속적으로 보전하기 위한 모든 인간의 노력은 글쓰기로 귀결되곤 하니까.

아 사실, 딴 말은 필요 없다고 본다. 나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 나온 이 말을, 아직 글쓰기의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다. “글쓰기의 첫 번째 열쇠는 쓰는 것이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끙끙 앓고 있는 하수상한 시절이지만, 그래도 써라. 거기에 당신의 실질적 정직을 꾹꾹 눌러 담아서. 우리는 그렇게, 당신을 감탄하고 싶다. 그렇게 당신이 내리면, 우리는 우산도 없이 당신을 맞을 것이다.

[YES24 채널예스 기고문, 글고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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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의 매스미디어와 구성원들의 관계의 일면. 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겠지만.

'전쟁'과 '테러'를 강자와 약자의 위계로, 혹은 미국의 시선에서 구획하는 지금-여기의 미디어가 전파하는 전쟁의 실상이란 뻔하지 않겠는가. 일부 미디어들이 수용자-소비자들의 반응과 소통에 적극적인 것처럼 나대지만 나는 아직 의심한다. 아직 많은 미디어들은 수용자-소비자들과 수평의 위치가 아니라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조정한다. 그 미디어들은 간교하고 얍삽하게, 수용자-소비자들이 포로 혹은 인질이라고 느끼지 못하게 배후조정까지 한다.    

...사회 구성원의 의식은 미디어의 포로가 된 지 오래다. 가령 미국에서 60년대의 베트남 반전운동에 견줘 오늘 이라크 반전운동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 배경 가운데 하나는 ‘군·산·언’복합체로 군산복합체와 한 몸이 된 미디어가 스스로 통제해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데 있다. 우리의 의식세계는 미디어에 의해 한정될 뿐만 아니라 가치관도 미디어의 잣대로 규정된다. 오늘 우리는 재벌 회장이 구치소에서 수면제 몇 알을 먹고 잠드는지 알 수 있지만, 1년 전 포항건설노조 점거투쟁의 관련자 9명이 2년6월~3년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지금 이 시간 감옥에 갇혀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 홍세화, 20070810 한겨레 -

어떻게 미디어의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블로그라고 마냥 거기서 자유롭지 않다.
난삽한 블로그도 너무 많으니까.
허명이나 공명심에 사로잡혀 다른 누군가를 포로로 삼고 싶어하는 블로거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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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미테랑'.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1년. 프랑수아 미테랑(1916.10.26 ~ 1996. 1. 8) 이후 프랑스에는 시라크가, 그리고 최근 사르코지가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됐다. (이번 사르코지는 -이념은 차지하고- 앞선 두 프랑스 대통령의 이미지가 강렬해서인지, 좀 경박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희귀본을 수집하는 문학광이었던 미테랑, 아시아 문화와 예술에 조예를 갖고 있던 시라크는 다른 노선의 인물들이었지만, 산책하고 사색하는 모습이 어울리던 대통령 이미지를 가졌다. 사르코지는 다르다. 왠지 팔랑거린달까.) 프랑스 제5공화국 출범(1958년 9월28일)이후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좌파 대통령이었던 미테랑.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미테랑은,

재임 내내 문화고양에 힘 썼으며 그만한 문화적 소양을 갖춘 대통령.
산책하는 모습을 내내 보이던 지적인 대통령.
어쩌면 정치인에게 치명적인(순전히 내가 살아온 땅의 기준에서 보자면) 스캔들에도 꼿꼿이 기지개를 켜며 프랑스인의 사랑을 받은 대통령.
프랑스의 좌우동거체제를 만들어낸 대통령.
유럽연합(EU) 발족에 지대한 공헌을 한 대통령...

이 정도였다.

그러다 미테랑 이야기를 보내준 백우진 선배의 메일에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었다. 젊은 시절, 언론계에 잠시 몸을 담기도 했다는 미테랑의 비판 매체 극복법. 그가 어떻게 소통에 능할 수 있었는지,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이를 어떻게 포용했는지를 알려주는 일화 한토막.

모든 매체가 그에게 달려들어 은퇴를 종용할 때였다. 가장 혐오스럽고 가장 모욕적인 톱 기사가 계속 실렸다. 미테랑은 가장 잔인한 칼럼들과 가장 심한 상처를 주는 만평들을 보란듯이 자신의 책상 위에 놓아두고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그것들을 즐기고 거기서 계속 버티는 힘을 길어올리기라도 하듯. 자크 아탈리는 충격을 삭이는 그의 능력과, 어떻게 보면 그런 것에서 그가 희열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테랑도 기자들을 싫어했다. “파리에는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기자 200명이 있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관해 최악의 혐오스러운 기사를 쓴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우파 언론인 루이 포벨스였다. 실은 미테랑은 포벨스가 쓴 두 번째 소설 <사랑이라는 괴물>을 매우 좋아했다. 대통령은 작가에게 그 책에 관한 찬사를 선사했다. 문학을 매개로 두 사람은 진심에서 우러난 대화를 나눴고, 그 대화에서는 빛이 났다. 점심식사는 4시간 동안 이어졌다. 포벨스는 그 뒤에도 계속 미테랑을 비판했다. 그러나 더 이상 대통령을 모욕하지는 않았다.



