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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을 해방시킨 선구자, 마가렛 생거(Margaret Sanger)
(1883.9.14~1966.9.6)
아이 낳을 권리, 낳지 않을 권리! 여성의 몸을 해방하라!!


여성의 몸은 당연히 여성 자신의 것입니다.
피임은 여성 자신의 몸을 통제, 출산력을 조정할 수 있는 권리이며,
세계보건기구(WHO),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에서도 생식의 권리, 원하지 않은 아이를 출산하지 않을 권리, 피임선택권의 보장을 강조하고 있죠.

그런데 우습게도, 이런 당연한 논리나 원칙이 통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회나 가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생산과 육아를 통제하고,
이상하고 해괴망측한 의무 혹은 부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한마디로 여성의 몸은 온전히 여성의 것이 아니었던 거죠.
자녀 생산과 육아를 위해 여성의 몸을 식민지로 전락시킨 코미디 같은 시대.

그런 시절에, 이런 주장을 펼친 여성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스스로 자기 육체의 완전한 주인이 되어야 하고, 원하는 아이가 축복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
그는, 마가렛 생거입니다.
여성의 피임할 권리와 인간의 권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
그의 노력이, 여성의 몸을 여성에게 돌려준 것이 아닐까도 싶어요. 


마가렛의 사회운동가로서의 기질은 일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급진적 자유주의자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지성과 예술적 자질을 갖추고 위트와 매력이 넘친 아버지를 닮은 까닭인지,
그는 호기심이 많고 연애와 파티를 즐기는 한편,
토론과 논의·대화를 좋아했으며,
학교에서는 리더역할을 맡은 활달한 학생이었습니다.
반면 가톨릭 신자로 자상하고 가정적이었던 어머니에게선,
가정의 소중함을 새긴 듯 싶어요.
그의 집안에는 무려 11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가 16살 되던 해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어려서부터 여성의 자신의 몸에 대한 주인일 수 없는 현실을 접했던 마가렛은,
아버지와의 다툼으로 잠시 집을 나가면서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던 그는,
간호사가 좀더 보람되고 만족한 삶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나 봐요.
그리고 생각대로 간호사는 흥분과 극적인 사건들로 충만해 있었고,
1900년 건축기사인 윌리엄 생거와 결혼했고 세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다 몸이 쇠약해져 시골 요양원에서 있었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활달한 마가렛의 성정에 안정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는지,
뉴욕에 다시 돌아와 간호사일과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상태가 나아졌다죠.
남편과 함께 노동운동가 빌 헤이우드,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기자 존 리드, 작가 업톤 싱클레어 등의 진보주의자들이 펼친 토론의 장에 참석했고,
당시 노동운동에도 적극 힘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마가렛은 그 사회변혁운동에 여성들의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 한 트럭운전사의 아내가 아이를 유산하려다 제대로 된 방법이 없는 통에 사망하자, 이에 깊은 슬픔을 품었던 그는 산아제한 운동에 직접 뛰어들게 됩니다.
물론 산아제한을 여성의 인권이란 관점에서 해석한 최초의 시도였던 거고요.
1916년 에델 바이네, 페니아 민델과 함께,
브룩클린에 산아제한상담소를 최초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당시 이는 불법이었어요. 1873년에 제정된 컴스톡법은 산아제한에 대한 어떤 정보도 유포할 수 없도록 하고 있었죠.
이 상담소는 십 여일 후 강제로 폐쇄 당했고, 30일간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마가렛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불편부당한 현실 때문에라도.
19세기에 이미 피임기구와 피임약이 발명되고,
산업혁명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에 대한 대책(피임 등)이 강구되긴 했으나, 이는 유한계급에 한한 것이었고 일반 대중은 소외됐던 현실.
가난한 집은 성교육은커녕 아이를 임신하면 무조건 낳아야만 했어요. 반면 부잣집은 성교육은 물론 피임법도 배우는 등 돈과 힘으로 법의 테두리 밖에 있었죠.
그는 잡지 등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육체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억제할 권리, 즉 생명을 생성시키거나 그 생성을 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는 노동자들이 노동자답게 살기 위해선, 노동자 스스로가 '아이 낳기'를 결정해야 하고, 피임법을 가르쳐 주는 일은 '부도덕한 일'이 아니며,
그것을 '불법'으로 못 박는 법이야말로 '나쁜 법'이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신념은 그랬습니다. 사람답게 살 권리, 여성답게 살 권리, 어머니가 될 권리, 아이답게 살아갈 권리 등은,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누려야 한다고.

물론 이런 마가렛의 외침은 당대 주류로부터 생뚱맞은 것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교회, 주정부와 검찰과 경찰 등의 권력은 그에게, '미친년' '마녀' '악마' '여성해방을 뒷걸음치게 하는 못된 년' 등의 악담을 퍼부어댔고요.

이 같은 갖은 탄압이 있었지만, 마가렛의 노력은 결실을 맺게 되죠.
1921년 미국산아제한연맹이 만들어졌고,
2년 후엔 직접 '산아제한 의료연구소'를 설립해 피임보급에 나섰습니다.또 1927년 제1차 세계인구문제회의(제네바)에선 국제산아제한기구가 최초 결성됐어요.
이즈음 보수적이던 의학계도 의사에게 피임처방권을 부여하는 '의사법'입법안 통과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1939년 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죠.
2년 후 마가렛과 미국가족계획협회는 새로운 피임법을 개발하고 피임약을 보급하는데도 힘을 쏟게 됩니다.


