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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여성 일자리 창출에 적극 나선다고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이를 위해 서울시 여성창업 플라자를 만들고, 사회적기업·협동조합 등 사회적경제조직 300개를 지원하기로 했고요. 아울러 3150개의 맞춤형 직업훈련과정은 물론 14738개의 사회적 공공일자리를 제공하기로 계획을 잡았습니다.

 

 

서울시는 지난 410일 점포형 창업보육공간인 여성창업 플라자를 개관하면서 42천여 개의 여성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한 ‘2013 서울시 여성일자리 종합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이번 대책은 여성창업 지원을 핵심으로 직업훈련 여성친화기업 발굴 및 협력 사회적 공공 여성일자리 창출 등 4개 분야 12개 정책을 담았습니다.

 

서울시의 이 같은 여성일자리 확충은 여성들의 사회활동 확대 추세와도 맞물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성들의 노동력은 증가 일로에 있으며, 특히 이전에 남성 비율이 높았던 전문직으로의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거든요. 미국의 통계에 의하면, 2009년부터 노동인구 비중이 남성보다 여성이 높아졌습니다. 역사상 처음부터 노동력의 추가 여성 쪽으로 기운 이후 여성은 계속 50퍼센트 이상을 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제54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506명 가운데 여성 합격자 비율이 41.7%에 달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여성 합격자 비율이 40%를 넘어선 것은 2010(41.5%) 이후 역대 두 번째였고요. 노동시장에도 여풍(女風)’을 확인할 수 있네요.

 

남자의 종말은 이런 세태를 약간 과장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남은 것은 액세서리뿐, 말하자면 맨세서리(mancessory)’들뿐이다.”(p.19)

재밌는 표현이죠? 맨세서리! 그렇다고 남자들, 버럭할 필요는 없어요.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면, 그것 너무 지질하잖아요.ㅠ.ㅠ  

 

 

여성창업플라자, 여성창업지원의 허브

 

서울시가 개관한 여성창업플라자(이하 플라자)’는 이런 추세를 더욱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3호선 도곡역의 지하철 유휴공간을 활용해 조성 개관한 플라자는 여성창업지원의 허브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자임하고 있습니다.

 

플라자는 전국 최초의 소규모 점포형 창업공간으로서 기존의 창업보육센터와 다른 지점을 갖고 있습니다. 기존의 것이 사무공간이나 제작공간만 제공했다면, 플라자는 창업보육실 내에서 제품 생산부터 판매까지 원스톱서비스가 이뤄집니다. , 교육-제조-유통이 한 번에 이뤄지게 되는 것이죠. 가령, 손뜨개 업체가 입주하면, 방문객을 대상으로 교육도 할 수 있고, 완제품을 판매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죠.

 

플라자에는 현재 공예·디자인 분야를 테마 업종으로 한 창업점포 15개가 입주해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상품 기획·회계·세무 등 분야별 11 컨설팅을 제공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요. 또 프랜차이즈, 온오프라인마케팅, 판촉 등의 교육과 창업매니저 및 마케터를 둬 상담 및 판로 개척도 지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예·디자인 업종을 테마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울시의 얘기를 들어볼까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미적 감각을 살릴 수 있고 경제적인 부담이 적어 여성 창업 및 성공이 가능한 업종으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에요. 또 동종업종이 한 곳에서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어서 제품 간 벤치마킹이 가능하고 이는 제품의 질 향상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겁니다.”

 

성공한 선도업체가 입주업체를 끌어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보이네요. 입주업체는 금화칠보 등 선도업체의 상품 개발, 유통망 정보제공 등 경영실전 노하우를 전수 받을 수 있는 거죠. 플라자는 이에 따라 선도-입주 업체가 함께하는 제품 콜라보레이션 등의 이벤트도 진행할 계획입니다. 신구의 조화, 아름다운 협동이죠?

 

무엇보다 서울시는 이번 여성창업플라자의 개관을 계기로 곳곳에 자리하고 있을 유휴공간을 찾아내 2의 여성창업플라자를 추가 조성할 계획입니다. 더불어 사회적경제 생태계에 여성들의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기반도 조성합니다. 2013년에 300여개의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등을 육성한다는 방침이 그것입니다. 특히 협동조합은 설립의 용이성, 탄력적인 운영 등으로 경력단절 여성에게 적합한 조직으로 서울시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여성인력개발기관과 서울시 공공시설 등을 커뮤니티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다양한 교육 기회도 제공할 계획입니다. 창업교육과정을 통해서는 1400명의 예비창업자와 22개 여성인력개발기관을 거점으로 활동할 여성협동조합 퍼실리테이터(촉진자)’를 양성하기로 했습니다.

 

 

 

 

여성기업과 여성을 위한 사회적 공공일자리의 확충

 

플라자를 통한 여성 창업 기회의 확대와 아울러 서울시는 여성친화기업을 지속 발굴관리하기로 했습니다. 올해까지 1천개 기업과 협약 체결을 추진하며, 여성친화적 기업환경 우수사례를 200개 발굴하고 매뉴얼을 제작·보급할 방침입니다.

 

이들과 연계해 10609명의 주부와 결혼이주 여성인터도 채용하고 인턴십 만료 후에는 약 70%의 여성이 계속 고용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사회적 공공일자리는 지난해보다 3500여개 늘어난 14738개로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여성분야 서울형 뉴딜일자리 4개 사업도 적극 운영, 안심귀가스카우트 500, 보육코디네이터 150, 아동돌봄도우미 415, 아동공동생활가정 가사도우미 61명을 두면서 시민호응과 성과가 높은 경우, 계속 사업으로 추진을 검토합니다.

 

조현옥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장은 올해 여성창업플라자 개관을 계기로 여성 창업을 적극 지원하고 여성기업과 협력해 나갈 것이라며 장기전문 교육을 통해 여성을 전문 인력으로 양성해 나가는데도 주력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일자리 창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질 좋은일자리가 아닐까 싶어요. 여성들이 자신이 가진 재능과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것.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서울시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겠죠. 지속가능한 좋은 일자리. 일하는 여성이 바꾸는 서울의 모습이 그래서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시장에게 좋은 일자리를 위한 정책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요구, 해야겠죠.  

 

그런 과정을 통해 여성 관리자, 여성 임원의 비중도 높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기업이나 사회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 남자의 종말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일하는 여성이 바꾸는 서울, 여성들의 지속가능한 좋은 일자리로 피어나는 서울, 그런 모습, 저만 원하는 건 아니죠?  

 

세상은 여성이 강력한 힘을 갖출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은 마지못해 의식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전환점에 서 있다. 시겔의 분석에 따르면, 여성 임원을 채용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들은 결실을 누린다. 시겔은 기업이 여성 관리자들을 늘리면 시간이 흐르면서 수익성이 개선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p.332)

 

Posted by 스윙보이

카메라를 들고 혁명을 갈구하다, 티나 모도티(Tina Modotti)
(1896.8.16~1942.1.5)


본질보다 그것을 압도하는 어떤 이미지에 의해 평가나 주목을 받는 경우가 있죠? 그건 안타까우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해요.
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기도 하겠는데요.