더불어 미테랑의 숨겨진 애인과 딸이 들통(?)난 것은 임기말인 1994년11월이었다. 가벼운 읽을거리와 사진 등을 싣는 프랑스의 가쉽대중지인 <파리마치>는 미테랑이 혼외관계를 통해 딸을 두고 있다며 특종을 터뜨렸다. 사진도 공개했다. 이 땅의 기준에서라면 경악할만한 일이지만,

프랑스는 역시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다. 비난을 받은 것은 되레 <파리마치>였다. 다른 언론들의 반응은 "너 왜 그랬니... 쯧쯧" 정도? <르몽드>가 뽑은 제목은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르피가로>는이를  '하수구 저널리즘'이라고 씹었다.

이 땅의 기준에서는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테랑은 그런 포화 속에서도 무사히 임기를 마친 뒤 군중 속으로 들어갔고 96년 1월8일 영면에 들어갔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으면서도 그 권력의 무게에서 자신을 빼는 방법을 알았던 사람이었던 듯 싶다. 사적인 욕망을 희생당하지 않을 권리. 관계와 대화라는 측면에서도 그는 출중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의 문인적 소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아탈리의 글은 그것을 뒷받침하지 않는가.

"...미테랑이 언어를 대하는 태도를 몰랐다면 그를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언어야말로 유일하게 영원히 존경할만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그는 1주일에 3~5권씩 끊임없이 책을 읽었다. 독서가 대통령관저에서 빠져나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면,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을 다시 만나고 자신을 모으며 또한 자신의 진실한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었다. 미테랑에게 글쓰기는 "내게 침잠하고, 주위의 사물과 사람들의 어지러운 압박과 세상사에서 나를 빼내며, 그리하여 내 실제, 내 뒤에 남기고자 하는 실제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 미테랑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

* 17년간 미테랑을 보좌하고 <<미테랑 평전>>을 지은 자크아탈리는,
미테랑을 가리켜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라고 했다.
그 '왕'은 전제군주나 절대군주를 뜻하는 나쁜 뉘앙스는 아니다.
안으로 개혁정치를, 밖으로 유럽연합을 주도하며 '강한' 프랑스를 이끌었다는 뜻에서 였다고 한다.

* 한 기자는 미테랑에 대해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으면서도 사적인 욕망을 희생시키지 않은 삶의 '절묘한 기술자'였다"고 기술했다. 듣고보니 그랬다. 기실 감옥 아닌 감옥이나 다름 없는 엘리제궁을 빠져나와 한적한 곳에서 숨어 책을 읽었다는 일화나 나중에 밝혀진 숨겨진 애인과 딸 등을 보면, 그는 사적인 욕망에도 충실한 '출중한' 대통령이 아니었나 싶다.

* 이런 재밌는 일화도 있었다. 미테랑의 숨겨진 애인은 그의 50대 야당 사무총장 때 만난 고교생이었다. 더구나 그 고교생은 미테랑의 정치적 동반자의 딸! 두 사람 사이를 눈치 챈 미테랑의 정치적 동반자가 딸에게 금족령을 내리자 미테랑은 그의 집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항의를 했단다. "연인을 만나게 해 달라!" 재밌지 않은가. 50 넘은 양반이 고교생 애인을 만나기 위해 집 앞에서 소리 지르는 장면이란. 멋지단 거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니까. 사랑 앞에는 체면이고 나이고 생까도 좋다.

* 재밌는 건, 미테랑은 청년시절 극우파였다고 한다. 어떻게 노선을 바꿨는지 잘 모르겠으나, 혹시 알고 있다면 알려주시길.

* 미테랑에 대한 호감지수를 높인 건, 바로 그의 문화적 소양, 문화행정력 때문이다. '책 읽는 대통령'은 그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다. 이런 일화는 어떤가. 1987년 재선에 성공한 미테랑은 파리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프랑스 혁명사>>를 읽고 있었단다. 당시 비행기 안은 재선 축하를 위한 사회당원들과 기자들로 시끌벅적한 상태. 기자 한명이 재선됐으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더니, 미테랑은 전국의 도서관을 하나로 연결하는 역사적인 도서관을 건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멋지지 않은가. 나는 이정도 공약 걸고 실행할 수 있는 대통령이라면 당장이라도 발벗고 선거운동에라도 나설 용의도 있다. 미테랑은 실제로 국립도서관을 새로 지었다. 취임 첫해부터 문화부 예산을 두 배로 늘리며 "모든 프랑스인이 만들고 창조하는 능력을 배양하고, 그들의 재능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일갈은 미테랑의 문화지수가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는 일례다.

이 땅도 이른바 '대선시즌'이 다시 도래했다. 색깔 갖고 장난치는거야 워낙 일상다반사이니 그렇다치더라도, 그들만의 청문회, 검증작업에 문화가 배제된채 가시돋힌 공방만 오가는 것을 보면 에라이~. 오로지 '대통령만 되면 된다'는 사생결단의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들의 떼쓰기에 언론도 같이 놀아난다. 사생활과 아닌 것도 구별 못해서 트집잡아 다른 언론의 '검증'작업에 딴지를 거는 행태를 보아하면, 거참 뭐하자는 플레이인지.

