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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서울탐사기'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7.16 ‘인디아나 전’을 따라나선 서울의 속살탐사기 by 스윙보이
지난 6월, ≪서울은 깊다≫의 저자, 전우용을 따라 나서 훑은 인문학적 서울 탐사기.
약간의 편집과정을 거친, YES24 채널예스에 올라간 글의 무삭제 디렉터스컷.^^

‘인디아나 전’을 따라나선 서울의 속살탐사
 ≪서울은 깊다≫의 저자, 전우용을 따라 나선 인문학적 서울탐사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고도 했다. 속담의 뜻과는 무관하게, ‘서울’은 그렇게 가야할 곳이고, 보내야 할 곳이었다. 로마제국의 힘을 비유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를 지금-여기의 현실에 대입하자면,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한다’가 될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들으면, 서운하고 얼토당토않은데다 버럭하겠지만, ‘서울민국’은 어쩌면, 지독하게도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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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독존의 수도.’ ≪서울은 깊다≫의 저자, 전우용은 서울을 그렇게도 표현했다. 생존과 확장을 위해 농촌을 수탈해야만 했던 도시 중에서도 서울은 유별났다. “조선시대 내내 사실상 유일한 도시였고, 다른 도시의 발전 가능성을 봉쇄한 채 모든 경제적·사회적 자원을 독점하면서 커나갔다.”(p28)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앞선 정권에서 ‘행정수도 이전’ ‘지역균형발전’ 등의 화두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오긴 했지만, 서울은 여전히 ‘식탐’ 많은 ‘식신’의 위치다. “서울은 한번 빨아들인 것은 사람이든 물질이든 되뱉지 않았다. 급기야는 스스로 자신의 중력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빅뱅’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 있다.”(p28~29)

숱한 사람과 물질을 빨아들였던 ‘서울’은, 그러나 자기만의 독자적인 기억이 없다. 아니 정확하게는 기억을 묻은 채 살아간다. 마치 출세와 성공만을 위해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을 내팽개친 야심차고 야멸찬 드라마 주인공처럼. 누군가의 말마따나, 시간을 새기지 않는 괴벽을 지닌 도시 서울. 너무 많은 기억에 짓눌리면 과거의 잔재가 불길함을 야기할 수도 있지만, 서울은 심했다. 압축성장과 팽창일로는 기억과 사유의 능력을 박탈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장소를 모욕할 수는 있어도 그 흔적을 지울 수는 없는 법이다. 장소 위에 새겨진 역사는 누적될 뿐 대체되지는 않는다.”(p36~37) 기억이 침잠된 서울의 괴벽에 불평만 늘어놓던 시민이었던 나는, ‘서울은 깊다’는 주장에 솔깃했다. 지워지지 않은 흔적, 대체되지 않고 누적된 어떤 기억이 덧붙여진 서울. ‘인위적으로 조성된 계획 도시’(p52), 서울의 웅숭깊음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더욱 서울을 사랑할 수 있을 터. “기억하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도 역사다.”(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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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깊다≫의 저자, 전우용 교수

6월6일, 현충일, 서울 탐사에 나섰다. ≪서울은 깊다≫의 저자, 전우용과 함께하는 인문학적 서울 탐사. 앞서 연일 서울을 적시던 비가, 때마침 멈췄다. 이것은 혹시, 신시(神市) 서울을 탐사하는 이들을 위한 신의 배려? 하수상한 시절임에도 탐사자들은 제 시간에 맞춰 덕수궁 앞으로 모여들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한제국의 궁인 경운궁(덕수궁)의 대안문(대한문)에 모인 26명의 탐사대원들. 인근 서울광장은 72시간 촛불문화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현충일을 맞아 전사자 합동위령제를 여는 사람들로 북적북적. 서울은 그렇게 역동적이다. 잠시도 맥박을 멈추지 않는 서울의 모습.

