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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8.15 건국절 아닌 '광복절'에 생각하는 ‘비정성시(悲情城市)’ by 스윙보이
  2. 2007.11.26 볼수록, 또 보면, 자꾸만, 빠져든다, 탕웨이... by 스윙보이 (4)
거참, 별 희한한 꼬라지를 다 본다.
이젠 '광복절' 말고 '건국절'을 만든다고 하신다.

건국절이라는 용어가 해괴하다는 거, 아니다.
그걸 모의하는 쉐이들의 속셈이 괘씸하고 얼척 없다는 게지.
듣자하니, 보자하니, 쪽 팔리단다.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이.
그래서 '광복(해방)'을 지우잔다. 앞으로 밝은 미래를 위해 건국을 따르자한다.

꼴통들이 광복을 싫어하는 이유는,
여기 아주 잘 기술돼 있으니 참조하면 될 터이고.
☞ "건국절? 차라리 8·29를 '문명절'이라 해라"
 
일찌감치 처리했어야 할 친일 청산 제대로 못하는 나라다보니,
어찌 당연한 결과 아니겠냐는 자조 팍팍 섞인 소리까지 나온다.
그 꼴통 수괴부터 꼬붕푸들의 대갈통에 (친일)청산가리 팍팍 뿌려불고,
한 국가나 민족 같은 틀 깨고 따로 '건국'해부렸음 하는 바람까지 생긴다.
헐~

어차피 그들과 난 계급이 다르니,
우린 각기 다른 세계의 외계인과 인간이지만,
그 꼴통들의 언행이 미천하고 비루한 내게까지 영향을 미치니,
그게 탈이지. 쯧.

'노동절' 하나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분들께서,
뜬금 없이 내뱉는 말이, '건국절'이라니, 코미디 한번 제대로 하심과 아울러,
아니 그토록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염려하시고 민족과 국가의 위신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왜 '한글절' 같은 건 아예 언급도 안 하시나 몰러.

이럴 때 필요한 주문이 있지.
여병추~
(여기 병신 하나 추가요~)

아니, 축구장에서 못하는 게 없는 요즘.
("축구장 물 채워라. 태환이 수영해야 된다."
"겨울에는 물 얼려라. 연아 스케이트 타야 된다."
"바닥에 매트 깔아라. 민호 유도해야 한다."
"골대도 줄여라. 핸드볼 선수들 연습해야 한다."... 등등)
이 꼴통들을 위해,
축구장에 건국 하나 시켜줘라. 거기서 살게.
지들 나라 거기서 하고 싶은대로 하게 하자.
개새끼들.

엉뚱하게도, 그래서, 한편으로 여전히 유효하게 된 글.
2004년의 광복절. 그리고 4년.
더 나빠진 세상.

또 다른 해방(광복)이 필요한 시기가 다가온다.
아,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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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과 ‘비정성시(悲情城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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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절되거나 굴절시키려는 역사가 있다. 과거 친일행위에 대한 침묵과 방관 혹은 권력의 기생, 자신의 것이 아닌 고구려사를 자신의 역사로 억지 편입시키려는 의도. 역사는 그렇게 현실에서 자맥질하고 있다. ‘광복절’은 그런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일깨우곤 한다. 역사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건 용납해선 안 된다. 엄연히 그건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움직임은 번번이 일부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좌절됐던 쓰라린 기억도 있다. 최근 논란을 거듭하고 있는 친일진상규명법 개정 문제도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광복절을 맞아 과거사 진생규명특위 구성을 제안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친일 뿐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등 쟁점이 됐던 사안을 포괄적으로 다루자는 것이다. 과연 해방이후 끊임없이 언급됐지만 더딘 발걸음으로 답답증을 유발키만 했던 ‘역사 바로 잡기’는 제대로 된 시동을 걸 수 있을까.


감격시대, 개막하다

라디오가 한껏 소리를 높여 부르짖는다. 평소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렇다.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이라는 거대한 대들보를 박고 침략적 제국주의의 병풍을 두르던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혹은 독립. 기나긴 식민시대의 종결을 라디오는 알린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흘러나온다. 라디오가 그렇게 흥분에 달뜬 목소리를 남기는 이유는 뚜렷하다.

