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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나는 극소심한 '김규항 빠돌이(항빠)'인데, 
몇 년 전, 지인의 결혼식에 규항 선생님이 주례를 서신 것을 보고,
정말이지 부러웠다. (그때의 주례사가 궁금하다면,  ☞ 주례사)

늙어가는 이 총각은 우습게도, 멋진 선녀선남 결혼 부러웠던 것이 아니라,
규항 선생님을 주례로 모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어찌나 부럽던지... 그런 기억이 난다.

오죽하면, 선생님 주례를 하사받을 수만 있다면,
누구하고라도(그것이 남자라도?), 덜컥 결혼(식)을 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짧게...ㅋㅋ
(뭐, 지금은 행여나 결혼을 하게 된다면, 주례 없는 결혼식을 생각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시기상 여름의 끝물이었지만,
여름이가 그리 순순히 물러날 손. 후끈후끈.
뜨거웠던 그 여름, 그럼에도 내 심장을 더 뜨겁게 달궜던 어떤 강연.

규항 선생님도 강연자로 자리하셨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게 했던 그날의 이야기.

마침 그날 8월28일은,
1963년의 그날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DC 링컨기념관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세기의 명연설(물론, 표절 의혹이 있긴 하나)을 한 날.

그날의 강연은 그리하여, 한편으로 묻고 있었다.
당신에겐, 타인이 주입한 것이 아닌, 어떤 꿈이 있습니까!
당신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까!

참, 언급한 바 있지만, 내 생의 F4는, 여기 강연을 하신 분 모두는 아니고,
규항 선생님은 F4에 포함되지만, 나머지 세 분은 다른 분들이다.
다시 더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게다. 

2009/08/30 - [나는 당신을, 감탄한다...] - 'F4'를 만나 오르가슴을 느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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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가 묻는다, “새로운 삶을 선택할 용기가 있는가”
[독자만남] 『괴짜사회학』출간기념 괴짜 학자들 4인방 대담회


울먹인다. 대학 신입생이란다. 이제 스물 언저리의 청년. 지난 5월 촛불집회 1주년 기념행사에 나갔다가, 전과자가 됐고, 억대 소송도 당했단다. 평범한 사람인데, 전과자가 되고, 보복이 들어오고. 스무 살 언저리의 청년이 감당하기엔 벅찬 무게. 두렵다고 했다. 옳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지만, 이 사회는 그것조차 용납하지 못한다. 이 옹졸함을 어찌 하오리까.

울먹이던 그가, 진중권 교수에게 마음가짐을 묻는다. 장내는 숙연하고, 내 속에서도 울분이 끓어오른다. 내 안구도 젖는다. 대체 누가 무엇이, 평범한, 별다른 죄도 짓지 않았을 법한 이 청년을 울린 건가.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이에 대한 진 교수의 이야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자.


그래, 잘 들어라.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왜냐 하면, 이것은 ‘F4’를 만난 기록이기 때문이다. 구준표, 윤지후, 소이정, 송우빈, 그 이름만으로도 꺄아~ 소리 지르고 싶겠지만, 그깟 애들, 잊어라. 돌멩이 맞을 각오로 하는 말이지만, 그따위 F4, ‘저리 가라’다. 그렇다면, “도대체 뉴규?”라고 묻겠지. 좋다. 김규항, 우석훈, 진중권, 홍기빈이다. 꺄아아아~ 소리 지르는 당신, 그래! 이 혼미한 세상에서, 그나마 제 정신이로군. 하하.
 

사진제공 : 프레시안


지난달 28일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이른바 ‘괴짜(학자)’ 네 명이 모였다.(그러니까, F4의 ‘F’는 ‘Freaks’의 줄임말?) 김영사, 예스24, 프레시안이 주최한 행사, <『괴짜사회학』출간기념 대담회 “괴짜 학자들, 한국 사회를 뒤집어 보다”>를 위해 모였다. 수디르 벤카데시(Sudhir Venkatesh) 콜럼비아대 교수(사회학)의 <괴짜사회학(Gang Leader For A Day)>의 출간을 기념한다는 명분. 이 괴짜들의 대담은 무려 4시간을 넘어, 따로 쉬는 시간도 없이 달렸다.

따라서 이것은 웃고 울리며, 그들과 함께 호흡했던 시간을 담은 기록이다. 괴짜들이 펼치는 괴짜 대담. 당신도 괴짜(가 되고 싶다)면, 작금의 한국 사회를 고민한다면, F4를 만나라. 이것은 한편으로, 한국 사회에 청진기를 들이댄 불온한 아이콘 4인방이 전하는 지금-여기의 환멸을 참고 견디는 법. 쥐의 공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법. 사회를 맡았던 김민웅 교수의 인사말로 그 진단은 막을 올린다. 

“반갑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괴짜사회학』이 고민한 것이 우리 사회에도 통할 수 있을까를 진단해 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카고 빈민가의 흑인 갱단에 들어가 갱들과 어울리면서 지역 문제를 파헤치다가 보스와 친해진다. 4년 정도 갱과 어울리면서 저자는 마약, 매춘, 재개발 등등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오늘 4명의 소장 중견학자를 모셨다. 이 분들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거침없이 일격하면서, 우리 사회를 눈뜨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분씩 모셔서 얘기를 들어보자.” (박수) 

각자의 심볼로 알아보는 F4의 근황

‘88만원 세대’, 우석훈 교수 : 『88만원 세대』는 당초 전체 12권 정도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자 시작했다. 한국이 갖고 있는 독특한 20대 문제를 다루면서 2천권이 팔리든지, 10만권이 팔리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봤다. 20대가 책을 안 본다고 가정하면 2천부, 20대가 보면 10만부라고 예상한 건데, 출판사는 1천부를 봤다. 그런데 예측이 틀렸다. 10만부가 넘었다. 『88만원 세대』로 20대 문제가 (사회적으로) 약간 환기가 된 것 같은데, 문제가 풀린 것은 없다.

다만 1~2년 내 폭발적인 전기가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사람이라는 게 너무 맞고 무시당하면 못 참거든. 1~2년 내 못 참을 때가 올 것 같다. 대통령이 이명박이니까. 다음 계획이라면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 한 7년 정도 됐는데, 마흔이 되면 은퇴하고 농사를 짓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지금 마흔이 됐는데, 은퇴할 준비가 안 돼서 아직은. 장소는 서울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다. 우리밀 소주를 만들고 싶다.

‘뇌주름 섹시’, 진중권 교수 : 잘리는 경험이 처음인데, 그렇게 중요한 인물인지 몰랐다. 과대평가한 게 아닐까. 스스로 평가하는 것보다 저들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잘 생긴 것도 아닌데, 다만 뇌주름이 섹시하다고는 하더라. 통섭교육은 생산력 형태가 달라지는데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다. 통섭은 좌우 상관없이 다른 나라에서 다 하는 것이다. 반대하는 분들은 생각이 없는 분들이다. 아예 무대를 뽀개고 있으니. 교수자리 3개를 끊고, 저들은 내가 생각하는 상상 이상이다.