이 사람, 티나 모도티(Tina Modotti)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그의 본질을 말하자면, 사진작가입니다. 그리고 체제 전복을 꿈꾸던 혁명가이기도 한.

하지만,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보다 다른 작가가 찍은 누드사진 모델로 더 알려졌고,
사진대가인 에드워드 웨스턴의 연인이나 조수로 기억되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뭐랄까요. 로댕에 가려졌던 까미유 끌로델을 연상시킨 달까요.

티나는 또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했는데요. 사진작가보다는 매력적인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강할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죠.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그에게서 사진작가보다는 배우로서 각인하게 됐죠.
그의 사진활동이 미국이나 유럽 아닌 멕시코에서 주로 이뤄졌다는 점도 한 몫할 겁니다.

그래도 티나의 진가가 아예 가려지는 것은 아니죠.
지난 1991년 소더비 경매에서였어요.
그의 대표작 '장미' 원판이 16만5000달러에 팔렸습니다. 서프라이즈~
그의 사진에 대한 상업적 가치가 우선 주목 받기 시작했고,
그의 예술과 생애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20세기가 평가절하한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무엇보다 그는 혁명과 예술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티나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가난에 시달리다가,
16살에 미국 서부로 건너갔습니다.
재봉일부터 시작했지만, 화려하고 이지적인 미모는 주변의 관심을 끌었죠.
예술가와 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화적 소양을 쌓던 그는,
시인이자 화가인 로보와 결혼한 뒤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배우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하나의 계기가 찾아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을 만나게 된 거죠.
그때가 1919년.
티나는 사진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됩니다.
웨스턴의 모델이자 뮤즈로 사진을 만났지만,
그는 사진에 푹 빠져들었고,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당시 유부남이었던 웨스턴과도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결혼합니다. 

사진은 또한 티나를 혁명의 길로 인도한 매개체가 됐어요.
웨스턴과 함께 1922년 멕시코로 건너가, 사진관을 운영합니다.
그러면서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화가 부부, 다비이 에이 시케이와 만나게 됩니다.
그들과 예술과 혁명을 논하면서, 멕시코 르네상스를 주도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카메라 뷰파인더를 멕시코의 변혁 과정에 갖다 댔습니다.

혁명은 중요한 오브제로 티나의 예술세계를 장식했어요.
예술과 혁명의 결합이랄까요. 그의 사진은 사회주의의 이상을 내용으로 당시 사진의 흐름이었던 형식주의를 간결하고 아름답게 보여줬어요.

티나의 작품들은,
멕시코에 거주한 시기인 1923~30년까지 찍은 250여컷에 잘 형상화됐습니다.
멕시코 사회의 변화와 예술이 한데 어우러진 시기, 그런 시대적 영감을 온몸으로 흡수한 덕에 그는 열정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어요.
당시 멕시코에는 망명 온 외국인이 많았고,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그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접한 공산주의와 자신의 정치사회적 이상을 사진을 통해 표현하게 된 거죠.

티나의 사진은 노동자, 인물, 정물, 민속예술, 거리풍경, 건축들, 꽃․식물 등 다양한 소재를 취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 놓았죠.
그의 첫 개인전은 1929년 12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렸는데,
노동자들을 위한 관람시간을 특별 배려했고, 전시 마지막에는 '멕시코 최초의 혁명적 사진전'이라는 제목의 연설이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언론들은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다뤘고,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도 했어요.

그런 와중이었던 1928년,
새로운 사랑인 쿠바출신의 혁명가 안토니오 멜라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멜라는 암살당하고,
티나도 대통령암살기도 사건에 연루돼 멕시코서 추방당합니다.
혁명적 이상을 품고 독일을 거쳐 모스크바로 건너간 그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로버트 카파, 헤밍웨이 등과 예술적 교류를 나누는 한편,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비토리오 비달의 부인이자 혁명동지로 활동했고, 러시아의 콜론타이,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등과 정치적 혁명 동지애를 나눴습니다.

스탈린 비밀경찰로도 활동한 그였지만,
모스크바도 그의 이상향은 아니었어요.
권력투쟁과 스탈린의 편집증에 질린 그는 소련을 떠나 스페인 내전 지원을 나섰다가,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조용히 숨 죽이며 번역과 공산주의자 활동에 전념하던 티나는,
1942년 사진작가 활동을 준비하던 중 택시 안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습니다.

재단사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사진작가의 모델로, 모델에서 사진가로, 사진으로 혁명을 담는 투사로, 공산주의 혁명을 전파하는 혁명가로 끊임없이 변신하며 세상을 누비던 티나.
여전히 카메라에 담고 싶은 이상과 열망이 있었고,
혁명가로서의 활동도 좀더 왕성하게 하고 싶었겠지만, 결국 그는 시대의 정신을 독특한 형식으로 담은 사진들만 남긴 채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마흔 다섯. 이른 죽음이었습니다. 


※참고자료 : 『티나 모도티』(마거릿 훅스 지음/윤길순 옮김/해냄 펴냄), 월간 한국사진,  위키백과, 한겨레, 티나 모도티 팬사이트(http://cinemarx.cafe24.com/tina)

[위민넷 기고-연재 끝]

Posted by 스윙보이

타인의 고통에 삼투압한 세계의 지성, 수잔 손택(Susan Sontag)
(1933.1.16~2004.12.28)

미국 최고의 지성 중 한명인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미국이 나락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힘을 과시하고자 했던 미국의 패권욕에 제동을 걸고, 세계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고자 현실 참여와 감수성의 자극에 힘을 쏟았습니다.

2003년 10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독일출판협회는 수잔에게 "거짓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찬사를 하면서 '평화상'을 수여했습니다.

하나의 상징적인 일례입니다만,

수잔은 문학가이면서 현실에 끊임없이 삼투압한 운동가였습니다.
하긴, 문학이라는 것이 현실과 유리된 채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니,
문학과 운동이 분리될 수만은 없겠네요.
무릇 작가란 그렇잖아요.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기득권의 지배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마음의 목록을 지닌 사람'.

그래서 수잔은 에세이 작가이자 뛰어난 소설가이며 예술평론가였습니다.
느닷없이 혜성같이 등장한 그였습니다. 시기는 1966년. 서른 세 살의 알려지지 않은 평론가가 내놓은 문화평론모음집, 『해석에 반대한다』.

서구 문화평론계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이 신참내기의 책은, 서구 미학의 전통을 이루던 내용과 형식의 구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을 재기발랄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지요.

