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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에 해당되는 글 180건

  1. 2010/03/08 우리, 아이 좀 낳게 해 주세요~ 네에~~
  2. 2010/01/20 용산참사 1년, 불길과 빗물
  3. 2010/01/18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스스로 묻는 소수와 함께
  4. 2010/01/09 명복을 빕니다...
  5. 2010/01/06 김광석 그리고 용산에 조금이라도 빚을 갚을 때,
  6. 2010/01/01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7. 2009/12/06 진중권이 건네는, ‘사라진 주체’에서 보는 푼크툼의 순간
  8. 2009/12/06 디지털 인문학, 영화와 세계를 사유하다
  9. 2009/11/28 혁명과 커피_ 커피를 통해 엿보는 세계
  10. 2009/11/24 세계관의 차이, 외로움의 깊이

그러니까, 내 경우.
왜 결혼을 않고 있냐고 혹은 못하고 있냐고 타박(?)을 듣곤 한다.
빈도가 몇 년 전보다 줄긴 했지만 아직도 자주. (주변에선 이젠 귀찮으니까!)
뭐 전혀 동의하진 않지만, '결혼적령기'를 넘은 싱글남이 받아야할 직구다.
포수 미트와 보호장구가 튼튼하다보니, 그 직구. 수월하게 받는다. 얼쑤~

그러면서 따라붙는 말, "애는 언제 어떻게 키우려고 그러냐."
친절하게 애가 초등학교 중학교 등등을 가면 내가 몇 살인지 깨우쳐주기까지.
쯧, 별 걱정 다한다.
있지도 않은, 태어나지도 않은 남의 애와 나의 미래까지 걱정해주는 저 오지랖. 

사실 오지라퍼들의 걱정(?)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물론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나,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당신, 언제부터 그렇게 인류와 사회를 걱정하면서 살았나. 조까라.

종족 번식을 위해, 결혼의 타당성(?)을 극렬옹호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뭐, 그러라지. 니 결혼의 목적까지 내가 관심 있는 건 아니니까, 뭐.
 
그러니까, 요지는 이거다.
나는 지지한다. 
'출산파업'!
대부분의 파업에 대해 지지하는 니 성향 때문 아니냐,
고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면, 조까라.
(물론, 지금 이 나라 이 정부의 정신줄 놓은 파업 혹은 태업에 대해선,
아니 '무'정부-기업화 상태에 대해선 지지할 턱이 엄꼬.)

아이 낳지 않을 권리.
물론, 지금 이 시대에선, 그것은 '비자발적'일 가능성이 훨씬 농후하다.
이 꽃 같은 세상, 애 제대로 키울 수나 있겠어. 
진짜 부모로서 자리매김할 수나 있겠어. 썅.
"'비자발적 출산파업' 부르는 국가, 손쉬운 해법 있다"
그러니까, 권리라기보다 '어쩔 수 없음'이 더 맞는 말이지.
비자발적 출산파업은, 사실 "아이 좀 낳게 해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

그리하여, 이런 말 나오는 것, 당연.

 

3월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들이 파업을 음모했습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할 때까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출산파업 선언자를 모았습니다. 그동안 ‘출산파업’이란 용어는 사회·경제적 이유로 아이 낳기를 꺼리는 세태를 일컫는 레토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집단행동에 나섰습니다. 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것일까요? <한겨레21> 801호는 출산파업 참가자 가운데 10명을 골라 이유를 물었습니다. ‘파업 해산’에 도움이 될 만한 스웨덴과 프랑스의 출산·육아 제도도 함께 소개합니다.


그리고, 부럽다. 프랑스. 
"왜 결혼 않고 출산? 파리엔 미혼모 없습니다"
썅, 대한민국아, 무조건 애 낳으라고, 출산하라고 말만 하면 다냐.
아무 맥락도 없이, 낙태금지법만 강화하면 다냐.  
니가 국가 맞냐, 혹시 순풍컴퍼니 아냐?
아~ 쉬파, 대한민국, 조까라 그래...

3월8일 102주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주의자도 페미니스트도 아닌, 평범한 수컷에게 든 단상.
언젠가, 여성의 날이 없어지는 그날을 기다리며.
아직 이땅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핍박과 억압에 대해,
가해자 수컷의 일원으로 진짜 미안해.

생명의 근원인 여성들에게서,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말이 자발적으로 나와야 하건만,
이넘의 천박한 천민자본세계는 냉장고 하나 가졌다고,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주술을 읊게끔 만든다. 미친 세상.

남보원? 에이,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공. 정신 건강 나파지니까.

2009/03/08 - [나는 당신을, 감탄한다...] - 남자는 맞아야 한다!
2008/03/08 - [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 '여성의 날'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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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20일.
불길이 치솟았고, 여섯 명이 죽었다.

딱 1년, 2010년 1월20일.
빗물이 내린다. 최근 가까스로 장례를 치른 다섯 명의 눈물일까.

꼭 의미를 부여할 것 없이도 내렸을 비다.
그럼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건, 오늘로 1년이 됐기 때문이다.

용산참사.

그냥 좀 마음이 그렇다.
지진으로 육신과 마음 모든 것이 파괴된 아이티의 참사.
1년이 됐고, 우리에게 마음의 빚을 남긴 용산 참사.
참사로 뒤범벅된 세계.
그럼에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우리들.
커피 한 잔에 담긴 내 마음은 그냥... 그렇다.

박래군.
이권과 권력의 횡포 앞에 인권과 사람을 위해 늘 투쟁했던 그 이름. 
"이행자 시인이 “박래군 같은 사람이 다섯 명만 있었다면 나라 꼴이 이 지경은 아닐 것!”이라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그는 ‘타고난 활동가’이자 ‘운동진영의 보배’로 손꼽혀왔다."
그저 활동가·투사인 줄로만 알았던 그는, 한때 문학소년이었다.
야만의 시대는 문학소년마저 투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 래군이 형 (한겨레, 김별아)

아울러, 김진숙.  ≪소금꽃나무≫. 달라진 것은 없다. 별일 없이도 산다.
그냥 이 비가, 마음을 건드릴 뿐이다.
☞ 용산 참사 1년, 김진숙을 읽고도 별일 없이 산다


[용산 부활도], 이윤엽


부디, 이 다섯 분이 웃음처럼 환하게 부활하시고,
국가에 의해 희생 당한 경찰 한 명도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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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
후배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신 홍세화 선생님을 봰 이후 한 8개월 만에 다시 뵀다.

물론 그땐 인사도 못 드렸으니,
앞에서 인사를 드린 건, 아마 3~4년 만?
홍 선생님께서 날 기억 못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야 홍 선생님을 그렇게 독대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

그러니까 이것은,
지난 연말경 홍 선생님을 뵌 기록.

가슴이 떨렸고, 나의 생은 위로를 받았다.
책을 통해서도,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지배세력이 주입하는 가치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길 바라는 내 마음 앞에,
선생님은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된다.
다행이다.

한때 나도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최선의 가치라고 사육당했고,
"부자 되세요"라는 개소리를 생각이나 비판도 없이 사용했었다.
야만과 천박함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던 시절에 빛을 준 한 분이 홍 선생님.

당시 계급적 성숙보다 의식의 반전에 의해 이뤄진 것이지만,
계급 혹은 존재에 대한 자각과 성찰을 통해 조금씩 그 부박함에서 벗어나고 있다. 

부디, 이 개새끼룰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이 부박한 야만의 세상에서,
괴물은 되지 않길. 되도록 진짜 '사람'을 만날 수 있길.

책과 선생님을 통해, 나는 이런 표어를 떠올렸다.

"사람을 찾습니다."

끝까지 찾으면서, 연대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선생님의 이 말씀.

“그래도 살아야 한다. 끝내 죽더라도 싸우다 지쳐 시어질 때까지는 살아내야 한다.”(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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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스스로 묻는 소수와 함께
[만나고 싶었어요] 『생각의 좌표』 저자 홍세화

이 글, 기축년의 마지막 공식적인 글쓰기이자, 경인년에 선보이는 공식적인 첫 글입니다. 그것을 홍세화 선생님(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한겨레 기획위원) 이야기로 하게 됐어요. 저로선 참 영광스럽고 기뻐요. 무엇보다 연말연시는, 성찰과 모색의 시간! 그런 의미에서 홍 선생님이 막 펴낸 『생각의 좌표』(홍세화 지음/한겨레출판 펴냄)는 딱이죠.

전 말이죠. 홍 선생님 같은 노장이 우리 사회에 계시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너, 나이가 몇이야?” “내가 누군 줄 알아”라며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은 ‘꼰대’들, 아주 몸서리 쳐지거든요. 홍 선생님의 존재감만으로도 뭔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 존경할 수 있는 노장이 있다는 사실에 불행하지 않습니다. 

시간 나면, 홍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 한 번 들어주세요. 이 야만의 시대, 인간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소수자인 홍 선생님 이야길 듣는 것, 감히 말하건대, 당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 모두. 지난해 12월23일 서울 효창공원 부근의 한 커피하우스에서 홍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홍 선생님을 뵙자니, 꼭 크리스마스를 앞둔 선물 같더군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홍 선생님의 말씀은 아마 새해를 맞아 뜻 깊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고요.

악의 평범성

본론에 앞서, 이 얘기로 시작해보죠. 트라우들 융에. 독일인입니다. 그녀는 한 통치자의 비서였습니다. 2002년 82세로 숨을 거뒀습니다. 22세 때 비서가 됐습니다. 당시 통치자가 다스리던 정당에 소속된 적도 없었지만, 타이핑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그리됐습니다. 그저 묵묵히 일했습니다.

그녀는 통치자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상냥한 상사였으며,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상냥하다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말하고 일하는 방식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녀는 통치자의 주선으로 그의 집사와 결혼까지 했으니, 참으로 고마울 만하죠. 월급 잘 주지, 동반자 소개해주지, 그저 일만 잘하면 됐습니다. 그녀는 25세까지 그 아저씨가 자살하는 순간까지 옆에 있었습니다. 유서도 그녀가 타이핑 했다죠.

네, 말씀드리죠. 그 통치자, 히틀러입니다. 융에 할머니는 비서 시절, 유대인 대학살조차 몰랐습니다. 그 할머니, 뒤늦게 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 히틀러 정권에 반기를 든 백장미단의 일원이었던 ‘소피 숄’(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을 보세요!)의 묘비를 보고 나서랍니다. 뒤돌아본 과거, 그녀는 전혀 의도하지 않게 ‘전범’이었고, 무고한 사람의 희생에 원하건 그렇지 않건, 일조했음을 자각하게 된 거죠.

융에 할머니, “정치적 무지가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말년 다큐멘터리(<맹점 : 히틀러의 여비서>)와 책(『히틀러 여비서와 함께 한 3년』) 출판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죽기 전,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으로 이 말을 건넸답니다. “이제야 나 자신을 용서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지배계급이 주입한 가치나 질서에 갇혀 살았던 융에 할머니. 말년에서야 ‘인간의 길’을 깨닫고 그제야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다는데, 과연 지금의 우리는...