다만 빈곤과 다산이 모자 사망률을 높이고,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산아제한 필요성을 강조했던 마가렛도, 가족계획운동으로의 변화과정에서 후진국의 빈곤 원인을 인구문제로 단순 치환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가 노동자 윌리엄 생거와 이혼하고 부호와 결혼한 뒤,
어느 정도 보수화된 탓이 아닐까하는 분석도 있어요.
미국가족계획협회는 1960년대 낙태법 수정안이 사회문제화하자 반대편에 서기도 했어요. 통치이념의 하위개념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마가렛의 초창기 운동성 회복을 촉구하는 성명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피임조차 마음대로 못하고 여성의 몸이 억압받던 암흑기를 뚫었던 것도,
피임 등을 통해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도,
마가렛 생거의 확고한 신념과 끈질긴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어요.

누군가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일류 역사상 남자들로부터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여자이며, 살아생전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참고자료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마가렛 생거의 이유있는 반항』(버지니아 코니 지음/안정숙 옮김/형성사 펴냄), 『20세기 사람들』(한겨레신문 문화부 지음/한겨레신문사 펴냄))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만나다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프랑스혁명의 배후, 잔 마리 플리퐁(롤랑)(Jeanne-Marie Phlipon)
(1754.3.17~1793.11.8)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 단두대에 스러진 급진주의자


1789년 일어난 프랑스 혁명.
절대주의 왕정을 폐기하고 개인(시민)의 권리를 고양한 시민혁명이었습니다.
문명에 대한 비판과 인민주권론 등이 혁명의 기초가 됐으며,
인간의 자유․평등, 국민주권, 법 앞의 평등, 사상의 자유와 인권선언 등을 명시함으로써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을 다진 일대 사건이었죠.

이 혁명의 대열에 적극 동참했던 이 사람, 잔 마리 플리퐁(별칭 마농 플리퐁).
그는 프랑스혁명의 한 주역이자 실세였습니다.
그는 부유한 제판공 아버지를 둔 덕에, 다양한 책과 사상을 접하면서 자랐어요.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18세기 철학자․사상가들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죠.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는 1780년 리옹의 산업검찰관이었던,
훗날 혁명기에 내무장관을 지낸 장 마리 롤랑과 결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정치적인 동지였으며, 혁명이 터지자 정치운동에 적극 가담합니다.

정치에 강력한 집념을 가졌던 플리퐁은 당초 급진 민주주의자였습니다.
자코뱅당 지도자이자 파리코뮌 대표로 추대됐던 로베스피에르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사상적 교류를 했었죠. 혁명 전반기 입법의회 좌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식의 차이 등으로 로베스피에르와 멀어지게 되고,
1791년 자코뱅당에서 떨어져 나온 온건 부르지아 민주주의자들(훗날 지롱드당이라 불린)의 일원이 됐습니다.
그는 이때,
자신의 집을 이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면서 자연히 살롱을 열게 됐지요.

혁명의 중반기까지 지롱드당은 혁명을 주도했고,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1792년 롤랑이 내무부 장관이 됐는데,
플리퐁은 남편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정도로 실세였다죠.
그의 살롱은 흡사 지롱드 당의 사령실이나 다름없었고,
"장관은 롤랑 부인(플리퐁)이지 롤랑 자신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플리퐁은 롤랑이 국왕에게 보낸 항의문의 초안을 썼는데,
결국 이 문서 때문에 롤랑은 1792년 6월 내무장관직에서 해임됐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정치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았어요.
남편을 부추겨 1792년 9월 소집된 혁명입법기구인 국민공회에서,
온건 민주주의자 조르주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를 공격했습니다.
지롱드당과 자코뱅당 사이의 틈은 점점 커졌습니다.

혁명이 진전되면서 급진적인 경향도 커졌습니다.
1793년 자코뱅당의 주장이 관철돼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플리퐁과 롤랑은 반산악파(反山岳派) 입장을 표명했는데,
자코뱅당이 실권을 잡으면서 지롱드당이 의회에서 축출되고 공포정치가 시작됐습니다.

결국 플리퐁도 같은 해 5월 자코뱅 당원들에게 체포돼,
11월에 단두대에 오르고 말았습니다.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죠.
"오, 자유여, 너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악이 저질러지고 있는가."
노르망디로 피신 중이던 그의 남편은,
플리퐁의 처형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네요.
아내의 후광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최후였을까요.

플리퐁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고 엇갈리기도 하지만,
그가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이상이나 재기는,
당시의 시민혁명을 추동한 하나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참고자료 :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윌리엄 L.랭어 지음/박상익 번역/푸른역사 펴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말하다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은둔 속에 핀 예술혼,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1830~1886년)

그리고 1775편의 시


살아생전,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1800여 편에 달하는 시는 그저 혼자 내뱉은 독백 같았습니다.
사랑, 이별, 죽음, 영혼, 천국, 자연 등을 다룬 시는,
은둔생활 속에서 핀 꽃이었나 봐요.

그는 내내 고독했지만,
그 고독은 그의 모든 것이었던 시를 잉태한 동력이었습니다.

시와 고독을 평생 친구로 곁에 두고 지냈던 이 사람,
영문학사상 최고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입니다.
이상하고 의외의 일이죠?
그가 살아서는 별 볼 일 없는 시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에요.
하긴 별 볼 일 없다는 것도,
그의 시를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까닭도 있었겠지요.


에밀리를 얘기할 때, 가장 흔히 따르는 것은, 평생 독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독신으로 살았다는 것이 그닥 부각돼야 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을 인류보편의 것으로 인식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독신생활하면서 시 짓기에만 몰두하다시피 한 그의 행보는,
호사가가 아니더라도 입방아에 올릴 수 있는 호기심거리가 될 수 있었겠죠.
마치 시와 결혼한 듯,
자신만의 공간에서 치열한 문학적 열정을 불태운 그였기에,
보통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의 궤적은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에밀리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엠허스트에서,
변호사 아버지 에드워드 디킨슨과 에밀리 노크로스의 둘째 딸로 세상과 접촉했습니다.
잘 보시면, 그의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에서 하나씩 딴 것이죠.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 신학교에도 진학했지만,
그는 보수적인 청교도 신앙에 그닥 흥미를 느낀 것 같진 않습니다.
청교도 정신부활을 위한 '영적대각성운동'이 있었을 때도,
그는 되레 청교도 신앙과 종교적 구원에 대한 회의를 숨기지 않았으니까요.