미테랑을 가진 프랑스가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개인이 문화의 산물이듯, 미테랑 역시 프랑스 문화의 산물임을 감안하면 말이다. 내 소박한 대선 소망이라면, 상상력 있는 정치인을,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것. 뭐 하긴 언제 이 땅이 상상력이 가진 분을 가져봤어야지,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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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말 한국기자협회에서 발간한 < 2006 저널리즘 >에 기고한 글.

시대의 요구, ‘디지털 저널리즘’을 구현하자
뉴미디어는 경쟁 아닌 결합의 대상

#1. 최근 한국광고주협회가 발표한 인쇄매체 수용자조사 결과, 신문의 가구구독률은 지난 2001년 51.3%에서 올해 34.8%로 뚝 떨어졌다. 열독률도 같은 기간 69.0%에서 60.8%로 하락했다. 신문구독을 하지 않는 이유로 △TV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43%) △인터넷으로 신문을 볼 수 있어서(19.5%) 등이 주로 꼽혔다.

#2. 국내 인터넷 사용자들은 뉴스를 접하는 주요 매체로 인터넷(46.7%)을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나스미디어의 조사결과로 신문은 6.9%에 그쳤다. 이 조사에서도 가구당 신문구독률은 지난 98년 65%에서 2004년 48%로, 98년 47.9%였던 지상파TV 시청률은 지난해 상반기 33.8%로 하락했다.

#3. 북한 핵 실험 등을 놓고 떠들썩했던 9~10월, 줄줄이 오보사태가 있었다. 지난달 24일 중국 언론의 어이없는 오보로 밝혀진‘농축우라늄 조선족 밀매업자 구속’은 서해를 건너면서 요란법석을 떨었다. 앞선 11일에는 일본 언론발 북한 2차 핵실험 보도가 받아쓰기에 여념 없는 국내 언론들의 대형 오보 사태를 야기했다. 앞선 달에는 로버트 칼린 전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동북아담당관의 가상 에세이를 연합뉴스가 ‘사실’로 오독, 각 언론사들이 이를 대서특필하게 만드는 등 헛소동을 일으켰다.


미디어환경의 재편과 저널리즘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는 최근의 사례다. 과연 우리 시대의 미디어는 제구실을 하고 있는가. 저널리즘은 그렇다면 이런 환경 변화 속에서 재정립되고 있는가. 시대 혹은 사회, 독자들과의 소통은 성공적인가. 사실 이 모든 질문은 여느 시대의 미디어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여기’의 미디어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들은 ‘위기’상황에서 저널리즘은커녕 생존조차 담보하지 못한다. 미디어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미디어환경 변화와 맞물린 저널리즘에 관한 성찰을 소홀히 한 대가다. 손석춘 한겨레 객원논설위원은 ‘어느 저널리스트의 죽음: 한국 공론장의 위기와 전망'에서 이같이 설파했다.  "저널리스트가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뒤틀려 있는 가장 큰 이유이다. 한국 저널리즘의 위기를 한국사회의 중대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비단 신문사나 방송사의 위기만이 아니라 공론장의 위기이자 민주주의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여기’의 미디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널리즘의 위기’는 곧 ‘신뢰의 위기’다. 밑바닥으로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곧 저널리즘의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면 과연 앞으로 더욱 가열 차게 변해갈 미디어환경과 어떻게 결합해야 할 것인가. 신뢰는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인터넷 미디어의 도약에서 배우기

인터넷 미디어의 등장과 창궐이 기성 미디어의 지위를 흔들고 있다. 다양한 조사결과에서 나오지만, 시소는 이미 기울었다. 신문 혹은 방송뉴스로 대변됐던 저널리즘은 온라인 혹은 인터넷이라는 미디어환경의 재편에 맞춘 재정립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살펴본 신문 구독률과 열독률의 하락은 신문이 여타 매체에 비해 제구실을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대목이다. 앞선 시대 신문이 가졌던 위상은 다양한 이유로 추락했다. 신문 아닌 다른 매체의 접근성이 더 좋을 뿐더러 차별화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신문을 볼 이유가 없는 시대다. 뉴스 소비 창구는 다양화됐으며 앞서 신문이 담당했던 역할은 인터넷이 대체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뉴미디어의 도약은 놀라웠다. 굳이 어떤 증거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인터넷 미디어의 약진과 기성 미디어의 추락은 이미 ‘사실’이 됐다. 정보기술(IT)의 발달과정서 불거진 이 같은 현상에는 여러 요인들이 섞여 있으나 가장 주요한 요인은 독자와의 ‘접점’에서 찾을 수 있다. 독자들은 미디어환경의 변화에 맞춰 뉴스소비 형태를 바꾸고 뉴스콘텐츠의 흐름을 변화시켰다.

특히 그저 신문을 읽고, 방송을 보며 단순 뉴스소비에 머물던 독자들이 손을 놀리고 입을 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인터넷이 바꾼 자각이었다. 신문 등의 기성미디어에서 인터넷으로 서식지를 옮긴 독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진했고 ‘프로슈머’로서 변신했다.