‘싸가지 없다’는 지적이 많은데, 내가 싸가지까지 있으면 큰 일 나지 않겠나. 우리 사회는 그런 면에서 참 답답하다. 풍속의 감시자인양, 왜 어법 갖고 문제를 삼는지. 진중권의 문체가 하나만은 아닌데. 어법의 강점? 절대 흥분하면 안 된다. 흥분하면 지는 거다. 가장 훌륭한 복수는 적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 지는 거다. 한 달 반 동안 내가 좋아하는 그림에 대해 새 책을 한 권 썼다. 미술작품 12개 정도를 뽑았다. 유명 명화는 아니더라도 느낌이 와서 꽂히는 것들을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칼 폴라니’, 홍기빈 : 우리는 지난 100여년 동안 시장경제체제를 놓고 없애느냐, 살리느냐, 고칠 거냐, 이 세 개 옵션만 놓고 논의해 왔다. 그러나 폴라니는 (이 체제가) 좋다, 나쁘다를 얘기하기 전에, 이것이 인간사회에 어떤 위치에 있는지, 실제 존재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차원이 다른 종류의 얘기다. 지난 금융위기를 거치며 미국에서는 케인즈가 복권됐다고 하는데, 케인즈 복권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시장이 인간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경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환경문제다. 케인즈는 금융시장을 아주 혐오했고, 범죄적으고 문제 많은 제도라고 생각해서 정부를 통해 고쳐야 한다고 봤다. 칼 폴라니가 시장 문제에서 주목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사회였다. 케인즈와 하이에크를 지나 이번에는 폴라니 차례가 돌아온 것 같다. 80년대 초부터 형성된 신자유주의 지구적 질서는 근본적으로 끝났다. 지금 상태로 계속 갈 수는 없다. 정치와 경제의 구분은 무의미하고 잘못됐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목표는 경제학자에게 속지 않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말할 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에 22조원을 투입하겠다는데, 고속철 사업에서 보듯, 예산은 짓다보면 늘어나고 잠재 예상은 100조원이 될 거다. 그 100조를 확 나눠줬으면 좋겠다.

‘불온한 B급 좌파’, 김규항 : 『나는 왜 불온한가』는 출판사 마케팅팀에서 붙인 제목이다. 바꾸면 안 될까 하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민망한 제목이다. 불온은 중립적인 말이다. 민주화 30년은 정치적 민주화를 말하는데, 이것은 정치적 자유뿐 아니라 자본에게도 자유를 줬다.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아이들 보면, 민주화된 것은 분명하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땐, 학생과 교사가 서로 ‘건설합시다’라는 구호를 하면서 경례를 했다. 참 더러운 세상이었다. 또 그 때는 오후 3시에 소재가 파악되는 아이들은 아프거나 징계 중인 아이였다. 나머지 아이들은 노는 거였다.

그러나 지금은 1시간 정도 소재가 파악이 안 되면 사고다. 세계에서도 아이들이 이렇게 생활하는 아이들은 대한민국 밖에 없을 거다. 민주화가 됐는데, 지금 아이들은 군사파시즘 시절의 아이들보다 더 못하게 살고 있다. 어른들도 비슷하게 살고 있고. 지금 이명박 씨가 우리에게 하는 모습과 우리가 아이들에게 하는 모습이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외계에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온 게 아니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가치관이나 철학이 잘못된 사람이라서 그렇지. 아이들 미래를 위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하는 건 똑같다. 우리 안에도 이명박이 있다. 어떤 체제를 반대하는 사람들 자체도, 체제가 내면화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이건희를 욕하는 사람과 이건희와의 차이가, 돈 있고 없고의 차이 밖에 없다면, 그건 차이가 없는 거다. 『예수전』은 예수가, 우리의 문제와 고민들을 직관적으로 통찰력 있게 보여주고 해명해 주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에서 썼다.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이 적어서 섭섭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집이 보수 신도들에게 포위되고 린치 당하고 이럴 줄 알았는데. 2권을 쓴다. 교회 개혁운동 얘기 많이 하는데, 이건 좀더 근본적일 필요가 있다.


이어진, 대담의 시간. 사회자 김민웅 교수가 토론에 앞서, 『괴짜 사회학』의 배경인 ‘시카고’가 미국에서 가지는 역사적․사회적 의미와 인도 뭄바이를 배경으로 한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얘기를 꺼내며 화두를 던진다.

“부자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질문만 던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대답만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에게 질문을 던질 수 없을까? 용산참사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던진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괴짜 사회학』은 재개발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이 빈민을 쫓아내기 위한 것임을 폭로한다. 용산참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 한국에서의 경찰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진중권, 이하 진) 촛불집회 처음에는 달랐다. 커피를 주기도 하고, 닭장차를 타면 제도화된 민주주의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정권에서는 적대적이 됐다. 요즘 경찰의 구호가 ‘국민에게 달려가겠습니다’인데, “제발 오지마”라고 말하고 싶다. (웃음) 섬뜩한 느낌이 든다. 과거의 경찰 이미지가 다 무너져 내렸다. 80년대의 익숙한 경찰로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우석훈, 이하 우)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노무현 정부 중간에 경찰국가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자본주의가 경찰 없이는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번 정부 와서 그 속도가 빨라진 거다. 정서적으로 경찰국가에 사는 게 괴롭다. 5년 간 죽었다고 생각하고 사는 주의인데, 한국 우파들은 참 무능하고 치사하다.

국내총생산(GDP) 2만달러 정도 가면 대개 지하경제를 통제하는 수준이 돼야 한다. 지금 통계상 10~15%를 지하경제로 보는데, 실제는 그보다 더 클 거다. 한마디로 깡패국가다. 두목이 이명박이고. 지금 시스템은 깡패들이 살기가 제일 편하다. 비공식 경제는 깡패들이 갖고 있는 비중 높은 편인데, 사실 그건 경찰들이 막아야 한다. 그러나 최근 경찰 보여준 모습은 비열하다. 

(홍기빈, 이하 홍)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쌍용차 사태와 관련해, 경찰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했다. 경찰 조직이 공적 기구인지, 민간 행위자인지 헷갈리는 거 같다. 가령, 소방서가 불을 꺼준 뒤 수도값 내라고 얘기하고 대원들 다친 돈 내놔라고 하면 골 때릴 수 있는 건데. 지금 경찰이 손배소송을 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한 마디로, 그들은 공적기구라기보다 사적영역에서 싸움꾼 행세를 한다는 거다. 근본적으로 인식을 전환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게 걱정된다.

(김규항, 이하 김) 남미에 가보면 부잣집 앞에 라이플을 든 경비들이 있다. 경찰들도 부자 편인데 그것도 모자라 사설경호원까지 둔다. 군사독재에서 자본독재로 전환하면서, 경찰 임무가 국가기강과 같은 것보다 부자들 이해를 돕는 쪽으로 전환하고 있다. 주체적으로 경찰이 바뀐다기보다 사회가 어떤 상태인지를, 경찰이 하는 짓을 보면 파악할 수 있다. 

- 폭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사진제공 : 프레시안

(김) 비폭력주의가 2000년대 이후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선 중요한 얘기로 회자되고 있다. 거기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를 한 적 있는데, 세상에 폭력주의자는 한 명도 없다. 폭력이 좋다고 말 하는 놈은 한명도 없다. 변태나 사적인 영역에서 미친 짓하는 사람 아니면. 부시도 악의 축에 맞선 저항이라고 했지, 폭력이라고 한 적은 없다.

말로서 비폭력주의는 아무 소용이 없다. 서재나 일 년에 빰 한 대 맞을 일 없는 안온한 사람이 폭력은 나쁘다고 말장난 일삼는 건 정말 끔찍한 폭력이다. 작금의 촛불에서의 폭력이 대단한 폭력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어폐 있지만, 사람이 사회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사회적 지평을 봐서 더 못한 사람, 그 전에 생각을 못했는데, 더 많이 맞는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는 폭력주의자에 의해 희생당한다. 예수, 간디를 봐라. 간디는 비폭력주의자였지만 항상 폭력의 현장에서 있었다. 그것이 중요하다. 이런 것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진) 80년대 관통하다 보니, 어딘가로 끌려가고 물도 먹고 매혈도 해야 맞았다고 말할 수 있지. (웃음) 경찰버스창을 깨고 이러는 걸, 폭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불편하다. 사실 법질서의 토대가 폭력이다.

두 번째로는 우리 사회는 과개발의 정치와 저개발의 정치가 어정쩡하게 겹쳐 있다. 과개발은 선진국, 저개발은 후진국형인데, 촛불집회가 전형적인 과개발의 정치였다면, 용산사태는 전형적인 저개발의 정치였다. 폭력을 얘기하기 전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용산 같은 경우가 성남에도 있었는데, 아무 문제없이 해결됐다. 해법이 있다. 정부나 언론이 그것을 해야 한다.