에밀리를 에워싸고 있던 종교가 시작(詩作)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 반면,
한 만남이 그를, 그의 시상(詩想)을 일깨웠습니다.
설핏 짐작 가시죠?
맞아요. 역시나 사랑.
독신이었다지만, 설마 그가 사랑 한번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진 않으셨죠?
아버지가 하원으로 당선돼,
그의 가족은 1854년부터 이듬해까지 워싱턴에서 살았는데,
필라델피아의 한 장로교회에서 만난 찰스 워즈워스 목사를 만났습니다.
찰스 목사는 스승과도 같았습니다.
문학적인 설교와 칼뱅주의에 입각한 그의 웅변이,
에밀리의 머리와 마음을 흔들었던 거죠.
그것은 하나의 지적도전과도 같았고, 시작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편지를 주고받았고,
워싱턴을 떠나 다시 엠허스트로 돌아간 에밀리를 찰스 목사가 찾기도 했습니다. 에밀리는 여러 글에서 그를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적기도 했어요.

그러나 역시나 장벽은 존재했죠.
찰스 목사는 기혼자였고, 그가 1861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로 옮기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났어요.
에밀리는 그를 정녕, 사랑했나봅니다.
친구부부와 동생에게 실연의 아픔을 토로했고, 더더욱 시에 매달렸습니다.
사랑의 아픔 때문인지 시는 봇물처럼 흘러넘쳤고,
좌절된 사랑으로 둘 곳 없는 마음은 작품 속에서 영적인 결합을 이뤘습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였을까요.
실연을 겪고 난 뒤, 그러니까 30세 이후 은둔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흰 옷만 입고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뉴잉글랜드의 수녀'라는 별명도 그래서 지어졌습니다.
시작도 계속했으나, 그는 출판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생전에 불과 7편의 시만 발표했을 정도로,
그는 철저히 고립된 속에서 시와 함께 했어요.

물론, 에밀리에게 사랑이 한번만 거쳐 간 것은 아니지만,
그는 독신생활을 청산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아내를 잃고 홀로 된 로드 판사와도,
사랑을 나눴습니다.
두 사람의 서신에서도 서로 사랑했음이 충분히 드러나 있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독신생활을 버리지 못해,
그의 청혼을 거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요.
그러나 1884년 로드 판사가 죽자,
실의에 빠져 있던 에밀리는,
결국 건강 악화로 2년 뒤인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겪은 사랑의 아픔, 그의 전부였던 시도,
그를 더 이상 지탱시켜주지 못했나 봅니다.


에밀리가 죽은 뒤, 그의 동생이 1775편에 달하는 시를 묶어 발표했습니다.
그의 시는 1890~1945년 동안 8권의 시집으로 묶여 출판됐고,
살아생전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시들은 20세기에 와서 제대로 평가를 받았어요. 그는 겉으로 보기엔 은둔자였지요. 가사 일을 끝내고 이층 방안에서 시작에만 몰두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시피 했으니.
그러나 시와 편지를 보자면 열정적이고 재치있는 예술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엔 친밀한 언어로 생과 죽음, 영원과 자연 등에 대해 무한한 상상과 사색, 사랑과 이별을 담았습니다.
그의 예술혼은 그래서 아직도 후세인들에게 전파되고 입에 오르내리는 것 아니겠어요?

(※참고자료 : 위키백과, 국민일보)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만나다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불황을 위무한 작가의 힘, 마가렛 미첼
(Margaret Munnerlyn Mitchell, 1900.11.8~1949.8.16)



스칼렛 오하라, 레트 버틀러, 비비안 리, 클라크 게이블, 남북전쟁,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이만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 있으시죠?
딩동~♪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맞추셨네요.
소설이든, 영화든, 아니면 다른 통로를 통해서든,
쉽게 잊혀 지지 않을 작품입니다.


그런데, 자칫했으면 이 작품과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처음엔 어느 누구도, 1037페이지 분량의 이 작품을 출판하려 들지 않았거든요.
이 거대한 대서사시를 잉태한 작가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었나 봐요.
때는 바야흐로,
1929년 대공황 발발 이후 불황의 만성화로 침체기에 있던 1930년대.

모두가 위험을 회피하려는 시기,
작가 지망생의 책을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죠.

그렇다고 힘들게 원고를 집필한 마가렛 미첼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원고 뭉치를 들고 이 출판사, 저 출판사를 전전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친 원고도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 질 정도였다죠.

그러던 어느 날, 역시나 인연은 우연처럼 다가오기도 하는 법.
미첼이 살던 애틀랜타의 지방신문에 이런 단신이 실렸습니다.
"뉴욕 맥밀란 출판사 사장 레이슨이 애틀랜타에 왔다가 기차를 타고 돌아간다."
기차역으로 바람처럼 달려가는 미첼.
다행히도 레이슨이 탄 기차가 떠나기 전이었고,
기차에 오르던 그를 잡고 말합니다.

"제가 쓴 소설입니다. 한 번만 읽어주세요. 읽어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바람과 함께 사라질 뻔한 레이슨을 만났으니,
바람과 함께 사라질 것 같던 소설이 바로 구원받았냐고요?

천만에, 아직 진행 중입니다.
결말은 대충 짐작이 가겠지만, 미첼의 끈질긴 구애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자, 다시 기차 안으로 들어가 보죠. 
볼 일 마치고, 돌아가는 피곤한 여정,
그 엄청난 페이지의 원고에 쉽게 눈이 가겠습니까.