이런 내공은 수잔의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은 결과물이었습니다.
미국 뉴욕의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폐결핵으로 여의고 어머니와 계부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빠져 지냈고, 영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열다섯 살에 대학에 들어갔고, 열일곱 살 때에는 젊은 사회학도 필립 리프와 결혼했으며, 열아홉에는 아들을 낳을 만큼 빠른 생의 궤적을 그렸습니다.

이 와중에도 수잔은 자신을 향한 사포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버드대학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옥스퍼드와 소르본대학 등에서 수학하기도 했지요. 그는 철두철미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어요.
알코올 중독자였던 어머니를 닮지 않기 위해 평생 4시간의 수면을 삶의 규칙으로 삼고, 스물다섯에 이혼하면서 그는 남편이 준다는 양육비를 거절하고 강의와 기고로 고집스럽게 자신과 아들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1963년에는 첫 번째 소설 『은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수잔은 위기의 순간에도 쉽게 자신을 놓거나 굽히지 않았습니다.
40세 무렵 유방암에 걸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을 받았지만, 그는 2년 이상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은유로서의 질병』을 발표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질병은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임에도 불구, 학자나 작가들이 만들어낸 병에 대한 은유적 이미지가 환자들의 질병에 대한 투쟁을 방해하고 있다."

수잔은 고난을 질료로 삼아 앞으로 정진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진지하자, 열정적이자, 깨어 있자!'라던 그의 삶의 좌표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1만5000권의 장서를 보유할 정도로 독서광이었고,
글을 통해 벤야민, 아르토, 바르트 등의 유럽의 지성들과 대화했습니다.
생에 대한 성실하고 치열한 자세와 사회현실에의 참여는, 그가 뛰어난 외모, 화려한 학벌을 무기로 명성을 유지한 마스코트가 아님을 입증합니다.

수잔은 한마디로 문화적 아이콘이자 시대의 지성이었습니다.
작가, 문화비평가,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예술가, 사회운동가 등으로 끊임없이 변신하면서, 시대와 세계에 문화적 스타일과 감수성의 자극을 준 사람입니다.
길게 내려뜨린 머리카락과 뒤로 빗겨 넘은 일부 하얀 머리카락, 또렷한 눈빛 등은 그의 카리스마를 상징하기도 했죠.

예술적인 심미안을 갖춘 사회적 행동가로서, 그는 어쩌면 이성과 감성이 균질하게 배분된 행복한 경우입니다.
물론 그것을 위한 엄청난 노력과 실천이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요.
그의 저서로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비평 부문 수상작 『사진에 관하여』(1977), '전미도서상' 소설부문 수상작 『미국에서』(1999)를 비롯해 4권의 평론 모음집, 6권의 소설, 4권의 에세이, 4편의 영화 시나리오, 몇 편의 희곡 등이 있습니다.

수잔은 미국 펜클럽 회장(1987~1989)을 맡고 있는 동안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어요. 한국 정부에 김남주 시인 등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서였죠.

또 1993년에는 사라예보 내전에 대한 전 세계인의 관심을 촉구하고자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수잔은 9․11에 대처하는 미국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해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사회에 불어 닥친 반이성적 태도를 비판하며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고 언급하기도 했죠.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도 "사이비 전쟁을 위한 사이비 전전 포고를 그만두라"고 부시행정부를 공격하는 등,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수잔에게 붙은 이 타이틀,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 허투루 붙은 것이 아님은 대충 아시겠죠?
세 차례에 걸쳐 암과 싸워야했던 그도 결국은 힘을 잃고 마는 때가 오긴 옵니다.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수잔은 그렇게 갔지만, 만약 지금 살았다면,
『타인의 고통』에 적은 이 글을 다시 읊조렸을 겁니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맞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수잔이 떠났던 무렵도 이맘 때였죠. 연말을 앞둔 지금 이 시점.
경제위기니 불황이니, 마음을 오그라들게 하는 파도가 덮쳤지만,
튜브를 던져줄 수 있는 마음만은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세상엔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지요.
나와는 전혀 상관없고, 내 책임도 아닐 법한.
그럼에도 우리는 이에 무관심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선 안 될겁니다.
그들이라고 악의를 갖거나 큰 죄가 있어 그런 고통을 받는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 기억해야겠지요.
나 역시 아무런 악의 없는 누군가나 시스템에 의해 상처 입게 될 수 있음을.
내가 외면하면 언젠가 혹은 곧 나도 외면 받게 될 거라는 사실.
수잔 손택이 우리에게 알려준 '불편하지만, 잊어선 안 될 진실'입니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자신을 수련하고 닦으면,
저런 멋진 아우라가 나올 수 있는 걸까요. 정말 놀라워요.

※참고자료 : 『타인의 고통』(수전 손택 지음/이재원 옮김/이후 펴냄), 수전손택 공식 홈페이지(www.susansontag.com

), 여성신문

[위민넷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뭉뚱그려 싸잡아서 매도할 생각은 없지만, (분명 그렇지 않은 소수도 있으므로!)
지금-여기의 많은 언론은 그들 스스로가 자처하듯,
‘사회의 목탁’이나 사회적 ‘공기(公器)’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그건,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박제된 역사에 지나지 않을런지도 모르겠다.

뭐 혹자는,
"기업의 ‘기획의도’대로 기사를 작성해주는 홍보 대행업체에 가깝다"고 혹평을 하는데,
이건 거의 진실에 근접한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계에 종사하는 내 어떤 동료들은 가끔 자조하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자 아닌 타이피스트일 뿐이고~"

전직 언론계 종사자로서,
능력도 하잘 것 없었지만,
그 같은 수렁에서 더 깊게 발을 빠트리지 않으려고 빠져나온 나로서는,
여전히 언론계에 대한 어떤 애정을 품고 있음에도,
지금의 언론계는 '절망'의 다른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다. 위험 수위 만땅.

믿고 존경할만한 언론(인)은커녕,
자본의 도구로서, 때론 권력과 결탁한 메신저로서,
악행의 자서전을 서슴 없이 집필하고 있는 저들은,
어쩌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 신세.

다른 무엇보다, 언론은, '철저히' 사회의 것이어야 함에도,
지금 내가 만나는 많은 언론들은 사주 혹은 자본가의 도구다.
 
또한 우리 사회는, 어인 일인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많은 언론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묻는데 인색하다.  

나는 언론이야말로 공공성을 담보한 '사회적 기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비현실적인 현실이 판을 치는 곳에서, 그런 생각은 비현실적인 상상에 가깝다.

소설가 김연수는 오늘 이외수의 《들개》를 문장배달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었다.
이 말은 요즘 찌라시를 접하는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 옮겨본다.