(우) 내가 제일 폭력주의자일 것이다. (웃음) 짱돌 정도는 던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내 기준으로는 방화는 안 되지만, 유리창 정도는 깨도 된다. 프랑스에 살았는데 3년 전 프랑스 정부가 시행하려고 하던 고용법이 통과가 안 됐다. 프랑스 시위가 평화롭다는 말은 다 뻥이다. 걔네들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 앞에 대형 스피커를 달아놓은 무대차가 지나간다. 그 위에서 애들이 그냥 춤추고 논다. 프랑스 대학생들은 손뼉 치고 노래 부르면서 꽃을 들고 다닌다. 그 뒤로 십대 청소년들, 무장한 10대가 있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다 깨고 눈에 보이는 것은 불지른다.

생각해 보라. 십대가 불 지르면 뭐라 하기도 참 난감하잖나. 걔들은 그렇게 하는데, ‘우리나라엔 무장 10대가 없어서 지는 구나’ 싶다. 앞으로 집회하는 분들은 전략적으로 무장 10대를 달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방화는 하지 말자가 내 소신이다.

(홍) 폭력하면 대개 물리적 폭력 말하는데,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 사회 심한 폭력은 언론이다. 특히 조중동. 이들 신문을 가끔 보면 섬뜩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증오와 적대를 선포하는 신문을 보지 못했다. 깡패 용어로 다구리라고 하는데, 이건 몰매를 맞는 게 낫지, 이렇게 당하는 건 문제가 크다. 우리 사회는 이런 폭력을 폭력으로 보고 제어를 하는 게 약하다. 조중동은 정치적 논조와 무관하게 폭력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시장의 폭력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면, 줄빳다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한국과 일본에 있다. 일본의 통치 구조를 보면, 천황을 정점으로 조금씩 기울어져 있는 저울형태다. 천황이나 상급자가 줄빳다를 치면 그 사람은 아래 하급자를 패고, 인간 피라미드에 의해 빳다의 물결이 흐르는, ‘다단계 빳다’가 형성된다. 돈은 위로 흐르고 빳다는 아래로 내려간다. (박수)

유럽 근대국가는 사회 전체를 법과 국가 폭력 앞에 줄빳다 세우는 원리로 형성됐다. ‘법 앞에 모든 사람이 줄서야 된다’는 거다. 19세기 들어오면서, 이 줄빳다 논리는 시장으로 간다. 폴라니가 쓴 『거대한 전환』에서는 국가 줄빳다에서 시장 줄빳다로 전환하는 순간이 2/3를 차지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가는 과정이 전 사회를 줄빳다 놓는 시기였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시점이 줄빳다의 논리가 시장으로 옮겨가고 있는 시점이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이것저것 다 필요없다. 돈 버는 게 장땡’이라는 합의가 이뤄지고 있잖나. 이 합의 위에 세워진 이명박 정권은 1970년대에 비유하자면 유신과 같다.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는 72년에 유신이라는 폭거와 마찬가지로 시장이 본격적으로 사회를 줄빳다를 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우) 선진국은 사람들 행위가 돈으로 50% 이상 설명되지 않는 국가를 말한다. 반면 후진국은 90% 이상 행위가 돈으로 설명이 된다. 프랑스가 (GDP) 2만달러 넘어설 때, 독일계 가수의 노래가 1등 먹었다. 부자들 조롱하는 노래였다. 그런데, 우리는 어땠나. 2만달러 넘어설 때, 너나 할 것 없이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을 썼다. 그렇게 해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원래 시장은 폭력적이나 합리성이라도 있는데, 한국은 촌스럽다. 주먹, 돈 많은 작자들의 치사함이 있었다. 게임값 물더라도 죽이겠다는 것이 한국의 시장이다. 시카고, 파리, 런던은 시장의 폭력을 얘기할 수 있는데, 한국은 돈에 대한 욕망만 있지, 시장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의 속도가 퍼진 만큼의 속도로 망할 거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노는 것을 회복해야 한다. 삽질하는 나라는 생각하는 나라를 이길 수 없다.

- 왜 가난은 발생하는가. 빈곤은 뭘까.

(홍)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유주의가 만들어놓은 근대사상의 허구가 있다. 부와 자유가 개인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개인이 잘해서 개인이 부유해질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가능하나 산업사회는 불가능하다. 농경사회에서는 나라님이 뭘 하든, 전쟁이 나든, 내가 내 땅에서 노동을 해서 거뒀다고 할 수 있으나, 산업경제에서 누가 어느 만큼을 기여했느냐는 회계분석을 해도 안 나온다. 사회 전체가 다 같이 뭔가 하지 않으면 풍요해질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존 로크나 아담 스미스가 농경제가 압도적일 때 이론을 만들다보니, 산업경제에서는 절대 적용할 수 없는 거다. 자유주의는 자기가 잘 나서 자기가 부유해질 수 있다고 얘기하는 거다. 섣불리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식으로 경쟁시켜서 게임을 하면 사회 전체는 거지가 된다. 서로가 사회 전체의 파이를 늘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게 되고.

지금의 경제학은 파이가 느는 것, 그 사람이 돈을 벌었다는 것은, 사회에 기여를 했다는 증거라고 가르치는데, 이건 기만이다. 농경제 시대의 빈곤발생 메커니즘과 산업화 시대의 빈곤발생 메커니즘은 다르다. 산업화 시대에서는 산업조직을 어떻게, 부를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르기 때문에 빈곤은 철저히 사회적이다. 분명히 산업경제에서는 개인의 부가 아니라 집단의 부가 먼저 있었다.

(김) 예수는 철저히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내일 입고 먹을 일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깊은 통찰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 체제에서는 가난하다는 의식이 또 가난을 만들어 낸다. 실제로 빈곤하다고 할 수 없는, 오늘 삶에 감사하고, 문화적 풍부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안정이라는 공포가 있다. 절대 빈곤 상태는 아니다.

진짜 먹고사는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얘기할 틈도 없다. 신자유주의가 뭔지 떠들만한 것도 없다. 잔고가 0인 사람은 걱정이 없는데, 잔고가 100만원인 사람은, 잔고가 80만원으로 내려가면 불안하다. 아직 가난하고 모자란다는 생각이 실제적인 가난을 만들기도 하고, 내 아이니 미래를 위한답시고 죽어가는 거다.

구전 가요 중 진리가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무계획 무책임하게 살자는 얘기가 아니다. 쉬고 놀고 서로 사랑하고 문화적 활동하면서 사는 것이다. 일은 그런 걸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아직은 모자란다는 의식이 우리 삶을 굉장히 조악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 한국이 재난영화의 현실이다. 재난영화에서 아이를 가진 부모가 할 일은 정신을 차리는 일이지, 아이 손을 잡고 미국으로 가는 일이 아니다.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런 걸 떠나 ‘내가 아직은 가난하다’는 의식 자체가 오늘의 삶을 없앤 것이다. 내년이고, 5년, 10년이고 공포에 젖어 가는 거다.

이명박 씨가 민주적 절차로 뽑힌 것도 한국의 정치적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포의 심리다. 이명박 씨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 하나로 대통령이 된 것도 시민들 스스로에게 가난하다는 공포가 작용됐기 때문이다. 정말, (이명박 씨는) 미감을 해친다. 사실 신경 쓰지 말자고 해 놓고선, 저도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웃음) 아이들에게 (이명박 씨가) 왜 싫으냐고 물었다. 초등 고학년들인데, 스타킹으로 씌워 놓은 것 같단다. (폭소) 성찰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 멈추고 한번 되돌아보자 얘기하는 거다.

사진제공 : 프레시안

(우) 1970~80년대에는 체계적인 기아가 없었다. 90년대 들어 기아인구가 전세계적으로 늘어난다. 지금 전 세계의 딱 반이 기아인구다. 세 끼를 다 못 먹는. 한국은 1%가 세 끼를 못 먹는다. 그렇다면, 누가 가져갔느냐.