뻥을 튀기자면, 이것은 한국판 ‘인디아나 존스’ 전우용(물론, 고고학자는 아니지만)을 따라 나선, 깊은 서울을 맛보고픈, 서울내기 혹은 시골뜨기의 수줍은 서울 탐사에 대한 스케치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은 아니지만, ‘신시’ 혹은 ‘유아독존의 수도’의 속살을 찾고, 오리지널 인디아나 존스마냥 짜릿하고 알싸한 모험담은 없지만, 깊은 혹은 은밀한 매력의 서울 맛보기.

시청 앞 호텔촌에서 만나는 깊은 서울

탐사의 첫 행보는 ‘원구단(圓丘壇)’.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즉위식이 열린 곳인데, 의외의 장소에 있었다. 조선호텔, 프레지던트호텔, 롯데호텔 등 높이 치솟은 마천루 숲의 어느 골목길에 살포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사실은 인근의 호텔들이 원구단을 잡아먹은 셈이겠지만. 원구단은 주의 깊게 찾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장소에 있었지만, 전통 건물로는 초고층이자 조선왕조 최초의 팔각건물이었단다. 건물 모양부터 기둥, 난간 모두 팔각으로 이는 팔각의 상징성에 기인했다. “팔각은 하늘 자체로는 아니로되 하늘과 땅 사이에 게재하여 그 둘을 매개하는, 달리 말하면 하늘의 뜻을 땅에 전하는 도형이었다.”(p214)

원구단은 태종의 부마 조대림의 집터로 ‘소공주댁’으로 불렸단다. 그래서 일대가 소공동으로 불리게 됐다는 설명.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이 거처한 이후 중국 사신의 숙소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고, 중국 색채가 짙게 깔림과 동시에 중국의 영향력을 상징하는 장소로 작용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자리는 ‘상징의 역전’이 치열했다. 우선 원구단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새로운 천하의 건설을 상징하기 위해 현재의 조선호텔 자리에 설치됐다. 원구단은 곧 천단으로 황제가 하늘과 직접 소통하는 곳이자, 대한제국이 천자국임을 상징하는 건조물이 됐다. 그런 신성한 의미를 부여했던 곳도 일제시대엔 농락당했다. 일본은 환구단을 허물고 1914년 조선호텔의 전신인 철도호텔을 완공했다. 잡배들이 묵고 스쳐가는 호텔을 그 자리에 세움으로써 상징성을 박탈한 것이다.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을 편 자리에 들어선 호텔들. 간혹 일 때문에 들렀던 그곳들에 그런 역사가 있는 줄은 몰랐다. 역사는 묻힌 채 비즈니스만 횡행하는 풍경, 어쩐지 신자유주의가 집어삼킨 지금의 현실과도 겹치고 있었다.

한편 원구단을 허물어 상징성을 거세한 일본은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황궁우를 남겨놓았다. 이에 대한 전우용 교수의 설명. “하나의 패턴이다. 대부분을 헐되 10% 정도는 남기고 신식 건물을 짓는다. 이는 대비효과를 노린 것이다. 일본이 만든 것은 웅장하고 신식이며 훌륭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조선이 만든 것은 초라하고 볼품없고 한심하다는 대비구조가 자연 사람들에게 일본을 동경하는 사고를 심어준 것이다. 민족개량주의의 한 단면이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현충일을 맞아 호국영령의 추모를 위한 천인예술제가 준비되고 있었다. 대한제국 자주의식의 상징이 거세된 자리. 예악의 향연이 과연 의식을 살려낼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원구단을 지나 다시 덕수궁을 향하는 길에 놓인 한 호텔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당초 그 언저리는 화교들의 집산지였다. 1966년 월남전 당시 동남아6개국 순방을 마치고 한국에 온 존슨 대통령.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때문에 동남아 순방에서 ‘양키 고홈’만 들었던 그는 한국에서는 달리 환대를 받았다. 이에 고무돼 환영인파와 일일이 악수를 나눈 탓에 예상보다 일정이 늦춰졌고, 그를 기다리던 외신들이 카메라를 돌린 곳이 초라한 화교촌이었다. 그에 따라 그곳의 풍경이 외신 등을 통해 교포들에게 전달됐고 교포들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만을 전달했다. 이에 병풍 역할을 하는 셈치고 그 호텔이 설립됐다는 비하인드 스토리. 권력의 필요에 의해 이방인들이 억압당한 역사가 ‘환경과 지구를 생각하는 기업’이라는 그 호텔 앞에 걸린 표어와 맞물려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이른바 ‘못사는 나라’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땅에서 배척받는 역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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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조작은 계속된다, 덕수궁의 슬픈 역사