악은 그렇듯, 평범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했었죠. 20대에 반나치 투쟁에 참여했다고 붙잡혀 수용소에서 죽을 운명이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프리모 레비는, 비록 일흔 살을 앞두고 끝내 자살했지만, 이런 말을 남겼다죠.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p.192)

왜 서러움을 느껴야 하나

하나 더. 최근, ‘직장인 71%가 학벌(학력) 때문에 서러움을 느껴봤다’는 내용의 기사. 한 취업포털이 직장인 124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서러움을 느낀 시점은 ‘콤플렉스 때문에 스스로 위축될 때(38.1%)’, ‘학연 파벌에서 소외됐을 때(28.8%)’, ‘승진에서 밀렸을 때(18.8%)’, ‘동료들이 무시한다고 느낄 때(7.4%)’ 순이었습니다. 성별 차이가 있다면, 여성은 ‘콤플렉스 때문에 스스로 위축될 때(48.4%)’의 답변 비율이 높은 반면 남성은 ‘학연 파벌에서 소외됐을 때(35.0%)’가 높았습니다. 이 때문인지, 자신의 학벌에 대해 74.9%가 ‘만족하지 못한다’고 응답했네요.

서러움의 첫 이유가 의미심장합니다. 어이없는, 바꿔야할 현실을 콤플렉스로 내면화하면서 서러움이 찾아온 셈이지요. 지배계급이 주입한 의식화(!) 작업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맞아요. 개천에서 용 나는 일, 이젠 없습니다. 최근 김희삼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연구위원이 경제적 대물림 정도를 분석해 펴낸 보고서 ‘세대간 경제적 이동성의 현황과 전망’은, 이런 사실을 분명히 해줍니다. 앞으로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인생을 좌우하는 정도가 커지고, 교육이 계층상승 사다리 구실을 하기보다 경제적 지위의 대물림 통로로 변해가고 있다고 김 부연구위원은 지적합니다.  

맞습니다. 이젠 교육도 돈으로 좌우되는 세상입니다. “한국의 교육과정은 이미 사회계층의 단순재생산을 합리화해주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세력은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강조함으로써 경쟁을 통해 대물림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교육과정이 계층의 단순재생산을 합리화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가리는 효과도 얻는다.”(pp.47~48)

학력조차도 보증수표가 되질 못합니다. 스펙이라는 이름의 고혈을 짜는 신종 빨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자격증, 외모관리 및 성형, 공모전 수상 외에도 봉사활동까지도 스펙의 범주로 삼켜버린 세상. 스펙을 쌓고 경력을 관리하는데 일상을 반납했습니다. 스펙이라는 퍼즐을 완성하지 못하면 이 사회는 낙오자 혹은 루저라는 주홍글씨를 단박에 새깁니다. 학력이나 스펙조차 없는 이들은 빈곤의 굴레에서 뒹굴어야 하는 야만의 세상.

이런 현상은 거의 동물적입니다. 동물은 생각이나 이성이 아닌 ‘반응’을 합니다. 무의식이 발가벗겨져 있기에 동물이고, 솔직하지만 무섭기에 야만입니다. 거울을 보지 않기에, 성찰하지 않기에 우리는 그렇게 동물이, 야만이, 괴물이 되고 있지요. 자유와 해방은 나 몰라라 내 쳐버린 지 오래, 차라리 개가 됩니다. 우리 속에 길들여진 야만과 권력에의 의지만 번뜩입니다. “최소한 괴물은 되지 말자”는 말이, 너무도 절박하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언감생심, 개가 되고 말았으니 주인으로 군림하는 자들은 윽박을 지릅니다. 물어라, 쉭. 이빨 드러내고, 눈빛 번뜩이며, 물어뜯고 헐뜯어라. 다른 놈들 누르고 일류가 돼라. 아니면 아예 죽어버려, 개새끼야. 특목고를 위해 달려가는 아이들의 눈빛, 아니 정확하게는 어른들의 욕심에서 ‘사람’은 없습니다. 괴물이 되어버린 우리들. 받아들이기 싫어도, 그것 또한 현실.

<씨네21>의 종신필자 김소희 씨의 말마따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시대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은 일상다반사. 지배집단이 박아놓은 개새끼 규율에 제식 훈련하듯 맞춰가는 지금의 시대.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입니다. 에잇,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웃다가 그만 씁쓸해지고 마는 우리네 풍경. 벽보라도 크게 내붙이고 싶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여기, 어떻게 하면 개가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홍 선생님이 들려주십니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을까. 그것이 진짜 나의 생각일까. 태어났을 때 없던 생각이 지금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을까. 자, 2010년 경인년은 내 생각의 좌표를 찾는 일부터 시작하는 거 어떠세요. 우리 당장, 인간까지는 힘들어도 최소한 괴물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울러, 무엇보다 야만의 세상에서 버티고 견디기. “그래도 살아야 한다. 끝내 죽더라도 싸우다 지쳐 시어질 때까지는 살아내야 한다.”(p.119)


돈독 오른 사회의 부박함

영구 귀국하신 지 7년 반이 지났습니다. 그 시간, 한국사회는 더욱 가파르게 물신에 종속당한 사회가 됐습니다. 다시 돌아오셔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한국사회의 변화가 있었다면 듣고 싶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돈독이 너무 올랐어요. 돈만 아는 세상이 된 거죠. 인간을 평가하는데도 돈으로 평가하고. 존재에 대한 성찰이 없어지니까 욕망에 매몰됐어요. 자유의 길을 모색하지 않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굴종의 길을 자발적으로 가는. 그런 소유의 욕망, 물질적 욕망이 덧씌워져 기존체제나 시장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됨으로써, 인간의 길이 아닌 굴종이 확연하게 두드러졌습니다. 

귀국하셔서 황우석 사태도 겪으셨습니다. 그 사태 이후 한국사회구성원들의 판단능력은 진일보했어야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겠으나 기존 생각을 수정하기는커녕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지만 합리적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성숙을 위해 자기를 부정하고 성찰하면서 수정할 줄 알아야하는데 그럴 용기가 없는 거죠. 훈련도 안 돼 있고. 자기생각과 욕망체계를 고집하기 위해서 외려 끊임없이 합리화 하는 데만 용기가 있어요.

마르크스가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생각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면 지배계급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배계급의 의식에 속절없이 함몰되는 가장 큰 이유를 뭐라고 보시는지.

유럽에선 서민들과 노동자들에게 19세기 말 후반에 투표권을 줬어요. 여성에게 안 줬지만. 그때 투표권을 줬을 때, (지배계급이) 아무 준비도 없이 줬겠어요?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이 교육입니다. 교육을 통해 욕망체계나 기존체제에 대해 숙달된 조교가 되도록 한 거죠. 공부 잘하는 것이, 곧 숙달된 조교가 되는 것이죠. 지배세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고, 지배계급의 이념이 일반 민중에게 관철되는.

미디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구성원들의 사회화 과정에 중요하고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교육과 미디어인데, 그것을 지배세력이 장악하고 있어서 당연히 (지배계급의 이념에) 매몰될 수밖에 없어요. 매트릭스죠.

지금의 우리, 몸은 비대하나 생각은 야윈 불균형이 심합니다. 특히 생각은 몸과 달리 아파도 자각증세가 없기 때문에 생각이 아프기 전에 스스로 묻고 답하는 훈련이 필요하지 않나 싶은데요.

나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내 몸과 생각입니다. 몸은 자각증세가 있어서 병원에 가면,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묻잖아요. 이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물론 암은 자각증세가 늦게 오는데, 내 생각은 암보다 더 지독해요. 내 삶을 오도하는 생각은 자각증세가 있기는커녕 고집하게 만들죠. 그건 스피노자 강조한 것(“사람은 이미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입니다. 어떻게 내 생각이 내 생각이 된 건지, 성찰하고 회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이지만, 생각을 고집하며 살아가지만, 그 생각이 어떻게 내 것이 되었느냐. 자기 성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의 학교를 버려라”

교육문제로 들어가 보죠. 암기와 문제풀이 능력으로 학생을 줄 세우는 현 제도교육은 윤리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교육문제를 논의하자면 7박8일도 부족하겠습니다만, 제도교육을 차라리 시키지 않는 편이 나을까요?

이런 상황이라면, 학교를 버리라고 하고 싶어요. 그럴 정도로 우리 학교가 갖고 있는 문제는 심각합니다. 자발적 복종을 내면화하고 있어요. 우리의 근대식 교육 자체가 일제강점기 때 터 잡은 것이고, 당시 학교는 ‘존재를 배반한 의식’이 목적입니다. 그 틀이 바뀌지 않았고, 학교가 민주화 돼있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학교가 민주화돼야 민주적 시민이 형성됩니다. 학교는 학생, 학부모, 교사 세 주체가 주인이 돼야 하는데, 지금 보면 장학사나 교장․교감, 이사장이 주인이잖아요. 이런 구조를 보면, 지금 학교는 민주공화국의 학교가 아닙니다.

또 대학서열화에 의해 학문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정밀과학이 아닌, 논리와 사고와 감수성을 요구하는 학문인데, 그런 것을 통해서는 줄을 세울 수 없고, 대학서열화에 맞출 수가 없어서 인문사회과학을 암기과목으로 바꿨어요. 그러다보니 주입의 주체는 당연히 지배세력이고 주입받는 자는 자발적 복종의 길을 가게 되죠. 민주화되지 않은 학교가 지배세력에 의해 이용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학교를 계층상승의 기회로 보지만 그런 사람은 이미 계층화가 이뤄졌고, 중산층 이하는 옛날과 달리 그럴 기회도 없고, 들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물림 구조의 부속물로 학교가 있는 거죠. 돈은 돈대로 들고. 제 자식이 한국에 있으면, 아이와 충분히 토론한다는 전제하에 학교를 안 가고 책 읽고 여행 다니는 쪽으로 이끌고 싶어요. 강제는 못하겠지만, 홈스쿨링이나 다양한 방식의 대안학교 모색하는 탈학교의 길로. 제도교육의 학교를 버려야 합니다. 

이건 아이도 아이지만 부모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교육 문제 때문에 부모들 중에 자유인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도 자식교육을 통해 무너지고 있어요. 그 점에서 교육문제는 부모의 블랙홀입니다. 교육문제에서 해방돼야 소수의 부모들이 가고자하는 자유의 길, 자아실현의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어요. 자식들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소수의 부모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탈학교를) 모색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교육은 이미 세습화를 위한 도구니까, 즉 교육이 아닌 거죠. 교육을 손아귀에 넣은 지배계급의 계략이 먹혀들어간 거죠?