"요즘 저도 어쩐지 패북감을 느끼게 되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사람들과는 같은 언어를 쓴다는 자체가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게 아름다운 언어일수록 부끄러움은 더욱 커집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리나라, 정의, 법, 질서 같은 단어들을 들을 때 저는 차라리 영어나 불어, 하다못해 외계어라도 쓰고 싶어집니다. 말을 더럽혀 더 이상 그 말들이 아름답게 들리지 않을 때, 그 말들이 지칭하는 세계는 우리에게서 영영 사라지게 될 거예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말이 안 통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그 사실 때문이죠."


정말 나는, 직업생활 동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있는데.  
나는 내가 거친 언론(미디어)사 대표들 가운데, 진짜 언론인이라고 존경한 사람이 없다.  
이른바 '진보'가치를 품고 장사치에 가까운 인간(Oh!)도 봤으니, 신물이 날 만도 하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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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보니, 나는 <굿 나잇 앤 굿 럭>과 같은 영화에 열광했고,
곧 개봉할, 닉슨의 불법을 실토하게 만든 프로스트의 인터뷰를 다룬 <프로스트 vs 닉슨>과 같은 영화로 아쉬움을 대신하곤 한다. 이땅에 없는 현실을 스크린을 통해 상상하기.
 
그리고, 이런 사람을 가진 미국의 언론인에 대한 부러움도.
위민넷에 기고했던, 워싱턴 포스트지의 '캐서린 그레이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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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용기 있는 언론인,
캐서린 그레이엄(Catharine Graham)
(1917.6.16~2001.7.17)


주로 남성들이 주름 잡던 언론계에 우뚝 섰던 여성이 있습니다.
특히나 권력의 압력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불의로부터 자신의 신문사를 지켜냈던 언론인입니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의 멘토이기도 했다죠.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의 명예회장이었던 '캐서린 그레이엄(Catharine Graha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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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사랑의 마에스트로, 엠마 골드만(Emma Goldman)(1869.6.27~1940.5.14)

사랑과 혁명은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죠.
말하자면, 둘 다, 불온합니다.
혁명은 그렇다손, 사랑이 왜 그러냐고요?
하하, 사랑의 속성을 곰곰 생각해본다면 고개를 끄덕이실 거예요.
맞아요. 사랑은 모든 것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세계를, 우주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도 혹은,
달라지게 하는 것이 사랑이죠.

그것은 어쩌면 혁명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죠.
불온한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그 자체로 불온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혁명가의 사랑, 사랑의 혁명가는 온통 불온함으로 가득합니다.
기성세대와 지배세력이 해석할 수 없어 막연하게 공포를 가지는 그 무엇, 불온.
그것은 때론 세상을 바꾸고 뒤흔드는 힘을 발휘하기도 하죠.

여기 불온함으로 점철된 생을 꾸려간 사람,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이 있습니다.
혁명과 사랑을 생의 중심에 놓고 앞으로 앞으로 길을 거닐었던 사람.

먼저, 엠마를 지칭하는 타이틀 혹은 직업군을 한번 볼까요?
혁명가, 사회운동가, 노동운동가, 아나키스트,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편집자, 언론자유의 주창자.

휴우, 이거 열거하기도 힘드네요.
타이틀만 놓고 보자면 무겁고 진중한 짐만 짊어진 사람 같지만, No!
그는 즐겁게 혁명을, 사랑을, 불온함을 만끽하고픈 자유연애주의자이기도 했지요.

여러 차례 연설에서 언급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도 한 번 볼까요?
(글로 남아있질 않아 몇 가지 버전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만.)

"If I can't dance, it's not my revolution!
(만일 내가 춤 출 수 없다면, 그건 내 혁명이 아니다!)",
"If I can't dance, I don't want your revolution!
(만일 내가 춤 출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If I can't dance, I don't want to be part of your revolution.
(만일 내가 춤 출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다!)" 등.

어느 것이 정확한 말이었든,
그는 혁명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듯 보입니다.

엠마는 1869년 제정 러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러시아 혁명 전의 나라, 왠지 그와 어울리는 듯도 합니다만,
혁명가로서의 기질과 자유분방함은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DNA에 박혔습니다.
8살에 가족을 떠난 그는,
할머니와 고모가 있는 쾨니히스베르, 상페테르스부르그에서 생활했는데,
청소년 시절부터 그곳 대학의 급진주의자들과 사귀면서 사상을 확립해 나갔죠.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배다른 자매 헬렌 조도코프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로체스터의 방직공장에서 일하게 된 그는 노동운동과 여권에 대해서도 차츰 눈을 떴습니다.

1886년 5월 엠마의 사상과 평생을 좌우할 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어요.
메이데이(노동절)의 계기가 된 시카고의 '헤이마켓' 사건.
그해 5월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미국 노동자들의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고, 
아나키스트들 주동으로 경찰관의 노동자 살해 항의집회가 헤이마켓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 폭탄이 터지며 난투가 벌어졌고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경찰관 살해를 교사했다는 혐의로 무정부주의자 8명이 재판에 회부됐던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아나키스트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엠마는 급진주의자들과 어울리며 아나키즘의 실천과 전파에도 나섭니다.
알렌산더 버크만과 함께 1906년 아나키즘 기관지 <어머니의 대지(Mother Earth)>를 만들고, 이듬해에는 암스테르담의 무정부주의자대회에 참석합니다.
그는 죽어서도 시카고 헤이마켓 아니키스트 묘지에 무덤을 둘만큼,
뼈 속 깊이 아나키스트였습니다.
그는 아나키즘을 이렇게 정의했죠. "인간이 만든 법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자유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출하려는 철학이다. 아나키스트들이 거부하는 것은 '인간 마음의 지배자인 종교, 인간의 욕망을 지배하는 소유욕,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정부'다."

그래서 단순하게 무정부주의로 아나키즘을 일컫는 것은 오류가 있는 것이죠.
엠마는 무엇보다 뛰어난 연설가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뛰어난 선동가였다는 말과도 통하죠.
인권, 특히 여권과 급진적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던 그는,
수시로 기득권과 지배세력을 뒤집어 놓는 과격한(!) 연설과 주장을 했습니다.
실업자가 정부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음식도 제공받지 못한다면,
식료품을 훔쳐서라도 배를 채우라고 말하던 것이 그였습니다.
지금-여기의 강력한 법치주의(?) 통치자가 들으면 까무러칠 일이죠.
그는 또 징병제도에 반대했고, 산아제한을 권장했으며, 언론의 자유를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어째 지금-여기의 이 땅 불합리한 현실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네요.

당연 윗분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죠. 엠마는, 명백한 사회 불순세력!
1916년 뉴욕 유니온 광장에서 가몬트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등,
산아제한운동을 펴다가 투옥되기도 했습니다(이 같은 운동 결과, 미국 아이오와에는 '엠마 골드만 클리닉'이라는 비영리 의료센터가 세워지기도 했죠).
이듬해에는 반전운동을 펼치다가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기도 했죠.
그 전에 말썽꾸러기로 그를 낙인찍은 미국 정부는 그의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했습니다. 찌질하기는. 그 정도도 감당도 못할 정부라니.
경찰과 언론은 그를 '미치광이' '빨갱이들의 여왕'이라며 혐오했고,
지지자들은 그를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 '반란 여성'으로 숭배했습니다.
그야말로 극과 극을 달린 인물이었던, 엠마!