덕수궁의 ‘수문장 교대식’이 이뤄질 찰나다. 익숙한 풍경이다. 궁궐로 쓰던 당시에도 저랬는가보다 했다. 그러나 아니란다. 복장도 ‘틀리고’, 음악도 ‘틀려서’ 역사적 사실을 오도했단다. 한방 먹었다. ‘막(장)개발’에 불과한 청계천도 그렇지만 제대로 된 ‘복원’ 어디 없소.

무엇보다 덕수궁은 슬픈 역사다. 1904년의 원인 모를 화재나 대한제국 시절의 위풍당당이 한 없이 쪼그라들어 초라해진 현재의 모습도 그렇지만, 일본에 의해 철저하고 악랄하게 상징조작된 풍경 때문이다. 덕수궁의 잔디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심었단다. 잔디(사초)는 무덤에만 쓰던 풀이었다. 대한제국의 심장부였던 그곳에 건물을 헐고 잔디를 심는 것. ‘거대한 무덤.’ 그것 말고 무엇이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속셈. 전 교수는 말한다. “잔디 위에 건물을 세워줘야 한다.” 미처 몰랐다. 푸른 잔디 아래 숨겨진 그 아픔, 그 슬픔.

하나 더. 석조전 앞 분수대가 있는 침강원(땅을 파서 만든 정원). 푹 파였다. “자연에 역행하지 않으려는 우리 전통 조경 양식에 비추어 보면 이례적인 것, 그래서 궁궐에 어울리지 않는 것”(p383)도 있지만, 무엇보다 못을 판 행위의 상징성이 뜨악하다. “집이 있던 곳에 못을 파는 것은 대역죄나 강상을 무너뜨린 죄를 지은 자들의 집에 가하는 형벌이었다.”(p383) 전 교수는 말한다. “황궁을 모욕하겠다. 철저히 능욕하겠다는 뜻 아니겠느냐.” 아프냐, 나도 아팠다.


이런 슬픈 역사와는 무관하게,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다 헤어진 연인들의 슬픔과 관련한 Tip. “속설에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이별하게 된다’는 것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이 나돌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여러 이야기가 있으나 내 생각에는 두 가지가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 하나는 1927년 이후 경성재판소(현 서울시립미술관)가 정동에 들어선 이래 이혼 소송이 이곳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배재학교 학생과 이화학교 학생들이 정동 입구로 나란히 걸어 들어가다가 정동교회 앞에서 헤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인’과 ‘이혼하기 위해 다투는 부부’는 분위기상 확연히 표시가 날 테니 뒤의 이야기가 더 사실에 근접한 것 같기도 하다.”(p205)

근대화와 선교지상주의가 흩뿌린 정동길

‘언덕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있는’ ‘눈 덮힌 조그만 교회당’(‘광화문 연가’.). 정동 길에는 그렇게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교회당에 지붕을 올린 후 8개월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갇혀있던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시골에서 온 농부들까지도 교회당의 구조에 대해 경이로움을 갖고 구경하러 왔다. 교인들과 외국인들도 감격에 겨워 교회당 주변을 맴돌았다”(1897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의 연례보고서).