계층화도 이뤄졌고 더욱 강화될 거예요. 상층부는 교육을 통해 영어유치원부터 사립초등학교, 국제중, 특목고, 이른바 SKY 상위권 대학, 미국 유학을 통해 대물림 지배구조를 만들어요. 또 그들끼리의 결혼을 통해 계층화도 강고하게 이뤄지는 현실입니다. 과거처럼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자식이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다면 오기가 나서 그들을 위한 들러리 역할을 시킬 수 없다고 할 거예요. 아이들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학교 구조나 내용이 바뀌진 않는 한, 이 문제에 대해 일상에서 시민사회 운동을 하는 분이라면 헤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할 만한 일이고요.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으로 만든 줄 세우기 풍토에 반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글쓰기를 강조하셨습니다. 자기 생각과 논리를 만드는 갖게 하는 글쓰기, 어떻게 만나면 좋을까요?

우선 공유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확하게 한다.” 이 말은 진리입니다. 문제는 우리 학교가 바로 이 두 가지를 안 한다는 거죠. 독서를 하면, 공부 안하고 뭐하냐고 타박하는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싶어요. 글쓰기는 더더욱 안 하죠.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해 논술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생각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점수에 맞추기 위한, 자기 생각을 갖기 위한 글쓰기가 아닌 왜곡된 글쓰기를 하고 있어요.

한국 학생들과 유럽 학생들에게 백지를 나눠줬을 때, 채워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암기를 해서 똑같은 단어를 몇 번이고 거듭 쓰는 것으로 채워져요. 유럽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담은 글쓰기로 채워지죠. 일상이 완전 다릅니다. 우리 사회는 공부시간이 제일 많지만 사회문화적 소양이 없고, 자기 생각이 부박합니다. 그건 글쓰기 없는 데서 비롯된 겁니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왜 없어졌나. 자기 생각 표현하는 거라, 등수를 매길 수가 없죠. 핀란드처럼 절대평가를 하는 나라에서는 가능하지만 우리처럼 등수를 매겨야 하는 구조에선 생각을 물을 수 없어요. 대학서열화가 글쓰기를 소멸시켰습니다. 풍요롭고 정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독서와 글쓰기가 필요한데, 우리는 학교에서 그걸 배제하는 상황입니다. 대학입시에 종속되고 왜곡돼서.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그것으로 명확해지죠.

자유, 존재의 지향점


예나 지금이나,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궤적을 그리고 계십니다. 책에서도 말씀 하셨습니다만, 그 자유라는 귀중한 가치,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의 지향점이 자유라고 봅니다. 어떤 억압도 없이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이 가진 능력과 적성에 따라 그 사회에 기여하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는, 그러면서 생존이 담보되는 것이 자유인의 개념이죠. 누구나 그런 내면의 욕구를 갖고 있어요. 자유인을 지향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 사회와 같은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고 싶은 겁니다. 많은 이들이 거부하길 기대하고 있고요. 인간이 애당초 편함을 추구하지만, 굴종에 의한 세속적인 편함이라면 저는 거부합니다. 불편해도 자유인의 길을 가고자 하는 거죠. 

지금, 자유라는 가치가 왜곡돼서 받아들여집니다. 자유의 반대말이 억압이 아닌 무질서와 불안이라는 것에서도 드러나죠. 지배계급의 아전인수식 강요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 결과가 아닐까요? 

자유의 개념을 자유주의․자유세계, 즉 공산세계와 반대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해요. 그 자유는 영업의 자유밖에는 안 됩니다. (웃음) 인간의 내면․사상의 자유가 아니고. 국가보안법이 아직 폐지가 안 된 것을 보면, 과거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그 자유만 강조해왔던 끝물이 아직도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다보니 자유의 반대가 억압인데, 불안이나 무질서를 얘기하게 되는 거죠. 지배세력이야 자기들이 갖고 있는 것을 계속 안전하게 보장받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질서, 안보 그런 가치를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더 중요한 가치가 정의, 진정한 의미의 자유, 평등인데 말이죠.
“많은 선 가운데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으니 그것이 곧 자유이다. 우리가 만약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곳곳에 악이 창궐하며 남아 있는 다른 선에서도 어떠한 맛과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한다.”(p.124)  

진보의식의 성숙, 무엇을 담보로 해야 할까요. 자기부정의 과정?

진보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소수파입니다. 그런데 이들도 진보의식을 단련과 성숙의 과정을 통해 가진 게 아니라, 반전을 통해 가졌다고 봅니다. 대개 스무 살 안팎에 선배 잘못 만나서, 책 소개를 잘못 받고, 누나나 오빠, 부모 잘못 만나서. (웃음) 그때까지 제도교육이나 미디어로 생성된 생각을 뒤집어서 갖게 된 진보의식이죠. 어렸을 때부터 진보의식을 가져서 사회현상과 부딪히면서 단련된 게 아닙니다. 이건 나름대로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뒤집었는데, 양성평등이나 성소수자 문제에 있어선 수구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잖이 봅니다. 진보의식이 성숙․단련을 통해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반전을 통해 갖게 됐을 때의 한계죠. 그래서 다양한 부문에서 내가 정말 진보적인 감수성 의식을 갖고 있는지 자기부정을 통해 점검해야 합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폭력적인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미디어를 통해 흘러나오는 사회입니다. 이건 비정상인데요, 대중매체의 윤리불감증,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엄청난 문제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소유에 매몰되지 말고 어떻게 존재를 가꿀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광고 문구는 소유가 존재를 규정한다고 규정하죠. 이런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사람들이 존재를 가꿀 생각은 않고 어떻게 하면 소유할까에 매몰됩니다. 존재가 굴종함으로써 비루하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지죠. 그런 따위를 어린 학생들이 듣고 어떤 가치관을 가질 것인지 작은 성찰만 해도 그런 광고를 낼 수가 없죠.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이나 인식이 지극히 오염돼 있음을 보여주는 일례입니다.

우리사회는 건국 이후 반공, 방첩, 숭미와 질서, 시장, 국익, 경쟁, ‘기업하기 좋은 나라’, 즉 지배계급의 가치가 국시처럼 강조됩니다. 국민들도 이런 몰염치한 가치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고요. 나눔과 분배에 대한 이중적인 시선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눔에 대해서는 조중동도 강조합니다. 같은 말인데 분배에 대해선 싫어하면서. 이중적 시선이죠. 나눔은 순수한 우리말이고 분배는 한자말이라서? 아니죠.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는 나눔은 원조, 시혜의 성격이 강합니다. 주체는 가진 사람들이고. 분배는 성장과 대립되는 용어인데, 공적인 부분이고 강제성 띠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조중동 세력들이 나눔을 강조하는 것은, 가진 사람의 시혜나 온정을 기대하지, 공공성 같은 건 잊으라는 뜻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빅토르 위고의 얘기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아닌데, 분배가 있고 나서 나눔이 있어야 한다. 나눔만 강조돼서는 안 되는데, 사람들은 나눔을 얘기할 때 받는 쪽을 생각하면서 나눔을 얘기하지 않는다. 나눔을 생각할 때, 주는 쪽에 서서 생각한다. 사적인 시혜를 받는 사람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로 얘기했다. 인간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나눔보다 분배가 중요하게 자리 잡혀야 한다.

“나눔이 사적 영역이고, 시혜, 온정, 베풂의 의미를 가졌다면, 분배는 성장의 반대로 공적 영역이고 제도에 의한 강제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조중동처럼 양극화된 사회에서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나눔을 강조하는 것은 나눔으로 분배의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데 있다.”(p.164)

무상교육․무상의료는 공화국의 소박한 요구

책에서도 언급하셨지만, 선생님께서 꿈꾸시는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해 주신다면요.

정말 단순합니다. 한 사회가 근대공화국이라면 공공성의 기치, 즉 퍼블릭 개념이 중요합니다. 군주국이 군주의 사적 소유물이라면, 근대공화국은 인민, 민중의 것이죠.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상교육․무상의료를 확충하는 건 공화국의 단순․소박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우린 공화국 알기를 군주제 반대로만 알지, 공공성이라는 핵심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치료나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무상의료․무상교육이야말로 공공성이고, 사회구성원들이 연대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그것이 실현되는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학교나 병원에서 돈이 보이질 않고, 은연중에 연대 의식을 형성하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사회환원의식입니다. 쉬운 예로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의 의사는 대부분 친절합니다. 대학병원은 돈도 안 받고 친절해요. 우리는 돈을 많이 받아도 많은 의사들이 친절하지 않아요. 심하게 얘기하면 유럽은 환자중심, 우리는 의사중심이에요.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한국 의사들이 불친절DNA를 타고 난 게 아닙니다. (웃음)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하고 비용도 많이 들였으니 사회 나와서 뽑아내야죠.

(본전의식 아닐까요? 하하) 유럽 의사들은 학비가 없으니 자기 돈 안 내요. 자기가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건, 사회가 대준 비용에 의해서라고 생각해요. 의사가 되면 되돌려 준다는 생각이 가능한 거죠. 그것이 그들이 돈도 안 받으면서 친절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구조 자체를 바꾸고 사회환경에 엄청난 변화를 줄 수 있어요. (무상교육․의료 효과는) 바로 절감할 수 있습니다.

책도 그 필요성을 이렇게 얘기하죠. “무상교육제도는 그 자체로 사회적 연대의 구체적 실현이다. 계층간 연대, 즉 횡적 연대의 실현인 동시에, 세대간 연대, 즉 종적 연대의 실현이다.… 이와 같은 횡적, 종적 연대의 구체적 실현으로서 무상교육제도는 가난한 서민들에게도 교육받을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더해 교육과정에 있는 어린 사회구성원들에게 자연스럽게 연대의식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하다.”(p.170~171)

책은 그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한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있다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를 건네라면, 어떤 말로 위무와 격려를 전하고 싶으세요?

사람은 결국 편함을 추구하는데, 문제는 편함을 추구하기 위해 남의 불편함을 요구하고, 불편함을 넘어 불행, 고통, 죽음까지 요구하는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자가 됐고 지배하게 됐겠지만, 불편함을 스스로 선택하면서 나름 올바른 길을 가려고 모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발적 불편함을 선택하는 건 소수일 수밖에 없죠. 진정한 자유인의 길이 뭔지, 한 번 태어난 것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분들도 소수고. 그런 소수들이 만나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고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이 그런 만남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한국에서의 만남이 돈이 연결된 것밖에 남아있질 않다고 해도,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다양한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충족시킬 수 있고,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며 나아가서는 용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책은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생각을 풀어냈습니다. 좀 더 미시적으로 접근해도 좋을 듯한데, 후속작 내실 생각, 있으신지요.

음, 그건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문제제기는 이미 했는데, 탈학교 문제에 대해서는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고. 도발적인 얘기를 했는데, 책임을 져야할 것 같기도 하고. 탈학교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고 한국사회에서 실제적인 모색이나 실천이 있는지, 어떤 성과물이 있는지 살펴봤으면 합니다. 그런 면에서 혼자 쓰는 것이 아닌 같이 만들어나가게 될 것 같아요. ‘학교를 버려라’라는 솔직한 제목으로 쓰고 싶어요.