이 풍경, 어쩐지 낯설지 않다. 직접 겪었거나 혹은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다. ‘빼앗긴 땅에도 봄볕이 드는가’하던 그 날의 풍경.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그날은 대한민국의 것만은 아니었다. <비정성시>의 무대, 대만에도 같은 날의 감격이 바다를 경계로 숨을 쉬고 있었다.

<비정성시>는 그렇게 시작한다. 라디오를 통해 전파된 감격시대의 개막. 하지만 그것 또한 또 다른 비극의 변주를 위한 하나의 서곡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 개인 혹은 어둡던 시대, 정치사회 이데올로기의 갈등의 파편이 튀긴 가족의 비극에 대한 기록. 거장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카메라는 그들의 삶의 궤적을 띄.엄.띄.엄, 동.정.없.이.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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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자욱한 산 정상의 모습은 영화의 빛깔을 대변한다. 영화의 무대였던 구분은 지금도 영화에 사용됐던 장소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 영화는 실제 대만에서 있었던 1947년의 2.28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공산당과 힘겨운 전투를 보내던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 시절, 대만의 까우슈를 중심으로 한 대만인의 독립 운동이 벌어진다. 장개석 정부는 이 운동에 대해 무차별 진압을 지시,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도시는 슬픔에 젖어...

‘슬픔의 도시(A city of sadness)’라고 명명된 거기에는 한 청년이 있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대신 온몸으로 비극을 받아내야 했던 임문청(허우샤오시엔 감독은 홍콩배우 양조위에게 이 역을 맡겼다. 양조위가 대만어를 할 수 없어 그만두려 했으나 어떻게든 그를 기용하려 했던 감독이 벙어리로 그 역할을 바꾸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하는 대신 사진사이며 젊은 맑시스트들을 친구로 두고 있다.

영화에서 문청의 역할은 절묘하다. 역사의 질곡 속에 말도 많고 온갖 뜬소문이 난무하는 시대, 귀 먹고 말 못하는 주인공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듣고 말하는 것을 그는 같은 상황에서도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오로지 필담만이 그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다.

<비정성시>는 주인공의 처지를 그렇게 설정한 뒤 현실을, 역사를 비정할 정도로 담아낸다. 일제 강점기를 건너 뛰었다싶은 안도감은 잠시, 중국 본토에서 쫓겨난 장개석 정부는 그들이 차별했던 대만에 둥지를 틀고 사람들의 목을 죄어온다. 매국을 했던 자가 계속해서 통치자의 위치에 군림하고 욕심을 채우게 되는 기득권의 강인한(!) 생존력. 소시민, 민초들은 그렇게 고통의 수레바퀴에 끼인 채 신음한다(일제에 영합했던 이승만 정권이 미국에 다시 빌붙어 대한민국 건국 이후를 이끌었던 이 땅의 역사와 자연스레 오버랩 된다).

주인공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개인 혹은 가족사가 잉태한 비가(悲歌)는 4형제의 삶을 지배한다. 조직 간의 암투로 죽음을 당하거나(첫째) 징용 당했다가 실종되고(둘째) 암거래가 틀어져 린치를 당해 미치고(셋째) 빨갱이사냥으로 인해 사형당하는(막내, 문청) 가족사가 바로 그것이다. 변방에 내몰린 국민당 정권의 발악은 정치적 저항의 때깔을 지닌 4형제의 숨통을 하나둘 끊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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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희생당한 개인들의 비극은 어디서나 상존한다


어쩌면 역사(혹은 집단)와 개인의 불화에서 당하는 건 언제나 개인이라는 것. 영화도 엄연히 이 사실을 말해준다. ‘감히 니까짓 게’라며 구둣발로 짓이기는 폭거 앞에 감수성 예민하고 선량한 청년, 문청은 끽소리 못하고 날개 죽지를 꺾이고 만다. 소박하고 선량한 그는 형들을 모두 잃고 임씨 가문의 유일하게 남은 적자가 되지만 결국 체포되고 만다.