레이슨은 어쩌다 원고를 받긴 했지만,
선반 한 켠에 이를 던져놓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기차를 타고 두 시간가량 지난 즈음,
승무원이 전보 한 장을 전해줍니다. 이렇게 씌여져 있습니다.
"레이슨 사장님, 원고 읽어보셨어요? 아직 안 읽으셨다면 첫 페이지라도 읽어주세요."
잠시 놀랐지만, 원고를 힐긋 쳐다보기만 했을 뿐, 역시나 관심 밖.
다시 뉴욕을 향해 시간과 기차가 흐를 즈음,
같은 내용의 전보가 그의 손에 놓이고,

그때도 시큰둥했으나, 다시 세 번째 전보가 도달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요. 귀찮아서 꿈쩍도 않던 그의 마음이 슬쩍 움직입니다.
'아니 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았길래 이토록 끈질기게 야단법석을 떨지?'
마침내 원고에 손을 갖다 댄 레이슨.
헉, 레이슨은 눈을 떼지 못하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고,
기차가 뉴욕에 도착, 다른 사람이 짐을 내릴 때도 그는 섣불리 일어나질 못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세상과 만나게 된 시발점은 이랬습니다.

또한 그렇습니다.
미첼은 원고를 레이슨에게 건네고는 그냥 집으로 가지 않았던 거죠.

우체국으로 향한 그는 거기에 머물며 시차를 두고 전보를 발송한 겁니다.
그의 열정과 끈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세기의 명작을 전파한 셈이랄까요.
레이슨은 작품에 감동 먹었고,
맥밀란 출판사는 이 책에 대해 자신 있었나 봅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5000달러의 선전비를 들여 초판 2만5000부를 찍었는데,
1936년 출판 첫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100만부 이상 독자와 만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서평. "미국 소설 가운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와 가독성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소설은 없다. 그야말로 최상급 소설이다."

또 이듬해는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지금도 해마다 20만 부 이상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됐죠.

아울러 세계 60여 개국 언어로 번역이 돼 국제적인 소설로 명성을 날렸고,
영화로도 제작돼 작품상을 비롯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한 동시에 엄청난 흥행과 영향력을 보여줬지요.
한편으로 당시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소설 주인공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였을 정도로,

소설과 영화의 인기는 대단함 그 자체였답니다. 
기차역에서의 그 짧은 인연이 만든 이 엄청난 파급효과. 
어쩌면 생의 한 순간, 병적인 유머센스가 발현된 것이 아닐까도 싶어요.


그렇다면, 그토록 강한 열정과 끈기를 지닌 미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변호사이자 역사학자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역사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군으로 참전한 외할아버지의 영향 등으로 남북전쟁에 대한 일화를 들으면서 성장했지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 남북전쟁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죠?

물론 집필을 위해 장시일에 걸친 방대한 자료 수집 또한 뒤따랐다고 하네요. 

미첼은 당초 의학을 지망해 매사추세츠주의 스미스칼리지에 들어갔지만,  
어머니 사망으로 귀향하면서 학교를 접었고,
몇 해 동안 애틀랜타 저널에서 5년 여 동안을 기자로 일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요구하던 여성상에서 약간은 이탈하고자 했던 기질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1925년 광고대행업자인 존 로버트 마쉬(John Robert Marsh)와 결혼한 그는, 이듬해 발목을 다쳐 요양하는 동안, 남북전쟁과 재건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고 하네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집필 과정에 숨은 공헌자(조력자)도 있어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영감을 주고,
당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제한적인 활동이 불가피한 상황이 불러온 것도 있지만,
그의 문필과 필력을 칭찬하고 어려서부터 듣던 남북전쟁 전후의 이야기를 작품화할 것을 독려했던 그의 남편, 마쉬.
칭찬과 격려의 힘 또한 이 소설의 잉태에 무시하지 못할 힘을 발한 것 아닐까 싶어요.

그러나 미첼에게 소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단 한편이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첫 작품에 너무 많은 공력을 쏟아 부은 탓인지,
첫 작품의 엄청난 성공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직후, 이렇게 토로하고 맹세했다죠.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것 같다.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
150㎝의 단아한 체구로 위대한 스토리텔링의 흥미와 호소력을 보여줬던 그는,
1949년 그의 동반자, 마쉬와 함께 길을 건너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불황이 태양을 없앤 시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피폐해진 사람과 시대를 위로․위무하고 평정심을 유지하게끔 도와줬습니다.
당시 이 책의 선전 문구도 힘겨운 시절을 반영하듯,
"단 돈 3달러로 완벽한 휴가를."이었다죠.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Tomorrow Is Another Day)...


무엇보다 결정적 이 한마디 혹은 장면.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Tomorrow Is Another Day)."
모든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폐허에서,
스칼렛이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흙을 쥐고서 읊조린,
절망에서 건져 올린 희망의 한 조각.

(당초 미첼이 붙인 제목이 바로 이 대사였는데, 출판사에서 당시 '내일(Tomorrow)'이란 말을 붙인 책 제목이 많다는 이유로 현재의 제목으로 변경됐고, 주인공 이름도 당초엔 팬시 오하라였다가 출판사가 스칼렛 오하라로 바꿨다고 알려져 있어요.)
 
모름지기, 작가는 그렇지 않을까요.
평화와 호황 때보다 불황과 절망의 시절에 더욱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마가렛 미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아, 그렇다면 혹시 레이슨 사장과 마쉬도 필요할까요?