용산이 곧 1년입니다. 하고 싶은 말씀 많으시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세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용산을 보면서, 이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인 사회가 됐는지 실감했습니다. 공자도 그랬지만,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켜야할 두 가지가 수오지심, 측은지심이며, 이것들을 지키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국민을 대상으로 진압작전을 펴고, 1년이 되도록 장례도 못 치르게 하고, 수사기록마저 내놓지 않는 뻔뻔스러움이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인간의 탈을 썼을 뿐 인간성이 얼마나 훼손된 사회인지 확인할 수 있어요. 우리가 과연 인간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욕망의 노예가 돼서 인간성 자체가 얼마나 오염됐는지 되돌아보고, 같은 사회구성원이 겪고 있는 고통에 동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요구됩니다.

이제는 전자상가로 대변되는 곳이 아닌, 우리에겐 국가가 없고 기업만 있음을 알려준, 용산. 선생님을 뵌 후 곧 장례식을 치르게 됐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우리는 국가라는 우산을 잃은 사회적 고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든든하게 우리를 보호하고 어머니의 마음만큼이나 따뜻하고 극진한 보살핌을 주는 것이 국가라 생각했다. 우리의 보호자인 나라가 있어 기를 펼 수 있으니 우리 또한 나라를 아끼고 사랑해야 마땅하다고 당연히 배웠다. 그러나 우리의 보호자이어야 할 국가가 국민을 유기하고 이간질시켜 서로 욕보이게 하고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내 안에 있던 인간과 국가가 부서졌다. 졸지에 고아가 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어린 고아였다.”(p.21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이십니다. 1년이 넘어 현재 15호까지 나왔는데, 어떠세요?

르몽드신문과 월간지인 르몽드 드플로마티크는, 제가 프랑스에 있을 때,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래서 한국판 편집을 맡는 것도 흐뭇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어요. 비미국․탈미국은 물론 유럽의 진보적인 담론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소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꺼이 참여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쉽지는 않습니다. 현재 희망은 좀 더 부수가 많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랑스에서는 20만부가 나가는데, 한국에서는 프랑스의 10분의1이라도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진보적인 담론의 힘이 (이 사회에) 있을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구독에)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라고 물음,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에는 지나치게 부풀린 욕망체계가 있습니다. 아주 쉬운 질문으로, 나라는 존재가 서른 평이 넘는 아파트가 왜 필요할까, 내 존재의 요구인가, 라고 물어봐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존재의 요구가 아니고 덧씌워진 욕망이라고 봅니다. 존재가 훼손되는 겁니다. 욕망을 채우려니까 굴종하고 비굴해지는 거죠.

둘째는 사회안전망, 공공성 문제입니다. 미래를 전망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처지에 처할 수 있다는 불안이 오늘을 저당 잡고 있습니다. 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 가능성 때문에 오늘을 빼앗긴 거죠. 이게 우리 학생들과 젊은이들의 모습입니다. 지나친 욕망체계를 제거하면서 부족한 한국의 사회안전망과 공공성의 확충을 모색하는 것이 나름대로 진보가 가야할 길이 아닌가 싶어요. 

굴종이 아닌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 살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남이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무지와 무관심은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몰상식의 자양분이며 영악한 자들이 뻔뻔하게 군림하는 토양이 된다.”(p.182)

2010년, 어떤 한해가 됐으면 하시는지요. 개인적인 바람과 사회적인 소망을 나눠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인 바람은 별로 없고, 아내가 현재 아픈데 치유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사회적으로는 2009년의 화두가 절망과 무기력입니다.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인권이나 남북관계 역시 거꾸로 가고 있는 한편으로 반민주적인 이명박 정권이 보여주는 행태 속에서 무기력함을 느낀 사람이 많습니다. 또 2008년에는 촛불시위로 희망을 봤다면, 2009년에는 반사적으로 무기력과 절망을 느낀 사람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이 사람들도 소수인데, 2010년에는 용기를 잃지 않고 연대할 수 있도록, 지금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단초가 있었으면 합니다.


돌아오는 길, 히죽거렸습니다. 내 이십대 민무늬 정신에 한 주름을 보태주신 홍 선생님을 뵌 것은 작은 축복이었으니까요. 홍 선생님을 비롯한 몇몇 분들의 책 덕분에, 저는 지배계급의 마수에서 슬슬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자유인이 돼 가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대신 가난이 찾아오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어떻게든 저는 버티고 견디면서, 루저나 위너가 아닌, 행인(걸어가는 사람)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제게 이상사회를 만들겠다는 꿈같은 것, 없습니다. 그저 세상이 극도로 나빠지는 것을 막는 일에 아주 사소하게라도 힘을 보태는 것, 덜 슬픈 세상을 만드는데 약간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 문제의식을 놓지 않는 것,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계속하는 것, 그 정도? “이상사회를 미리 그려놓고 그것을 향해 사회운동을 펼쳐 나가기보다는 오늘 이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과 불행을 덜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p.179)

올해도 고꾸라지지 않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버티고 견디면서 커피향을 계속 맡을 수만 있다면 올 한해도 성공이지요. 상상하는 것 또한 놓지 않았으면 하고요. <판의 미로>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이말. “나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상상력과 희망으로 버티어낼 수 있었다. 나에게 상상은 도피가 아니다. 진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2010년, 소원을 하나 보탰습니다. 홍 선생님의 사모님께서 완쾌하셨으면 좋겠다는. 평소 소원이 많은 인간이 아니니까, 그 정도는 들어주시겠죠? 아울러,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식이 어떻게 주입됐는지 고민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과 함께 온전히 자기 안에서 우러나온 사랑(이라는 감정)에도 충실한 한 해 되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홍 선생님의 이 말씀으로 마칩니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p.223)

[예스24 기고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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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린 눈.

355일 만에 하늘로 보내드리게 된 분들을 위한 것이었죠?
☞ 355일 만에 다시 찾은 용산…"하늘도 울었다"


부디, 명복을 빕니다. 


제 마음의 빚,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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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역에 발을 디뎠습니다.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진 날씨, 정말이지 손발이 꽁꽁 오그라들었습니다. 
전자상가에 볼 일을 보고, 우리의 짐승성이, 시대의 야만이 발가벗겨진 현장을 찾았습니다.
맞습니다. 지난해 1월20일 국가권력의 저지른 만행에 불타 죽은 우리네 이웃들이 있는 그곳.
용산의 남일당 참사 현장이었습니다.

그냥, 주르륵 눈물이 났습니다. 

혹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그 분들 생각하면, 눈물이 안 날 수 있을까요.
작년 이맘때 새벽녘, 혹한과 화염, 극과 극을 오가며 살 곳을 달라는 외침이 살아납니다.
장례 결정이 났지만, 아직 이 춥고 외로운 이승을 떠돌고 있을 우리네 이웃들. 
미안하고 죄송하고,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음...  
 
마침 이수호 위원장(민주노동당 최고위원)께서 계시더군요.
꾸벅 인사를 드리니, 어떻게 혼자 와서 이렇게 바라보고 있냐고 여쭈십니다.
어찌 안 올 수 있겠습니까. 아직 저는 이 사회의 구성원인 걸요.
물론 그렇게 즉답을 하진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셨을 겁니다.
몇 마디 말씀을 나누고, 참사희생자분들의 영정을 보니 다시 꾸역꾸역 눈물이 밀려옵니다.
유가족분들도 계시고,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에 자꾸 고개만 숙였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2009 용산참사 헌정문집>>을 구입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노란색 표지의 흩뿌려진 국화를 보자니, 마음이 그냥 내려앉습니다.

(김)광석이형을 떠올렸습니다.  
가객 김광석. 오늘이 바로 14주기(1996년 1월6일)이기도 했으니까요. 
노래하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애정을 놓치 않았던 그 사람. 
아마, 형이 살아있다면, 이 참사를 어떻게 노래했을까, 문득 그런 상상을 했습니다. 
보고 싶은, 듣고 싶은 광석이형...

그렇게 무너지는 마음을 품고 돌아섰습니다.
참사 현장 바로 앞의 건널목에 서서 앞을 바라봤습니다.
중앙차로 버스정류장에 한 연인이 서로의 몸과 마음을 녹이고자 부둥켜 안고 있습니다.
울컥 하더군요. 왜 나는, 우리는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그렇게 안지 못했을까요.
그렇게 부둥켜 안아주기만 했어도 그분들, 덜 춥고 외로웠을 텐데요.
왜왜왜...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겠습니다.
오는 9일 열릴 예정인 용산참사 희생자 장례식을 시민상주로 참여했습니다. 
묘지조성비용과 신문광고비 등으로 쓰일 1만원을 입금했습니다.
당신도 평생 지우지 못할 마음의 빚이 있다면, 함께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용산범대위 홈페이지(mbout.jinbo.net)

고작 이런 것으로 내 마음의 빚을 갚을 수는 없지만, 
아주 사소한 빚갚음이지만,  
부디 명복을 빕니다. 많이 죄송하고 많이 아픕니다.


어제 읽은 정성일 선생님의 글이 자꾸만 눈에 밟힙니다. 
"집은 우리의 삶의 방어선이다. 그것을 갖기 위해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내가 알지 못하는 협상 테이블에서 재개발 결정이 난다... 폭력적으로 기획된 질서. 그것을 당해낼 수 없는 가여운 존재의 슬픈 지리학." 


잊지 않겠습니다. 승리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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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일. 경인년의 새해.
그렇다. 2010년의 하얀 호랑이해의 개봉.


51년 전(1959년), 가슴 벌렁벌렁 뛰는 혁명이 있었다.
이름하야, 쿠바혁명.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함께 한 그 사회주의 혁명 말이다.

나는 1월1일이 오면, 아직 이땅에 오지 않은,
언젠가는 오고 말, '혁명'을 꿈꾼다.

그렇게 나의 1월1일은, 혁명을 꿈꾸는 시간.
인생 더러운(?) 자의 몽상에 불과할지라도, 
혁명이라는 이름 앞에 나는 그냥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렌다.

혁명, 어떤 형태가 될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혁명이라는 부름을 사회주의와 연관시킨다면,
당신은 상상력 부족. 

D.H.로렌스가 건넨 이 혁명.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 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좇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는 가를 보는 짓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 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들을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 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제대로 된 혁명 : 로렌스 시선집》
(D.H.로렌스|류점석 옮김/아우라 펴냄) 중에서 

함께 혁명을 꿈꾸는 당신과 나는 혁명동지.
웃고 즐기며 재미있게, 경인년의 혁명을 함께 하자.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건네는 새해 인사. ^.^
 
"승리할 때까지 Hasta la victoria Siem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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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진중권 교수를 네 번 만났다.
물론 그는 나를 기억 못하겠지만, 강연 자리 세 번, 인터뷰 한 번.