사실 거기에는 어떤 논리적 이유도, 타당한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단지 그 시대를 관통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는 실존의 문제만이 있을 뿐.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처지마냥, 계란으로 바위치기임을 알면서도 저항할 수밖에 없는, 한편으로는 니힐리즘적인 서사가 문청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기실 이 영화, 온갖 고해성사가 난무한다. 뒤늦게 진흙 속의 진주를 캐낸 양 시네마를 유영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 영화는 ‘보석’같은 위치에 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을 수면 위로 부각시킨 단초가 됐던 영화. 1989년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타면서 감독의 이름을 만방에 알렸다. 그러나 1990년 국내 개봉 당시에는 무참하게 칼질 당한 채 만신창이가 돼 외면을 받기도 했다.


말을 넘어선 실천의 길을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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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청은 자신의 친구 관영의 누이, 관미와 결혼식을 올린다

<비정성시>는 해방 전후의 역사와 관련한 동질감 외에 ‘말’에 대한 조용한 속삭임도 건넨다. 말을 하지 못하는 문청이 역사의 격랑에 휘둘린 집안의 슬픔과 몰락을 몸으로 고스란히 체험하고 의식을 구성하는 과정을 보면 그렇다. 그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말을 한다. 오직 글로써 뇌를 거쳐 다듬어진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한다. 그래서 그 글로 주고받는 대화의 순간이 감정의 결을 보여주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기실 우리는 그럴듯한 말들로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다. 얼마나 많은 말들이 세상에 떠도는지, 말의 홍수라고 지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또한 그런 말들로 우린 각자를 평가할 뿐 아니라 미워하고 사랑하고 천냥 빚을 갚기도 한다. 물론 그 사람이 쓰는 글을 포함한 언어에서부터 행동거지, 용모 등 여러 가지 기준도 있겠지만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의 위력은 예사롭지 않다.

극중에서 문청의 말은 직접적인 대면 소통과정에서는 소외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 구체성을 띠고 진정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행위 즉, 실천에 있어서 문청은 여느 말 잘하는 달변가보다 훨씬 낫다.

속칭 ‘야부리’나 까는 인간들에 의해 야바위판이 돼버린 세상의 여느 공간들, 그 속에서 유영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문청은 나지막하게 이야기한다. 세치 혀를 놀려 그럴싸하게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은 아닌지,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할 듯 위선을 떠는 것은 아닌지. 특히 TV같은 곳에 나와서 올바름은 자신의 것 인양, 남 비방하면서 깐죽대는 정치인 혹은 연예인들, 혹은 바른 평론과 시각을 한답시고 혹세무민하기도 하는 언론 혹은 평론가들이 난무한다.  

문제는 결국 하나다. 언행일치! 말이 과연 행동과 일치하느냐 그 문제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쉽지만 실제 행동과의 일치가 어렵다는 것이 정말 딜레마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래서 우린 그걸 제대로 하는 사람을 ‘행동가’ 혹은 ‘활동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청은 행동가이며 온 몸으로 자신의 언어를 표현한 실천가인 셈이었다. 사람들이 발휘하는 생명력에 대한 고찰은 문청을 통해 전달된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화살이 내게도 온다. 이런 말, 저런 글 여기저기 날품팔이하면서 연명하는 나는 과연 얼마나 말(글)이 삶의 궤적과 일치하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문득 사형당하기 직전, 죽음을 준비하던 문청이 마지막으로 찍은 가족사진이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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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청은 죽기 전 가족 사진을 찍는다