아참 며칠 후, 8일이면 미첼의 탄생 108주년인데요,
오랜만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거나 영화를 보는 건, 어떨까요.
당신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참고자료 : 위키백과, 완주신문, 『세계 영화계를 흔든 100대 사건』(이경기 지음/우리 문학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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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최초의 여성총리, 인디라 간디
(1917.11.19~1984.10.31)


인도의 주요한 국제관문이라면, 인디라 간디 공항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인도 뉴델리로 가려면 이 공항에 도착하게 되죠.
이 공항의 이름은, 인도 최초의 여성 총리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여성의 이름을 따 국제공항을 명명한 것은 거의 드물지 않을까 싶은데요.
과연 어떤 사람이 길래, 그렇게 명명됐을 정도일까요.

우선, 인디라 간디는 마하마트 간디와 혈연관계는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이자,
인도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입니다.

그의 성은 결혼하면서 훗날 하원의원이 된,
남편 페로제 간디의 성을 따른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그는,
12살 때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리틀 인두(작은 인도인)'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로 당찬 아이였습니다.

인도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그는,
스위스, 영국 등에서 수학한 뒤 21살 때인 1938년, 아버지 네루를 따라,
인도국민회의파에 입당해 반영(反英)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인디라는 정치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독립 후 아버지 비서실장 역할을 한 것을 비롯,
1959년 인도국민회의파 당수가 됐습니다.

그러다 1964년, 아버지 네루가 사망한 뒤,
샤스트리내각에서 공보장관을 지낸 그는, 

1966년 소련 샤스트리가 사망하자, 인도의 제3대 수상이 됐습니다.
인도 최초의 여성총리로서 마침내 오른 것이죠.

집권 초기, 인디라는 경제 안정에 주력하면서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차츰 강권통치를 자행한데 있었습니다.
시크교도들의 독립운동을 무력진압하고,
정권유지를 위해 야당을 탄압하는 등으로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은 데다,
아버지의 17년과 딸의 11년 등 28년 장기 집권에 싫증을 느낀 인도인들의 반(反) 간디분위기로 1977년 총선에서 참패, 정계를 떠났습니다.
그러다, 집권당인 인민당이 국민의 신임을 잃자, 이를 빌미로 정계복귀한 그는,
1980년 총선에서 승리, 다시 수상으로 취임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총리시절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시크교도의 독립을 억압했던 인디라의 전력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1984년 10월 31일, 시크교도인 경호원의 피격으로, 암살당하고 말았던 거죠.
평소 방탄조끼를 입고 있다고 알려졌던 그는,
카메라 앞에서는 이를 입지 않았는데, 암살범이 그 때를 노렸습니다.
눈 깜짝할 새에 인도 최초의 여성 지도자는 눈을 감았습니다.

(※참고자료 :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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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미스(Gold Miss)

최근 한 지상파방송에 <골드미스가 간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최근 쉽게 접해보셨을 거예요. '골드미스'라는 말.
올드미스가 아닌, 골드미스는 과연 무엇일까요.

골드미스는 사실 마케팅 용어입니다.
30대 이상 40대 미만의 결혼하지 않은 여성 중,
탄탄한 직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회적․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있는 계층을 의미하죠.
이들은 나름 독신생활을 즐기면서 자기계발에도 소홀하지 않은 모습을 보입니다.

골드미스는 말하자면, 사회가 다양하게 분화되면서 나타난 용어입니다.
결혼연령이 늦춰지는 사회적 변화와 함께 사회생활에서의 성차별도 약해지고,
독신생활을 즐기는 부류가 늘어난 변화상을 반영한 것이죠.
일본에서는 하나코상(Hanakoさん)이란 유행어도 있다는 군요.

마케팅에서 활용되는 이들의 구체적인 조건을 보자면,
대졸이상의 학력, 고소득을 가지는 전문직 혹은 대기업 사원, 연봉 4천만원~1억원, 아파트 혹은 자산 규모가 8000만원 이상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공략하고자 하는 기업들의 움직임도 활발합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성취욕이 높고 자신에 대한 투자를 많이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구매력이 높은 층이거든요.
마케팅 업계에서는 이들이 쇼핑과 해외여행 등 감성적인 만족을 위한 소비행위를 많이 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에 결혼정보업계, 여행업계, 패션업계, 미용업계, 외식업계 등이 이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전략을 선보이곤 하죠.

그러나 이 말이 때론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어요.
오죽하면 '플래티넘미스(업그레이드된 골드미스로서 연봉 1억원 이상을 뜻하는)'란 말도 등장했는데요. 
냉정하게 보자면,
이 말들은 새로운 소비층을 찾아내려는 마케팅이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일의 성취도나 내면적 성숙도, 자신의 일에 매진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보다,
소득수준, 소비성향 등 외피에만 매달린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세상엔 무엇보다 골드미스가 아닌 사람들이 훨씬 많거든요.

(※참고자료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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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웃고 운 과학의 제왕,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1.7 ~ 1934.7.4)


매우 유명한 양반이죠.
그 이름을 듣거나 보면 떠오르는 건, 역시나 폴로늄과 라듐, 혹은 노벨물리학상(1903)과 노벨화학상(1911). 1번도 어렵다는 노벨상을 두 번이나 탔던 과학자.
 
분할 지배하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던 그의 본명은 'Maria Skłodowska'입니다.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어린 시절, 10세 어머니를 잃은 그는 17세 무렵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독학하는 과정도 겪었습니다. 마냥 쉽지많은 않은 유년이었죠.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면서 그의 과학적 재능은 본격 꽃을 피웠습니다.
물론 그의 과학적 업적은, 1895년 결혼한 남편, 피에르 퀴리와의 공동 연구에서 비롯됐지요.

남편과 함께 방사능 연구에 나선 그는 방사능이 원자 자체의 성질이라는 것을 알아내면서,
1898년 7월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딴 폴로늄을, 같은 해 12월 라듐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방사성원소로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라듐은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발견이었죠. 
또 방사성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방사성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한 업적이었죠.
 