기아가 생긴 이유를 다국적 기업이 가져갔다 얘기하는데, 그건 정답이다. 세상의 빈곤이라는 게 없어질 수 있을까. 정치인을 정의해보니, 빈곤과 싸운 사람이 진짜 정치인이었더라. 인류는 국가를 만든 이후로는 빈곤에게 이겨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밥은 먹여라’, ‘아프면 치료해줘라’, ‘공부하고 싶으면 책을 좀 줘라’, 이것만 하면 ‘좋은 경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이거 세 개 다 해결이 안 된다. 태어나면 이 정도 해줘야 하는데, 부모들이 이걸 해 줄 수 없으니까, 애를 안 낳는 거잖나.

- 학교는 뭐하고 있을까. 대학은 죽어가는 반면, 비제도권에서는 인문학 강연이 풍성해지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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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대학이 다 망해가고 있다. 기업 연수원 비슷해졌다. 대학이라는 것은 국가와 협력할 때는 하고, 시장과 협력할 때는 하고, 국가나 시장이 잘못되면 경고시스템을 줘야하는데 그걸 안 한다. 근시안에 의해 대학이 몰락하고 있다. 인문학, 사회학 등 다 죽여 놓고. 한 대학은 교양필수과목이 ‘회계학’이다.
미래는 상상력이 콘텐츠가 생산력의 시대 아닌가. 일본 만화를 보면, 이건 그냥 만화책이 아니다. 웬만한 인문서적보다 낫다. 우리나라는 아니다. 성과 없으면 감사하고, 이런 발상들만 있다. 우리나라에도 콘텐츠 학과라고 있다. 뭐 배우냐고? 그냥 콘텐츠만 중요하다고만 배운단다. 역사, 철학, 문학 없이, 상상력, 창의력 다 죽여 놓고 가능하겠나. 대학은 사회적 경고음을 날리는 존재다.

(김) 통계를 보니 80년대 초에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20% 정도였는데, 지금은 90%에 가깝다. 대학 가려고 하면 다 간다. 정원이 많아졌고, 상향지원만 않으면. 문제는 대학생이나 부모는 관심이 없다는 거다. 훌륭한 인간을 키우기 위해 대학에 다니거나 보내는 게 아니다.

학벌 없는 사회 운동이 안타까운 것은, 학벌문제를 비판하는 게 학벌주의자라는 것이다. 악순환이다. 정서적인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진보와 활동하는 인텔리는 탐욕이 있다. 공포가 아닌. 내 아이가 좋은 일류대학을 가서 진보 엘리트가 되길 바라는 거다. 욕심도 많지 않나? 노동운동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이가 노동자나 민중이 되는데 공포를 느낀다. 윤리적인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이 더 충만하고 행복한가를 따져 묻는 거다. 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가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지원해야 하는데, 문제는 잘 산다는 것이 뭐냐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배체제나 소수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지금 광범위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 교회 문제를 얘기해보자. 이명박 체제의 문제 가운데 교회 요소가 빠질 수가 없다.

(김) 한국에서 사업하려면 대형교회를 나가야 한다. 그 안에서 모든 비즈니스와 아이들 결혼 등이 이뤄진다.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폐해의 연원을 들여다보는 게 유익할 수 있다. 따져 보자.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분명히 예수는 새로운 종교 만들려고 한 흔적이 없다. 예수의 신성조차도 325년 니케아 주교회의에서 결정됐다. 교회와 기독교 문제를 생각할 때 어느 정도까지를 진정한 교회를 두는가, 연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라는 사회문화정치의 현상으로서 간단히 비평할 수 있을 뿐인데, 그런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진) (이명박 씨가) 소망교회의 장로가 되기 위해 주차장 정리했다고 하잖나. 그것은 정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교회를, 예수를 믿는 것 같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웃음) 그래서 종교를 버리는 게 낫겠다.

(김) 첨언을 하면, 종교를 버리겠다는 것이 종교적이다. 천당지옥을 얘기하는 건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반영된 것이지, 종교 자체의 것은 아니다. 조화롭게 큰 욕심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종교적이라고 보는데, 현실에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종교 체제다. 종교를 버리겠다는 것에서 종교적인 느낌이 든다. 주변에서 종교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종교를 버리겠다거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다. (웃음)

(홍) 한국자본주의의 정신적 기반과 한국교회의 정신적 기반이 일치하는 게 있다. 무데뽀 정신으로 물질적 풍요를 이루겠다는 것이 똑같다. 이건 6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를 얘기하는 것이다. 맨손으로 교회를 만들었더니 캐쉬 플로우(현금 흐름)가 발생하는 거다. 기독교 패러다임과 박정희 이후의 자본주의 패러다임도 똑같다.

인류학적으로 얘기할 필요도 있는데, 교회를 한번 생각해보라. 대단한 비즈니스다. 원자재비용이 없다. 설교자만 있으면 된다. 설교자도 인덕이 있어서 아주머니들을 잘 구슬리면 돈이 생긴다. 이 정도의 현금 회전율을 가진 것은 비즈니스 차원에서 환상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는 내가 보기에 한국 개신교의 부흥교회와 일치한다.

요즘 내 생각은 (교회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신자유주의 이념이 호모 이코노미쿠스다. 돈이 되지 않는 욕구, 상상은 처박아 두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데, 이에 싸워야 되는 사람은, 첫째 인문학자고 둘째 종교인이다. 이런 얘기 팽배할 적에 영혼의 의미는 무엇일까, 라는 그 질문에만 대답했으면 좋겠다.

교회 얘기에서 떠오른 한편의 영화. 최근 개봉한 영화 <독>에는, 종교에 관심도 없는 아버지, 형국이 갑자기 교회에 나간다. 어릴 때 갔었다는 이유를 들며. 진짜 이유는 물론 다르다. 비즈니스 때문이다. 그의 공장과 비즈니스를 하는 윗집의 박 장로와 장 권사가 기독교인이다. 가족을 데리고 교회에 나가고 300만원이나 되는 돈을 헌금으로 내놓기까지 한다. 교회의 힘을 본다. 기독교 아닌 한국 기독교의 어떤 힘을 본다. 거기에는 순수한 종교적 열망이나 신념은 없다. 그저 중산층 커뮤니티로 입성하는 단계이자 사업적 관계를 위한 포석, 자신의 죄에 대해 어떻게든 용서를 구해 어떤 벌도 받지 않고 잘살고 싶은 욕망이 뒤범벅된 우리의 굴욕이 있을 뿐이다. 

- 최근 두 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대통령 당시 비판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아픔과 슬픔을 나누고 있다. 느낀 바가 있다면. 

(우) 노무현 정부 생전에 많이 싸웠다. DJ 때는 정부기관에서 일했다. 그래서 DJ는 공직자 시절의 기억 같은 것이다. 사실 DJ가 돌아가실 줄 몰랐다. 평생의 숙적이라 YS가 죽기 전까지 돌아가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눈물은 안 났는데, 앞으로 한국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길이 안 보이더라. 김대중만한 사람이 한국에 나올까. 안 나올 거다. 다만 안티히어로는 있는 것 같다. 안티히어로에 의해 우리가 영웅을 만드는 시절이 오지 않을까.

(홍) 두 양반의 노선을 반대했고, 지금도 반대하지만, 뜨끔하고 괴로웠다. 반대함에도 눈물 나고 죄송했다. 이 두 분이 개인적 신념은 어찌됐든, 이 분들은 중도였다. 두 양반의 노선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면도날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기어가면서 속은 썩어문드러졌을 것이다.

(진) 서거 추모는 추모로 끝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잃어버린 10년을 계속 써야 한다. 1년 반 만에 우리는 10년을 잃어버렸다. 두 분 대통령 돌아가신 뒤, 통합 얘기 나오는데,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시대정신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 두 분이 먹고살만한 사람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서민에게는 나쁜 대통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맘이 안쓰러운 것은, 여건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제금융을 수습하거나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말을 할 만큼 신자유주의가 진행된 시절에 권력을 넘겨받아서 안쓰러웠다. 

