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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의 날'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5.17 당신과 나, 혹은 그들의 스무살에게... by 스윙보이
  2. 2008.05.18 스무살, 너에게 바친다, by 스윙보이 (2)

오늘밤.
최근 ≪은교≫를 낸 소설가 박범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뭐라 딱히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 곱씹고 있다.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말고! ^^; )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천천히 거닌 내 밤길이 내겐 그랬다.

그 정화는 아마도, '욕망'에서 비롯됐다.
누구로부터, 특히 자본으로부터 주입된 가짜 욕망이 아닌,
내 안의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욕망, 말이다.  
최근 만난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의 김원영 씨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일컬어진 그 욕망.

스무살.
'성인'이 됐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대지만, 
실상 대부분 어른들은 무책임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다.
스무살 그네들이 온전하게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저 자신들이 휘둘리고 있는 가짜 욕망을 그들에게 주입하고자 용을 쓴다.
하긴, 나도 그랬다. 온전히 내 욕망을 모른채 그 가짜가 내 것인줄 알았다.

얼마 전, 한 강의.
김규항 선생님은 열아홉까지 생을 잃어버린 한국의 아이들을 말했다.
스무살 이후를 본격기 인생이랍시고, 아이들에게 온전한 자신의 욕망 혹은 생을 봉쇄하도록 만든 부모들, 그러니까 어른들.  
'오늘이 인생임'을 알려주지 못한 죄.
하긴, 어른이라는 작자들도 모른다. 그네들의 욕망이 제 것인지 아닌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랬단다.
어른들한테 호감을 주는 학생은 문제가 있다고. 
적당히 나쁜 짓, 연애질도 하고, 적당히 민폐도 끼쳐야 건강한 청춘.
'요새 젊은 애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쯧쯧' 소리를 들어가면서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정상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오늘, 스무살이 된 청년들이,
혹은 스무살이 되기 전의 아이들이,
그리고 '스무살 이후'임에도 아직 자신의 욕망을 모르는 어른아이들이, 
온전하게 자신의 욕망과 마주대할 수 있기를.

나 역시 그러하기를. 
아주 약간 정화된, 오늘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부는 바람에게 바라본다.
'정화'라는 표현을 쓰니,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이 생각나네.
암! 김민선처럼 예쁜 사람을 만나 사랑하면 충분히 그리 될지니. ^^;

아울러,
어른이라는 작자들, 스무살 이전의 아해들에게,
무한경쟁이랍시고 남들 짓밟고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고,
누군가 어떤 사랑을 하든, 그것을 혐오하지 않고, 억압하지 말 것을 알려줬어야 했다. 학창시절, 동성애를 병처럼 여기며 알랑방구 끼던 어른들의 뻘소리를 나는 아직 기억한다.

5월17일은, 그렇게 아이다호 데이(IDAHO-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 Transphobia,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란다.

지난 1990년 5월17일.
세계보건기구(WHO)가 정신질환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성인이 되는 것은, 그렇게 사람들을 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와 달라도, 그들이 가진 진짜 욕망을 인정해주는 것. 이해까지 바라지도 않아!
5월17일 ‘아이다호데이’를 아십니까 / 서정은
게이, 아직도 신기한가요?

아울러, 5월18일. 30년이 됐다.
광주민주화항쟁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도 어른들의 몫이다.
나는 스무살이 될 때까지, 어떤 어른으로부터도 5.18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여전히 아프다. 참 좆 같은 일이다.

스무살, 너에게 바친다,
성년의날에 생각하는 미디어와 세계관

Posted by 스윙보이

5월19일 성년의 날. 스무살이 된 너는, 누군가로부터 어떤 징표를 받겠지.
사랑을 고백하고픈 혹은 성년이 된 너를 위해 준비한,
스무송이 '장미'를 통해, "나의 진실한 마음을 알아 주세요"라는 고백을 받거나,
향긋한 '향수'를 손에 쥔 너는, "언제나 나를 기억해 줘"라는 속삭임을 듣거나,
무엇보다 너를 황홀하게 만들지 모를, 잊지 못할 기억을 위한, 알싸한 '키스'가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1973년부터 시작된 '성년의 날'은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하더군.