이에 미디어 생태계는 구조적인 변화를 겪었다. 수동적인 수용자였던 독자가 기성미디어의 방향을 결정짓는 능동적인 주체가 됐다. 그러나 사실 이것에도 일말의 오해가 있다. 사실 많은 미디어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독자들의 목소리를 선별, 게재하는 방식 등을 통해 그것이 여론인양 몰아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터넷 미디어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들은 기성미디어가 갖지 못한 인프라와 기성미디어가 자가당착에 빠져 소홀했던 독자와 ‘통’하고 있다. 아울러 끊임없이 고민하고 보조를 맞춘다. 독자들은 그래서 단순 뉴스 소비자가 아닌 미디어를 소유하게 됐다. 지금, 어떤 형태로든 독자에게 미디어는 속옷과 같은 존재다.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 뿐 아니라, (1인) 미디어도 건지는 시대다.

기성미디어는 이처럼 상호보완과 개방을 통해 독자들과 ‘너나 모두 미디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함께 고민해야 한다. 뉴미디어가 두려움의 대상이 돼서도 안 된다. 뉴미디어에 조응하는 콘텐츠 기획은 수많은 세헤라자데와의 대화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끊이지 않는 ‘천일야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법이다. ‘디지털 저널리즘’의 기반은 독자와의 소통에서 나온다. 

불신의 늪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미디어환경의 차이 등으로 직접 비교는 힘드나 가까운 일본에서 신문의 위상을 보자. 최근 요미우리신문의 ‘신문 신뢰도 조사’에서 ‘신문을 크게 신뢰할 수 있다’가 24.0%, ‘대체로 믿을 수 있다’는 응답이 65.5%였다. 두 응답을 합하면 90%에 육박한다. 지난해보다 4%가 높아진 수치다. 일본 사회의 구심점으로서 신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지금-여기의 신문은 반대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심한 말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신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정파적이고 상업주의에 찌든 신문을 보는 일은 고역이 되고 있다. 따라서 ‘신문에서 정보를 얻는다’거나 ‘신문을 통해 세상을 읽는다’는 말은 이제 생뚱맞다. 사회적 난제나 위기가 생겼을 때, 언론은 해결책은커녕 갈등만 부추긴다.

현재의 저널리즘은 그래서 명백하게 위기다. 특히 신문과 방송과 같은 기성 미디어를 향한 불신은 심각하다. 앞서 언급한 북핵과 관련한 오보사례만 봐도 그렇다. 북핵이 각 언론의 촉수를 예민하게 만든 것은 분명하지만, 사태의 엄중함에 비해 언론의 처신은 너무도 가볍다. 불신은 한 순간이지만, 신뢰 회복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한번 형성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기성미디어는 아직 인터넷 등의 뉴미디어에 친화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때론 뉴미디어 속도에 맞추고자 저널리즘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행위는 아이러니컬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플랫폼에서건 콘텐츠가 저널리즘의 기본을 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종이신문에 적용된 가치는 인터넷, 모바일, DMB 등 어떤 플랫폼에서건 일관되게 유지하되 접점 지점에서는 차이를 둬야 한다.

뉴미디어는 경쟁이 아닌 결합의 대상이자 미래상

향후 ‘뉴미디어’라는 테두리의 변화는 지속될 것이다. 인터넷의 인프라 정비에 아울러 디지털방송, IP-TV 등 새 플랫폼과 동영상 등의 콘텐츠가 미디어환경의 진화를 유도할 것이다. 이에 따른 뉴스 소비의 형태도 바뀐다. 기성미디어의 생존은 이 같은 환경과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가능하다.

이제 단순히 신문과 방송은 단순 콘텐츠 전달의 플랫폼으로서만 기능해선 안 된다. 타성에 젖은 뉴스전달과 정형화된 패턴의 정보제공은 독자를 기만하는 처사다.

그렇다고 신문과 방송을 버리고 뉴미디어에만 총력을 기울이란 얘기는 아니다. 신문 혹은 방송의 변신은 무죄다. 신문, 방송에서 활용하고 응용할 콘텐츠는 차고 넘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 ‘크로스 미디어(Cross-media)’를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 관건이다.

‘지금-여기’의 미디어기업은 종합콘텐츠기업을 지향하면서 뉴미디어와 친화해야 한다. 콘텐츠는 생존을 위한 총알이다. 이를 장착할 수 있는 무기(플랫폼)는 다양화해야 한다. 인터넷은 그 다양화의 시발이다. DMB, 와이브로, IP-TV, 디지털방송 등에 들어설 수 있는 첫 관문이다. 인터넷에서 실험은 시작돼야 한다. 디지털스토리텔링과 같은 콘텐츠의 다양한 실험은 물론 멀티미디어, 인터랙티브, 콘텐츠 자산관리 등으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 과정서 기술투자 역시 소홀해선 안 된다.

이를 위해 전사적인 적응 노력과 내부 혁신이 전제돼야 한다. 최진순 한경미디어연구소 기자는 “일관된 혁신과 개조의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신문기업일수록 기자들의 창의성이 무르익어 있다”며 “뉴미디어 투자 이전에 신문 내부의 낡은 구조와 문화를 깨지 않으면 “빈 수레가 요란한 격”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속가능한 미디어기업으로서 뉴스를 생산할 수 있는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즉자적인 대응이 아닌 구조적으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기성미디어는 ‘디지털’로 대변되는 뉴미디어와 경쟁 구도를 꾸리지 말고 손을 잡아야 한다. 사람, 조직, 자원의 혁신과 마인드의 변화를 유도하면서 새롭게 대두된 ‘디지털 저널리즘’을 짜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자들도 단순히 기사 생산만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의 전략적인 구현을 위한 ‘콘텐츠 아티스트’혹은 ‘콘텐츠 코디네이터’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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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는 여전히 화두다. 이용자 중심의 콘텐츠 생산과 배급 역시 아직 유효한 과제다. 콘텐츠 진화가 계속 이뤄지고 있지만, 2005년의 고민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2005년 3월에 쓴 내 기사에서 다시 콘텐츠 진화와 혁신의 방법을 생각해 본다.