진 교수는, 재미있다.
그 재미는, 물론 말초적인 흥밋거리나 유머를 뜻하는 게 아니다.
그는 지적호기심에 자극을 주고,
사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화두를 던져준다. 그것이야말로 재미.

다만 진 교수의 말이 빠른 편이라 워딩하기엔 다소 애로가 있다. ^^;

가장 최근, 지난 11월 진 교수를 만난 기록.
이 글은 특히 좀 애를 먹었다.
앞선 진 교수 인터뷰가 호기심 많은 청년의 대담 형식처럼 됐던 지라,
진 교수 이야길 되도록 잘 담고자 신경을 많이 썼지만, 생각만큼 안 됐다.
마감 일정에 쫓기면서, 다른 일과 겹쳐서 비몽사몽 간에 써야 했던 글.

출판사에서도 살짝 기분 나쁘게 했다.
강연직후 강연에 쓰인 사진을 부탁한다고 분명 몇 번을 말했건만,
엉뚱한 사진을 보내놓고선, 미리 말하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다니. 쯧.

뭐, 진 교수의 강연이 괜찮아서겠지만,
그래도 쓰고 나선 한숨 돌리며 행복한 잠을 청했던 기억.

이 책, 교수대 위의 까치.
미술에 문외한인 나이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다.
재미있고 흥미롭다.
회화를 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범례적으로 말해주는데, 
그게 여러 분야와 맞물려 꽤나 흥미진진하다. 
푼크툼.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사용한 개념까지 알게 되는 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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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건네는, ‘사라진 주체’에서 보는 푼크툼의 순간

[아름다운 만남] 『교수대 위의 까치』 저자 진중권


미학자 진중권이 귀환(?)했다. 그는 최근 6년간 몸을 담았던 중앙대학교의 강단에서 사라졌다(?). 이유야 누구나 다 알만한 비밀이고, 해당 학교에선 소동도 있었지만, 그는 그 사건으로 이전보다 더 알려졌고 유명하게 됐다.


이건 참 아이러니하다. 진중권은 (강단에서) 사라졌지만, 우리를 더욱 사로잡고 휘어잡았다.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진중권에 대한 ‘푼크툼’. 푼크툼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자세히 나오지만, 쉽게 말해, 필(feel)이 꽂혔다는 거다. ‘진중권’, 그 이름을 잘 모르던 사람까지 꽂히게 만든 마술적인 힘. 타의에 의해 ‘사라진 주체’가 됐지만, 개별적이고 고독하게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 진귀한 경험.   


알다시피, 지금 TV는, 지상파나 케이블이나 상관없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완전 대세다. ‘진짜 리얼’에 대한 불신도 커지곤 있지만, 리얼로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때문인지, 브라운관 속 리얼리티는 몸집을 키우고 있다. 특히나 케이블은 연예인들만의 리얼을 넘어, 일반인들이 종횡무진한다. 시청률은 덤이다. 뉴스를 만들고, 이슈가 된다.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티 프로그램 사이의 거리감도 좁혀진다. 누군가의 말마따나(씨네21 이다혜), ‘리얼은 가짜 같아지고 가짜는 리얼 같아진다. 리얼리티쇼의 재미는, 그 모든 경계가 불분명한 데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진 교수의 임용탈락은 리얼리티쇼 같다. 진 교수는 진짜 잘린 것일까. 그건 리얼일까. 헷갈린다. 이라크전에 대한 보들리아르의 말(“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처럼 대중에게 더욱 익숙해진 그를 보자면, 현실(리얼리티)의 자리에 가상(가짜)이 들어와 있는 것?


지난 18일 롯데시네마 홍대입구관에서 열린 45번째 ‘아름다운 人터뷰’에 미학자 진중권 교수가 초대됐다. 최근 출간된 『교수대 위의 까치』(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펴냄)의 7장에 실린 ‘사라진 주체’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 지금은 없지만 존재했던 어머니의 사진이 롤랑 바르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듯, 이 기록은 중앙대 강단에선 사라졌지만 우리 앞에 더욱 자주 출몰하는 진 교수가 ‘왜 대중을 사로잡을까’에 대한 작은 단초가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꽂히면 푼크툼, 아니 진크툼(진중권 푼크툼!)이고, 안 꽂히면 말고.


책의 콘셉트는 ‘낯설게 보기’다. “그림을 보다보면, 표준적인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적이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반면 이른바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 사람을 확 사로잡기도 하고,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왜 저러지? 왜 저렇게 했을까? 그런 그림을 모아보자고 해서 열두 꼭지를 모았다. 사실 더 있었다. 쓰다 보니 숫자에 대한 미신도 있고, (웃음) 열두 꼭지로 만들었다.”


또 이날 주제는 타의로 중앙대를 떠나게 된 그를 위해 학생들이 마련한 마지막 강의의 내용이었다. 강단에서 사라지게 된 교수가 학생들과 마지막으로 나눈 강의가 화가의 자화상을 다룬 ‘사라진 주체’라니, 재밌지 않나. 이건, 리얼인가, 아닌가. 강연을 엿보고 판단하시라. 


진중권, 푼크툼을 회화에 꽂다


이번 책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푼크툼’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에서 빌린 개념이다. 롤랑 바르트는 스튜디움(studiun)과 푼크툼(punctum)을 내세웠다. 사회적으로 공유된 코드로 사진을 보는 것이 스튜디움이다. 우리는 신문, 내셔널지오그래피, 광고에 등장한 사진 등을 보면, 그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별다른 예외가 없다. 그것이 스튜디움이다.


반면 똑같은 제재를 보더라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꽂히는 것이 푼크툼. 나한테는 꽂히지만, 다른 이에겐 꽂힌다는 보장, 없다. 사진과 나 사이의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 우발적이고, ‘절대적인 우연효과에 의해 발생한’(롤랑바르트) 개념이다. 이는 롤랑 바르트의 저서인 『카메라 루시다』에 잘 나와 있다. 수잔 손탁과 함께 묶은 『사진론 : 바르트와 손탁』에서도 접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스튜디움. “나는 이런 사진들에 대해 때로는 감동적인, 일종의 일반적인 흥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감동은 도덕적, 정치적인 교양이라는 합리적인 중계를 거친다. 내가 이 사진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거의 길들이기에 가까운 ‘평균’ 감정 상태에 속한다.… 그것은 스튜디움이라는 말인데, 무엇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호의, 즉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여기서 스튜디움은 코드화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다음은, 푼크툼. “두 번째 요소는 스튜디움을 깨뜨리기 위해 혹은 스튜디움과 박자를 맞추려고 온다. 이번에는 내가 이 요소를 찾지 않고 그것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사건의 현장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온다. 이 낙인들, 이 상처들은 점이다. 이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이 우연이다.” 그러니까, 푼크툼은 찌른다. 개별적인 나를 찌른다는 것. 


진 교수는 롤랑 바르트를 ‘찌른’ 두 개의 예를 제시한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가 어릴 때 온실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이에 사로잡혔다. 지금은 없지만 존재했던 어머니의 사진이 ‘왜 나를 사로잡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이렇게 마술적인 힘, 사로잡는 힘을 푼크툼이라고 표현했다. 또 제임스 반 데어 지(James van der Zee)가 흑인 중산층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바르트는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의 벨트에 꽂힌 거다. 즉, 사진 주제와 상관없는 디테일에 그렇게 된 거다.”


그러나 이는, 사진의 개념이다. 피사체가 있어서, 지표성이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 푼크툼이다. 회화에는 기본적으로 피사체가 없기 때문에, 회화에 쓰기는 문제적 개념이라고 진 교수는 지적한다. “푼크툼은 향수적이다. 노스탤지어. 그게 얼마나 보편성을 가지겠나. 한편으로 유아론적이다. 나한테만 와 닿는 거다. 사진작가는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미학이 있다. 절대적 우연은 예술과 미학이 될 수 없고, 수용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진가들 사이에서는 푼크툼을 버리자는 말도 나온다.”
 

가랑비를 맞으며 침묵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서울, 1965


그럼에도, 진 교수는 푼크툼이 버리기엔 참 아까운 개념이란다. 어떻게든 푼크툼을 살리고 싶다. “경직되고 좁은 것을 완화해서 나만이 겪는 체험이라도 보편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20여 년 전, 친구의 집에서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에 꽂힌 적이 있다.

또 아우구스트 잔더라는 사진작가가 있다. 사회과학적 사진을 찍고, 특정주제만 찍는 유형학적 사진의 창시자다. 그 사람의 사진은 독일사회를 읽어내는 사진이다. 그 사람의 <석탄배달부>라는 사진이 확 들어왔는데, 3년 뒤 다른 작가의 같은 주제로 찍은 사진을 봤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한테 꽂힌 게 다른 사람에게도 꽂힐 수 있구나! 푼크툼도 전달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엄밀히는 안 된다. 회화에는 피사체가 없으니까.”


진 교수가 제시하는 것은, 푼크툼의 개념을 완화시켜 그림을 읽는 다양한 방법을 도출해보자는 것이다. 도상학이나 도상해석학적으로 보는 순간, 보편적으로 읽게 해주는 그런 코드가 아닌.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 걸린 그림 가운데 너무 많이 알려진 작품 앞에서 우리는 그냥 훌쩍 지나치기도 한다.

반면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 혹은 작품 앞에 압도당하거나 꽂힐 수 있다. “표준전과식의 설명도 아니고, ‘이게 뭐다’라고 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다양한 층위가 있다. 물론 표준적인 해석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말고 남들이 던지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남들이 하지 않는 답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 작품과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를 가지면, 작품해석이 다양하고 풍부해지지 않을까. 시대마다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고전이고 좋은 작품이다.”


그러니까, 『교수대 위의 까치』는 범례적인 책이다. 당신도, 이렇게 할 수 있어. 한번 해 보라는 식의. 어떻게 접근하면 되냐고? 진 교수의 팁은 검색을 통한, 경계를 넘나드는 길 찾아보기. “99.9% 구글에서 정보를 찾았다.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등 다양한 언어로 나온 자료를 통해 이 책을 썼다.”


자화상의 어떤 역사


이날의 주제로 들어가자. 요하네스 굼프(Johannes Gump, 1626~). 듣보잡이라고? 맞다. 알려진 작품도, 찾을 수 있는 작품도 <자화상> 밖에 없을 정도란다. 미술사를 찾아봐도 거의 나오지 않고, 쉽게 볼 수 있는 작가의 작품도 아니다. 그런데, 진 교수는 꽂.혔.다. 그러니까, 푼크툼.