이어서, 각자 한명 씩 청중석을 돌아다니며, 직접 문답을 나누는 시간이 돌아왔다.

- 중앙대 학생이다. 최근 중대에서 진중권 교수 임용 거부를 계기로 ‘줄빳다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보나.

(홍) 최근 진 교수가 겪은 일련의 사태를 보면 그렇다. 옛날에 데모했을 때는, 제재가 감옥에 가거나 징계를 당하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스펙에 흠집을 내는 방식이다. ‘어디 잘 되나 보자’는 방식이 더 무섭다. 온 나라의 20~30대에게 영어공부 물결친 지가 10년 넘었는데, 이는 기업들이 토익점수를 보겠다고 해서 이렇게 물결이 친 거 아니냐.

그런데 문제는 대기업의 그런 기준에 대해 욕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서점의 경제경영서를 보면 코웃음 쳐지는 책이 있는데, 『마시멜로 이야기』. 대체 누가 100만부나 사라고 한 거냐. 시장 줄빳다는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방식은 다르지만, 효과는 더 높다. 자발적으로 하니까. 이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보면, 시장 폭력이구나 싶더라. 진중권 선생이 중요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연대할 필요가 있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 행동도 않고 비판도 않는 20대에 대해 ‘시대 개새끼론’이 있다. 88만원 세대라고 해서 동정도 받지만, 행동을 않는다고 비판도 받는 게 20대다. 왜 이리 비판받고 힘들 수밖에 없는지 모르겠다. 20대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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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어느 쪽에도 찬성하는 건 아니다. 내가 신촌을 사는데 연대 쪽으로는 안 간다. 돈, 호르몬, 술이 흐르기 때문이다. 영혼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라. 육체적으로는 2차 성징이 나타나면 크나, 영혼은 23~24세에 큰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 영혼이 큰 인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20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30~40대, 50~60대 부닥치는 문제들 가운데 돈 가지고 해결되는 문제들은 없다는 것이다. 그때 내 영혼이 얼마나 강건하고 풍부한가, 그것밖에 없다. 지금 20대들 스펙관리한다고 하는데, 안타까운 것은 스물다섯이 넘어서는 영혼이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영혼의 크기가 형성되는 시기임을 잊지 말고 70~80세 까지 행복하게 살려면 영혼을 키워야 한다. 스펙 때문에 영혼을 찌그러트리지 말라.

- 10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나,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가는 것에 대해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 대세를 따라간다는 생각을 버리면 된다. 대학 못가면 어떤가. 20대들이 보수화 됐다는 그런 말이 있는데, 그게 아니고, 쫄아 있는 것 같다. 쫄아 있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덜 맞은 것 같다. 아직 3년 반이 남아서 충분히 시간도 있고, 우린 이명박 씨의 얼굴만 조금 본 거잖나. 속마음도 못 봤고, 뇌도 못 봤고. 이명박 씨가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웃음) 20대 때 농촌으로 가는 것은 지금 가면 뻔하니까, 가라고는 말은 못하겠다. 그런데 책 잘 파는 저자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별로 없다. 사회한테 받은 건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

- 중학교 2학년이다. 3시 반에 수업이 끝나는데 강연이 2시 시작이라 조퇴를 하고 왔다. (박수) 촛불집회에 참여했는데. 친구가 이것을 학교 게시판에 올렸다. 선생님들이 불러 뭐라고 하더라. 10대로서 갖춰야 할 것이 있다면, 사회 나갔을 때 어떤 것을 갖춰야 하는지. 

(김)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이라고 계신다. 아동문학가 중에서 인세수입이 가장 많은 분일 거다. 이 분이 생전에 한달 생활비가 한 30만원이었다. 그것도 당신이 다 쓰는 것이 아니었다. 권 선생 안동 집에 가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집이 아니다. 뱀이 방 안에 들어오고 정말 생태적인 집이다. 이오덕 선생의 아들 분이 생전에 권 선생을 충주의 소박하고 작은 집에 모셨다. 모시자마자 불편하니 (안동)집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다. 권 선생은 가난해야 된다, 그런 생각으로 한 게 아니라, 그게 더 편한 거다. 30만원 쓰고 집 같지 않은 집에서 사는 게 더 편한 거다. 이른바 ‘자발적 가난’인 거지.

몇 억 원을 벌면서도 이런 식의 삶의 태도가 훌륭하고 가치가 있어서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많이 벌고 쓸수록, 경쟁에서 이겨야 된다는 기준을 갖고 있는데, 꼭 그렇지 않다. 가령 대기업 다니는 사람도, 억지로 잡혀 있는 것처럼, 그만두지 않는 가장 고상한 방식을 쓰고 있다. 싫으면 그만둬라. 안 죽는다. 원래부터 대기업 안 다닌 사람도 많다.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에게 나중에 몇 달 후나 1년 후에 물어보면 그런다. 처음에는 조금 힘든데, 훨씬 편하고 가족들도 밝아지고 좋아진 거 같다고.

우리는 위로 꼭 가야된다는 전제를 갖고 있는데, 꼭 위로 가지 않아도 된다. 더 나은 삶이 있는데, 전혀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엄마아빠가 공포에 젖어서 그런 거다. 다른 삶도 가능하다. 얼마든지 비껴나서 살 수 있고, 죽지 않는다. 놀기 위해 살아야 한다. 놀기 위해 일해야 한다. 두려워 할 것도 없고.

청중들과의 이야기가 끝나고, 대담을 마무리 하면서 사회자가 소회를 겸해 “딱 하루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F4 각자는 이렇게 얘기했다.

(우) 책 보는 사람들은 절대 지지 않을 거다. 특히 골프 치는 놈들한테는 지지 않을 거다. 내 신념이기도 하고,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고. 대기업 그만두는 짓을 해 봤는데, 꽤 높은 직급이었다. 그래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더라. 물론 순수하게 그랬다고 말하긴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대통령이나 장관 같은 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지만, 12시 전에 일어나는 것은 무조건 싫다. 대기업 그만두고 얻은 2가지 특권이 있다. 넥타이 안 매는 것에 3천만 원, 아침 12시 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에 2천만 원을 걸 용의가 있었다. 어쨌든 대통령은 생각 안 해봤지만, 최근 한국은행장을 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든다. 내가 보기에 이명박 씨가 등장한 것은, 한국은행장이 나쁜 놈이라서 그런 거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나를 한국은행장으로 만들 거다.

(홍) 대통령이 되면 딱 하나. 사퇴하는 거다. (웃음) 오늘 느낀 바는, 고민의 무게라는 게 알량하게 주둥이로 몇 마디 나불거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자극도 됐다. 사퇴하겠다는 얘기는 정권 잡는다고 우리가 말한 문제가 풀리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문제가 풀리는 건 극히 드물고 오늘 고민은 국가권력 잡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진) 대기업 박차고 나오는 건 못할 것 같고, 잘릴 것 같다. 스스로는 못하고 (웃음) 대통령이 되면, 실험할 수밖에 없다. 현직 대통령보다 잘 굴러간다는 것을 입증하고.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씀은, 자기 자신을 배려해라는 것. 자본은 여러분들의 교양, 삶에 관심이 없다. 자본은 자기 자신의 확대재생산에만 관심 있고 필요 없는 건 버린다. 남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지 말고. 한국사회는 쏠림이 강한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고독함, 무시를 견뎌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3년 하면 전화가 걸려온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

(김) 사퇴는 하는데, 한 가지 알리는 말씀을 해야겠다. 지구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단순한 말을 들려주지 않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문제는 ‘고래가 그랬어’를 부모가 사줘야만 볼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고래동무라고 해서 후원자가 있다. 대신 고래에 돈을 내주면, 고래가 300개 공부방, 도서관으로 간다. 잡지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지만, 한 달에 8500원만 내면, 30명의 아이들이 고래를 볼 수 있다.


