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사랑'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8.11.25 은둔 속에 핀 예술혼, 에밀리 디킨슨 by 스윙보이
  2. 2008.01.04 사랑은, '오렌지주스'에서 시작한다... by 스윙보이 (2)
  3. 2007.09.23 파블로 네루다, 그리고 <일 포스티노> by 스윙보이 (4)
  4. 2007.07.09 [한뼘] 위로 by 스윙보이

은둔 속에 핀 예술혼,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1830~1886년)

그리고 1775편의 시


살아생전,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1800여 편에 달하는 시는 그저 혼자 내뱉은 독백 같았습니다.
사랑, 이별, 죽음, 영혼, 천국, 자연 등을 다룬 시는,
은둔생활 속에서 핀 꽃이었나 봐요.

그는 내내 고독했지만,
그 고독은 그의 모든 것이었던 시를 잉태한 동력이었습니다.

시와 고독을 평생 친구로 곁에 두고 지냈던 이 사람,
영문학사상 최고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입니다.
이상하고 의외의 일이죠?
그가 살아서는 별 볼 일 없는 시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에요.
하긴 별 볼 일 없다는 것도,
그의 시를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까닭도 있었겠지요.


에밀리를 얘기할 때, 가장 흔히 따르는 것은, 평생 독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독신으로 살았다는 것이 그닥 부각돼야 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을 인류보편의 것으로 인식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독신생활하면서 시 짓기에만 몰두하다시피 한 그의 행보는,
호사가가 아니더라도 입방아에 올릴 수 있는 호기심거리가 될 수 있었겠죠.
마치 시와 결혼한 듯,
자신만의 공간에서 치열한 문학적 열정을 불태운 그였기에,
보통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의 궤적은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에밀리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엠허스트에서,
변호사 아버지 에드워드 디킨슨과 에밀리 노크로스의 둘째 딸로 세상과 접촉했습니다.
잘 보시면, 그의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에서 하나씩 딴 것이죠.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 신학교에도 진학했지만,
그는 보수적인 청교도 신앙에 그닥 흥미를 느낀 것 같진 않습니다.
청교도 정신부활을 위한 '영적대각성운동'이 있었을 때도,
그는 되레 청교도 신앙과 종교적 구원에 대한 회의를 숨기지 않았으니까요.

에밀리를 에워싸고 있던 종교가 시작(詩作)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 반면,
한 만남이 그를, 그의 시상(詩想)을 일깨웠습니다.
설핏 짐작 가시죠?
맞아요. 역시나 사랑.
독신이었다지만, 설마 그가 사랑 한번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진 않으셨죠?
아버지가 하원으로 당선돼,
그의 가족은 1854년부터 이듬해까지 워싱턴에서 살았는데,
필라델피아의 한 장로교회에서 만난 찰스 워즈워스 목사를 만났습니다.
찰스 목사는 스승과도 같았습니다.
문학적인 설교와 칼뱅주의에 입각한 그의 웅변이,
에밀리의 머리와 마음을 흔들었던 거죠.
그것은 하나의 지적도전과도 같았고, 시작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편지를 주고받았고,
워싱턴을 떠나 다시 엠허스트로 돌아간 에밀리를 찰스 목사가 찾기도 했습니다. 에밀리는 여러 글에서 그를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적기도 했어요.

그러나 역시나 장벽은 존재했죠.
찰스 목사는 기혼자였고, 그가 1861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로 옮기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났어요.
에밀리는 그를 정녕, 사랑했나봅니다.
친구부부와 동생에게 실연의 아픔을 토로했고, 더더욱 시에 매달렸습니다.
사랑의 아픔 때문인지 시는 봇물처럼 흘러넘쳤고,
좌절된 사랑으로 둘 곳 없는 마음은 작품 속에서 영적인 결합을 이뤘습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였을까요.
실연을 겪고 난 뒤, 그러니까 30세 이후 은둔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흰 옷만 입고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뉴잉글랜드의 수녀'라는 별명도 그래서 지어졌습니다.
시작도 계속했으나, 그는 출판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생전에 불과 7편의 시만 발표했을 정도로,
그는 철저히 고립된 속에서 시와 함께 했어요.