이 무렵의 미국 정부도 참 쪼잔하죠?
당시 그런 분위기가 만연해 있을 때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뒤 보수화된 사회나 기득권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눈뜨고 못 보죠.
그들은 사회주의자나 급진주의자를 탄압하고 억누릅니다.
사회 안녕을 빌미로 자신의 입지와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인 거죠.
엠마는 그런 탄압을 피하고 혁명 기운이 충만한 그의 고향, 러시아로 떠납니다.
247명의 동지들과 함께. 때는, 1919년의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하진 않죠.
혁명의 기운이 넘실거렸던 러시아도 그의 이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고,
결국 러시아를 다시 떠나게 됩니다.
이 실망스런 경험을 담아 『러시아에 대한 나의 환멸(My Disillusionment in Russia)』(1923)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고요.
미국과 러시아를 떠난 그는 영국으로 넘어갑니다.
제임스 콜튼과 결혼해 영국 시민권을 획득한 그는,
유럽을 돌며 강연 등을 통해 아나키즘 바이러스를 뿌립니다.
또 1936년 에스파니아 내란이 일어나자 아나키스트를 도와 활약하기도 하죠.
그러다 1940년 캐나다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그의 생애는 막을 내립니다.

키가 작고 약간 뚱뚱한 모습에,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외모는 아녔지만,
엠마는 주변을, 청중을 격동시키고 매혹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끊임없이 인간을 탐구하고 공부하는 열정을 지녔던 그는,
허세 없이 편안하고 세련된 태도로 사람을 대하고,
개방적이면서도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대화를 할 때면 상대방에게 늘 즐거움을 선사하는 사람이었어요.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갖춘 덕에, 늘 서사가 끊이질 않았던 덕이었습니다.
3개국 이상 언어를 습득, 엄청난 다독가였으며,
기지와 해학을 갖춘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던 거죠.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혁명을 열망하는 자의 식견이 보인다'고.
각종 문학, 예술, 과학, 경제, 여행, 철학, 남성과 여성,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엠마의 뜨거움.
그는 어쩔 수 없는, 불온아였습니다.

참, 서두부터 사랑, 사랑하더니, 그 얘긴 어디 있냐고요.
운동에 가려 쉬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엠마에게도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호보 킹(뜨내기일꾼들의 아버지)'이라 불린 저명한 사회운동가이자 의사였던 벤 리트먼과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결혼제도에 반대하고 자유연애를 신봉한 자유연애주의자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람둥이'로 알려진 벤과 연애하면서 안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편지엔 이런 고민도 있었다죠.
"네. 나는 여자예요. 틀림없는 여자이지요. 그것이 내 비극입니다. 여성인 나와 결연한 혁명가인 나 사이에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서 나는 그리 행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그는 사랑의 열망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는 역량을 보여줬습니다.
자신의 정치활동에 감정을 불어넣으며 그는 진짜 공부하는 사랑, '호모 에로스'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혁명운동만큼 사랑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진정한 불온아.
"성적인 억압이 가해지던 시기에 엠마는 용감히도 남녀관계를 정치적 맥락에서 이야기하고, 황홀한 연애경험을 일상생활의 극치라고 이야기했다."(캔데이스 포크)

지금-여기의 하수상한 시절, 우리에게도 엠마 골드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만큼의 농담이지만,
엠마 골드만이 아니라면 목표물에 제대로 꽂힐 수 있는,
신발(?!)이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자료 : 『엠마 골드만(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캔데이스 포크 지음/이혜선 옮김/한얼미디어 펴냄)

[위민넷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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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만든 사람, 타샤 튜더(Tasha Tudor)
(1915.8.28~2008.6.18)


"나는 직업을 묻는 질문을 받으면 늘 가정주부라고 적는다. 찬탄할 만한 직업인데 왜들 유감으로 여기는지 모르겠다. 가정주부라서 무식한 게 아닌데. 잼을 저으면서도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을."

여기, '가정주부'라는 호칭 혹은 직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타샤 튜더(Tasha Tudor)'.
잘 가꿔진 정원과 자연 친화적인 삶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졌던 사람입니다.
TV나 책 등을 통해 그의 이름과 정원 혹은 철학을 접하신 분들, 많을 거예요.
사실 그는 100권이 넘는 책에 그림을 그렸으며 미국에서 매년 최고의 그림책에 주는 '칼데콧상'을 받은 저명한 그림작가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난 상업적인 화가고, 쭉 책 작업을 한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 였다. 내 집에 늑대가 얼씬대지 못하게 하고, 구근도 넉넉히 사기 위해서."
그는 굳이 예술가연 하지도 않았고, 그림을 통해 특별한 예술적 메시지를 전파하지도 않았습니다.

타샤는 그저 '가정주부'이길 원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면서도 그의 작업이 '예술'이 아니고,
그의 삶 자체가 '예술'이 아니었던가 싶은 사람.

그는 맨발로 일상을 지냈습니다.
흙을 밟으며 사람과 땅 사이의 교감을 나눈 거죠.
식물을 가꾸고 동물을 키우며 자연과 벗했다죠.
해마다 1000개가 넘는 알뿌리를 심고,
염소젖을 짜 치즈를 만들고,
자기가 좋아하는 코기종 개들과 앵무새를 키우고.

그러면서 인형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인형극을 보여주고,
동화를 짓고, 그림을 그린 삶.

늘 19세기 옷을 입고, 그릇도 가구도 19세기 것을 고집한 삶.

귀농이라고요? 천만에요.
타샤는 그저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알았을 뿐이에요.
자신만의 방식과 이유를 갖고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행운'과,
그것을 '실천'하면서 자칭타칭 '행복한 사람'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죠.
세간에선 동화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그건 타인의 눈에 비친 시선일 뿐,
그가 자신의 생을 위해 쏟은 노력은 평범 그 이상이었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인 버나드 쇼의 말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만, 나아가는 자는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간다."

타샤는,
미국 보스턴에서 화가였던 어머니, 조선 기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본가가 보스턴의 유명한 가문인 덕에,
당대의 지식인들과 집안이 교류를 나눴다죠.

마크 트웨인, 소로우, 에머슨, 올콧 일가 등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고,
타샤도 예술적인 기질과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로 자랐나 봅니다.
집안이 가난해지고 부모의 이혼으로 가족이 흩어져 살게 됐을 때도,
그는 아버지 친구의 집에서 활달하고 자유분방하게 커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스턴 뮤지엄 파인 아트 스쿨에서 공부했지만,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살기 시작했어요.