그렇게 F4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4시간을 훌쩍 넘어 웃고 울고 함께 했던 행복한 시간. 이들은 해답이 아닌, 화두를 던졌다. “새로운 삶을 선택할 용기가 있는가.” 그리하여, “새로운 삶에 대한 선택이 우리 사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지금-여기는 ‘남들처럼 살고 싶은 욕망’만 들끓는다. 내가 아닌, 남들이 짜놓은 기준에 의한. 행복함이 오로지 자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양새만 가지려는 욕망만. 남의 불향이 나의 행복이 되는 이상한 세상. 결국 타자를 통해서만 나의 행복이 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은 변태다.

김혜리 기자(씨네21)는 프랑스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돈키호테는 사회가 꿈꾸기를 허용하지 않을 때 그 거대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개인이 윤리적일 수 있음을 주장하는 문학적 마스코트다.” 지금 시대는 그렇다. 이것저것 재지 않는 미친놈, 즉 돈키호테가 많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행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참, 서두에서 얘기했듯, 진중권 교수는 이런 대답을 내놨다. 정답이 아닌. “가장 가슴 아픈 게 이런 것들이다. 평범한 사람인데, 전과자 되고 보복이 들어오고.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 역시 강의가 잘리고,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소송이 들어오고, 보복을 당하고 있다. 그래도 지나고 나면 괜찮은 것 같다. 시간 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를 괴롭혔던 그 사람들은 욕을 먹고 불의에 대항하다 핍박 받은 사람들은 복권된다. 큰 흐름들은 그렇다. 후퇴도 있고, 업&다운이 있지만, 큰 맥락에서는 장기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까.”

버티고 견디는 것. 그것이 내가 일상을 돌파하고, 환멸을 견디는 법이다. 진 교수는 중대에서 마지막 강의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자화상에 대한 강의가 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수업. 그렇게 우리는 버티고 견디고 있다.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함께 버티고 견디자. 그리고 손을 맞잡자.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예스24 채널예스 기고 원문]

Posted by 스윙보이
2009년, 진중권 교수를 네 번 만났다.
물론 그는 나를 기억 못하겠지만, 강연 자리 세 번, 인터뷰 한 번.

진 교수는, 재미있다.
그 재미는, 물론 말초적인 흥밋거리나 유머를 뜻하는 게 아니다.
그는 지적호기심에 자극을 주고,
사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화두를 던져준다. 그것이야말로 재미.

다만 진 교수의 말이 빠른 편이라 워딩하기엔 다소 애로가 있다. ^^;

가장 최근, 지난 11월 진 교수를 만난 기록.
이 글은 특히 좀 애를 먹었다.
앞선 진 교수 인터뷰가 호기심 많은 청년의 대담 형식처럼 됐던 지라,
진 교수 이야길 되도록 잘 담고자 신경을 많이 썼지만, 생각만큼 안 됐다.
마감 일정에 쫓기면서, 다른 일과 겹쳐서 비몽사몽 간에 써야 했던 글.

출판사에서도 살짝 기분 나쁘게 했다.
강연직후 강연에 쓰인 사진을 부탁한다고 분명 몇 번을 말했건만,
엉뚱한 사진을 보내놓고선, 미리 말하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다니. 쯧.

뭐, 진 교수의 강연이 괜찮아서겠지만,
그래도 쓰고 나선 한숨 돌리며 행복한 잠을 청했던 기억.

이 책, 교수대 위의 까치.
미술에 문외한인 나이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다.
재미있고 흥미롭다.
회화를 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범례적으로 말해주는데, 
그게 여러 분야와 맞물려 꽤나 흥미진진하다. 
푼크툼.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사용한 개념까지 알게 되는 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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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건네는, ‘사라진 주체’에서 보는 푼크툼의 순간

[아름다운 만남] 『교수대 위의 까치』 저자 진중권


미학자 진중권이 귀환(?)했다. 그는 최근 6년간 몸을 담았던 중앙대학교의 강단에서 사라졌다(?). 이유야 누구나 다 알만한 비밀이고, 해당 학교에선 소동도 있었지만, 그는 그 사건으로 이전보다 더 알려졌고 유명하게 됐다.


이건 참 아이러니하다. 진중권은 (강단에서) 사라졌지만, 우리를 더욱 사로잡고 휘어잡았다.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진중권에 대한 ‘푼크툼’. 푼크툼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자세히 나오지만, 쉽게 말해, 필(feel)이 꽂혔다는 거다. ‘진중권’, 그 이름을 잘 모르던 사람까지 꽂히게 만든 마술적인 힘. 타의에 의해 ‘사라진 주체’가 됐지만, 개별적이고 고독하게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 진귀한 경험.   


알다시피, 지금 TV는, 지상파나 케이블이나 상관없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완전 대세다. ‘진짜 리얼’에 대한 불신도 커지곤 있지만, 리얼로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때문인지, 브라운관 속 리얼리티는 몸집을 키우고 있다. 특히나 케이블은 연예인들만의 리얼을 넘어, 일반인들이 종횡무진한다. 시청률은 덤이다. 뉴스를 만들고, 이슈가 된다.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티 프로그램 사이의 거리감도 좁혀진다. 누군가의 말마따나(씨네21 이다혜), ‘리얼은 가짜 같아지고 가짜는 리얼 같아진다. 리얼리티쇼의 재미는, 그 모든 경계가 불분명한 데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진 교수의 임용탈락은 리얼리티쇼 같다. 진 교수는 진짜 잘린 것일까. 그건 리얼일까. 헷갈린다. 이라크전에 대한 보들리아르의 말(“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처럼 대중에게 더욱 익숙해진 그를 보자면, 현실(리얼리티)의 자리에 가상(가짜)이 들어와 있는 것?


지난 18일 롯데시네마 홍대입구관에서 열린 45번째 ‘아름다운 人터뷰’에 미학자 진중권 교수가 초대됐다. 최근 출간된 『교수대 위의 까치』(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펴냄)의 7장에 실린 ‘사라진 주체’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 지금은 없지만 존재했던 어머니의 사진이 롤랑 바르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듯, 이 기록은 중앙대 강단에선 사라졌지만 우리 앞에 더욱 자주 출몰하는 진 교수가 ‘왜 대중을 사로잡을까’에 대한 작은 단초가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꽂히면 푼크툼, 아니 진크툼(진중권 푼크툼!)이고, 안 꽂히면 말고.


책의 콘셉트는 ‘낯설게 보기’다. “그림을 보다보면, 표준적인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적이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반면 이른바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 사람을 확 사로잡기도 하고,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왜 저러지? 왜 저렇게 했을까? 그런 그림을 모아보자고 해서 열두 꼭지를 모았다. 사실 더 있었다. 쓰다 보니 숫자에 대한 미신도 있고, (웃음) 열두 꼭지로 만들었다.”


또 이날 주제는 타의로 중앙대를 떠나게 된 그를 위해 학생들이 마련한 마지막 강의의 내용이었다. 강단에서 사라지게 된 교수가 학생들과 마지막으로 나눈 강의가 화가의 자화상을 다룬 ‘사라진 주체’라니, 재밌지 않나. 이건, 리얼인가, 아닌가. 강연을 엿보고 판단하시라. 


진중권, 푼크툼을 회화에 꽂다


이번 책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푼크툼’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에서 빌린 개념이다. 롤랑 바르트는 스튜디움(studiun)과 푼크툼(punctum)을 내세웠다. 사회적으로 공유된 코드로 사진을 보는 것이 스튜디움이다. 우리는 신문, 내셔널지오그래피, 광고에 등장한 사진 등을 보면, 그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별다른 예외가 없다. 그것이 스튜디움이다.