 ‘통합적 접근’ 해야 ‘콘텐츠 혁신’ 가능
콘텐츠 생산 어떻게 해야 하나 … 콘텐츠가 미디어다 (하)

복합콘텐츠·콘텐츠아티스트 양성 등 급선무

현재 언론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콘텐츠 혁신을 단순히 생존차원에서만 비롯된 것이라고 넘겨짚을 수는 없다. 뉴스 수용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근접조우해야 하는 것이 언론사들의 숙명임을 감안하면, 콘텐츠는 바로 수용자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결과여야 한다.

일례로 한 신문만 보는 독자들에게 서비스하면 콘텐츠는 그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면 되고 기존 지면재편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건 혁신이라 일컫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뉴스시장 환경은 그렇지 않다. 인터넷 등의 뉴미디어는 다종다기한 매체들의 경연장이며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나 ‘오십보백보’인 콘텐츠로는 수용자들의 ‘간택’을 받기가 어렵다. 특히 ‘원소스-멀티유즈’라는 담론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콘텐츠 혁신은 사람은 물론 시스템 전반의 혁신과도 병행돼야 함을 의미한다.

▷복합 콘텐츠 추진= 무엇이든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는 향후 언론계의 핵심키워드로 이미 자리매김했다. 공간과 감각이 함께 움직이는 유비쿼터스 환경에서는 생활자체가 뉴스 혹은 정보와 바로 직결된다. 이른바 맞춤형, 개인형 미디어는 개봉박두 상태며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은 바로 이 같은 흐름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수용자들은 군더더기를 바라지 않는다. 콘텐츠 자체만으로 미디어가 될 수 있는 힘은 여기서 나온다. 아침 기상직후 하루의 구상부터 저녁까지 콘텐츠는 일상과 밀착하게 될 것이다.

매체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사람들은 미디어 이용시간이 늘고 있으며 더욱더 많은 시간과 돈을 미디어에 투자하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미디어라는 형식과 용기를 채우는 내용물(콘텐츠)이 결국 수용자들에게 먹히는 ‘아이템’이 될 것이고 각 언론사들도 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해 파란의 스포츠지 독점에서 보듯 진입장벽이 낮은 콘텐츠로는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이 요원할 수밖에 없음을 간파한 언론사들은 뉴스를 단순 정보가 아닌 ‘복합 콘텐츠’로 승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프리미엄 콘텐츠’를 향후 콘텐츠 혁신의 한 구심점으로 삼은 조선일보의 관계자는 “사실의 나열이 아닌 부가가치가 높은 자기완결적인 콘텐츠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인스닷컴(www.joins.com)은 여러 파생 콘텐츠 등을 뉴스와 접목, 뉴스와 생활관련 정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종합정보서비스 사이트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콘텐츠 아티스트 양성= 네트워크의 열린 구조는 ‘만인의 미디어화’를 추동하고 있다.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모토를 내건 ‘시민기자제’ 운영으로 훌쩍 큰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에서 보듯, 이제 각 언론사들은 콘텐츠의 생산 주체를 ‘현직 기자’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있다.

이전에는 제보자에 머물렀던 사람들도 직접 기사를 내고 있다. 오히려 기자보다 더 현장에 밀착한 기사를 생산, 사실보도의 적임자가 되기도 한다. 각 사는 ‘디지털특파원’ ‘참여기자’ ‘누리기자’ ‘통신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콘텐츠 생산자 역할을 맡기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사실과 다른 보도가 나오거나 무분별한 콘텐츠 양산으로 저널리즘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부작용이 나타나는 측면도 있다. 온라인 저널리즘에 대한 진중한 고민이 결여돼 있다는 비판의 지점이다.

그럼에도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미디어 시장의 재편을 예고하지만 기술을 넘어서는 콘텐츠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매체환경 적응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 일간지 인터넷뉴스부 기자는 “플랫폼이 다양화돼 리소스가 한정된 상황에서 일일이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선택과 집중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지만 인터넷만 놓고 보자면 원래 주인이 네티즌이었고 네티즌의 콘텐츠 생산 코너를 확대하면서 접점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뉴미디어환경은 연합뉴스를 받아 엇비슷한 관점에서 콘텐츠를 생산하는 관행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뉴스획일성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 매체환경에 적합하면서 다양한 시각을 제시해줄 수 있는 ‘콘텐츠 아티스트’의 육성이 언론사 콘텐츠 혁신의 과제로 등재돼 있다.

▷통합적 접근= 콘텐츠 차별화는 콘텐츠 혁신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콘텐츠 혁신의 완결편이 되기 위해선 조직차원의 시스템적인 접근과 함께 인식의 변화를 함께 가져가야 한다.