물론, 에밀리에게 사랑이 한번만 거쳐 간 것은 아니지만,
그는 독신생활을 청산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아내를 잃고 홀로 된 로드 판사와도,
사랑을 나눴습니다.
두 사람의 서신에서도 서로 사랑했음이 충분히 드러나 있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독신생활을 버리지 못해,
그의 청혼을 거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요.
그러나 1884년 로드 판사가 죽자,
실의에 빠져 있던 에밀리는,
결국 건강 악화로 2년 뒤인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겪은 사랑의 아픔, 그의 전부였던 시도,
그를 더 이상 지탱시켜주지 못했나 봅니다.


에밀리가 죽은 뒤, 그의 동생이 1775편에 달하는 시를 묶어 발표했습니다.
그의 시는 1890~1945년 동안 8권의 시집으로 묶여 출판됐고,
살아생전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시들은 20세기에 와서 제대로 평가를 받았어요. 그는 겉으로 보기엔 은둔자였지요. 가사 일을 끝내고 이층 방안에서 시작에만 몰두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시피 했으니.
그러나 시와 편지를 보자면 열정적이고 재치있는 예술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엔 친밀한 언어로 생과 죽음, 영원과 자연 등에 대해 무한한 상상과 사색, 사랑과 이별을 담았습니다.
그의 예술혼은 그래서 아직도 후세인들에게 전파되고 입에 오르내리는 것 아니겠어요?

(※참고자료 : 위키백과, 국민일보)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만나다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연말연시, 곧 덕담이 난무하는 시즌.
누구에게든, 상투구든 뭐든, 좋은 말 한마디씩은 던지는 것, 익숙하지. 전화, 문자, 대면 등을 통해 주고 받은 새해인사를 담자면, 누구나 트럭 백만스물두개 정도는 될 터. "복 받아라"는 클리셰가 가장 흔할 테고, 내 경우, 다음으로 많은 것은, "결혼해야지" 정도가 되시겠다! 뭐, 결혼 안(못)한 종족들의 피할 수 없는 덕담? 악담?

"올해는 결혼하냐?"
"좋은 소식 좀 듣자"
"올핸 국수 먹게 해주는 거냐?"
"새해 장가도 좀 가고..."
"새해엔 결혼해서 부모님을 즐겁게 해주는 한해가 되길 바란다. 사회적 어른!..."


뭐, 이런 말들이 우수수 쏟아지더군.
몇년째야, 대체.^^;; 이 말 건네는 사람들도 슬슬 지겨워질 때가 됐지 싶은데, 제일 만만한 덕담인가? 어쩌다, 결혼 못(안)한 처지가 안스럽다는 뉘앙스까지 은근 품은 말을 들을 땐, 아 그 측은지심에 눈물까지 킹왕짱 쏟아지려구 해. 또 부모님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라니.-.-; 그건 더 슬퍼. 꼭 부모를 위해 하는 결혼이라. 내 아무리 불효자라지만, 그건 너무해. ㅠ.ㅠ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 당연 아니지.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고, 당연 날 위해 건네는 진심이란 것, 알아~ 그럼에도, 그 말이 때론, 폭력적인 말이 될 수 있음을 알아줬음 좋겠어. 생을 사는데 있어서, 단 하나의 방식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끔찍한 일이야. 또 나는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부하고 살아가는 소수도 있음을 고려하면 더 좋지 않겠나 싶어서. 나도 누군가에게 꽂히면, 그 제도와 도킹하는 날도 있겠지. 그래도, '결혼' '장가' '시집'이라는 말보다 '사랑'이란 말을 하면 더 좋지 않을까. "결혼해라"는 말 대신, "사랑해라" 혹은 "더 많이 사랑해라"는 그런 말. "연애해라"도 좋겠군.