반면 똑같은 제재를 보더라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꽂히는 것이 푼크툼. 나한테는 꽂히지만, 다른 이에겐 꽂힌다는 보장, 없다. 사진과 나 사이의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 우발적이고, ‘절대적인 우연효과에 의해 발생한’(롤랑바르트) 개념이다. 이는 롤랑 바르트의 저서인 『카메라 루시다』에 잘 나와 있다. 수잔 손탁과 함께 묶은 『사진론 : 바르트와 손탁』에서도 접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스튜디움. “나는 이런 사진들에 대해 때로는 감동적인, 일종의 일반적인 흥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감동은 도덕적, 정치적인 교양이라는 합리적인 중계를 거친다. 내가 이 사진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거의 길들이기에 가까운 ‘평균’ 감정 상태에 속한다.… 그것은 스튜디움이라는 말인데, 무엇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호의, 즉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여기서 스튜디움은 코드화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다음은, 푼크툼. “두 번째 요소는 스튜디움을 깨뜨리기 위해 혹은 스튜디움과 박자를 맞추려고 온다. 이번에는 내가 이 요소를 찾지 않고 그것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사건의 현장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온다. 이 낙인들, 이 상처들은 점이다. 이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이 우연이다.” 그러니까, 푼크툼은 찌른다. 개별적인 나를 찌른다는 것. 


진 교수는 롤랑 바르트를 ‘찌른’ 두 개의 예를 제시한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가 어릴 때 온실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이에 사로잡혔다. 지금은 없지만 존재했던 어머니의 사진이 ‘왜 나를 사로잡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이렇게 마술적인 힘, 사로잡는 힘을 푼크툼이라고 표현했다. 또 제임스 반 데어 지(James van der Zee)가 흑인 중산층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바르트는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의 벨트에 꽂힌 거다. 즉, 사진 주제와 상관없는 디테일에 그렇게 된 거다.”


그러나 이는, 사진의 개념이다. 피사체가 있어서, 지표성이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 푼크툼이다. 회화에는 기본적으로 피사체가 없기 때문에, 회화에 쓰기는 문제적 개념이라고 진 교수는 지적한다. “푼크툼은 향수적이다. 노스탤지어. 그게 얼마나 보편성을 가지겠나. 한편으로 유아론적이다. 나한테만 와 닿는 거다. 사진작가는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미학이 있다. 절대적 우연은 예술과 미학이 될 수 없고, 수용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진가들 사이에서는 푼크툼을 버리자는 말도 나온다.”
 

가랑비를 맞으며 침묵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서울, 1965


그럼에도, 진 교수는 푼크툼이 버리기엔 참 아까운 개념이란다. 어떻게든 푼크툼을 살리고 싶다. “경직되고 좁은 것을 완화해서 나만이 겪는 체험이라도 보편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20여 년 전, 친구의 집에서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에 꽂힌 적이 있다.

또 아우구스트 잔더라는 사진작가가 있다. 사회과학적 사진을 찍고, 특정주제만 찍는 유형학적 사진의 창시자다. 그 사람의 사진은 독일사회를 읽어내는 사진이다. 그 사람의 <석탄배달부>라는 사진이 확 들어왔는데, 3년 뒤 다른 작가의 같은 주제로 찍은 사진을 봤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한테 꽂힌 게 다른 사람에게도 꽂힐 수 있구나! 푼크툼도 전달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엄밀히는 안 된다. 회화에는 피사체가 없으니까.”


진 교수가 제시하는 것은, 푼크툼의 개념을 완화시켜 그림을 읽는 다양한 방법을 도출해보자는 것이다. 도상학이나 도상해석학적으로 보는 순간, 보편적으로 읽게 해주는 그런 코드가 아닌.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 걸린 그림 가운데 너무 많이 알려진 작품 앞에서 우리는 그냥 훌쩍 지나치기도 한다.

반면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 혹은 작품 앞에 압도당하거나 꽂힐 수 있다. “표준전과식의 설명도 아니고, ‘이게 뭐다’라고 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다양한 층위가 있다. 물론 표준적인 해석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말고 남들이 던지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남들이 하지 않는 답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 작품과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를 가지면, 작품해석이 다양하고 풍부해지지 않을까. 시대마다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고전이고 좋은 작품이다.”


그러니까, 『교수대 위의 까치』는 범례적인 책이다. 당신도, 이렇게 할 수 있어. 한번 해 보라는 식의. 어떻게 접근하면 되냐고? 진 교수의 팁은 검색을 통한, 경계를 넘나드는 길 찾아보기. “99.9% 구글에서 정보를 찾았다.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등 다양한 언어로 나온 자료를 통해 이 책을 썼다.”


자화상의 어떤 역사


이날의 주제로 들어가자. 요하네스 굼프(Johannes Gump, 1626~). 듣보잡이라고? 맞다. 알려진 작품도, 찾을 수 있는 작품도 <자화상> 밖에 없을 정도란다. 미술사를 찾아봐도 거의 나오지 않고, 쉽게 볼 수 있는 작가의 작품도 아니다. 그런데, 진 교수는 꽂.혔.다. 그러니까, 푼크툼.

[자화상], 요하네스 굼프


이 작품 <자화상>, 희한하다. 주체가 3개다. 하나는 뒤통수, 다른 하나는 거울, 남은 하나는 캔버스. 즉 현실과 비현실, 더욱 비현실이 함께 나타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캔버스에 그려진 자화상이 가장 강력한 효과를 드러낸다. 그림을 보는 관객과 눈이 마주친다.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작가는 뒤통수만 보인다.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의 일부



여기서 잠깐 자화상의 역사를 짚어보고 가자. “자화상은 르네상스시대 이후에 등장했다. 중세 때 화가는 개성이 없었다. 지금 앉아있는 의자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듯, 중세까지 화가는 장인의 의미였다. 최초의 자화상은 역사화에 자신을 배치했다.” 그림의 일부이자 역사의 목격자로서의 화가 자신.

“초기 르네상스의 자화상은, 화가가 자신이 묘사하는 신성한 사건에 목격자로서 참여한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가령 아뇰로 가디(Agonolo Gadi, 1350~1396년)가 그린 산타 크로체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보자. 화면 왼쪽에 테두리에 몸이 반쯤 잘려 나간 채로 한 사내가 서 있는데, 그 사내의 프로필은 화가가 그린 가족의 초상 속에 등장하는 본인의 옆얼굴과 일치한다.”(pp. 139~141)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림 속의 화가가 그림 밖의 관객을 바라보게 된다. 필리피노 리피의 자화상이 바로 그것. <시몬 마구스와의 논쟁과 베드로의 책형>의 경우다. “누가 화가인지 찾는 방법이 있다. 누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가. 그게 화가다.” 


[자화상], 타치아노


독립적인 화가의 자화상이 나오는 것은 타치아노와 바사리다. 다만 화가라는 사실은 강조되지 않았다. 그림의 왼쪽 끝에 아주 소심하게 붓이 들려 있음을 보여줄 뿐. “타치아노의 <자화상>을 보자. 옷이 화려하다. 나도 살만큼 산다는 거다. 사회적 지위를 강조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람인양.” 물감을 묻혀가며 그림을 제작하는 공인(工人)으로서의 자부심은 그닥 찾아볼 수가 없다.

[자화상], 안니발레 카라치

 

한 걸음 더 가보자. 안니발레 카라치의 <자화상>. 그림을 그리는 순간을 담았다. “카라치에 와서야 ‘나는 예술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라는 예술가의 자의식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가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굼프의 자화상


그렇다면, 굼프의 작품은 독창적이었을까. 카라치의 다른 그림, <이젤 위의 자화상>을 보자. “카라치의 이 그림에는 화가(얼굴)가 없다. 주체가 없다. 저 멀리 창가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인물이 서 있다. 이건 재현에 대한 그림, 그림에 대한 그림이다. 메타적인 그림이 된다. 우리가 우리의 얼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준다. 매우 현대적인 그림이다. 굼프는 이 그림을 봤을 것이다. 굼프는 카라치의 영향을 받았다.”