만 20세가 된 젊은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질 성인으로서 자부심과 책임을 부여하는 날로, 매년 5월 셋째 월요일이며, 국가청소년위원회가 주관한다. 1973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6615호)에 의거 4월 20일을 성년의 날로 정했다가 1975년 5월 6일로 변경한 1985년부터 5월 셋째 월요일로 정해 기념일 행사를 열고 있다...         -두산백과사전 중에서-


사실 요즘의 '미친 소'시국에서 생각해보면, 이 설명, 완전 틀렸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질' 존재는, 어른(성인)이 아니다.
어른은 그저 망쳐놓을 뿐이다. 쪽 팔린다. 미친 소까지 대놓고 불러들이는 어른들이다.
구정물 같은 세상. 청소년들이 외려 낫다. 어른들은 이것저것 재고 통빡만 굴릴 뿐이다.
성년이 짊어져야 할 국가와 민족의 장래는, 요즘엔 차라리 청소년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해학과 풍자의 정도도 어른을 뛰어넘는다. "내가 광우병 걸려 병원 가면 건강보험 민영화로 치료도 못 받고 죽을 텐데 화장을 해 대운하게 뿌려다오"라니. 허허. 이런 센스쟁이들~

요즘 10대가 어른보다 나은 이유들 몇가지
☞  어른들 “10대들에 부끄러워 나왔다”
☞ [삶과경제] 광우병 괴담? 노동절 괴담? / 강수돌
...교육청에선 청소년 안전 운운하며 문화제 참여를 저지하거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한다. 아이들은 “야간 자율학습도 밤 12시에 끝나는데, 언제부터 안전 걱정 했냐?”고 받아친다. 청소년을 ‘미숙아’로 파악하는 기성세대를 향한 통쾌한 한 방이다. 실제로 청소년은 미숙아가 아니라 ‘날마다 어른이 되어 가는 사람’이다. 그들 말을 괴담이라 회피하지 말고 경청하라...

☞ [시론]10대들은 왜 거리로 나왔는가?/진중권
...나중에 몇몇 학생들을 만나서 그 자리에 왜 나왔는지 물어 보았다. “대학 졸업해 좋은 직장 얻었는데, 광우병 걸리면 어떡해요?” 길에서 만난 여고생은 매우 솔직했다. “확률이 47억분의 1밖에 안 된다잖아요.” 슬쩍 시비를 걸어 보았다. “우리는 학교에서 급식을 받잖아요. 아직 나이도 어려서 앞으로도 오랜 기간 먹어야 하잖아요. 광우병은 잠복기가 10년이라는데, 지금 먹은 쇠고기가 10년 후에 광우병을 일으키면 어떡해요?”
한마디로, 자기들에게는 음식을 선택할 권리가 없고, 나이도 어려 앞으로 광우병 쇠고기 위험에 노출되는 시간도 가장 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른이 된다는 것, 성년이 된다는 것. 과연 축하할만한 일일까.
청소년기의 저토록 멋진 해학과 풍자, 그리고 과감한 행동력과 실천력, 즐거운 유희의 정신은 성년이 된 이후에도 살아남을까.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덫(실업, 비정규직...)에 걸려 그만 잊어버리진 않을까.