P.S … 이 영화의 감독 허우샤오시엔은 얼마 전 부산영화제가 선정하는 제2회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이 상은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아시아 영화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이다. 허우샤오시엔은 최근 일본의 오스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헌정 영화 <가배시광>을 만들었고, 이 영화는 올해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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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의) '매혹'은, 치명적이다.
빠지면, 도리가 없다. 있는 것, 없는 것, 줄 것, 안 줄 것, 그런 것, 가릴 게재가 없다. '진짜 매혹'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벌거숭이가 돼야 한다. '남의 마음을 사로잡아 호림'이라는 '매혹'의 정의를 따르자면, 매혹은 곧, 권력과도 통한다. 사로잡는 자와 사로잡히는 자의 관계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매혹은 그렇다. 마음을 사로잡혔는데, 어찌하란 말이냐. 어쩌면, 마음은 감옥으로 향한다. 이른바, '마음의 감옥'. 매혹은, 그렇게 우리를 옥죈다. 매혹을 뿜는 자, 세계를 가질지니. 매혹을 당한 자, 무릎을 꿇어야 하나니. 경배하고, 추앙하라. 매혹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매혹이, 때론 나를 지탱한다.
나는, '매혹'을 원한다. 매혹 없는 생은, 많이 끔찍하다. 마음이 사로잡히는 것, 하나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쭈그렁한가. 그 무엇이건, 매혹은, 전 생을 걸쳐 꾸준하게 있어줘야겠다. 그건 감성 노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무릇 신산한 생을 지탱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나에게 오라, 팜므파탈. 제발 와줘, 팜므파탈.^^; 나는, 그러면서도, 걷잡을 수 없는 '매혹'이 덤비면 어찌하나, 노심초사하는 왕소심한 마초다. 그렇기에, 나의 매혹은, 얼쭈 '스크린'에서 이뤄진다. 알다시피, 스크린 속의 '매혹'은 어떤 치명상이나 내상을 부여하지 않는다. 즉, 안전하다. 소심한 작자는, 스크린을 통해 뇌살을 당하고, 매혹에 한없이 빠져든다. 매혹신의 강령.
2007/09/12 - [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공존] - 변양균이 '팜므파탈' 신정아에 빠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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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웨이, 나의 새로운 매혹, 하악~

나의 스크린 속, 첫 번째 매혹은, 우리 (장)만옥 누님이었다. 좋아하는, 아름다운 배우들은 차고 넘쳤지만, 나는, <화양연화>를 보면서, 허거거걱...꺼윽꺼윽... 만옥 누님은, 매혹 그 자체였다. 무엇으로 그 아름다움과 뇌쇄를 설명할 것이오. 그 쪽진 머리와 실루엣은, 나를 매혹으로 물들여놨다. 뱀처럼 내 마음을 휘감는, 늪으로 내 마음을 유도하는, 그럼에도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매혹. 또 다른 매혹은, 스칼렛 요한슨. 나는, 그 입술을 보면, 그것에 풍덩 빠지고 싶다. 그리고 약간 물 건너 지나갔지만, 나카야마 미호. 그런데, 얼마전, 그 유명한 <색, 계>(色,戒, 2007)를 보고, '포스트 장만옥'으로 덜컥, '탕웨이'를 임명하고 말았다. 만옥 누님이 아직 정정하심에도, 나는 탕웨이의 뱀같은 유혹에 넘어갔다. 아흑. 넘어간다~는 말도 안하고 그냥 넘어가더라, 털썩. 바야흐로, 탕웨이가 내게로 왔다.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이런, 이 미친 놈의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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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탕웨이.

코는 낮고, 입술은 작았으며, 젓살까지 찰랑. 얼굴은 또 어찌나 작던지. 나도 모르겠다. 이건, 평소 내가 넘어가던 매혹의 '조건'이 아니다. 어찌 이런 일이. 허나, 따지고 보자. 매혹에, 조건이 있을 수가 있나. 이러이러하니, 난 매혹당하련다, 이런 건 없다. 마음을 사로잡는 건, 순간이다. 어떤 순간이 확, 마음을 낚아채는 것이다. 나는, 낚였다. 탕웨이에. 숨도 쉬지 못할만큼의 격렬한, 그 쎅스 씬이 아니었다(나는, <색, 계>의 그 유명한 쎅스 씬들보다, 이대장(양조위)와 막부인(탕웨이)가 처음 나눴던, 전화통화 씬이 더욱 섹시하고, 관능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쎅스 씬은 너무 슬퍼서.ㅠ.ㅠ 그 형형한 눈빛, 내 마음을 불을 지른 탕웨이의 눈빛.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의 몸짓에 나는, 홀딱 넘어간건가. 포스트 장만옥, 탕웨이. 다음 작품을 보고선, 앞의 수식어를 탈착여부를 결정하겠지만, 기냥 이참에, 선언할까보다. "나는, '탕닥후'(탕웨이 오타쿠)~" 탕웨이는, 마음을 사로잡은 눈부신 색, 그리고 천상과 지상을 오가는 계. 스물 여덟, 이제 막 농익기 시작한 여신. 하악.