며칠 전, 현재 결혼 상태의 한 친구가 툭 던진 이말.
"넌 혼자여두 씩씩한 것 같아... 난 혼자여두 외롭고, 둘이어도 더 외로워지라..."
쓸쓸함이 묻어난, 그 자조섞인 얘기에, 난 뭐라고 해야 좋을지 잠깐 고민.
"어, 왜 이래. 난 외로움도 못느끼는 외계인이냐? 외로움은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없는 거야. 친구처럼, 감기처럼 평생 옆에 달고 있어야 돼. 사람에게 숨길 수 없는 세가지가, 기침, 가난, 사랑이라는데, 난 거기다 외로움도 더 붙여야 한다고 생각해..."
뭐, 이런 시시껄렁한 말을 해줬다. 결혼도 못(안)한 '아해'의 망언?

사실, 나는 일찍 눈치챘다.
외롭지 않기 위해 결혼한다는 것, 순 말짱 거짓말이라는 걸. 단지 외로움을 떨치려고 하는 결혼이라면, 물론 나는 자격따윈 없지만, 그 결혼 반대닷. 그런 사람은 그 외로움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 아닐까 싶어. 마음의, 감정의, 빈 공간을, 한갖 제도로 편입함으로써, 메울 수 있으리란 생각은 오산인게지. 그럴 때 하는 결혼일수록, 허물어지기 쉬운 모래성이 될 것 같고.

나는, 그 친구에게 "사랑해라"고 말해줬어.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구일지는, 온전히 그의 몫이지만, 나는 좀더 그가 '아름다운 개인'이 돼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봐. 경험상, 외로움은 떨치는 것이 아니더라구. 그리고 떨친다고 되디? 그것이. 그놈, 킹왕짱 질긴 놈이야. 아싸리, 친구가 되는게 상책이더라규. 뭐랄까. 외로움과 좀더 친해질 때, 사랑도 더 잘할 수 있는 법이고, 아름다운 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사랑의 대상이, 스스로가 돼도 좋겠어. '싱글'은, 때론 결혼 혹은 연인 여부와는 무관한 레떼르일 수도 있는데,

그리하여,
'싱글'에게 고하노니, 올해 사랑하시라. 이것이 너에게 건네는, 나의 첫 새해덕담이노니.

그리고, 이건 내가 아는 한 사랑의 시작. 바로, <노팅힐>. 너에게 권해줄께.
우리 올해, 오렌지주스나 실컷 마시자규.ㅎㅎㅎ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각해봐. 사랑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기억 나? 어디를 사랑의 시작으로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저런. 하긴, 애매할거야. 누가 그랬잖아.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라고. 언제,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일어날지, 누가 알았겠어. 사랑의 시작을 두부 자르듯, '이 순간이었어'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아. 그래도, 이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오렌지주스에서 시작된 사랑. 사랑은 때론, 그렇게 엉뚱해. 병적인 유머센스가 발현된 거지. 하하.

짜잔, '미국 할리우드의 대스타, 안나'(줄리아 로버츠)가 등장하지. 
꺄아아~ 줄리아 로버츠, 소리치고 싶지? 재밌는 건, 극중 안나가 바로 줄리아 로버츠, 그 자체야. 할리우드 스타가 할리우드 스타 역할을 하는 시츄에이션. 그렇담 상대는? '영국 노팅힐의 구멍가게 책방주인, 윌리엄'(휴 그랜트)이야. 전혀 매칭이 안 된다구? 그렇지. 이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은 당연해. 더구나 로맨스라니! 그야말로 꿈같은 일에 지나지 않는 허구(로 밖에 생각될 뿐이)지. 