최진순 서울신문 기자는 “콘텐츠 혁신은 일부 인원에 의해 주도되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다”며 “기술·트렌드를 읽는 시각을 구비하고 인력자원을 배치하는 한편 조직과 자원분배에서의 혁신이 콘텐츠의 질적·양적 변화를 추구하는데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 기자는 이에 내부적으로 콘텐츠 혁신에 대한 공감대와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거친 뒤 시장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곁들여 뉴미디어에 맞는 콘텐츠 생산을 위해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구조개편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김경호 국민일보 뉴미디어센터장도 “지난 시기의 신문조직은 뉴스 이용자들에게 맞는 미디어조직이 아니며 다양한 유통창구에 맞는 유연한 조직방식이 필요하다”며 “현재는 시스템(조직), 기자, 콘텐츠 세 가지 변수를 놓고 방정식을 풀고 있는 ‘실험단계’”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온·오프 통합룸 구축도 중요한 과제다. 황용석 건국대 교수(신문방송학과)는 “서로 다른 문화와 뉴스가치를 가진 온·오프가 함께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과 시행착오를 감내하는 실천력이 필요하다”며 “문화적 이질성을 장점으로 바꾸는 커뮤니케이션시스템과 인트라네트워크 강화, 정보 DB 구축, CMS(콘텐츠관리시스템·Content Management system) 등의 구축이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뉴미디어환경에서도 콘텐츠의 브랜드화는 오프라인과 다른 차원에서 중요 과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기자상도 새롭게 요구되고 있다.

특히 새로운 저널리즘을 잉태하기 위한 콘텐츠 혁신은 업계 공동의 노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콘텐츠 질과 양의 차이는 미디어간 격차로 나타나 일부 언론사의 콘텐츠 독과점 양상을 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공동연구 등 시장외적인 공동체적인 노력을 선행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미디어기업간 인수합병(M&A)도 나와 주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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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는 여전히 화두다. 이용자 중심의 콘텐츠 생산과 배급 역시 아직 유효한 과제다. 콘텐츠 진화가 계속 이뤄지고 있지만, 2005년의 고민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2005년 3월에 쓴 내 기사에서 다시 콘텐츠 진화와 혁신의 방법을 생각해 본다.



 “유비쿼터스 등 온라인 마인드 전환 시급”
‘콘텐츠 전쟁 시대’ 도래 … 콘텐츠가 미디어다 (상)

온·오프라인 괴리감 극복 등 수용자들 위한 콘텐츠 생산만이 살 길

새로운 매체환경의 도래와 시장 제반여건의 변화가 언론사들의 콘텐츠에 대한 고민을 가중시키고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론사들은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명제 앞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에는 뭐니뭐니해도 ‘콘텐츠’가 있다. 콘텐츠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언론사들에게 '어떤 콘텐츠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당장의 생존은 물론 미래와도 직결된 문제다. 현재 언론사들은 콘텐츠에 대해 무엇을 고민하고 있으며 어떻게 방향성을 잡아가고 있는지를 2회에 걸쳐 진단해본다.


“아무리 새롭고 획기적인 접근방식이나 기술이 개발되더라도 핵심은 역시 콘텐츠다.”

최근 한 인터넷 언론사의 신임 대표는 취임 인터뷰에서 이 같이 언급했다. 이 명제는 상투적이고 진부하지만 어쩔 수 없이 ‘참’이다. 콘텐츠는 한 언론사만의 문제가 아닌 전 언론계의 변함없는 화두다.

▷콘텐츠 전쟁=
이른바 ‘콘텐츠 전쟁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다채널 환경은 콘텐츠 부족을 예고하고 있는 한편, 신문시장의 위기 등으로 한계에 부닥친 매스미디어는 새로운 시장과 매출 증대를 위해 콘텐츠 혁신을 요구받고 있다.

특히 많은 뉴스 수용자들이 뉴미디어를 선호하면서 기성매체는 어려움과 변화를 동시에 겪고 있으며 이에 대한 탈출구를 찾는 일이 시급한 현실이다. 콘텐츠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고민의 중심에는 비즈니스가 있지만, 콘텐츠 수용자들의 ‘간택’에 의해 언론사의 수익과 영향력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보면 신뢰의 회복도 중대한 모토다. 각 플랫폼에 맞는 콘텐츠의 형식과 내용·질을 꼼꼼히 따지는 작업이 동시에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용자들을 고려한 콘텐츠 생산이다. 한 언론사 관계자는 “내가 하고 싶은 ‘우리만의 콘텐츠’가 돼선 안된다”며 “예전에는 대중·군중이라는 말로 표현했으나 이제는 상황에 따라 다른 태도를 지니는 ‘상중(狀衆)’의 개념이 중요해진 만큼, 이들의 판단이 콘텐츠 생산의 중요한 선결과제”라고 지적했다.

온·오프라인 유기적 결합 시급

▷온-오프 마인드의 괴리감= “이제는 텍스트만 갖고는 살 수 없다.”
한 언론사 관계자는 최근의 고민과 추세를 이렇게 함축했다. 이미 다양한 콘텐츠 형식과 내용들이 선을 보였거나 보일 예정이다. 이전에도 일부 언론사닷컴들이 동영상 콘텐츠를 통해 ‘탈텍스트’에 나섰으나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었다. 최근에는 국민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인터넷 방송을 내보내고 있으며 전자신문, 동아일보 등도 준비중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향이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다. 뉴미디어의 향배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나 두 마인드간의 마찰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신문사에서 닷컴으로 자리를 옮긴 한 종사자는 “신문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닷컴사에) 와보니 알겠다”며 “신문 쪽을 보면 답답하고 현재 미디어환경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온-오프라인 마인드의 괴리감을 설명했다.  