그땐 그랬단다. 청의 착취로 재정적으로 어려운 마당에 근대화는 하고 싶은 상황에 기독교는 하나의 돌파구가 됐다는 것. 미국인 선교사를 우대하고 기독교 포교를 묵인하면서 선교지상주의는 서서히 한국에 뿌리를 내렸다. 정동교회는 그런 상황에서 핵심이었다.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도 엄청났다. 서재필, 이승만 등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근대 엘리트의 기반이 됐으니. 어쩌면 에피소드, 혹은 해프닝 하나. 우리는 한때 크리스마스를 ‘성탄절’이라고 불렀다. ‘절(節)’. 국가의 가장 중요한 날에만 붙는 ‘절’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절은 4개다.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이 왜 정교분리 국가에서 예수의 탄생일에도 붙여져 불린 걸까. 열혈기독교도였던 이승만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통치자의 종교적 성향이 엉뚱하게 발산된 경우. (그러다 생긴 생뚱맞은 노파심 하나.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미국에서 온 쇠고기를 좋아하시고 한때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하신 어떤 분도 혹시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 ‘성탄절’을 부활시키진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속으로 외쳤다. “노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땅의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절’을 공식 지정하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새로 살린 ‘촛불절’을 만들어 달라.” 그래, 촛불아, 활활 타올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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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길은 무엇보다 외국 공관을 비롯해 근대식 건물의 집합소였다. 현재 이화여고 부근에는 한국 최초의 커피숍이 생긴 ‘손탁호텔’이 있었고, 예원학교가 있는 곳은 프랑스공사관이었다. 러시아공사관은 현재 정동공원 부지에 있었는데, 당시 공사관 가운데 가장 컸고 예쁜 건물이었다고 한다. 현재 미대사관저도 원래는 경운궁(덕수궁) 부지였다. 아시아 공사관은 청계천 이남에 주로 있었는데, 러시아,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공사관은 경운궁 주변에 자리 잡았단다. 외국 공관들이 경운궁을 ‘옹위’하는 모양새가 나오는 셈인데, 이는 ‘천자의 나라이자 세계 속의 대한제국’임을 내세워 백성들에게 자존심을 심어주고자 한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전 교수의 추정도 있었다. 아울러 고종이 아관파천 후 경원궁을 새로 궁궐로 삼은 것은 여차 일이 발생하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려는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눈초리도. 고종에게 물어봐. 커피 한잔 권하면서. ^^

서울의 동상들은 제자리에 서 있는 거야?

맛난 점심과 사인회를 거쳐 다시 신발끈을 졸라맨 여정의 시작은 남산. 남산 부근의 회현동, 묵정동, 필동, 주자동 등에 걸친 해방 전후의 지형도와 부자 국회의원을 배출하게 된 연유 등이 흥미롭게 펼쳐졌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동상들의 입지 조건. 전 교수는 덕수궁에서도 한번 언급했다. 덕수궁에 있는 세종대왕의 동상. 과연 맞아? “서울의 동상에는 체계가 없다. 서울의 길 이름에는 취지가 있고 이에 맞는 상징동상을 세워야한다”는 것이 전 교수의 주장. 그에 따르면, 세종로에는 세종대왕, 을지로에는 을지문덕 장군 등등. 당초 그렇게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너무~ 좋아’라는 박정희씨의 말 한마디에, 세종대왕은 덕수궁으로 밀려나고 한국은행 앞에서 칼의 노래를 부르고자 했던 이순신 장군은 세종로로 행차. 그나마 세종대왕의 위안이라면, 만 원짜리엔 세종대왕, 백 원짜리엔 이순신 장군 박힌 것 아닐까. 그런 동상의 뒤죽박죽 재구성을 야기한 자의 동상은 어디서도 보지 않게 되길 바라.

다시 넘어가자. 남산. 그나마 남산에 자리한 동상은 나름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전 교수의 설명이다.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동상을 비롯, 김구, 유관순, 안중근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동상이 남산에 둥지를 틀었다. 이는 남산 일대에 많이 모여 살던 일본인들의 흔적을 지우고 일부 동상의 경우, 이북출신이 모여 살던 지역적 특징을 감안한 것이다.  