그런데, 이 이야기, 그런 선입견 버려도 좋아. 
제목이기도 한 작은 마을 '노팅힐'이 큰 역할을 하지. 뭐랄까.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이 엮어지는 장소로 최적이었어. 거대도시를 대변하는 안나는 화려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반면, 지리멸렬함과 팍팍함, 그리고 외로움을 품고 있어. 도시탈출을 꿈꾸는 사람들의 환상마냥, 안나도 대도시를 떠나 작고 소박하지만 따스함이 살아 숨쉬는 안식처를 꿈꿔. 이미 길들여진 거대도시를 영원히 떠나 살 수 없음을 알면서도...

반면, 여행관련 서적만을 다루는 책방주인, 
윌리엄은 '헐랭이'라는 별명답게 별 볼일 없는 남자야. 해리슨 포드와 닮은 건달과 도망간 아내와는 이혼했고, 사랑했던 여자는 친구와 결혼한데다, 서점은 파리만 들끓고. 점원마저 월급만 축 내는 빈대지. 나른한 시골 동네의 풍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 근데, 이거 진짜 게임이 될까. 

그런데 그 노팅힐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의 풍경이 가득해. 
한마디로 포근하지. 시골 변두리의 다소 번잡한 시장과 잘 어울리는 주변 풍경은 절로 미소를 띄우게끔 유도하고. 가슴(감성)보다 머리(이성)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에겐, 소박한 도시의 여유가 게으름으로, 관심은 간섭으로 치환되곤 하잖아. 가슴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잊어가는 사람살이는 속도전과 무한경쟁이란 명목으로 마음의 감옥을 쌓고 말이야. 그런 대도시와는 전혀 다른 곳, 노팅힐. 모름지기, 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플의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로 적절치 않겠어? 꽉 짜여진 메트로폴리탄의 일상에선 길어올리기 힘든, 사랑의 어떤 시작. 

해방과 자유를 꾀하는 안나가, 결국 일을 벌려. 
그건 바로 '탈출'. 시골마을의 자유와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겠지. 윌리엄의 책방을 찾고, 다시 골목에서 그들이 부딪혔는데, 아뿔싸, 오렌지주스가 쏟아지네. 안나의 옷에 젖은 오렌지주스는 결국, 사랑에 젖게 만드는 촉매제! 이름하여, '오렌지주스 로맨스', 무척이나 맛있는 과즙음료를 넘기는 순간이야. 꿀꺽. 캬~

그리고, 두 사람의 낭만적인 사랑의 매개물은 윌리엄의 친구들이야. 
(신분상) 너무 다른 두 사람이지만 함께 있으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도, 이들의 살가운 주책과 한없는 간섭·푸념이 한몫하지. 삶에 대한 낙관과 곰살 맞은 속삭임이 일상사를 가꾸는 순간.

하긴 주변 친구들, 나름대로 사연, 많지~
윌리엄의 여동생은 빈둥대면서 시집 못 간 신세타령이나 하고, 윌리엄과 함께 사는 친구는 괴상한 옷을 입고 말썽이나 부리는 돌아이야. 불의를 사고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자 불임까지 된 윌리엄의 옛사랑과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는 그녀의 남편, 또 투자를 제대로 못해 회사 퇴출을 겁내면서 무기력하게 살거나 파리만 날리는 음식점의 주인이 된 친구 등. 윌리엄의 주변은 낙오자들로 가득해.  

그러나 그들은 지지리궁상이 아니야. 
'누가 더 비관적인 인생인가'로 시합을 벌이는 오십보백보의 사람살이지만 그들의 회합은 언제나 웃음과 따스함이 앞선다고. 대놓고 드러내진 않지만 은근하게 깔린 그들의 우정과 사랑은 윌리엄의 혼란스러운 사랑이 방점을 찍게끔 모든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아. 이런 그들의 풍경에 녹아들지 않을 재간은 없지. 