하지만 마리에게도 사랑의 위기가 닥칩니다.
이들 부부는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함을 누리는 듯 했지요. 연구나 명예, 부, 가정생활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듯 했죠.
그러나 1906년 5월 7일, 피에르가 짐마차의 바퀴에 머리가 깔려 즉사했습니다.
서른아홉의 마리에게 닥쳤던 시련 앞에 비통에 빠진 마리가 몰두한 것은, 역시나 연구.
피에르의 후임으로 소르본 대학의 교수(여성으로는 최초였다죠)가 됐고, 방사성물질을 계속 연구했습니다.

이젠 위인전에는 잘 나오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11년을 함께 했던 피에르의 빈자리가 커서였을까요.
물론 꼭 그것만은 아니었겠지만,
마리는 두 번째 노벨(화학)상을 받기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노벨상에 대한 칭송은커녕 많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던.

마리는 피에르의 제자였던 폴 랑주뱅과 사랑에 빠졌는데요,
문제는 폴이 유부남이었다는 거죠.
마리는 폴에게 적극적이었고, 결국 폴의 부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됐지만,
마리는 "끝까지 기다릴게요...내게로 돌아와 줘요"라는 편지까지 보내며 애정을 보였습니다.
어쩌다 이 편지가 폴의 부인을 통해 일간지 '뢰브르'에 공개, 문제는 일파만파가 됐죠.

마리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수상이 유력한 노벨상도 포기할 수 있다고 했다지만,

폴은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부인에게 돌아갔다죠. 그들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고 말았고.
그는 결국 두 번째 노벨상을 탔지만, 어쩌면 상처뿐인 영광이었죠.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도 노벨상 수상 여부를 다시 숙고할 정도였는데,
그 업적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세상의 영예와 비난을 모두 맞본 마리였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의 연구와 과학적 성과를 지속한 건, 피에르나 폴과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그랬기에 그는 노벨상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에 솔직 당당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세상의 율법보다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더욱 충실했던.

어쨌든 마리는 퀴리실험소의 소장으로서 프랑스의 과학 연구에 공헌했고, 백혈병으로 사망한 지 61년 만인 1995년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역대 위인들이 안장된 파리 팡테옹 신전으로 이장되는 사후 영광도 누렸습니다.
저는 세상의 율법을 거부한 사랑의 만신전에 그를 올려놓고 싶은데, 당신은 어떠세요?


P.S... 마리가 1921년 열렬한 환대 속에 미국을 다녀온 뒤 언니에게 한 이 말, 왠지 짠합니다.
 "난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고생을 해서 더 이상 남은 고생이 없어. 이젠 진짜 재난이 닥쳐야 느낌이 올 거야. 나는 체념이 뭔지 알게 되었고, 일상의 회색 속에서 작은 기쁨 몇 개를 발견하려 노력해…"

어쩌면 우리는 '마리 퀴리'라는 이름에, 노벨상이라는 엄청난 명예에 가려,
그를 제대로 알지도 보지도 못한 건, 아닐런지...

(※ 참고 : 『퀴리가문』(데니스 브라이언 지음ㆍ전대호 옮김/지식의 숲 펴냄), 두산백과사전, LJ비뇨기과 칼럼 '남편의 제자와 밀애를 나눈 퀴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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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강서비스, 알시아 기브슨(Althea Gibson)
(1927.8.25~2003.9.29)


흑인이라면 대놓고 무시를 당하던 시절.
테니스에 관심을 둔 한 흑인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녀를 둘러싼 환경이 참 열악해요.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 정부의 복지원조(생활보호대상자)로 지탱했던 생계.
아버지의 학대를 받았고, 아버지의 술주정을 피해 지하철을 번갈아 타면서 동이 틀 때를 기다리곤 했던 소녀.
가출도 심심찮게 했다지요. 학교에 자주 무단결석하면서 마음 둘 곳 없던 그 소녀.

그러나 만나야 할 사람은 꼭 만나게 되듯,
테니스를 해야 할 사람은 테니스를 하게 되나봅니다.
테니스가 소녀에게 온 것인지, 소녀가 테니스에게 다가선 것인지 몰라도,
알시아 기브슨은 테니스와 운명적으로 만났습니다.
사실, 그 시대에 가당치도 않았지요. 백인들 중심으로 테니스가 소비되던 때, 할렘가에 사는 소녀가 관심을 가진 것이 하필 테니스라니.

연유야 어찌됐든, 그는 테니스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테니스라켓을 쥘 때만큼은 남달랐던 그의 재능과 흥미는 음악가 버디 워커의 눈에 띄었습니다. 버디의 눈은 틀리지 않았고, 기브슨을 후원했고 할렘가의 다른 흑인사업가들도 재정지원을 통해 그의 재능을 밀었습니다.  

기브슨은 그렇게 날개를 달았습니다.
1950년 흑인으로서는 처음 포레스트 힐스 경기에 참가했던 그는, 1956년부터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역시 흑인으로서는 처음 프랑스 국제테니스대회 단복식과 이탈리아 국제테니스대회 단식 우승을 이끌었고, 무엇보다 1957년 영국에서 열린 윔블던 테니스.
승승장구하며, 4강전에서 영국 홈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여고생 스타 크리스틴 트루먼을 2대0으로 가볍게 물리칩니다.
자국 스타를 무너뜨린 흑인에 대한 영국 백인관중들의 시기와 질투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결승에서도 단 50분만에 달렌 하드를 2대0으로 꺾고, 영국 여왕으로부터 우승 트로피를 하사받았습니다. 흑인으로서 처음 윔블던을 제패한 역사적인 순간.


기브슨은 멈추지 않습니다.
윔블던 우승 기념연회장. 
그는 남자 단식우승자인 호주의 루 호드와 춤을 춘 뒤 연단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선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란 노래를 부릅니다.
멋지지 않아요?
그는 정말, 이 담대하고 불온한 행동을 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기브슨의 윔블던 우승은 흑백으로 갈라져 반목하던 미국과 영국의 테니스클럽이 자연스럽게 통합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죠.