뭐, 어줍잖고 미욱함에도, 생물학적 나이만 어쩌다보니 어른이 된 나의 공연한 노파심이렷다.
나는 스무살의 문을 열고 들어온 너의 이야기를 믿고 싶다. 아니, 믿는다. 너는 지금의 무력하고 슬픈 세상에 대안을 열어줄 것을.
장미보다 붉은 너의 마음, 향수보다 진한 너의 향기, 그리고 키스만큼 황홀한 너의 젊음을, 나는 믿는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지기도 싫고, 철이 너무 무거워 들지도 못한 근력 약한 내가,
스무살이 된 너에게, 스무송이 장미도, 향긋한 향수도, 황홀한 키스도 건네질 못하지만,
대신 너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너는 이제,
너보다 앞서 스무살을 관통하고 '스무살 이후'를 살고 있는 어른들이 지멋대로 축조한 절망과 슬픔의 성벽 뒤에서 남몰래 눈물도 훔치고 좌절하는 순간을 수도 없이 맞이할 것이다.

그래도 너는,
툭툭 털고 일어나 미친 소를 끌고 온 미친 어른들의 전철을 밟지 말고 그들의 태도를 비웃고 그들의 허울 좋은 권위에 똥침을 날려라.  

나는 네가,
한국에서 삶의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남은 유일한 인간군 중의 하나로 남길 바란다.
그땐, 내가 너를 태우고 자전거를 태워주겠다. 네가 본 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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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키즈 리턴>

성인’ 혹은 ‘성년’의 꼬리표는 사실 그냥 오지 않는다. 세월 먹는다고, 시간 보낸다고 거저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무살이 되면 으레 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정부에서 편의상 정한 제도일 뿐이다. 성년의 날도 그렇다. 스무살이 됐다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변화는 그리 분명치 않다. 19년 364일과 20년 1일 사이의 간극이 그리 클 리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그건 그만한 고통을 수반해야 한다. 성장통이라고 불리는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또 세상은 내 의지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디 그뿐이냐. 맘먹은 대로 안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세상 아니더냐. 그렇다. 훌쩍 커버린 어느 날, 그건 그만한 고개를 넘어왔기 때문이다.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 스스로 몸으로 체화해야 하는 것, 소화불량이 돼 몸 밖으로 나와 버린 어떤 것 등등. 뒤죽박죽이다. 역시 성인이란 타이틀은 그냥 딸 수 없다. 그리고 그 때는 저지르기만 할뿐 수습하지 못한다. 주워 담을 수 없는 흔적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그래서 ‘그땐 그랬지’라는 과거 회상조의 읊조림도 나온다.

한편으로 성인은 홀로 갈 것을 명받는 나이다. 그 어린 날 함께였고 함께일 거라고 생각도 했던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진다. 나를 지키고 돌보는 건 수호천사의 몫이 아니다. 이젠 ‘홀로서기’라는 걸 배워야 한다. 이런 불안이 엄습해 온다. 어린 새는 둥지를 벗어나기 위해 날개 짓을 하지만 그 날개가 처음부터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 아득한 추락의 이미지까지 감안하면서 어린 새는 날개 짓을 습득한다. 온전한 날기가 되는 날, 어린 새는 온전한 새로서 자리매김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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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부유하다...

신지와 마사루(마짱)가 그렇다. <키즈 리턴>은 아이에서 어른이 돼 가는 그들을 덤덤하게 담는다. 이른바 문제아로 불리는 마짱은 신지를 ‘시다바리’ 삼아 하릴없이 부유하고 다닌다. 그들에겐 어떤 목적이나 목표도 없다. 선생님을 희화화해서 골탕 먹이고 학생들에게 삥을 뜯거나 성인영화를 보려고 전전할 뿐이다. 그들에게 인생은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잔혹사가 아니다.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밀착으로 대충대충 연기하는 무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잣대를 들이댈 것이다. 희망 없는, 싹수 노란 아이들이라고. 이들이 그렇다. 이름도 있고 존재도 있지만 세상은 그걸 알아주지 않고 외면한다. 따뜻한 시선보다 무시 혹은 무관심의 그늘에 익숙한 그들은 어느 날 권투를 만난다. 불온한 목적으로 권투도장에 나간 마짱과 달리 신지는 우연찮게 권투가 자신에게 맞는 것을 발견한다.
 