<노팅힐>, 남자신데렐라나 바보온달의 출세기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냐.
평범하게 꾸미는 인간적인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드러낸다구. 운명임을 강조하지도 않아. 자연스런 감정을 투영하면서 사랑의 장애물을 넘는 과정도 과장되지 않고. 오렌지주스에서 시작된 그들의 로맨스는, 몇 번의 헤어짐에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득실을 따지지 않는 감정에 충실하게끔 진행되더라. 

그렇다면, 그 오렌지주스에서 시작된 사랑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자신의 고백을 거절했던 윌리엄의 바뀐 마음을, 기자회견장에서 확인하는 안나. 그녀가 내뱉는 'indefinitely(정해져 있지 않은, 영원한)'란 대답은 관객 마음에 묘한 공명을 불러일으켜. 상투적이고, 진부하지만, 로맨틱코미디의 힘은 의외로 강하다구. 정형화된 경로의 나열과 인위성이나 우연의 반복 등이 몰입을 방해하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다양한 변주로 그것을 극복하기도 하지. 메마른 대지에 내리는 촉촉한 비처럼, 관객들 가슴에 달콤쌈싸름한 사랑의 감정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로맨틱코미디가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이 영화, 어쩌면, 
'사랑이란…아주 소박한 꿈'같은 것임을 주지시켜줘. 배경인 영국의 작은 소도시인 '노팅힐'의 공기와 유머는 이와 '딱' 어울렸고. 

그래서, 
<노팅힐>은 꽤나 재치있고 상큼한 로맨틱코미디였어. 그리고 너무도 사랑스럽고 한번쯤 꿈꿔 왔음 직한 이야기를 재현했어. 환상 같은 사랑의 그림이 태연자약(!)하지만 굴곡 많게끔 흐르고. 굳이 현실성을 따지려 들 필요는 없어. 극중 안나가 윌리엄에게 말하는 "황당해도 즐거웠어요"라는 말이 영화를 대변하는 평인지도 모르지. 

함께 마실까? 이 맛있는 오렌지주스 로맨스!!!
오렌지주스 마시다보면, 안나처럼 환상의 여인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어쨌든, 그 사랑의 끝은 묻지마. 나도 몰라. 사랑의 시작은 우리가 훔쳐볼 수 있었지만, 끝은 온전히 두 사람의 것이야. 직접 물어보거나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 

혹시, 오렌지주스가 성공적이었다면, 알려줘. 
나두, 앞으로 그 오렌지주스만 마실래. 혼자만 재미보고 입닫기 없기닷.

그건 그렇고, 'She~'(Elvis Costello) 너무 좋지 않아? 이 노래, 들을 때마다 노팅힐의 영상이 눈 앞에서 줄줄줄 흘러내린다구. 영화도 그렇지. 씨봉, 첨 볼 때부터 그리 눈물과 웃음 범벅되게 하더니, 어찌 다시 되돌려 볼 때마다, 똑같은 현상을 불러일으키다니. 아, 씨봉. 글고 줄리아 로버츠의 1538만달러짜리 미소, 나의 여신은 역시 죽지 않아. 늙지 않아. 언젠가 필름 속을 걷게 된다면, '노팅힐'에 꼭 가볼래. 어때, 같이 갈까? 오렌지주스나 실컷 마시고 오자구. 혹시 알아. 줄리아 로버츠 같은 연인과 멋진 사랑에 빠질지...

She may be the face I can't forget
a trace of pleasure or regret
may be my treasure or the price I have to pay
She may be the song that summer sings
may be the chill that autumn brings
may be a hundred different things within the measure of a day.
She may be the beauty or the beast
may be the famine or the feast
may turn each day into a heaven or a hell
She may be the mirror of my dreams
a smile reflected in a stream
She may not be what she may seem inside her shell
She who always seems so happy in a crowd
whose eyes can be so private and so proud
no one's allowed to see them when they cry
She may be the love that cannot hope to last
may come to me from shadows of the past 
that I'll remember till the day I die
She may be the reason I survive
the why and wherefore I'm alive
the one I'll care for through the rough and ready years
Me I'll take her laughter and her tears and make them all my souvenirs
for where she goes I've got to be
The meaning of my life is she, she


Posted by 스윙보이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세계를 넓힌다는 것과 때론 동일한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물론 모든 영화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 한편의 영화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진 않지만, 한 사람의 세계를 바꿔놓을 수는 있진 않을까.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을 수도 있지. 당연, 영화가 반드시 그래야할 이유는 없다. 영화는 때론 혼자만의 것이니까.