한 일간지의 인터넷 담당 기자는 “기성매체 기자들이 온라인 저널리즘의 지평을 학습하거나 연구하지 않고서 비대해진 온라인에 기사를 싣다보니 인식의 괴리와 정체성의 혼란에 직면한 상태”라며 “새로운 기술 형태에 대한 인식과 습득의 차이가 확연히 나기 때문에 기성매체 종사자들의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일부 언론사들은 온-오프 통합뉴스룸 구축 등을 연구하거나 온-오프의 유기적인 결합을 위한 시도를 하면서 콘텐츠의 질적 강화와 수익모델 개발을 전사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각 사의 인터넷 부문이나 개별 기자 중심으로 형성된 뉴미디어 마인드가 전사적으로 뿌리내릴 필요가 있음에도, 본사나 편집국 차원의 움직임이 제한돼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높다. 

‘죽느냐 사느냐’ 콘텐츠가 판가름

▷“아무도 모른다”= 언론계에 ‘새로운 정보기술(IT)을 활용한 콘텐츠 비즈니스의 확대’라는 과제는 주어졌다. 무엇이든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환경에 대비한 콘텐츠 제공의 출사표도 이미 던져졌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미디어 중심의 통합 미디어 자산관리 그룹’을 미래상으로 제시했으며 권영빈 중앙일보 사장도 여러 곳에 흩어진 콘텐츠를 모은 ‘콘텐츠 생산기지’를 강조했다.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회장은 신문·방송·모바일·인터넷·교육 등 5륜형 체제로의 운영을, 장영섭 연합뉴스 사장은 ‘멀티미디어 통신사’를 지향점으로 내세웠다. 

언론계는 이처럼 ‘원소스-멀티유즈’를 거론하면서 ‘미디어 융합(컨버전스)시대’를 준비하고 있으나 문제는 어떤 미디어플랫폼이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다. 리소스는 한정돼 있으나 플랫폼이 너무 다양해 일일이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마냥 손놓고 기다릴 수만도 없다. 다매체 다채널의 시대는 선택과 선택 뒤의 성취 혹은 후회, 그리고 다시 주어질 선택에 대한 고민들을 전제하고 있다. 특히 투자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

한 언론사닷컴 관계자는 “지금 상황은 10여년 전의 케이블을 보는 것 같다”며 “제대로 된 성공경험이 없기 때문에 투자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현재 언론환경도 좋지 않아 공격적인 투자를 할만한 곳도 없다”고 설명했다.

다른 언론사 관계자는 “아무리 돈을 들여서 콘텐츠를 만들어도 팔리지 않으면 난감하다”며 “어떻게 유통시킬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고민을 털어놨다. 

이와 함께 콘텐츠의 내용에 대한 고민도 한창이다. 종합지, 경제지, 전문지 등 각자의 영역이 있는 상황에서 콘텐츠의 중심을 잃고 외연을 확대할 수도 없기 때문에 각 사는 뉴스 외 파생콘텐츠의 결합에도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뉴미디어 환경에서 엔터테인먼트 등 연성기사의 강세를 무시할 수도 없지만 언론사의 위치를 감안할 때 ‘당연히 안 되는 것’에 대한 한계점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사닷컴의 경우, 온-오프가 한 조직 내에 있는 언론사와 달리 콘텐츠 라이선스를 놓고도 본사와 어떤 관계를 가져가야 할지를 놓고 고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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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여 전 적을 두고 있던 미디어오늘(www.mediatoday.co.kr)에서 창간 기념으로 꾸며본 '10년 뒤 미디어세상'이라는 콩트다. 이용호 화백이 그림을 잘 그려줘서 허접스러운 글이 그나마 조금 살았다. 예언이나 예측과는 무관한 내 멋대로 그려본 미디어세상. 하나의 기록으로서 옮긴다. 그림은 이 화백께 허락을 받지 아니하였는데, 나중에 허락을 받기로 하구.^^;; 그리고 언젠가 스토리텔링을 좀더 가미한 업그레이드 버전을 선보이기로 하구. (2005. 5. 18)


"내가 곧 미디어로소이다..." 
[용호화백과 준수기자가 바라본 10년뒤 미디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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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행정도시 이전 이후 서울의 광화문 주변 신문로와 여의도 방송가는 예전 같지 않다. 합종연횡, 이합집산, 인수·합병(M&A), 해체와 소멸 등 격랑이 휘몰아치는 ‘서바이벌 게임’을 치렀던 언론계. 교통정리를 끝내고 살아남은 언론사들은 종합정보콘텐츠기업(Total Information Contents Company·TICC)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다지고 있다. 이제 고전적인 신문과 방송의 경계도 없다. “콘텐츠가 생명력이다” “상상력이 콘텐츠를 만든다” 등의 구호(이자 선언)는 2009년 이른바 ‘09콘레보’(콘텐츠혁명)의 뻔한 상투구지만 여전히 유효한 명제다. ‘09콘레보’의 척후병이자 주모자였던 ‘게디어(게릴라 미디어)’는 현재진행형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각종 미디어의 창궐은 지독한 ‘데이터 스모그’를 양산하고 있다. 정보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에게 알짜만을 뽑아주는 ‘디지트’(Diget·디지털 다이어트) 업종도 미디어 시장의 틈새를 차지한다. 2015년, 세상의 중심에서 미디어를 외치는 일은 일상다반사다.



