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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9.23 인류 최초의 여권신장론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by 스윙보이
  2. 2008.08.22 19세기 남근중심에 저항한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 by 스윙보이

인류 최초의 여권신장론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4.27~1797.9.10)

지난 8월에 소개했던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자, '메리 셸리' 기억하시죠?
그에 대한 이야길 나누면서 잠깐 언급했었습니다.
메리 셸리가 페미니즘을 다룬,
19세기 남근중심의 시대에 저항한 요인 중 하나로 지목했던 것이 그의 어머니였죠.
열혈 여권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이번엔 그 울스턴크래프트를 얘기해보죠.
그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18세기 영국의 작가 겸 여권신장론자'입니다.
우선 첫째 방점은 18세기에 찍힙니다.
그때는 여성이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취급을 못 받던 시절이었어요.
태어났으나 여성에게 자체발광은 언감생심.
남성의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했던 것이 여성의 운명인양 취급됐던 시대.

울스턴크래프트는 그 엄혹한 시대에, "세상은 반은 여자"라며 여남평등을 부르짖었습니다.
한마디로 그건 미친(?) 짓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 여권(女權)에 대한 자각을 외치다니.
물론 그런 주장에 우호적인 시대여건이 조성된 측면은 있어요.
앞서 왕과 귀족에게 침탈당한 인권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던 18세기 유럽.
진보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인권이 중요한 사상적 테마로 간주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당대의 '인권'이 온전한 인권이었느냐.
절래절래, 아니올시다. 인권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이론이 세상에 널리 퍼지고 지지를 받았으나, 그들이 내세운 인권은 '여성' 아닌 '남성'만 포함된 절름발이였습니다.
아무도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존재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당대 가장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일컬어지던 루소나 로크도 그랬습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약하고 열등한 존재로 남성과 평등해질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더랬죠.

그러한 때, 울스턴크래프트의 주장은 한마디로 천지개벽할 일이었죠.
여성도 인간이며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
『여성권리옹호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1792)의 발간.
인류 최초로 여성의 권리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분석한 책이었죠.
그렇다고 당대, 남성들이 패권을 쥔 시대에 순순히 먹혀들어간 건 아니었습니다.
한 사회평론가는 책이 나오고, 그에 대해,
"패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라고 원색적인 욕을 해대기도 했으니까요.

울스턴크래프트이 여성과 남성 간의 평등을 주장한 배경에는,
개인적인 경험도 한 몫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을 보기 위해 파리로 건너가 미국인 사회평론가 길버트 이무레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 그는 딸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나 불화가 생기고 그는 버림받습니다. 자살까지 시도합니다.
남녀 간 불평등한 애정관계가 빚은 비극. 사랑했던 남녀의 헤어짐 이후 여성에게만 닥치는 비참함과 따가운 시선을 몸소 체험한 그는 여권 신장문제에 더욱 파고들어갑니다. 

그러다 런던에서 급진주의자 모임의 일원에 참여하면서,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아나키스트이자 사회사상가 윌리엄 고드윈과 가까워집니다.
고드윈은 울스턴크래프트의 상처를 달래줬고,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전제 하에 이뤄지는 사랑을 제안하게 되죠.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프로포즈였고, 망설이던 울스턴크래프트도 이를 받아들입니다.

둘은 결혼했지만, 여느 부부와 달랐습니다.
각자의 공간에서 서로의 작업에 간섭하지 않는 결혼생활.
각자를 독립된 인격체이자 성인으로서 대접하고,
타인을 얽매거나 행동을 구속하지 않고 개인적 행동의 자유를 보장한.

와, 18세기에 이런 결혼생활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결혼 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런 말을 했다는군요.
"나는 여전히 독립적이라고 느낀다. 나는 앞으로 내 자신의 생각과 원칙들을 발전시킬 것이고
남편이 거부한다고 하여도 그것들을 내 아이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 덕분인지, 그의 두 딸은 어머니의 유산을 잘 물려받았습니다.
비록 메리 셸리를 낳고서 열흘 만에 사망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여성의 권리에 대한 자각과 자유로운 사상은 두 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죠.
첫째 프랜시스는 시인 바이런의 애인이 돼 문학과 사상을 논하면서 자신의 삶을 꾸렸고,
둘째 셸리 역시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사랑하고 예술적 영감을 공유하면서 탈관습적인 삶을 살면서 작품 활동을 펼쳤습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을 깔보는 시대적 분위기 탓에 당대에 크게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또 19세기에는 그의 지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사생활에 초점을 둔 전기 등이 활개쳤습니다.
20세기 여성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그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시작하고 재평가됐습니다. 마거릿 조지의 『한 여성의 상황 One Woman's Situation』(1970), 엘리너 플렉스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Mary Wollstonecraft』(1972), 클레어 토멀린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Mary Wollstonecraft』(1974) 등이 그를 다룬 책입니다.