[자화상], 요하네스 굼프


이 작품 <자화상>, 희한하다. 주체가 3개다. 하나는 뒤통수, 다른 하나는 거울, 남은 하나는 캔버스. 즉 현실과 비현실, 더욱 비현실이 함께 나타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캔버스에 그려진 자화상이 가장 강력한 효과를 드러낸다. 그림을 보는 관객과 눈이 마주친다.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작가는 뒤통수만 보인다.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의 일부



여기서 잠깐 자화상의 역사를 짚어보고 가자. “자화상은 르네상스시대 이후에 등장했다. 중세 때 화가는 개성이 없었다. 지금 앉아있는 의자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듯, 중세까지 화가는 장인의 의미였다. 최초의 자화상은 역사화에 자신을 배치했다.” 그림의 일부이자 역사의 목격자로서의 화가 자신.

“초기 르네상스의 자화상은, 화가가 자신이 묘사하는 신성한 사건에 목격자로서 참여한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가령 아뇰로 가디(Agonolo Gadi, 1350~1396년)가 그린 산타 크로체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보자. 화면 왼쪽에 테두리에 몸이 반쯤 잘려 나간 채로 한 사내가 서 있는데, 그 사내의 프로필은 화가가 그린 가족의 초상 속에 등장하는 본인의 옆얼굴과 일치한다.”(pp. 139~141)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림 속의 화가가 그림 밖의 관객을 바라보게 된다. 필리피노 리피의 자화상이 바로 그것. <시몬 마구스와의 논쟁과 베드로의 책형>의 경우다. “누가 화가인지 찾는 방법이 있다. 누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가. 그게 화가다.” 


[자화상], 타치아노


독립적인 화가의 자화상이 나오는 것은 타치아노와 바사리다. 다만 화가라는 사실은 강조되지 않았다. 그림의 왼쪽 끝에 아주 소심하게 붓이 들려 있음을 보여줄 뿐. “타치아노의 <자화상>을 보자. 옷이 화려하다. 나도 살만큼 산다는 거다. 사회적 지위를 강조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람인양.” 물감을 묻혀가며 그림을 제작하는 공인(工人)으로서의 자부심은 그닥 찾아볼 수가 없다.

[자화상], 안니발레 카라치

 

한 걸음 더 가보자. 안니발레 카라치의 <자화상>. 그림을 그리는 순간을 담았다. “카라치에 와서야 ‘나는 예술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라는 예술가의 자의식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가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굼프의 자화상


그렇다면, 굼프의 작품은 독창적이었을까. 카라치의 다른 그림, <이젤 위의 자화상>을 보자. “카라치의 이 그림에는 화가(얼굴)가 없다. 주체가 없다. 저 멀리 창가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인물이 서 있다. 이건 재현에 대한 그림, 그림에 대한 그림이다. 메타적인 그림이 된다. 우리가 우리의 얼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준다. 매우 현대적인 그림이다. 굼프는 이 그림을 봤을 것이다. 굼프는 카라치의 영향을 받았다.”


굼프가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회화의 자의식을 탐구한 셈이 됐다. “굼프는 관객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감추어버리고는 화폭 위에 거울에 비친 ‘영상’과 캔버스에 그려진 ‘모상’만 남겨둔다. 그 결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는(또는 거울을 비추는) ‘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굼프는 자화상을 이용해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재현의 본성’을 주제화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굼프는 ‘화가의 정체성’을 묻고 있지 않다. 그가 묻는 것은 ‘회화의 정체성’이다.”(pp.143~144)


카라치의 <이젤 위의 자화상>이나 굼프의 <자화상>은 가상이 현실을 압도한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자기동일성이 없는 복제)의 문제. 복제가 원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보들리아르가 얘기한 개념을 17세기 화가들이 다룬 셈이다. 현실적 주체가 사라지면서 복제의 복제가 되고, 모방의 모방이 된다. 현실보다 재현이 더 현실적이다. 보들리아르는 말했다. "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실의 끔찍함이 사라지고 게임 같은, 현실의 자리에 가상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1600년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비슷한 정서가 있었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 데이비드 데일리


그 정서가, 바로 바니타스, 즉 헛되다(Vain). 데이비드 데일리의 작품이 이를 잘 드러낸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 “17세기는 이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잖나. 삶이라는 게 가상이고, 연극이다, 허무하다, 같은 정서가 지배한 거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을 보면, 그림을 그린 베일리는 그림 속 사진에서의 모습일 때, 67세인가 그랬다. 나이가 많을 때 그렸는데, 그림은 젊을 때의 자신이 현실의 사진을 들고 있다. 뒤에 있는 모래시계, 해골, 쓰러져 있는 물잔, 꺼진 촛불은 바니타스, 즉 인생의 허망함을 드러낸다. 가상과 현실이 뒤바뀌었다.”


자화상은 진짜 나일까


진 교수는 지적한다. “거울을 보고 그린 것은 진정한 자화상이 아니다.” 눈을 빼서 보지 않는 이상, (거울을 보고 그린) 자화상은 타인이 자신을 본 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화가들은 자기 얼굴을 그리기 위해 거울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렇게 그린 자화상은 실은 자기가 자기를 본 모습이 아니라,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자화상은 결국 타인을 그리는 것이나 다름없다.”(p.151) 


이에 에른스트 마흐는 그의 저서인 『감각의 분석』에서 <거울 없는 자화상>을 보여줬다. 말 그대로, 거울을 활용하지 않은 자화상이다. 단 하나 문제는, 얼굴이 제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 이 그림에서는 소파에 길게 누운 몸과 자신을 그리는 손이 보인다. 얼굴의 일부가 드러나긴 하는데, 바깥을 향한 왼쪽 눈의 째진 틈과 그 사이로 보이는 코의 왼쪽 측면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그릴 때는 모종의 자기기만이 들어간다. 블로그에 자기 사진을 올리는데, 이것은 따지고 보면, 이상이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기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거울을 볼 때의 생얼(민낯)이 진짜다. 일종의 허위의식인 거다. 정체성을 이상화할 때, 더 나은 나를 추동할 수도 있으나, 자기소외를 불러오기도 한다.” 모종의 분열증이 끼어들게 되는 셈이다.


책에서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거울 단계’를 통해 설명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은 이상적 자아를 투사해놓고 현실의 자아의 불완전함을 보상 받으려 한다. 화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상으로 구성한 이상적 자아를 현실의 무대 위에 연출하려 한다. 그 충동이야말로 어쩌면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를 성립시키는 모티프일지 모른다. 화가들이 자화상을 통해 자의식과 정체성을 주장할 때, 그들 역시 거울에 자신을 비춰놓고 그 이상적 자아를 화폭 위에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p.151)
 

[시녀들], 디에고 벨라스케스


“주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초상은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17세기 고전주의 인식론의 표상이며, 원본이 사라지고 복제가 자립성을 띠는 것은 17세기 바로크 세계 감정의 표상이다. 초상(재현)이 화가(주체)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립하는 데에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 불안함은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즉, 화가들은 다른 사물을 그릴 때와 달리 자화상을 그릴 때에는 거울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자화상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지도 모른다.”(pp. 148~150)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의 자화상
 

[재현 금지], 르네 마그리트


진 교수는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 자화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설명한다. 굼프의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의 뒤통수를 보는데, 이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거울을 두 개 이상 쓰지 않는 한. 르네 마그리트의 <재현 금지>가 이를 잘 표현했다. “일종의 유체이탈인데, 착란증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가 자기의 몸에서 빠져나가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주체는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17세기에 일반적이었다. 제재가 아닌 재현에 대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 유명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대표적이다.” 즉, 이는 OBE(out-of-body experience).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두 번째는 자기 몸 안에서 있으면서 바깥에서 자기를 보는 경우다. ‘도플갱어’와 같은 것이다. 로비스 코린트의 <하얀 파자마를 입은 자화상>이나 빈센트 반 고흐의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이 대표적이다. 전자에서 화가는 오른손에 파레트를, 왼손에 붓을 들고 있다. 그러나 코린트는 실제로는 오른손잡이였다. 자신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그린 것이다. 후자에서도 고흐는 실제로 잘라낸 왼쪽 귀가 아닌, 오른쪽 귀가 잘린 것으로 묘사했다. “만약 고흐가 (그림 속의 주체가) 자신이라고 인식했다면 (귀가 잘린 위치를) 바꿨을 것이다. 밤 12시에 화장실 거울 앞에서 촛불을 켜고 3분 동안 뚫어지게 봐라. 그런 착란증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웃음)” 이것은, AH(autoscopic hallucination).


세 번째 유형은, 내가 나를 보는데 어디에 있는지 헷갈리는 경우다. HAS(heautoscopic)로 일컬어지며, 조반니 바티스타 파지의 <건축가 친구와 함께 있는 자화상>이 그렇다. 거울 속는 두 인물이 있다. 그런데, 누가 화가인지 헷갈린다. “이 그림은 이유가 있다. 화가는 건축가와 한 몸 같은 친구였다. 건축과 회화는 디자인(이탈리아어로 ‘disegno’)이라는 측면에서 통일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한 몸이다시피 묘사한 것이다.”


느닷없이 왜 신경생리학이냐고? 굼프의 자화상은 그러니까, 세 번째 유형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하나의 인격이 현실, 거울, 화폭 위에서 3중으로 분열되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정작 현실의 모델은 얼굴이 없다. 거울 속의 얼굴은 시선을 회피한다. 오로지 캔버스 위의 얼굴만이 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관객의 주목을 자기한테로 잡아끈다. 복제의 복제, 모방의 모방에 불과한 캔버스 위의 얼굴이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현실성을 띠는 셈이다.”(p.157)


[자화상], 요하네스 굼프


진 교수는 굼프가 남긴 또 다른 자화상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앞선 자화상과 달리, 포맷이 사각형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앞서의 것(원형)이 낫지 않나. 이건(사각형) 너무 화려하다. 아까 것은 집중도도 있고 단색이 중심이다. 사각 포맷은 캔버스라고 느껴진다. 원형은 거울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한 번 더 꼬아준다.”


굼프의 두 자화상의 결정적 차이이자 결정적 장면은, 눈이다. 거울에서 드러나는 눈의 위치가 다르다. 사각 포맷의 자화상은 거울 속 얼굴은 화가에게 시선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원형 포맷은 다르다. “분명 거울을 보는데, 눈을 안 맞추고 무시한다. 얼마나 섬뜩하나. 시선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관객과 눈을 맞추는 것은 캔버스의 것이다. 아주 작은 디테일이다. 주체가 사라진 것은 17세기에도 있었고 굼프 혼자 한 것은 아니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굼프의 작품에 꽂힌 것은 이런 아주 작은 디테일 때문이다. 이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굼프의 <자화상>이 진 교수를 사로잡은 이유. 그림은 이렇게도 볼 수 있음을 범례적으로 보여준 것. ‘모델-재현’의 상식적 관계를 무너뜨린 디테일. “재현은 모델과 상관없이 제 의지를 가지고 따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것이 나인가? 뒤통수를 보이는 저 머리인가? 아니면 거울 속의 얼굴인가? 그것도 아니면 캔버스 위의 얼굴인가?”(p.159)
 


이날, 나는 거울을 볼 자신이 없었다. 왠지 내 시선을 피하면서 독자적으로 표정을 낼 것 같아서. 복제가, 시뮬라크르가 나를 압도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살짝 궁금하다. 이 글을 쓴 나는 리얼일까. 아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리얼일까.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거꾸로 시대는 과연 리얼일까. 우리는 언제쯤 다시 거울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거울을 통해 인민의 아픔과 소외를 다독이고 눈 맞춰야 할 통치자가 등을 돌린 이 현실, 리얼일까. 인민에게서 등 돌린 통치자가 거울 속에서 우리에게 계속 등을 돌리는 모습이면 어쩌지. 사라진 통치자. 사라진 인민. 아, 이런 푼크툼의 순간이라면, 정말 싫다.   