이후 그는 윔블던 복식 우승은 물론, 전미선수권대회 단식과 혼합복식, 오스트레일리아 국제테니스대회 복식 등 여러 대회에서 빼어난 기록을 남겼습니다.
테니스 외에 프로골퍼로 전향해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던 그는,
1971년 테니스 명예의 전당인 내셔널론의 회원이 된 것을 시작으로 국제테니스 명예의 전당, 흑인 스포스선수 명예의 전당, 사우스 캐롤라이나 명예의 전당, 플로리다 스포츠 명예의 전당 등에도 이름을 새겼다네요.

최근 셀레나와 비너스 윌리엄스 자매의 멋진 테니스 경기를 보자면,
자연히 알시아 기브슨이 세상을 향해 날린 강서비스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참고 : 브리태니커백과, 한겨레21, 『Althea Gibson: Tennis Player』(Benson, Michael 지음/Ferguson Publishing Company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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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모? 편부? 아니, '한부모'

<가족의 탄생>이나 <쇼킹패밀리> 등과 같은 영화를 보면,
기존의 전통적인 가족 개념에서 떨어진 '가족'이 나옵니다.
가족이 꼭 피를 나눈 혈연에서 비롯됨도 아니요,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함을 알 수 있죠.
그 영화들은 편견을 깰 수 있는 좋은 영화들이예요.

그런 맥락에서, 꼭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야만 가족이 형성되는 건 아닐 겁니다.
우린 그런 현실을 이미 많이 접하고 있어요.
부모 중 한쪽이 부재한 가족이 있죠.
한쪽이 돌아가시거나, 이혼을 하거나,
법률적으로 부부의 연을 맺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경우 등이 해당되겠죠.
이 가족은 아버지나 어머니 한 사람이 단독으로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를 표현할 때,
편부, 편모와 같이 한쪽 성의 부모만을 강조하는 경우를 흔히 접할 수 있어요.
어떤 초등학교 등에서는 학기 초 학생들에게 제출받는 가정환경조사서에 '편모·편부' 여부를 조사하기도 한다는 사례도 있었죠.
 
국립국어원은 성차별적 언어 표현인 '편부, 편모'보다는 '한부모'로 바꿔 쓸 것을 제안했습니다.
아버지 없는 자식, 어머니 없는 자식이라는 인상을 주기 쉬운 편부, 편모보다는,
한부모라는 표현이 좀더 낫다는 얘기겠죠?
한쪽만 있더라도, 충분히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 그런 것으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차별하게 만드는 건 낡은 개념이죠? 
 
(※참고자료 : 「성차별적 언어 표현 사례조사 및 대안마련을 위한 연구」, 국립국어원.한국여성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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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놓쳤더니, 아직 못봤는데.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마리 앙투아네트>.
언젠가 봐야할 목록에만 올려놓고, 아직 못보고 있군. 쩝.
논쟁 심하고 호오가 확연히 갈리는 건 차치하고,
내가 그저 보고픈 건,
소피아가 해석하고, 커스틴 던스트가 체화한 앙투아네트라기보다는,
도저하게 감싸고 돌고 있을 어떤 핑크빛 향락.


그리고 명심할 것.
어떤 확인되지 않은 루머나 얼토당토 않은 허구가,
당사자의 마음에 낼 커다란 생채기.
왕비라는 이유만으로,
셀러브리티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혼자 삭혀야 할 의무는 없는 법.
악성 루머나 댓글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그 악루나 악플을 소화하는 우리의 자세나 태도가 문제지.
그것으로 빚어진 특정 이미지 때문에 한 사람을 해할 수도 있는 법.

어쩌면, 우리(대중)는 늘 그런가봐.
18세기나 21세기나 별다를 게 없는 것이,
한 시대의 아이콘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것.

어쨌든, 나도 뒤늦게 알았지만,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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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물결에 휩쓸린 비극,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11.2 ~ 1793.10.16)


퀴즈하나 내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장미는?
어떤 대답을 하셨나요.
그런데 틀림없이, 이 장미, 빠지지 않습니다. 베르사유의 장미.
동명의 만화로도 엄청 유명하죠. 특히나 소녀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낸 작품입니다.
알다시피, 이 작품, 파리 외곽 베르사유에 위치한 왕궁을 배경으로 한 상상의 이야기입니다.
오스칼이라는 걸출한 상상의 캐릭터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가 1682년 파리에서 거처를 옮기면서,
프랑스 앙상 레짐 시기, 권력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
무엇보다 궁전 내 깊숙이 위치한 '마리 앙투아네트 영토'로 유명하죠.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이 영토에서 앙투아네트는 세간의 시선과 달리,
소, 말 등을 기르며 가끔은 직접 우유를 짜며 전원생활을 꿈꿨습니다.
지금도 이 농장에선 말, 돼지, 염소, 당나귀, 개, 닭, 오리, 토끼 등을 관찰하고 직접 만나볼 수도 있다고 하네요.

 
맞아요. 오늘, 이 사람이에요.
마리 앙투아네트.
10월16일, 1793년 기요틴(단두대)에서 꺾이고 만 베르사유의 장미.
오스트리아 명문 합스부르크가의 황녀로 태어나 프랑스의 왕비로 생을 마감한 여인.
여기에 덧붙여, 그에 대해 대중적으로 각인된 이미지를 나타내자면,
엄청난 허영과 사치의 대명사.
부당한 정치 간섭과 욕정과 욕망의 화신으로 각인된 팜므 파탈.
몇 명의 연인을 두고 성적 방종을 일삼은 암캐.
프랑스혁명의 원인으로 지목된 마녀 등등. 