(※ 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 주간한국) 

19세기 남근중심에 저항한 작가, 메리 셸리

Posted by 스윙보이
19세기 남근중심에 저항한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8.30~1851.2.1)

페미니즘을 담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자


괴물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인식돼 있는 ‘프랑켄슈타인’은 1818년에 출간된 소설입니다. 공포소설, 공상과학소설의 고전이죠. 영화로도 많이 제작돼 아류까지 합하면 130편 이상 제작됐다고 합니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이름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과학자 이름인 것, 아시죠?

그런데, 소설 《프랑켄슈타인(원제 :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이 페미니즘도 다뤘다는 사실 아세요?

괴물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19세기 식민지 열강이자, 여성성을 극도로 억압한 당대의 남성성을 대변합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남성성 과다분비의 프랑켄 박사의 분별없는 열정이 빚어낸 파국. 소설은 어머니 없이 태어난 괴물의 만행에 따른 결말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당시 영국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오직 하나의 부모로서의 아버지’라는 주장을 폈어요. 여성에 대한 차별과 남성의 오만한 의식이 팽배한 시대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그런 시대의 공기에 저항한 것이 이 소설이죠. ‘오직 하나의 부모인 아버지’인 프랑켄 박사가 갖는 결함과 한계, 실패하고 열등한 존재라고 외치는 괴물의 절규에서 어머니 없이 태어난 자의 불완전성과 콤플렉스가 드러나죠.
그래서 이 소설을 여성성을 억압하는 남근중심적 사회를 향한 경고로 읽는 시선이 있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리처드 로스웰이 그린 메리 셸리의 초상화

이는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낸 작가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메리 셸리. 1797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급진적 무정부주의 철학자인 윌리엄 고드윈이며, 어머니는 열렬한 여권운동가(페미니스트)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입니다.
그러나 메리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합니다. 최초의 페미니스트 타이틀을 갖고 있는 울스턴크래프트가 메리를 낳고 열흘 만에 숨을 거뒀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어머니 이름을 물려받은 것 마냥, 사상적 DNA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상가 집안이라는 지적인 환경에서 자란 그는 총명한 재원이었습니다. 새어머니의 미움도 한편으로는 책이라는 친구를 둘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도 하네요.

메리의 삶은 그러나 평탄치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죽음도 그랬지만, 아버지와 교류하는 사상가와 문학가의 드나듦 속에서 시인 퍼시 비쉬 셸리와의 만남 또한 그랬지요.

결혼한 상태였던 퍼시와의 첫 만남에서 사랑에 빠진 그는 16세의 나이에 퍼시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퍼시의 전처는 둘의 사랑에 절망해 자살을 했고, 메리는 아버지와 의절했습니다. 사랑의 도피까지 감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꾸렸습니다. 부모의 영향을 받아 탈관습적이었던 그다운 결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적 재능을 공유하고 자극한 남편이나 시인 바이런과 같은 친구의 교류와 격려로 메리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작품을 썼습니다. 그가 이 작품을 쓰게 된 사건은 문학사에서 하나의 전설처럼 내려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생은 역시나 굴곡 투성이였습니다. 퍼시와의 사이에 낳은 네 아이 중 세명이 일찍 죽었고, 남편 퍼시도 서른 살의 나이에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메리는 이후 30여년을 더 살면서 《발페르가 또는 루카의 왕자 카스트루치오의 삶과 모험》 《최후의 인간》 《로도르》 《포크너》 등을 발표했지만, 퍼시와 보낸 시절만큼 문학에 의욕을 불태우지도 못했고, 세대를 뛰어 사랑받는 작품도 내놓질 못했습니다.

드라마틱하면서도 극적인 생을 살았던 그에게 사랑은 어떤 존재였던 걸까요.

(※ 참고 : 데일리서프라이즈 <류가미의 문예기행(27) 메리 셸리, 새로운 장르의 어머니>,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 www.britannica.co.kr, 엠파스 실시간지식)


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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