[예스24 채널예스 기고 원문]
 
☞ [진중권 교수에 대한 다른 이야기] 디지털 인문학, 영화와 세계를 사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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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20대 때 만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뭐랄까.
시원짜릿했고 통쾌했다. 정색하지 않고 신랄하고 재밌게 핵심을 콕콕.
특히나 이문열에 대한 나의 묵은, 정리되지 않은 무엇을 정확하게 찝어줬다. 

그리고 직장인 시절.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진중권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했던가, 그렇지 않던가, 그것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만, 그것이 첫 접촉이었다.

지난 3월. 
강연 형식을 띤 자리였지만, 진 교수를 만났다. 사인도 받았다. 야호~
그러고보면, 20대 나의 민무늬 정신에 주름을 새긴 인물들은 얼쭈 다 만나본 셈이다.
고종석, 김규항, 조병준, 진중권, 김수행...

노엄 촘스키옹도 돌아가시기 전에 만날 수만 있다면, 아...  

그리고 얼마 전,
3월 당시 진 교수에게 손수 사인을 받은 세 권의 책 가운데 하나를,
수다회 모임 게스트로 진 교수를 초대하고자 했던 친구에게 건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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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 영화와 세계를 사유하다
[아름다운 책 人터뷰] 『진중권의 이매진』 저자 진중권


# 약간 세월이 흘렀다. 한때 모 방송국에서 일을 봐주던 한 친구는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를 간혹 본다고 했다. 담배를 피러 가면 진 교수도 같은 장소에서 흡연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일종의 담배 친구? 물론 친구는 진 교수를 알고 있지만, 진 교수는 친구를 모르는 상태. 당시 진 교수는 해당 방송국의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던 때였다. ‘(할 말 있)수다회’라는 모임을 종종 갖던 우리는 모임 때마다 ‘게스트’를 초청하곤 했다. 그냥 함께 수다나 풀자고, 이 풍진 세상, 우리만의 유희나 즐기면서 세상을 씹자고.

어느 날, 친구가 진 교수를 한번 초청해보자고 했다. 담배 필 때 종종 맞닥뜨리는데, 자기가 보기엔 외로워 보인다면서. 담배 필 때, 한번 말해보겠다고 했다. 뭐, 사실 별 기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만의 친목모임에, 당대의 논객이자, 이래저래 바쁜 양반이 초대에 응해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으니까. 뭐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까. 해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거사(!)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내 기억으로는, 해당 라디오 프로그램이 막을 내리면서 친구도 진 교수를 만날 일이 없어졌다. 약간, 아쉬웠다. 함께 담배를 피면서, 수다를 떨어대면서 담론놀이를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그냥 함께 놀고 싶었거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진 교수는 언제나처럼 ‘동번쩍 서번쩍’하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그를 책으로 처음 만난 것이 아마 10여 년 전,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였다. 정말이지, 통쾌하고 유쾌한 책읽기로 기억한다. 삐뚤어진 우파 이데올로그의 똥꼬 깊숙이 파고드는 유희에 과장하자면, 오르가슴이라도 느낄 정도였으니까. 여튼 이후에도 책을 통해 꾸준히 그를 만났다.

알다시피, 진 교수는 본디 미학자다. 논객보다는 미학자라는 정체성을 더 먼저 달았을 터이다. 그런데 나는 안타깝게도, 미학과 관련한 그의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 이 사회에 쏘아올린 각종 시론들을 묶어놓거나 논객으로서의 정체성에 가까운 책들은 읽어댔지만, 미학자 진중권은 다소 내겐 멀었다. 그의 미학 관련 책을 읽어본 주변인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가 어느 순간, 영화잡지 <씨네21>에 글을 연재했다. 눈이 갔다.


진중권 교수와 영화. 그 조합이 어색한 사람도 있겠다. 대중적인 논객으로서, 미학자로서 정체성을 각인시킨 그에게 영화라니. 시사나 미학이 아닌, 영화라니. 물론 그것은 오해다. 영화는 시사와 미학을 모둠할 수 있는 좋은 테마다. 그의 연재물은 흥미로웠다. 영화비평도 아니었다. 그의 전공인 미학과 인문학이 어우러져 새롭게 접근하는 영화의 세계. 진중권이기에 가능한 시도. 이미 브랜드화된 진중권의 담론놀이는 1년여 지속됐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책이 나왔다. 이름 하여, 『진중권의 이매진』(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펴냄). 방가방가~

진중권을 만나다

지난 20일 서울 신림동 롯데시네마 신림관에 진중권이 떴다. YES24와 롯데시네마가 주최하는 ‘아름다운 책 人터뷰’ 3월의 두 번째 작가로 초대됐다. 『진중권의 이매진』출간과 관련한 독자와의 만남. 오래 전, 게스트 초대에 실패하여 대면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라도 그를 만나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논객으로서 대중에 널리 이름을 알린 그를 잠깐 소개하자면, 그는 미학을 전공한 학자다. 독일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으며 미학자로서의 목표는 철학, 미학, 윤리학의 근원적 통일성을 되살려 새로운 미적 에토스를 만드는 것, 예술성과 합리성으로 즐겁게 제 존재를 만드는 것 등이다. 한편 대중적 논객으로서 사회에 대한 다양한 글쓰기와 강연을 해오고 있으며, 촛불시위나 TV토론프로그램 등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상도 우리에겐 익숙할 것이다.

지은 책으로는 『미학 오딧세이』『현대 미학강의』『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춤추는 죽음』『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 2』『앙겔루스 노부스』『시칠리아의 암소』『페니스 파시즘』『호모 코레아니쿠스』『폭력과 상스러움』 등이 있다.

참고로, 그는 이미 다른 책 등을 통해 채널예스 독자들과 만난 바 있다.
[향긋한 북살롱]예술은 항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 『서양미술사』의 저자 진중권

이날 사회는 김혜리 씨네21 편집위원이 맡았다. 아래는, 충분하지는 않고 띄엄띄엄하지만, 이날 두 사람이 독자 혹은 관객들과 함께 나눈 디지털과 미디어와 영화를 아우른 시시콜콜한 담론이다. 내가 보기에도, 진 교수는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가 맞다.

디지털 기술이 만든 새로운 영화의 세계

김 위원이 진 교수에게 물었다. <베오울프>와 같은 영화가 실사, 애니메이션 외에 제3의 (영화)양식으로 떠오르고, <폴라 익스프레스> 등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캡쳐’라는 신기술이 영화의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자리 잡은 것에 대해.

진 교수는 “연극배우의 연기는 전체적이지만 영화배우의 연기는 파편적이다”라는 말로 운을 뗐다. “배우들이 스크린 앞에서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베오울프>를 보면 카메라 앞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 같다. 움직임의 다이어그램을 제공하는 것이다. <베오울프>에서 주인공은 난쟁이 연기도 했다. 배우의 사라짐 현상이 심해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디지털 분라쿠(文樂:실물 크기에 가까운 인형들이 까만 옷을 입고 작은 샤미센 반주로 영창되는 사설에 맞추어 연기하는 일본의 전통인형극)이거나 분라쿠의 디지털 버전처럼 보인다.”


<베오울프>에 대한 그의 의견은 책에서도 이렇게 정리돼 있다. “<베오울프>는 ‘제3의 장르’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려면 그의 실험이 기술의 시연을 넘어 (앞에서 시사한 것처럼) 매체에 고유한 미학성을 보여주어야 한다.”(p.64)

김 위원이 <베오울프>를 통해 영화윤리의 문제를 제기한다. 실사영화는 아무리 여름용 오락영화라고 해도, 현실 등을 상기시키면서 스크린 속의 인간이 피를 흘리면 아픔을 느끼고 모욕을 당하면 슬픔을 느끼나, 퍼포먼스 캡처로 만든 영화는 안전판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을 이용하는 예술가가 어떻게 활용하는 가에도 달려있지만, 상당히 위험한 부분이 있다고 상기시켰다. 그렇다면 이런 기술 발전이 이야기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진 교수는 우리가 갖고 있는 서사의 틀이, 영화건, 드라마건,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 서사라고 지목하면서 <나비효과>를 예로 들었다. “<나비효과>는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서사의 실험은 재미있다. 주사위의 눈은 여섯 개지만 실현되는 것을 하나다. 그것이 플롯을 만들어간다. <나비효과>는 6개의 눈이 병렬진행하면서 잠재성의 축을 현재성의 축으로 옮겨놓는다. 재미있는 것은, 미래의 원인이 과거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인과관계를 뒤집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하, 그랬다. 그게 신기하지 않았던가. 그 전에 보아왔던 타임루프의 서사는 ‘과거 원인, 미래 결과’의 틀이었는데, <나비효과>는 신기했다. “<나비효과>의 구조는 하나의 플롯을 선형적으로 진행시키는 게 아니라, 다수의 플롯을 공간적으로 병행시키는 방식으로 짜인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 이미 대중의 일상이 된 하이퍼링크를 형식화한 것. 오프라인의 독서는 텍스트를 앞에서 뒤로 읽어나가는 선형적 글 읽기다. 인터넷 서핑은 다르다. 온라인의 읽기는 대개 비선형적으로 이루어진다.”(p.79)


진 교수는 <메멘토>와 <타임코드>의 예도 든다. “<메멘토>는 역행진행을 취하면서 데칼코마니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영화를 DVD로 실험을 해봤다. 거꾸로 돌리면 완벽한 선형적 서사다. 정말 재미없었다. <타임코드>는 못 봤는데, 듣자하니 4개 프레임이 동시에 나온다. 이건 CCTV와 비슷한데, 그래서 익숙하다. 나만 해도 TV를 보면, 스포츠, 뉴스, 드라마 등 몇 개를 동시에 본다. 그런 것들이 미디어의 변화로 인한 새로운 지각방식인데, 그걸 영화로 재현한 셈이다. 사람들이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촛불시위 때 방송을 했는데, 왜 그렇게 인기를 끌었는가 생각해보면 제가 잘 생긴 덕도 가장 중요한 이유고, (웃음) 부차적인 이유가 방송에 게임 포메이션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이미지를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지를 조작하고 싶어한다.”