오늘 묵은 영화 한편을 꺼내는 건, 역시나 그런 의미다.
내 세계를 넓혀 준 한편의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
떠들썩 하진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영화지.
누군가는 '시와 음악이 물빛 그리움으로 번지다...'라는 시 같은 헌사를 바치드만.

메타포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
<일 포스티노>가 준 선물이었다. 그만큼 내 세계는 조금 더 확장됐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칠레의 명민한 좌파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처음 알았고,
좋아하게 된 파블로 네루다의 '詩'라는 시를 만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메타포(은유)를 느꼈다.

9월23일, 오늘은 파블로 네루다의 34주기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구름의 저편으로 몸을 숨긴 세계의 문인.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
무엇보다 그는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을 꿈꾼 민중의 시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계급적 근원을 알고 계급성에 기반해 자신의 문학과 언행을 펼쳤다.
노동자의 아들로서, 칠레의 명예영사로서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접한 부조리가,
절친한 동료시인들을 잃은 1936년 스페인 내란이 그의 정치적 태도를 확립시켰다.
칠레 공산당에 입당해 빈곤문제의 해결을 위해 갖은 활동을 했지만,
네루다는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망명생활을 하게 됐다. (<일 포스티노>에는 망명생활을 하는 파블로 네루다가 나온다.)

다시 돌아온 칠레였지만,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는 네루다의 희망을 꺾고 기력을 쇠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펜을 놓았다.
그의 장례식에는 엄청난 수의 군중들이 모여들었고, <인터내셔널가>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그 광경은 참으로 벅찬 장면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정신과 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피노체트의 군부독재 마감에 일조를 했다는 말은 그만큼 칠레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방증하는 것이겠지.

사실 그는 '사랑'에 목마른 연애시의 대가였다.
약관의 나이인 20세에 낸 두번째 시집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로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된 그의 이력을 봐도 충분하지.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시를 쓰지 못하게 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찾게 된 이름이 체코슬로바키아의 하층민 출신 시인 '얀 네루다'였고, 그는 여러가지 필명을 쓰다가 네루다를 선택했다. "체코의 서민 시인이었기 때문에 계급적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본명은 도저히 기억할 수 없는 이름이다. 리카르도 네트탈리 레예스 바소알토. 휘유 -.-;;

20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 체 게바라가 죽기 전 필서하면서 들고 다니던 시가 파블로 네루다의 것이었다지? ☞ 게바라 죽는 순간도 ‘詩와 함께’

이걸 밝히면 더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내 이력서에는 파블로의 작품 '詩'의 한 구절을 변용한 문구가 있기도 했다.^^;;

파블로 네루다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 파블로 네루다(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아마 3년여쯤 됐나. <일 포스티노> 감상기다. 가을, 편지,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 이번 추석엔 <일 포스티노>를 다시 꺼내 봐야할 것 같다. '詩'를 한번 읊어봐야할 것도 같고. 지난해 타계한 <시네마천국>의 알프레도 아저씨, '필립 느와레'가 <일 포스티노>에선 파블로 네루다로 나온다는 사실. 필립 아저씨를 보고 싶기도 하고.

사실 <일 포스티노>가 한편으로 안타까운건,
우편배달부, 마리오 역과 각본을 맡았던 마시모 트로이시는 영화 촬영을 끝내고 이틀후 세상을 등졌다. 영화 촬영 전 두번의 심장수술을 했고, 영화를 찍으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 그는 <일 포스티노>와 함께 했다고 한다. 영화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걸까.

