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아이다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11.01 청춘의 시작과 끝, '리버 피닉스' by 스윙보이
  2. 2007.10.31 불사조가 된 청춘, '리버 피닉스' by 스윙보이 (2)

오늘, 시월의 마지막 날.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헤어졌다던 그날.
좀더 어린 시절, 날 매혹시켰던 한 청춘의 시작과 끝.
집시의 아들이 어쩌다 할리우드라는 정글에 몸을 담게 됐지만,
히피처럼 자연과 좋은 사람들과 공생하면서 생을 꾸리고 싶었던 한 청춘.

오늘 하루,
1993년 10월31일, 구름의 저편으로 간, 
길의 감식자, '리버 피닉스'를 생각한다.

'히치하이커'에 기고했던 글.

*******************

여기 이 말.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먼저 꺾어 식탁을 장식하듯,
신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데려가 천국을 장식하신다… ”


그래서일까. 어떤 청춘은 천재의 이름으로, 신화란 명목으로 하늘의 이른 부름을 받는다. 10월의 마지막 날, 한 청춘이 영원히 박제됐다. 시작인줄 알았던 청춘은, 끝을 선언했다. 내가 아는 한 아름다운 청춘의 시작과 끝, 그 이야기.


리버 피닉스. 지난 93년 10월의 마지막 날, ‘유목민의 아들 ’로서 세상에 처음 등록을 했던 리버가 할로윈 파티를 핑계로 들썩거리던 선셋대로에서 영원한 잠을 청했다. 23년, 길지 않은 세월.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청춘은 그렇게, 한 시절을 마감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청춘의 끝. 시작부터 리버는 어쩌면, 그 끝을 잉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리버는, 기실 실체를 잡기 힘든 청춘의 아픔이 고스란히 투영됐다는 점에서, 청춘의 아이콘이자 자화상이었다. 청춘 예찬의 다른 한편에 둥지를 튼. 왜 그렇게 훌쩍 우리 곁을 떠나야 했는지, 무엇이 그를 차가운 바닥으로 내몰았는지, ‘Nobody Knows’. 다만 리버에겐 삶과 죽음은 이항대립이 아니라, 자웅동체의 구조물이었으리라. 

그런 면에서, <아이다호(My Own Private Idaho)>는 리버의 생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혹자는 이 영화를 보는데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툭하면 쓰러져 둥지에서 떨어진 새처럼 길 위에서 떠는 영화 속 그의 모습이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 뒹구는 그의 최후와 포개지기 때문 ’이라고. 짧은 시간 태엽처럼 휘감아 돌던 청춘의 흔적이 그토록 강렬하게 와 닿는 건, 리버도 여느 전설마냥 생을 일찍 마감했기 때문이다. 어느 청춘이나 한때 그런 삶을 꿈꾼다는 점에서 더욱이나.

청춘의 빛나는 표본, 리버 피닉스

리버를 처음 본 것은, <인디아나 존스3 - 최후의 성전>에서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의 어린 시절로 나왔을 때. 그리고 <스니커즈>에서 재기발랄한 청년으로 나온 리버를 만났다. 강렬한 눈빛과 깎아 만든 아름다운 얼굴이 인상적이었던 배우,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다, <아이다호>를 만났다. 이후 죽음의 구덩이로 발을 디딘 그를, 가슴 한켠에 아로새기는 건 당연한 나의 몫.


리버는 독특한 체취를 풍겼다. 게토에 머물렀던 청춘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할리우드의 거대 울타리 안에서도. 리버의 청춘은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장식했던 시기의 우상이었다. 랭보가 보낸 ‘지옥에서의 한 철’이나 제임스 딘의 ‘에덴의 동쪽’이 어디에 있으며, 짐 모리슨의 ‘The End’가 어떤지 알고 싶어하던 시기, 리버는 살아있는 표본이었다.

그런 와중에 날아든 리버의 부고. 죽지 않는, 불멸의 새, ‘피닉스(Phoenix)’라는 이름은 아이러니였던가. 아님 그의 청춘을 불멸의 것으로 명명하기 위한 정해진 수순인가.

자유와 청춘, 그리고 길의 감식자, 리버 피닉스

아마도 리버는 후자가 아니었을까. 아라비아 사막에서 500∼600년마다 스스로 향나무를 쌓아올려 타 죽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영조(靈鳥)라 불리는 ‘피닉스’. 리버는 결국 탐욕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할리우드를 견디지 못하고 향나무를 쌓아 올린 것이다. 히피와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 자본과 탐욕의 경계 안으로 몰리면, 선택은 불을 보듯 훤하다. 불사의 길. 리버의 선택은 자명했던 셈이다.

혹은, 미이라 콤플렉스에 시달렸는지도 모른다. 이집트 미이라처럼 사후에도 영원히 감정을 박제하고픈 욕망처럼, 청춘은 봉인해야만 그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본 건 아닐까. 세월 앞에 변치 않을 청춘은 없음을 알기에. 아니면, 그렇게 아프고 쓰라린 상흔을 품고 있음에도, 우리가 언제나 예찬하는 그 청춘을 지키기 위해. 리버는 선택했다.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청춘에 머물 것을. 청춘, 그 박제하고픈 가상현실은 영원히 버릴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그림자처럼, 리버에게 따라붙어 있다.

리버, 어쨌든 나쁜 녀석이다. 떠나기 전 나보다 ‘형’이었던 그는 여전히 그대로다. 나는 이제 그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억지로 해야 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은 일이 더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세월은 점점 더 내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청춘의 시작과 끝, 리버 피닉스.