#에피소드1. 문근영,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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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제68회 칸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칸. 6일로 28번째 생일을 맞은 영화배우 문근영이 다시 칸을 방문했다. 느슨한 블로그들의 연대 미디어인 ‘B베디어’의 ‘문근영 전담 기자’, 노낙종 기자도 덩달아 나섰다. 노 기자의 무기는 캠코더, DMB폰, 컴퓨터, 휴대인터넷 등이 결합된 PMC(Portable Multimedia Cam). 마침내 문근영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흥분한 노 기자 왈, “10년 전 ‘댄스의 순정’으로 칸을 첫 방문, 전 세계 영화팬들의 시선을 훔쳤던 문근영씨. 최근 컬트무비 ‘오징어는 문어라 불리길 원치 않는다’의 열연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근영, 아... 찡하다 근영. 전세계 미디어들의 스포트라이트가 문근영에게 쏟아지고 있근영. 정말 ‘근영 짱’이근영...”



#에피소드2. 모바일 노마드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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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A신문사’로 불렸으나 한 벤처기업의 적대적M&A전에 휘말려 경영권 방어에 실패, 현재 지주회사를 가진 미디어그룹으로 탈바꿈한 ‘A미디어’. 사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A미디어는 업무시간, 업무방식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신에 나서 전방위에 걸친 콘텐츠그룹으로 탈바꿈했다. 부서와 부서, 자원과 자원, 장치와 장치가 서로 연결돼 경계가 없어졌다. 기자들은 이른바 ‘모바일 노마드(유목민)’다. 출퇴근? 그런 것은 없다. 그들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난다. 그리고 콘텐츠를 배출한다. A미디어의 열린 공간에는 ‘이용자들과의 소통을 허하라’는 구호가 상징처럼 붙어 있다.



#에피소드3. 기자도 사랑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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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걱. 이게 뭐야. 사라졌다. 정말 그런 거야? 아~ 미치겠다. DMB, HSDPA(초고속데이터전송기술), 와이브로를 갖춘 최첨단 포터블 디바이스가 있음 뭐하냐구요... 작동 한번 잘못하면 이 지랄이다. 반나절을 매달려 찍은 이 취재영상을 어떻게 하나. 난 왜 이러냐. 꼰대가 엄청 깨겠군. 주변의 이 시민들은 뭐 구경거리 났나. 기사를 날렸다는 걸 눈치챘나보군. 아~ 쪽팔려.-.-;;;

엉? 웬 진동이지? 여자네?(동영상이 뜬다. 여자 왈, “아까 같은 자리에 있었어요. 그쪽이 필요한 게 저한테 있는데. 만날래요?) 헉. 이게 웬 천지신명의 징조냐. 그녀한테 그 현장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니. 그대로 빌렸다. 다시 송고해서 꼰대로부터 칭찬도 들었다. 살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나의 ‘카시어터’에서 우리가 합작한 기사를 보면서 사랑에 빠졌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닭살 멘트를 날리면서... 기자도 사랑이 된다.



#에피소드4. 서브웨이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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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자체가 하나의 미디어다. 10년 전만 해도 무료신문이 득실댔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M-paper(모바일 페이퍼)와 지하철 내의 홀로그램 미디어가 지하철 이용객들의 시선을 잡는다. 때 마침 지난해(2014년) 콩고 월드컵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영국 프리미어리그 리버풀 FC의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활약 중인 박주영(29)의 경기 모습이 나온다. 현란하게 드리블하는 박주영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지하철 내에서 생생하게 방송된다. M-paper을 통해 보는 사람들은 박주영의 경기 데이터를 동시에 찾아볼 수 있다. 그런 한편으로 아직도 ‘씨내리’ 등 활자화된 잡지를 보는 사람들도 많다. 재미있는 공존이다.



#에피소드5. 스무살 성년식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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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디어오늘) 스무살. 장미꽃과 향수, 그리고 키스가 필요한 나이^^ 10주년이라고 행사를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성년이 됐다. 수많은 매체들이 명멸하고 진화한 가운데 20주년을 맞아 사옥이 완공됐다. 사옥이래봤자 별게 없다. 그저 미디어의 진화과정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이전과 같은 사무실 개념이 아니다. 유비쿼터스가 일상이 돼 기자들에게도 사무실이 필요가 없다. 내 손안의 모바일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퍼스널 미디어의 창궐은 개인의지에 따라 콘텐츠가 생산되는 시대다. 스무살 성년식도 특별하지 않다. 어디에 있든, 손안에서 스무살이 된 매체의 성년식에 참여할 수 있고 한마디씩 가능하다. 수용자들의 키스가 마냥 기다려질 뿐이다.



#에피소드6.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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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은 빈 공간이다. 무엇을 채우든 당신의 상상력에 맡긴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아니면 말고... ^^;; 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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