나를, 매혹시키는 또 다른 것.
물론 나도 이 영화, 지나친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나 여성을 탈색시킬만큼 과도하게 감상을 덕지덕지 발라놨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신파극 맞긴한데, 매혹에 빠진 내가 제대로 그런 것이 보였겠어.^^; 뭐, <색, 계>는 많은 컨텍스트도 품고 있지만, 여기서 그런 것은 언급않고. 그저 매혹, 그 하나에만. 하악. <색, 계>를 보면서 2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만났던, 관금붕 감독의 영화, <장한가>를 떠올렸다. 당시 나는, <장한가>에 '매혹'됐었다. 개거품을 물었다,면 거짓말이고, 그해 나의 최고의 영화로 꼽았을 정도니까. 당나라 백거이의 장편 서사시 제목인 <장한가>에서 정수문이 분한 '왕치아오'에 나는, 뻑갔다. 그 일생도 일생이지만, 40년대 상하이의 풍경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고보니, <색, 계>도 40년대 상하이. 나는, 어쩌면 40년대에 약간은 매혹됐는지도 모르겠다. 경성의 40년대 또한 나를 사로잡곤 했으니까. 상하이와 경성의 고혹적인 풍경이, 이들 주인공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내겐, 어떤 매혹의 요소가 됐을 수도 있겠다. 이보다 약간 앞선, <완령옥>(그러고보니, 만옥누님이 완령옥 역할을 했었다!)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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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매혹이여, 절정이여~
<색, 계>에서 탕웨이는 말한다. "뭘로 사로잡아요? 내 몸으로? 당신은 그를 몰라요. 연기라면 그가 몇 수 위죠. 날 안을 때마다 그는 마치 뱀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어요. 난 노예처럼 그를 받아들이고 충실히 내 역할을 다해 그의 맘을 얻어내죠. 내가 피를 흘리고 고통의 비명을 질러야만 그제서야 절정에 올라요. 그는 내 반응이 가짜가 아니란 걸 알죠. 이러다 사로잡히는 건 내가 되고 말 거예요!" 어흑, 내가 치고싶은 대사였다. 탕웨이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매혹시킬 것인가. 한편으로, <색, 계>가 혹시 탕웨이의 절정은 아닐까, 화양연화가 아닐까, 때이른 걱정도 한다. 별걸 다 걱정하는군. 쯧. 탕웨이는, 이제 시작인 것을. ☞ [탕웨이] 말로 할수 없는 것을 연기하다

아 어쩌면, 나는 당신이, 빠져든다... 나, 빠져나오기 싫어....

그리고, 알고보면 더 재밌는, <색, 계>의 실제 사건. ☞ 영화 '색, 계'의 실제 모델 띵무춘과 쩡핀루

뱀발. <색, 계>. 다시 보고 싶지만, 탕웨이 아닌 다른 것을 볼 수 있을까. 저리도 슬픈 섹스는, 대체 마음이 어떤 시츄에이션일 때 가능한거야. <색, 계>의 양조위에 대한, 이야기는 불필요하겠지만, 마지막 장면은 정말 침대가, 우는 것 같았다. 막부인(혹은 왕치아즈)이 총살 당하던 그날, 이(양조위)가 막부인의 빈 침대에 앉아 글썽이던 눈물. 이가 일어난 뒤 보여지는 구겨진 침대시트. 그리고 그것을 뒤돌아보는 이의 그림자. 흑. 어찌, 침대 하나로 이렇게 사람을 울리오. 징하다, 이안. 가만보니, 그 침대. 알고보니, 침대는 과학도 아니었소. 침대는 눈물이더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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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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