그럼 퀴즈 하나(출제자 : 전우용). 서울에 있는 동상 가운데 가장 무거운 동상은? 바로 백범 김구의 동상이다. 전 교수 왈. 대부분 동상은 후손들이 그저 동상 세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며 제조업자에게 전적으로 그 제작을 맡겼으나 백범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제작업자들은 당시 비싼 동을 제대로 함유하지 않은 채 동상 제작에 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범의 후손들은 달랐다. 동상 제작공정에 대한 감시체제를 가동했다. 결국 동을 가장 많이 쓰게 된 결과를 낳았다. 재밌지 않아? 이런 동상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신출귀몰 ‘와룡 제갈공명’, 서울까지 왔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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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산의 서쪽을 타고 내려오는 길. 1966년 아파트 지을 기술도 없던 그때 건립된 남산아파트의 재개발을 둘러싼 서울시와의 갈등을 엿볼 수 있는 풍경이 있었고, ‘제일 걷기 좋은 길’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옛 중앙정보부 진입로에 들어섰다. 차가 다니지 않은 덕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출사를 나온 듯한 사람들도 도로와 자연과 사람을 뷰파인더에 담고 있었다. 아이러니했다. 나는 새도 떨어지게 만들었다는 중앙정보부의 진입로라면 일반인들은 다리에 힘이 빠져 당최 거닐지도 못할 길 아닌가. 그 길에는 얼마나 많은 공포와 좌절과 눈물이 있었을 터인가.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뿐한 발걸음에 만면에 띤 웃음. 길은 하나지만, 기억은 갈래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니, 나타난 와룡묘. 아니 와룡이라면, 촉한의 지략가인 제갈공명 아닌가.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이 서울에 있음 또한 나는 몰랐다. 혹시 신출귀몰한 그 양반이 서울에까지 왔던 것은 아닐까. 물론 그것은 아니다. 듣자하니, 일본의 상징조작에 맞서는 한편 충성심 고취를 위한 고종의 ‘꼼수’. 1900년 남산 일본인 거류지 동쪽 끝에 충신을 장려하는 재단인 ‘장충단’을 세웠는데, 일본인들이 장충단 옆에 유곽을 만들어 ‘공간정치’를 행했고 이에 앞서 일본은 남산기슭에 일본인 최고의 충신을 모신 남산대신궁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현재 와룡묘가 있는 아래쪽. “와룡묘는 왜인들이 서울 안에 만들어놓은 ‘그들만의 성소’를 바로 내리누르는 곳에 자리잡았다.”(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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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잔재를 넘어 서울 천년을 향해

길은 이어졌다. 그러나 곳곳이 공사 중. 서울은 여전히 파헤쳐지고 있었다. 여기도 목적이나 명분이야 있다. ‘열린 남산 만들기 사업(소파길 보행환경 개선사업 외 1개소)’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심 그 파헤침이 불안했다. ‘복원’ 아닌 ‘개발’에만 목을 매는, ‘토건국가’를 향한 강력한 야심을 드러내는 대운하의 수장이 있기 때문이다. 컨테이너 박스를 광화문에 쌓는 그 강력한 포스(?). 그의 가슴 속에는 아마 시멘트와 철근이 쌓여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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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은 곳곳에 감지됐다. 리라초등학교와 사회복지법인 남산원 자리에 있었던 경성신사를 엿보고 통감관저 터를 지났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자리에는 일본공사관부터 시작해 한국통감부를 거쳐 1926년까지의 조선총독부가 있었단다. 서울예술대학 등 예술과 학문이 일제시대의 잔재를 덮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으로 짧은 생각이 들었다. 애니센터가 그곳에 둥지를 튼 것은, 저패니메이션(일본 애니메이션)의 넘어서겠다는 어떤 욕망 혹은 야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물론, 아니면 말고. 어쨌든 반갑다. 로버트 태권브이. 국회의사당 아래 비밀격납고에서 나왔으니 네가 이 시끄러운 정국을 진압해주면 안되겠니?