그림작가로서 타샤의 데뷔는 23세 때였습니다.
남편 조카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린 <호박 달빛>이 출판된 것이 시발이었죠.
그의 그림은 이후로도 한결 같았습니다.
식물과 동물이 어우러지고 아이들이 노닐거나 전원 풍경이 묘사된,
여성스럽고 로맨틱한 고전풍의 그림체가 그의 낙인이 됐습니다.
백악관의 크리스마스 카드와 엽서에 삽입될 정도로,
그의 그림은 인상적이었고, 평화로움 그 자체였지요.

그림에 나왔듯, 타샤는 전원생활을 계속 꿈꿔왔습니다.
30세가 되자 뉴햄프셔에 있는 낡은 17세기 농가를 구입,
삶의 또 다른 전기를 마련했지요.

전기도 수도도 없는 그곳에서,
그는 최대한 자연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자 했어요.

네 아이를 키우면서 그림 작업도 하고, 채소밭과 꽃밭을 가꿨습니다.
소젖을 짜고 닭, 오리, 양, 돼지 등도 쳤고,
하루하루가 축제이자 방학인 듯 지냈습니다.

그러나 지향점이 맞지 않던 남편과는 결국 헤어졌습니다.
그림을 팔아 생활을 꾸려나가던 타샤는,
마침내 56세에 염원하던 버몬트 주의 버려진 감자농장터 부지를 구입해
이사를 했습니다.

이곳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타샤의 정원'입니다.
그의 생활은 여전했습니다.
오두막집을 짓고 화덕에 장작을 지피는 오래된 방식으로 음식을 만들고,
베틀로 천을 짜 옷을 짓고 기르던 염소 젖으로 짠 요구르트와 치즈를 먹었으며,
그림 작업을 계속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당연히 정원에는 꽃과 나무, 초지에는 야생화 씨앗을 심고, 과수원에는 돌능금나무와 배나무를 키우는 등 정원을 풍성하게 만드는 작업도 놓치 않았죠.
척박한 땅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 쉽지 않았지만,
그는 지난한 세월동안 꾸준히 가꾸고 닦았습니다.
돈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성.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타샤의 정원을 만든 결정적 마법이었습니다.

타샤는 그렇게 자연과 함께 90세가 넘도록 공존했습니다.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과 달리 자신이 만든 소우주 속에서 행복을 찾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인지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세간에 보여줬습니다.

누구나 타샤의 삶을 따라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그것이 행복의 완벽한 모델이랄 수도 더더욱 없지만,
행복과 잘 사는 것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 것만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그도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선을 긋습니다.
"인생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에게 특별히 해줄 이야기는 없다."
참,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타샤 할머니가 건넨 이 한마디도 도움이 되겠네요.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는 것이다."
 
※참고자료 : 타샤 튜더 공식 웹사이트(www.tashatudorandfamily.com), 블로그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http://blog.naver.com/tashaworld), 한겨레, 중앙일보

[위민넷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전쟁으로 피폐한 사람들의 마음에 힘을 불어넣은 디바,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 (1924.8.29~1963.12.14)


세상엔, 훌륭한 재즈 디바들이 많죠.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니나 시몬(Nina Simone),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

그 가운데, '블루스의 여왕(Queen of the Blues)'이라 불린 디나 워싱턴은,
가스펠풍의 독특한 창법으로 재즈를 소화한 최고의 디바 중 한명이었습니다.


디나의 본명은 '루스 리 존스(Ruth Lee Jones)였어요. 고향은 앨라배마주 터스컬루사지만 어릴 적 가족이 이사하면서 시카고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성가대에서 가스펠을 노래하고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등,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다고 전해집니다.

15세 때 리갈 극장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우승했고,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연주했어요.
샐리 마틴의 가스펠 그룹과 순회 연주를 다녀오는 등 운신의 폭도 넓혔죠.

그런 디나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음악관계자 조 글래저에게 발탁됐습니다.
1942년 디너 워싱턴이라는 예명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라이오넬 햄프턴 밴드에 들어가 1946년까지 활동하면서, 음악성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이윽고 때가 왔습니다.
1946년에는 솔로로 데뷔한 그는,
블루스, 재즈, 팝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부르는 한편 열정적인 스타일로 인기를 끌었죠.
《베이비 겟 로스트(Baby Get Lost)》(1949), 《트러블 인 마인드(Trouble in Mind)》(1952), 《디스 비터 어스(This Bitter Earth)》(1960) 등이 대표곡입니다. 특히 1949~55년 그의 음반은 R&B순위에서 연속적으로 10위권 안에 드는 등,
그에겐 '할렘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사라 본, 카멘 맥레이와 함께,
40~50년대 모던 재즈시대를 대표한 보컬리스트였어요.

무엇보다 디나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의 혼란스럽던 시절,
피폐하고 신산한 사람들의 마음에 힘을 불어넣어줬습니다. 
라이벌이었던 사라 본이 부드러운 선율로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섰다면,
디나는 강렬하고 박력 있는 고음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휘어잡았습니다.
가사 하나 하나에 힘을 줘 또박또박 발음하는 그의 노래는,
앙칼지면서도 전율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물론 디나가 재즈에만 매달린 건 아니었어요.
재즈의 인기가 퇴조하면서 1950년대 말엽부터 R&B스타일에 좀더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켜준 'What a difference a day makes'는 1959년 팝차트의 톱10 히트를 기록했고, 이후로도 많은 골드 레코드를 내놓으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영예와 인기가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1963년 서른아홉이라는 나이로 그는 사망하고 말았어요.
강렬하고 다이내믹한 목소리로 세상을 휘어잡고, 
아홉 명의 남편을 맞이할 정도로 정력적이었던 그의 삶도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후에 추모 앨범 <The Dinah Washington Story>가 팬들의 가슴을 적셔줬고,
1993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로큰롤에 영향을 미친 자' 부문으로 그의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참고자료 : 『Queen: The Life and Music of Dinah Washington』(Cohodas, Nadine, Pantheon Books), 두산백과사전

[위민넷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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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질병, 정치적 박해 속에서도 빛난 카를 마르크스의 절반,
예니 마르크스(Jenny Marx)
(1814.2.12 ~ 1881.12.2)

마르크스를 만든 결정적인 동반자


"카를 마르크스의 절반이 여기 잠들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경제학자이고 혁명가로서 『자본론』의 저자인 카를 마르크스의 부인이자 혁명동지인 '예니 마르크스'의 묘비명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절반. 카를의 명성과 업적에는 예니의 몫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표현이죠.
혹자는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평생을 추방과 가난에 시달린 마르크스에게 힘의 원천은 예니 마르크스였다."