신지는 권투에 더욱 몰두하게 되고 체육관의 유망주로 도약한다. 권투를 떠난 마짱은 야쿠자로 편입돼 차츰 성장가도를 달린다. 끈적끈적하던 둘의 관계는 다른 길을 걷는 행보로 인해 서먹하게 된다.
 
그들은 예기치 않게 누군가를 대신하고 자신의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특별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성년으로 치닫고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도 않다. 주어지니까 할 뿐이다. 새장에 갇힌 새들은 먹이가 주어지니까 먹을 뿐이고 날지 못하니까 날개가 퇴화한다. 영화는 그저 덤덤하다. 각자가 가는 길에 묵묵히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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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달린다, 청춘...

그러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달린다. 자전거를 타고 혹은 다리를 움직여서 달린다. 아니면 끊임없이 만담을 하는 누군가들이 있다. 현실은 두 종류의 인간들이 있다. 꾸준히 자신의 꿈을 향해 매진하는 인간과 이리저리 부유하고 치이다가 어느 순간 어딘가에 있는 인간.

<키즈 리턴>에서는 콤비 만담가를 꿈꾸던 두 친구들만 자신들만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지는
실패한 퇴물복서의 잘못된 인도에 끌려 다니다가 패배에 익숙해지고 마짱은 중간보스로서 어울리지 않는 경박함과 한동안 자리를 비운 선배 야쿠자의 복귀로 고꾸라진다. 성인으로 가는 과정에서 둘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 같다.

과연 그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신지와 마짱의 모습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대로 재연된다. 옛날처럼 타 보자며 예전과 똑같다는 학교를 자전거로 돌아다니는 두 사람. 그리고 그 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성인이 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현실. 각자의 길을 거닐었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확신하지 못한 채 낙마했다. 신지는 묻는다. “우린 이제 끝난 건가요?” 마짱은 대답한다.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둘은 절망을 겪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것을 내보인다. 자전거는 그렇게 예고한다. 그들이 다시 달릴 것임을.

마짱이 먼저 앞서나가고 신지가 뒤를 좇는 모양새는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의 관계와 같다. 또 앞바퀴가 그어놓은 흔적과 절망은 뒷바퀴가 수습하고 쓰다듬는다. 어찌됐건 절망을 지우려는 희망의 목소리는 “다시 시작한다”로 귀결될 것이다. 자전거에 함께 올라탄 그들의 인생은 어쩌면 이전의 절망도 어쩌면 달콤했던 것으로 기억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전거 페달을 돌려 단절된 희망의 속삭임을 되살리려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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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 그럼에도 되풀이되는 것들이 있다. 자전거를 다시 타고 나타난 그들처럼, 커피숍에서 데이트를 신청하는 그 누군가처럼 사람은 달라져도 되풀이되는 그 무엇도 있다. 강철은 불에 달궈질수록 강해진다는 말, 원하건 그렇지 않건 한번 건너온 강에서 노를 젓던 노하우는 다른 강을 만나더라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성장이니까.

어찌됐건 나는 누구에게든 어른이 되는 날을 축복해주고 싶다. 설혹 그것이 앞으로 절망과 고생의 가시덤불을 예고하는 스타트라인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껍데기를 벗고 세상에 알몸으로 뒹굴어야 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언젠가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똑같은 품새로 “다시 시작”을 얘기할 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우리는 싱긋이 웃어주면 된다. 절망의 기운이 뚝뚝 떨어진 그곳에서 누군가는 희망의 페달을 밟고 있을 테니까. 궁상맞고 우스꽝스러울 지라도 누구에게도 성장은 비껴가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 맞다. 그게 스무살이지 싶다. 물론 스무살 이후에도 확실한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없다. 스무살은 그저 기억하기 좋은, 낭만적인 퇴행을 위한 레토릭일 수도 있다. 아니라면 더욱 좋고.

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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