그렇다. 미래영화의 모습. 상상해 본적 혹시 없는가. 인터렉티브 시네마라는 말은 어떤가. 진 교수는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의 생사여부를 둘러싸고 관객들이 선택하게 됐을 때, 맥이 끊기면서 재미가 없게 되는 경우를 들었다.

책은 <파렌하이트>를 예로 들며 이렇게 언급한다. “최근 미술에 이어 영화에도 인터랙션을 도입하려는 실험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이게 못마땅했던 걸까? 어디선가 어느 감독이 인터랙션 시네마에 대해 논평했던 대목을 읽고, 유쾌하게 뒤집어졌다. 관객이 매번 영화를 중단시켜 놓고 버튼을 눌러 플롯을 진행시켜야 한다면, 관객은 영화 속으로 몰입하는 데에 심각한 방해를 받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랙션 영화는 극을 중단시켜놓고, 관객의 의견을 물으며 태도를 결정하라고 다그쳤던 브레히트의 연극을 닮았다.”(p.82)


인터렉티브 시네마는 아직 멀다. 인터렉티브 시네마의 서사는 결정론적이 아니고 참가자 해위나 관객들의 행위에 따라 달라진다. 이럴 경우 컴퓨터가 병렬처리가 가능해지고 기존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양자컴퓨터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SF’라는 것이 진 교수의 언급.

영화의 촉각적 경험

그렇다면 관객들의 지각방식은 어떻게 바뀔까.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으로 규정한 바 있는데, 육체는 미디어와 기술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할까.

진 교수는 미디어 아트가 지닌 육체화와 탈육체화의 측면에 주목했다. 베냐민도 영화가 지닌 촉각적 지각에 주목한 바 있었다. 그는 <라이언일병 구하기> 초반부를 언급했다. 우리가 그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촉각적 경험을. 그것은 곧 1인칭 체험자 시점이라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종전까지 대부분 전쟁영화는 3인칭 시점을 취했다. <블랙호크다운>는 특별한 기법이 없음에도 트라우마를 느끼게 할 정도의 체험을 가능하게 했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촉각적 효과가 극대화한 경우라고 일컬었다.


책에서는 이런 설명이 추가된다. “<라이언일병 구하기>는 영화사에 일찍이 없었던 ‘폭력의 현상학’을 구현한다. 이는 효과를 내는 기술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기억을 조작하는 미학의 차이다. 가령 <지상 최대의 작전>의 관객은 전투를 ‘밖에서’ 관찰하게 하나, <라이언일병 구하기>는 전장을 객석으로까지 연장해 관객을 불현듯 그날 오마하 해변의 전장에 처하게 만든다.”(p.125) “영화 매체의 촉각성으로 상처를 주어 역사를 트라우마로 기억하게 하는 것. 거기에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성취가 있다.”(p.128)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이렇게 설명된다. “이 영화는 뜨겁다. 고해상의 이미지에는 공간적 빈틈이 없고, 초당 24장의 프레임은 이미지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지운다. 맥루언의 말대로 정보의 밀도(해상도)가 높으면 관객의 참여도(상상력)은 떨어지는 법. 이미지가 뜨거우면 상상력은 식는다. 중세의 목판화는 차갑다. 관객에게 앙상한 뼈대의 빈틈과 간극을 스스로 채우라고 요구한다. 이미지가 차가울 때 상상력은 뜨겁다.”(p.133)


진 교수의 이날 선언 중 하나를 꼽자면, 우리가 이미 사이보그라는 것이다. “차나 자전거를 탈 때 우리 신체는 그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렇게 기계와 이미 접속된 상태다. 사실상 사이버다. 인간은 이미 사이보그화 돼 있을지 모른다.” 이에 대한 예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스파이더 맨>을 들었다.

“‘사이보그’라는 낱말은 그 사이에 심보그(symborg)라는 신조어로 전환했다. ‘symbios’와 ‘organization’의 합성어인 심보그는 한마디로 인간과 동물, 신체와 기계, 가상과 현실의 공생관계 위에서 살아가는 유기체를 가리킨다.… 생명 자체가 실은 다른 생명체와의 공생을 통해서만 탄생하고 존속할 수 있다는 얘기. 이 자연현상을 인공적으로 수행하는 존재가 바로 ‘심보그’다.”(p.100) <스파이더맨>은 그래서 ‘심보그’ 선언이다. 내게 2개의 주체가 존재하는 것.


리얼리즘은 저해상으로부터?

김혜리 위원에게 지난해 가장 충격적인 영화 중의 하나가 <클로버 필드>란다. 최고의 괴수는 형식이고, 특수효과는 마케팅이라는 이야기. 예전에는 고해상이 몰입의 전제였는데, 지금은 그렇다면 달라졌다는 얘기? 진 교수의 대답은, “고전적 리얼리즘의 개념이 살아있는 것이 저해상”.

어느 정도 고해상의 영상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이제 고해상을 연출․합성․허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영상을 되레 리얼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 “영화에 초점조차 안 맞는 저해상의 영상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대중에게는 그런 동영상에 대한 취향이 생겼기 때문일 게다. 흔들리고, 초점이 안 맞고, 해상도가 떨어지는 영상에 대중이 열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캘리포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때 휴대폰으로 찍은 동영상을 생각해보라. 시각이 제한되어 있어 범인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나, 거기에는 영화나 방송의 카메라로 전달할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과 진실성이 있다.”(p.142)


정말, 그 같은 저해상의 리얼리즘을 이용한 것이 바로 <클로버 필드>의 핸드헬드 카메라였다. 괴물의 습격 앞에서 벌벌 떠는 캠코더. 그것에 몰입됐던 경험, 당신도 갖고 있진 않은가. 몰입에 반드시 고해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디지털 대중이 사용하는 영상의 전략을 본격적으로 영화 속에 도입하는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이 흔들리는 저해상의 불량한 영상을 대중이 기꺼이 참아주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의 일상적인 영상 취향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관에서만은 다른 영상을 보고 싶어하는 이는 거기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다.”(p.143)

영화는 진화한다

그렇다면, 이런 디지털이나 신기술들이 영화사를 바꿔놓을까. “최초의 몰입 영화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였다. 이상한 장치는 가망이 없다. 사람들이 번거로워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영화가 계속 진화하고 있지만, 현실이 주는 감동을 넘지 못한다. 과거에도 뉴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없애지 않았다. 서로 전략을 차용하면서 진화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게임을 차용하고, 게임은 영화를 차용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것이다.”

진 교수에 따르면, 대중의 이미지 취향은 이미 변했다. <워낭소리>만 봐도 그렇다. 감동은 원래 피사체에서 오나, 피사체를 조작했음에도 사람들은 속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다. 아마 우리의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진화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방향성을 갖든, 어떻게 변화하든. 아마도, 고민은 계속 될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새로운 상형문자의 시대다.… 디지털은 영화로 하여금 제 언어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p.29)


진 교수의 강연은 그렇게 유익한 시간이었다.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영화를 기대하게 만든. 영화 안에서 나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새로운 기술이 주는 사유를 만날 수 있다. 이루지 못했던 게스트 초청은 몇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렇게 만났다. 영화와 만나는 디지털 인문학이 즐거웠던 이유. 나의 영화도 계속 진화한다. 당신의 영화는 어떤가.

[예스24 채널예스 기고]

☞ [진 교수에 대한 다른 이야기] 진중권이 건네는, ‘사라진 주체’에서 보는 푼크툼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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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무역 커피와 함께 하는 랩39, 11월 월례포럼

<혁명과 커피_ 커피를 통해 엿보는 세계>

커피는 인류 역사와 어떻게 함께 했고,
지금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어떻게 우리 손에 왔을까.

사이토 다카시 일본 메이지대학 문학부 교수는 그의 저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을 통해 커피가 인류 역사의 톱니바퀴를 움직인 힘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커피가 미국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보이지 않는 하나의 요인이 됐을 수 있다고까지 분석한다. 프랑스혁명 등에서 볼 수 있듯, 커피하우스는 혁명을 불렀고, 시대를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했다.

그런 영향에도 불구하고,
커피는 불공정한 세계교역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상품이며,
커피를 통한 거대자본의 커피생산자 착취는 일상사가 됐다.

커피스토리텔러 김이준수가 전하는,
커피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커피 한 잔으로 연결되는 세계를 엿보는 시간.

" 한 잔의 커피는 경이롭고 놀라운, 관계의 집합체이다."
- 《커피의 역사》 저자 하인리히 E. 야콥 -


내용
● 일시 : 2009년 11월 28일(토) 오후 5시
● 장소 : project space LAB39/골다방(공정무역커피하우스)
● 강사 : 커피스토리텔러 김이준수
● 문의 : jslyd012@gmail.com
● 찾아오시는 법
지하철 2호선 문래역 7번 출구 --> 직진 100M-->광명수산식당-->좌회전하여 우측에 철공소 끼고 직진 200M-->기업은행 지나 신흥상회 3거리 도착-->좌회전 50M -> 3거리 우회전 -> 철공소길 따라 50M 우측 1층 새한철강 -> 새한철강 건물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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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솔로이스트>.

영화에 대한 감상과는 무관하게,
함께 본 이는 극 중에서 홈리스(Homeless)들이 나오자, 불쾌감이래야 하나,  
일종의 혐오감을 드러낸다. 약간 당황스럽다.

그이는,
홈리스들을 향해, 아무 일도 않는 게으르고 세금만 축내는 존재라며, 쏘아댄다.
옆에서 듣자니, 섬뜩하다. 무위도식하는 세금식충이처럼 그들을 묘사하는 것 같아서.

음, 속칭 가방끈도 길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홈리스들을 향해 저런 야멸차고 냉정한 시선을 보낼 줄이야.

홈리스를 잉태한 사회구조나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말.

아마도, 세계관의 차이겠지만, 
갑자기 이 세계가 외로워졌다. 그 얘기 한 마디에.
안드로메다와 지구 사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거리감.

그래서 솔로이스트였구나. 나는 혼자 독창을 하고 있구나.
 
그는 이 땅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남에게 별다른 해 끼치지 않고, 주변에서는 착하다는 얘기 듣는, 아주 열심히 살아가는.

p.s...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른 한 친구로부터 받아든 경향신문, 이 말이 외로운 나를 다독여준다.

"한 사회의 수준은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하느냐가 아니라 고통 받는 이들을 얼마나 배려하며 보듬고 갈 수 있는 환경인가로 측정할 수 있다. 풍요롭지만 ‘그들만의 풍요’일 뿐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한다면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그보다는 물질적으로 덜 풍요롭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지 않고 약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스템이 작동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임에 틀림없다."

과연!
다행이다.
너무 남발돼 오염된 '희망'이 아닌 어떤 느낌..... 당신은 혹시, 아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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