과연 예니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독일의 트리어의 명문귀족가에서 태어난 그는 진보의 기운을 받고 자랐습니다.
트리어는 당시 독일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곳이었으며,
한때 프랑스 혁명군이 점령해 진보적인 이념을 퍼뜨려 놓은 곳이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사람이었죠. 예니가 지적이고 개방적인데다 낭만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 덕분이었습니다.
카를과도 아버지 간의 친분 덕으로 어릴 적부터 소꼽친구로 자랐죠.
카를이 4살 어렸지만.

예니는 실로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빛나는 여성이었습니다.
'트리어 제일의 미인' '무도회의 여왕' 등이 그에게 붙은 별명이었다죠.
그를 묘사한 이런 문구도 있어요.
"녹색 눈빛, 갈색 머리, 달걀형 얼굴, 하얀 피부를 가진데다가 유머와 재치가 넘치고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그녀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선녀나 다름없었다."
시인 하이네도 이렇게 감탄했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마력적이다."

예니 마르크스와 남편 카를 마르크스


그랬던 예니가,
돈 없고 당시 시시한 문필가에 불과했던 카를과 결혼을 결심합니다.
집안끼리 친분이 있었다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카를의 재능을 높이 사긴 했어도,
좀더 나은 상대를 바랐던 그의 집안에서는 '이 결혼, 반댈세'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을 꺾을 순 없었고,
비밀 약혼에 이어 1843년 두 사람은 결혼을 '감행'했습니다.
행복했겠죠? 그런 고난을 겪고 이룬 사랑이다 보니.
파리로 간 그들, 행복했나 봅니다. 첫 딸 예니도 낳았고.

그러나 그 행복한 시간도 잠시, 그들은 줄곧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카를은 '경제학'에는 능통했어도, '돈벌이'에는 무능했습니다.
예니는 남편이 건사할 수 없었던 집안을 대신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상적인 남편은 아녔지만,
예니는 남편의 일을 인정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한 것 같습니다.
그는 남편 곁에서 집필을 돕고, 용기를 북돋워 줬으며,
남편이 정립하는 혁명사상에 적극 동참하고 이해하는 동지로 자리했습니다.
두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된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이상을 놓치진 않았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덕목을 묻는 딸의 질문에 '소박'이라고 답할 정도로.

예니는 무엇보다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가 없었다면,
카를의 이론은 대중과 만나지 못한 채 사장됐을 거라고 여겨질 정도죠.
그의 지혜와 문학성이 악필이자 거친 카를의 원고를 대중이 알아보기 쉽게 바꾸고, 설명까지 곁들인 덕에 카를의 사상이 전파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카를 자신도, "예니의 의견이나 비판을 받지 않고는 어떤 원고도 인쇄에 돌리지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였죠.

하지만 불운이 예니 곁을 쉬이 떠나진 않았죠.
대부분은 정치적 박해를 받은 남편 때문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파리로, 파리에서 다시 브뤼셀과 런던 등지로 옮겨 다녀야 했고,
어떨 때는 기본적 생필품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가난, 혹독했습니다. 셋째 딸 프란치스카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죽었는데,
관을 마련해 줄 돈조차 없었답니다.

일곱 자녀 중 네 명을 굶주림과 질병으로 잃은 예니였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먼저 보내야했던 어머니 예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빚쟁이들에게도 시달리는 등 참혹하고도 잔인한 생의 현장에서,
그는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물론 그도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졸도, 발작, 질병, 도피 등에 대한 기록도 있다고 알려졌으니까요.
무엇보다 카를이 가정부 헬레네와 외도를 해서 아이까지 뒀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힘들게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위기 앞에서 예니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다고 하네요.

인류에는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가정적으로는 지은 죄가 많은 카를은,
예니에게 이런 절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도 써서 보냈지요. 

"…세상에는 정말 많은
여성이 있습니다. 또한 그중 정말 아름다운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얼굴 하나하나의 곡선이, 심지어는 주름 하나하나까지 제 생명 중의 가장 강렬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디서 당신과 같은 사람을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안녕, 내 달콤한 사랑.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당신과 아이들에게 키스를 보내며." (카를이 예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귀족가문의 영애였던 예니도 결국 끊임없이 닥치는 고난이 힘겨웠던지,
간암에 걸렸습니다.
카를은 그를 어린애처럼 돌보면서 쾌유를 기원했지만,
"카를, 나는 더 이상 기운이 없어요"라고 속삭이고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카를과 예니의 혁명동지 엥겔스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이제 마르크스의 삶도 끝났다!"
동지를 잃고 생을 지탱할 동력을 잃은 카를도 1년 3개월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만하면,
예니는 그렇게 세계를 뒤흔든 사상의 절반을 만든 여성이라는 사실, 아시겠죠?

(※참고자료 : 『예니 마르크스 또는 악마의 아내』(프랑스와즈 지루 지음/이정순 옮김/성현출판사 펴냄),『커플 : 클라시커 50』(바르바라 지히터만 지음/ 해냄 펴냄), 위키백과)

[위민넷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세상에 공명한 아프리카의 목소리, 미리엄 마케바(Miriam Makeba)
(1932.3.4~2008.11.9)

2008년 11월, 아프리카에서 별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마마 아프리카'로 불리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가수 미리엄 마케바.
향년 76세였습니다.
어떤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 부르다가 죽는 것이 가장 영광이라고 했다지만,
그는 정말 그런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에서 열린 한 자선공연.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열창한 마지막 순서를 마친 직후 쓰러졌어요.
앵콜을 외치는 함성이 거듭 울려 퍼졌지만,
갑작스런 심장마비로부터 그를 구해낼 순 없었습니다. 

이 공연은 저서 『고모라(Gomorra)』 때문에 마피아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고 있는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의 신변 보호 촉구를 위해 열린 것이었어요.
그는 끝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해 노래 부르다가 세상을 떴습니다.

자, 그렇다면 마케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의 인생 역정은 한편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픈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백인 가정의 하녀 등으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1954년이 돼서야 본격적인 음악인생의 막을 열었습니다.
남아공의 인기밴드인 '맨해튼 브러더스(Manhattan Brothers)'의 여성보컬이 됐습니다. 발군의 가창력 덕분에 아프리카와 미국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1959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 축하파티에 초대돼 공연을 했고,
전미 투어 공연을 하면서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디바로 등극했습니다.