<아이다호>에서 영원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던 리버는 어쩌면, 그 아이다호를 찾아 원혼이 돼 있는 건 아닐까. 끝없이 나 있을 것 같은 2차선의 길 위에서,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청춘의 자화상을 드러내는 <아이다호>에서의 리버. ‘그 길을 간 적이 있음에도’ ‘엔진을 끄지 말아야 했음에도’ ‘일그러져 보이는 그 길을’, 리버는 어김없이 거닐고 죽음 같은 몽환 속으로 빠져 들었다. “평생 길을 맛볼 거야. 이 길은 끝이 없어. 지구의 어디라도 갈 수 있어...” 라던 그의 대사처럼. 길의 감식자, 청춘의 감식자였던 리버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다.


이렇듯 가을에서 겨울을 넘보는 문턱이 되면, 늘 몽환적인 선율과 그 삶으로 인해 아름다웠던 한 청춘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이런 말을 건네줄 것 같다. “안녕? 나와 함께 아이다호로 가주지 않겠니?”라고. 이 불가해한 청춘의 이야기.

하지만, 정말 그가 ‘피닉스’처럼 다시 살아나길 바라지 않는다. 박제된 청춘 그대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길. 다시 태어나도 같은 굴레에 머물 것이라면 그 신비감을 유지한 상태가 좋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그렇게 어쩌면 누군가의 가슴 속밖에 없다. 우리의 청춘도 그렇게 자연스레, 소멸할 것이다. 가슴에서 영원한 청춘으로 머물러다오, 리버 피닉스.

2007/10/31 - [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공존] - 불사조가 된 청춘, '리버 피닉스'

Posted by 스윙보이

누군가에게 가을은 그렇더이다. 가을은 고독 혹은 외로움. 아니면 그리움.
시월의 마지막 날. 아무 것도 아닌 날이면서도 아무 것도 아닌 날이 아닌 날.
사실, 쓸데 없는 장난이지.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만들어 놓은 '시월의 마지막 밤' 환상과,
리버 피닉스의 요절 혹은 영면이 새겨놓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박제된 아름다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끔 그렇게 속절없이 날 울리는 게지.
악마적인 퇴폐와 고질적인 순수를 가졌던 한 청년.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사람.

매년 지겹지 않냐,고 누군가는 묻는데.
글쎄. 아직은 그닥 지겹진 않네.
사실 이렇게라도 꺼내지 않으면,
내가 이 세계의 야만 속에 속절없이 함몰될 것 같고,
감성이 노화하여 땅으로 하강한 낙엽처럼 바싹 으스러질 것 같아.

결국 지난해 긁어부스럼이 된 감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지만,
어설픈 그리움의 연서로 기록되겠지만,
내 헛된 바람 중 하나는, 어떤 식으로든 리버 피닉스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

<리버 피닉스 따라하기> 이런 제목은 어떤가.
아니면, <누가 리버 피닉스에 약을 먹였지?> 혹은 <리버 따라 피닉스로 영면하다>.

흠. 별로 재미없지? 좀더 리버럴한 이야기와 형식이 필요해.
<김수영, 리버 피닉스를 만나다> 이런 건 어때?

시인 김수영과 리버 피닉스는 물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김수영은 1968년에 교통사고로 세상과 결별했고, 리버 피닉스는 1970년에 태어났다. 조금이라도 겹쳐지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리버 피닉스가 김수영의 환생이라고? 에이, 설마. 그건 나야, 나.^^;;;;;;;;;;;;;;;;;;

나비의 몸이야 제철이 가면 죽지마는
그의 몸에 붙은 고운 지분은
겨울의 어느 차디찬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지리라
그러나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이러하지는 않다


다만, 김수영은 고독한 사람의 죽음이 어떠한지 안다. 1955년에 발표한 <나비의 무덤>을 보자.
김수영은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나비의 죽음과 다름을 말했다.
나비의 고운 지분은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질 것이지만, 고독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고독한 사람이 남긴 지분은 어쩌면 영원히 살결 속에, 가슴 속에 박혀버릴지 모른다.
내가 아는, 리버 피닉스는 그렇게 고독한 사람이었다.
시월은 그렇게 제철이다. 쓸쓸함이 묻어날듯한 낙하의 계절.
나는, 리버 피닉스가 아프다.
 
죽었지만 죽어 소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꼭 어디선가, 나타나 '안녕, 잘 있었어?'라는 말을 건네줄 것만 같은 망자들.

리버 피닉스도 그렇다.
어쩌면 어딘가에 꽁꽁 숨어지내는 것은 아닐런지,
아니면 집시처럼 계속 어딘가를 떠돌거나,
진짜 자신의 별로 돌아가버렸는지도.
대체,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리버 피닉스는 세상에 여전히 체취를 드리운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삼투하지 못한,
그래서 요절할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물론, 다시 시월의 마지막 날이 왔기 때문이겠지. 10월31일. 
뜻 모를 이야기조차 남기지 않은 채 헤어졌기에,
나는, 우리들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more..

Posted by 스윙보이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55)
함께 살자(공유와 공동체) (51)
식품 정의(페어 푸드) (8)
또 다른 미디어 (22)
이야기가 있는 풍경 (10)
미디어 소믈리에 (13)
놀아라, 직딩아~ (31)
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236)
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49)
저자와의 만남(기고) (2)
돼지털 싱글스토리 (82)
나는 당신을, 감탄한다... (45)
프로이트와는무관한불친절한.. (5)

달력

«   2018/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get rsstistory! Tistory Tistory 가입하기!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