이처럼, 나는 파블로 네루다, 필립 느와레, 마시모 트레이시의 이야기나 모습이 담긴 <일 포스티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은,
극중 베아트리체 루소에게 푹 빠진 일포스티노, 마리오가 파블로 네루다에게 사랑에 빠진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장면. 물론 이건 영화를 봐야  좀더 확실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

"전 사랑에 빠졌어요"
"그건 심각한 병이 아니야, 치료약이 있으니까"
"치료약은 없어요! 치료되고 싶지 않아요... 계속 아프고 싶어요..."

"이 섬의 아름다움을 말해보겠나?"
"베아트리체 루소"

누군가 한국의, 서울의, 아니면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의 아름다움을, 자랑을 묻는다면,
당신은 반드시 지금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대라.
닭살이라고?
이봐이봐, 사랑은 원래 그런 거라구.
그리고 그것이 또한 메타포라규.

나는 당신의 사랑을 지지한다. ^.^
그리고 올 가을엔 꾹꾹 눌러쓴 편지를 써 보는 건 어떻겠나.
<일 포스티노>도 함께 봐주면 좋겠다.

아니면 황지우 시인의 '일 포스티노'(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 수록)를 읊어도 좋겠군.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히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 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 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숏, 롱테이크되고 ;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시와 편지 그리고 바다, <일 포스티노> (2004. 3)

편지. 참으로 먼지 폴폴 날리는 오래 묵은 골동품과도 같은 뉘앙스다. 이제 ‘편지를 쓴다’는 행위는 목욕재개하고 신실한 마음에서만 가능할 것만 같다. 벌써 향수가 된 건가. 내 안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떠오르지 않는 시상(詩想)으로 머리를 쥐어짠다. 그리고 또박또박 한자한자 꾹꾹 눌러담는다.

more..


'이야기가 있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뼘] 뇌 알기 주간  (2) 2008.03.10
[한뼘] 글쓰기  (0) 2007.09.28
파블로 네루다, 그리고 <일 포스티노>  (4) 2007.09.23
다행이다  (0) 2007.09.10
"나는 당신의 오랑우탄 입니다"  (0) 2007.05.15
4월23일은 책과 장미를 싣고,  (0) 2007.04.23
Posted by 스윙보이

첫 소절을 만나고선 눈물이 울컷 솟는 어떤 노래들이 있다. 어쩌다 들을 때 특히 더 그렇다.

그건 어떤 추억과 맞닥뜨려서일 것이다. ㅠ.ㅠ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면


에이 안 되겠지, 하면서도 한편으로 혹시나하며 기대했던 어떤 축제에서 작은 상을 타게 됐다.

오래전에 써 놓은 글이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날 위로해 주기도 하는구나.

그래, 아주 작지만 지금-여기의 내 생에선 크나큰 위로다. 요즘 같이 너절한 슬럼프에선 더욱더.

생은 가끔 이런 식으로 위안을 받는다. 나는 숨을 쉰다. 휴우.


그런데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는 일말의 기적 혹은 기대감마저 박탈당한 사람에겐 저 노래가 너므너므 아플 때가 있다. 죽음이 그렇듯, 연애도 사랑도 결코 익숙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매번 그 대상이 다르기 때문일까. 죽음도, 연애도, 사랑도 진짜 연습이 없는 법이다.

Posted by 스윙보이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55)
함께 살자(공유와 공동체) (51)
식품 정의(페어 푸드) (8)
또 다른 미디어 (22)
이야기가 있는 풍경 (10)
미디어 소믈리에 (13)
놀아라, 직딩아~ (31)
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236)
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49)
저자와의 만남(기고) (2)
돼지털 싱글스토리 (82)
나는 당신을, 감탄한다... (45)
프로이트와는무관한불친절한.. (5)

달력

«   2018/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get rsstistory! Tistory Tistory 가입하기!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