그리고 한옥마을을 향한 길. 여남은 채의 다다미집이 있는 풍경. 덩그러니 그렇게 남은 옛집은 그 숱한 기억을 묻고서 지금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그런 찰나, 도달한 남산한옥마을. 따지고 보면 이곳도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지금이야 가족이나 연인단위의 사람들의 코스로 무척 평화로워 보이지만. 경성주재 일본헌병대사령부와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가 있었다. 일제시대의 헌병대사령부는 정보치안의 총사령부 역할을 한 곳이다. 끌려갔다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채로 지내고야 말았을 무시무시한 공권력이 있던 풍경.

한편으로 일제시대의 충무로는 상권이 발달했고, 인근에 시계방들이 도열해 있었단다. 정오 시간을 알리는 오포(午砲)가 등장했는데 어떻게 시간을 맞췄느냐. 인근 시계방을 망원경으로 보고 오포를 터뜨렸는데, 시계방들은 또 이 오포소리를 듣고 시계를 맞췄다 하니, 이는 흡사 지금의 정권과 수구신문들이 서로 신호를 맞추는 형태와 비슷하지 아니할쏜가. 오포(午砲) 아닌 오포(誤砲)였던 셈. 허허. 역사는 이렇게도 형태를 달리하여 반복될 수도 있는 것인가. 지금 우리의 시민들은 그런 ‘오포’에 속지 않음이 또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뭐? ‘오포(悟砲)’.


하루 동안의 ‘서울의 속살 살짝 엿보기’는 그렇게 마쳤다. 26명의 탐사자들은 짧은 하루, 서울을 다시 품었다. 오랜만에 종일 거닌 탓에 발은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힐긋 엿본 서울의 속살은 불평시민에 불과하던 내게 좀더 애정 어린 눈길과 걸음으로 서울과 마주대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탄탄하고 속깊은 의제를 쌓은 역사탐사의 달인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아마 ‘16년 내공의 달인 김병만 선생’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

≪서울은 깊다≫도 그렇게 흥미롭다. 개인의 경험에서 이야기를 확대하면서 깊은 서울을 전한다. 서울을 좀더 보듬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싶다. 개인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세계 혹은 우주의 확대. 전 교수는 책 곳곳에 ‘상상력’을 동원했다며, 독자에게 한참 미안함을 토로했지만, 나는 외려 고맙다. 좀더 깊은 서울을 공유함으로써 상상력이 활개칠 수 있는 공간은 넓고 깊어질 터이다. ≪부산에 관한 스물두가지 발칙한 상상≫마냥, 서울이 더 깊고 넓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역시나 상상력.

사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상상하기를 멈췄다. 서울시에서 아무리 ‘천만상상 오아시스’라며 떠들어대도 우리는 알고 있다. 서울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고작 ‘뉴타운’뿐이었음을. 지난 총선에서도 확인하지 않았던가. “1980년대말 이후에 만들어진 ‘신도시’들은 ‘섞여살기’보다는 ‘따로 살기’를 원하는 주택 소비자들의 요구에 충실히 반영했다... 공간과 장소를 공유해본 경험을 갖지 못한 채 자란 아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까”(p56)

그렇게 “연대의식이 사라진 도시는 대립의 현장일 뿐 통합의 공간은 아니”(p57)었다. 서울이 그랬다. 그냥 외따로 떨어진 그들만의 제국이었지. 그런데 지금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다. 광장이, 축제가 서울을 바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성급한 기대. 우리는 어쩌면 ‘쇠고기’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촛불이 하나씩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서 “서로 어울려 살기 위해 계급적 이익을 일부 유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p56)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다시 말하지만, 성급하고 성마른 기대다.

정리하자면, 우리에게 서울은 무엇인가. 우리는 서울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우리의 서울은 안녕한 걸까. 서울의 속살을 좀더 알고 싶다면 ≪서울은 깊다≫는 충분히 유용하다. 더불어 시간이 허락한다면,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도. 그렇게 당신의 서울에 발을 디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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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속살을 엿보고픈 시민을 위한 탐사의 흔적, 사진으로 따라가기


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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