그런데 정말,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런 수식어에만 가둬도 될까요.

우선 그에 대한 하나의 오해부터 풀죠.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했다는 이말. "빵이 없으면 고기(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이건 일종의, 악성 댓글(루머)입니다. 과격한 혁명자들이 자신의 목적을 추동하려고 만든.
≪마리 앙투아네트:여행≫저자인 안토니아 프레이저를 비롯한, 역사학자들 대부분은 그것이 일종의 유언비어였다는 학설을 강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앙투아네트는 실제, 백성을 생각하고 정치에 관심 많은 왕비였다네요.
프랑스 왕가 중 소작인의 옥수수밭을 마차로 짓밟고 지나가기를 거부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루이16세가 사냥 때, 오발로 맞은 농부를 농부의 집에서 3일 동안 간호하기도 했습니다.
또 자신의 일기에는 백성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자신들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매우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들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해집니다. 왕은 이 진실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대관식 날을 평생(제가 100년을 산다 하더라도) 잊지 못할 겁니다."
비극은, 저 유언비어가 앙투아네트를 언급할 때마다 언급되고 영원히 떠날 리가 없다는 것.

앙투아네트는 일전에 언급했던 마리아 카톨리나의 친동생입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의 15번째 자녀.
그런 환경에서 교양을 취득하고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는,
당시 프로이센의 위협에 따른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강화하려는 가문의 요구에 따라 14세에 루이 오귀스트(나중의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하고 프랑스의 왕태자비가 됩니다.
이후 루이 15세의 사망 후인 1774년 왕비가 됐는데,
그는 베르사유 궁전의 트리아농관(館)에서 살면서, 사교·관극·수렵·미술·음악 등의 모임에 참여하면서 그들 사이에서 '작은 요정(妖精)'라고 불렸습니다.
또 그는 통설과 달리 기품과 우아함을 갖추고, 아름다운 프랑스 언어를 구사했으며,
모든 귀족 부인들이 닮고 싶어 하던 왕비였다고 전해집니다.
남편 문제로 7년 동안 아이를 못 낳다가, 치료를 받아 4명의 자녀를 가진 그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어머니였어요. 특히 셋째 아들이 천식으로 고생하자 지극정성으로 이를 보살폈다지요.

당시 프랑스 왕실의 사치는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앙투아네트가 유독 낭비를 일삼은 왕비였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왕실 전반에 걸친 일상이었죠.
다만 루이 16세가 유독 검소했던 탓에 '적자부인(赤字夫人)'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죠.
아울러 1785년 발생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그의 위신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입수하려 한 사기이자 음모였는데,
로앙 추기경이 엮인 데다 마리 앙투아네트로 변장한 창녀로 인해 왕실이 추문에 휩싸였죠.
그는 사건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철저히 이용만 당한 셈이었지만,
세계는 때론 그렇죠.
악성 허구나 루머가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공력을 집중하는 순간이 있지요.
그 때라고 지금과 다르지 않아요. 데자뷰(기시감)라고나 할까요.
허무맹랑한 루머가 대중들에게 하나의 사실이나 진실처럼 오도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세계에 발붙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집니다.
목걸이 사건이 종결됐음에도, 그를 조롱․비방하는 글, 노래, 인쇄물 등은 대중적으로 성공했지요. 이런 중상 비방문들은 허구를 사실로 바꾸면서 신화를 구축하는 마법을 발휘하죠.

결국,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대중들은 화가 났고,
왕정에 대한 분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발화됐습니다.
앙투아네트의 비호를 받던 귀족들은 그를 버리고 망명을 갔지만,
그를 비롯한 왕족들은 파리의 왕궁으로 연행돼 혁명군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그는 퇴영적이고 선량한 남편을 격려하고 자신의 친정인 오스트리아에 도움을 청하는 등 왕권의 복권을 위해 주도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윽고 탈출 시도를 했으나 이내 잡혔고,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면서, 사태는 악화됐습니다.
앙투아네트가 적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몰래 알려주고 있다는 루머가 퍼진 겁니다.
마침내 8월10일, 파리 시민과 의용군의 습격으로 국왕 일가는 탕플탑에 유폐됐고,
이듬해 1월 루이 16세가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리고 10월16일, 국고를 낭비하고 오스트리아와 공모해 반혁명을 시도하였다는 죄명으로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시민의식의 성장과 구제도의 모순이 결합해 발생한 프랑스 혁명은 필연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왕실이나 앙투아네트는 필요 이상의 모함과 오해를 받았습니다.
개인으로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물론 역사란, 개인의 사정을 일일이 감안하지는 않는 법이지만요.
그것이 혁명의 추동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지만, 
앙투아네트가 겪어야 했던 이미지의 실추, 잔인한 비극은,
후세에도 그가 폄하된 왕비로 남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요인이 아닐까요.
그래서 어떤 시선은 그를 프랑스대혁명의 희생양으로 보기도 하지요.

어쨌든, 저는 그래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랑을 갈구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이 아닐까요.
누구나가 그렇듯 욕망에 충실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욕망의 화신은 아니었으며,
낭비벽으로 사치스럽고 무뇌아적인 여인으로 그를 생각하고 싶진 않습니다.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혁명의 창녀도 아니었지만,
역사의 거대한 물결 앞에 그저 살아보고자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던 사람.

여기서 우리, 사실로 밝혀지지 않은 루머나 이야기에 대해서 너무 왈가왈부하지 말아요.
18세기에도 허구가 사람을 잡았는데, 21세기에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건,
정말 세계의 비극이네요. 좀 덜 슬픈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세계가...

(※ 참고자료 : 위키백과, 두산대백과사전,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Marie Antoinette, the portrait of an average woman』(슈테판 츠바이크 지음|박광자 외 번역/ 청미래 펴냄), 씨네21)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말하다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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