무엇보다 마케바의 명성을 끌어올린 것은,
같은 해 아파르트헤이트(흑백인종분리)철폐 다큐멘터리영화 <컴백 아프리카(Come Back, Africa)>에 출연하면부터였어요.
영화 <킹콩>의 뮤지컬 버전 출연으로 남아공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립했지만,
그에게 더 절실한 것은 어이없는 차별정책에 대한 분노였나 봅니다.
남아공 정부는 이듬해 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여권을 말소한 것은 물론,
63년에는 그가 유엔에서 아파르트헤이트 관련 증언을 하자 그의 국적을 없애고 음악 유통도 금지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결국 떠돌이 신세가 됐습니다.
자신이 진행하던 남아공의 음악 프로그램에 나가지 못한 것은 약과였지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가도 못했고, 이후 30년 이상을 미국, 프랑스, 벨기에, 기니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마케바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출신으로 칼립소의 전파자이자 서구 대중음악계에서 주목받은 뮤지션, 해리 벨라폰테와 함께 작업한 앨범으로 1965년 그래미상을 수상했습니다.
1967년에는 '파타 파타(Pata Pata)'가 큰 히트를 기록하는 등 망명 중에도 그의 음악은 계속 나왔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그의 목소리도 계속 됐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옥중에서 反아파르트헤이드 투쟁을 벌였다면, 마케바는 음악을 통해 아파르트헤이드 반대를 호소했던 인물이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명 중에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불운도 함께 했습니다.
총 5번에 걸쳐 결혼한 마케바는 1968년 미국에서 급진적인 공민권 활동을 펴던 블랙팬서(Black Panthers)의 지도자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와 3번째 결혼하면서 미국에서 큰 반발을 샀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 건의 콘서트가 취소되고 계약이 파기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또 망명 중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던 그는 하나뿐인 딸 '본디'가 1985년에 36살의 나이로 숨졌을 때, 관을 살 돈이 없어 홀로 장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자궁경부암을 앓기도 했고요.


마케바는 80년대 들어서는 조국의 문제에 좀더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1980년12월 남아공에 둘러싸인 독립국 레소토에서 콘서트를 개최했고,
80년대 말까지 조국의 실상을 알리면서 세계를 순회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대 초반, 만델라의 석방과 함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붕괴되면서 그의 망명도 끝났습니다.
만델라의 집권과 함께 자유를 되찾은 그는 귀국 인터뷰에서,
"나는 내 뿌리의 음악을 지켰다. 음악으로 나는 아프리카의 목소리가 되고 이미지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말마따나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아프리카를 대변하는 목소리였어요.
혹자는 "아프리카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청각적 기억"이라는 말로,
대신했을 정도였죠.

마케바는 음악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낸 사람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민속음악과 대중음악을 결합해 세계에 이를 알리는 한편,
참여적인 민중음악을 생산해 사회운동 차원으로 확대시킨 공로까지.
그런 그가 떠나자 이런 애도의 목소리들이 울렸습니다.

"사랑하는 미리엄의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의 음악은 우리 모두에게 강력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대통령)

"마케바는 즐거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로 억압받는 수백만 남아공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전해줬다."(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제이컵 주마 총재)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음악,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음악에 있어 그의 죽음은 크나큰 손실이다".(세네갈 출신의 가수 유쑨두)

(※참고자료 : AFP, 한겨레, 한국대중음악연구소)
 

[위민넷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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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풍미한 강렬한 목소리, 로테 레냐(Lotte Lenya) 
(1898.10.18~1981.11.27)

오스트리아의 가수이자 배우, 로테 레냐는 한 시대를 풍미한 목소리였습니다.
그 목소리는 그가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였어요.
남편이었던 쿠르트 바일의 음악과 상생하면서 유명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도,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뮤지컬 드라마를 빛낸 것도 그의 목소리였어요.
무엇보다 그의 목소리는 당차면서도 흡입력이 대단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딱딱 끊어지는 독일어로 한번 들으면 쉬이 잊히기 힘든 목소리일 정도로 강렬했고요.

가톨릭 신자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레냐는,
어릴 적부터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재원이었어요.
오스트리아에서 16세에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한 그는,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1920년까지 취리히 국립극장 단원으로 활약했습니다.
또 발레와 드라마를 익혀 1920년대에는 셰익스피어 작품에 출연하는 영광을 누렸죠.

레냐를 본격적인 출세의 길로 이끈 것은 바일이었습니다.
1922년 두 사람은 만나 뜨거운 사랑을 했고 1926년 결혼했습니다.
그는 이듬해 바덴바덴 음악제에서 브레히트와 바일이 합작한 〈마하고니〉에 출연했습니다. 때마침 이 작품이 논란이 되면서 레냐도 유명세를 탔고요.
이후 바일이 올린 극에는 레냐가 주연을 도맡다시피 했습니다.
중간에 두 사람은 헤어지기도 했으나 다시 재결합해서 살았고요, 두 사람의 사랑은 2007년 'Love Music'이라는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공연된 바도 있습니다.

레냐는 바일의 음악을 더욱 빛나게 하고 영감을 주는 뮤즈로, 바일은 레냐의 목소리와 연기에 자극을 주는 든든한 지원자로 서로 궁합이 잘 맞았습니다.

레냐는 1920년대 자의식 강한 신여성을 대변하는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강렬하고 짧고 흑색의 단발, 검정스웨터, 담배 등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각인됐고, 당당하고 자신의 길은 스스로 개척하는 예술가의 모습이었죠.
말하자면 '모던 걸'이었다고나 할까요.

레냐의 절정은 〈서푼짜리 오페라〉(1928)였습니다.
브레히트가 곡을 쓰고 바일이 작곡한 이 작품은, 5년간 공연되면서 19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기도 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이후 〈마하고니〉를 오페라로 바꾼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1930)를 비롯한 바일의 다른 작품에도 계속 출연하면서 독일에서 큰 명성을 떨칩니다.

한동안 독일에서 활동하던 그들은,
<서푼짜리 오페라>가 나치에 의해 퇴폐로 판정돼 공연이 금지되는 등 예술 활동이 제약을 받고, 그 혼돈된 상황을 견딜 수도 없어 파리로 활동근거지를 옮깁니다.

이곳에서 레냐는 역시 브레히트와 바일이 합작한 발레극 〈7가지의 죽을 죄〉 등의 활동을 펼치다가 미국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는 미국에서 연극 〈영원한 길〉(1937)로 본격적인 데뷔를 한 이후,
<바람 속의 촛불〉〈피렌체의 선동자〉 등에서 미국에서 계속 활동했어요.
몇 년 간 바일의 작곡을 돕기 위해 무대에서 물러나 있던 그는,
1950년 바일이 죽자 다시 무대로 돌아가는 한편,
바일 기념음악회와 재공연 작품에 계속 얼굴을 드러냅니다. 그중 〈서푼짜리 오페라〉는 오프브로드웨이 작품으로 오랫동안 관객들과 만나기도 했어요.

레냐는 1960년대에는 활동무대를 더욱 넓혀 영화로도 진출했습니다.
<스톤 여사의 로마에서의 봄>(1960) <러시아에서 사랑을>(1964) <약속>(1969) 등의 영화에도 출연한 그는, <스톤 여사의 로마에서의 봄>으로 1961년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81년 뉴욕에서 83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숨을 거둡니다.
시대를 풍미하던 목소리는 더 이상 울려퍼지지 않게 됐습니다.


(※참고자료 : 브리태니커 학습백과,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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