굼프가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회화의 자의식을 탐구한 셈이 됐다. “굼프는 관객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감추어버리고는 화폭 위에 거울에 비친 ‘영상’과 캔버스에 그려진 ‘모상’만 남겨둔다. 그 결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는(또는 거울을 비추는) ‘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굼프는 자화상을 이용해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재현의 본성’을 주제화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굼프는 ‘화가의 정체성’을 묻고 있지 않다. 그가 묻는 것은 ‘회화의 정체성’이다.”(pp.143~144)


카라치의 <이젤 위의 자화상>이나 굼프의 <자화상>은 가상이 현실을 압도한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자기동일성이 없는 복제)의 문제. 복제가 원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보들리아르가 얘기한 개념을 17세기 화가들이 다룬 셈이다. 현실적 주체가 사라지면서 복제의 복제가 되고, 모방의 모방이 된다. 현실보다 재현이 더 현실적이다. 보들리아르는 말했다. "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실의 끔찍함이 사라지고 게임 같은, 현실의 자리에 가상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1600년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비슷한 정서가 있었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 데이비드 데일리


그 정서가, 바로 바니타스, 즉 헛되다(Vain). 데이비드 데일리의 작품이 이를 잘 드러낸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 “17세기는 이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잖나. 삶이라는 게 가상이고, 연극이다, 허무하다, 같은 정서가 지배한 거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을 보면, 그림을 그린 베일리는 그림 속 사진에서의 모습일 때, 67세인가 그랬다. 나이가 많을 때 그렸는데, 그림은 젊을 때의 자신이 현실의 사진을 들고 있다. 뒤에 있는 모래시계, 해골, 쓰러져 있는 물잔, 꺼진 촛불은 바니타스, 즉 인생의 허망함을 드러낸다. 가상과 현실이 뒤바뀌었다.”


자화상은 진짜 나일까


진 교수는 지적한다. “거울을 보고 그린 것은 진정한 자화상이 아니다.” 눈을 빼서 보지 않는 이상, (거울을 보고 그린) 자화상은 타인이 자신을 본 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화가들은 자기 얼굴을 그리기 위해 거울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렇게 그린 자화상은 실은 자기가 자기를 본 모습이 아니라,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자화상은 결국 타인을 그리는 것이나 다름없다.”(p.151) 


이에 에른스트 마흐는 그의 저서인 『감각의 분석』에서 <거울 없는 자화상>을 보여줬다. 말 그대로, 거울을 활용하지 않은 자화상이다. 단 하나 문제는, 얼굴이 제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 이 그림에서는 소파에 길게 누운 몸과 자신을 그리는 손이 보인다. 얼굴의 일부가 드러나긴 하는데, 바깥을 향한 왼쪽 눈의 째진 틈과 그 사이로 보이는 코의 왼쪽 측면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그릴 때는 모종의 자기기만이 들어간다. 블로그에 자기 사진을 올리는데, 이것은 따지고 보면, 이상이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기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거울을 볼 때의 생얼(민낯)이 진짜다. 일종의 허위의식인 거다. 정체성을 이상화할 때, 더 나은 나를 추동할 수도 있으나, 자기소외를 불러오기도 한다.” 모종의 분열증이 끼어들게 되는 셈이다.


책에서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거울 단계’를 통해 설명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은 이상적 자아를 투사해놓고 현실의 자아의 불완전함을 보상 받으려 한다. 화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상으로 구성한 이상적 자아를 현실의 무대 위에 연출하려 한다. 그 충동이야말로 어쩌면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를 성립시키는 모티프일지 모른다. 화가들이 자화상을 통해 자의식과 정체성을 주장할 때, 그들 역시 거울에 자신을 비춰놓고 그 이상적 자아를 화폭 위에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p.151)
 

[시녀들], 디에고 벨라스케스


“주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초상은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17세기 고전주의 인식론의 표상이며, 원본이 사라지고 복제가 자립성을 띠는 것은 17세기 바로크 세계 감정의 표상이다. 초상(재현)이 화가(주체)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립하는 데에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 불안함은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즉, 화가들은 다른 사물을 그릴 때와 달리 자화상을 그릴 때에는 거울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자화상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지도 모른다.”(pp. 148~150)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의 자화상
 

[재현 금지], 르네 마그리트


진 교수는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 자화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설명한다. 굼프의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의 뒤통수를 보는데, 이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거울을 두 개 이상 쓰지 않는 한. 르네 마그리트의 <재현 금지>가 이를 잘 표현했다. “일종의 유체이탈인데, 착란증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가 자기의 몸에서 빠져나가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주체는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17세기에 일반적이었다. 제재가 아닌 재현에 대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 유명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대표적이다.” 즉, 이는 OBE(out-of-body experience).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두 번째는 자기 몸 안에서 있으면서 바깥에서 자기를 보는 경우다. ‘도플갱어’와 같은 것이다. 로비스 코린트의 <하얀 파자마를 입은 자화상>이나 빈센트 반 고흐의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이 대표적이다. 전자에서 화가는 오른손에 파레트를, 왼손에 붓을 들고 있다. 그러나 코린트는 실제로는 오른손잡이였다. 자신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그린 것이다. 후자에서도 고흐는 실제로 잘라낸 왼쪽 귀가 아닌, 오른쪽 귀가 잘린 것으로 묘사했다. “만약 고흐가 (그림 속의 주체가) 자신이라고 인식했다면 (귀가 잘린 위치를) 바꿨을 것이다. 밤 12시에 화장실 거울 앞에서 촛불을 켜고 3분 동안 뚫어지게 봐라. 그런 착란증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웃음)” 이것은, AH(autoscopic hallucination).


세 번째 유형은, 내가 나를 보는데 어디에 있는지 헷갈리는 경우다. HAS(heautoscopic)로 일컬어지며, 조반니 바티스타 파지의 <건축가 친구와 함께 있는 자화상>이 그렇다. 거울 속는 두 인물이 있다. 그런데, 누가 화가인지 헷갈린다. “이 그림은 이유가 있다. 화가는 건축가와 한 몸 같은 친구였다. 건축과 회화는 디자인(이탈리아어로 ‘disegno’)이라는 측면에서 통일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한 몸이다시피 묘사한 것이다.”


느닷없이 왜 신경생리학이냐고? 굼프의 자화상은 그러니까, 세 번째 유형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하나의 인격이 현실, 거울, 화폭 위에서 3중으로 분열되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정작 현실의 모델은 얼굴이 없다. 거울 속의 얼굴은 시선을 회피한다. 오로지 캔버스 위의 얼굴만이 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관객의 주목을 자기한테로 잡아끈다. 복제의 복제, 모방의 모방에 불과한 캔버스 위의 얼굴이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현실성을 띠는 셈이다.”(p.157)


[자화상], 요하네스 굼프


진 교수는 굼프가 남긴 또 다른 자화상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앞선 자화상과 달리, 포맷이 사각형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앞서의 것(원형)이 낫지 않나. 이건(사각형) 너무 화려하다. 아까 것은 집중도도 있고 단색이 중심이다. 사각 포맷은 캔버스라고 느껴진다. 원형은 거울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한 번 더 꼬아준다.”


굼프의 두 자화상의 결정적 차이이자 결정적 장면은, 눈이다. 거울에서 드러나는 눈의 위치가 다르다. 사각 포맷의 자화상은 거울 속 얼굴은 화가에게 시선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원형 포맷은 다르다. “분명 거울을 보는데, 눈을 안 맞추고 무시한다. 얼마나 섬뜩하나. 시선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관객과 눈을 맞추는 것은 캔버스의 것이다. 아주 작은 디테일이다. 주체가 사라진 것은 17세기에도 있었고 굼프 혼자 한 것은 아니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굼프의 작품에 꽂힌 것은 이런 아주 작은 디테일 때문이다. 이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굼프의 <자화상>이 진 교수를 사로잡은 이유. 그림은 이렇게도 볼 수 있음을 범례적으로 보여준 것. ‘모델-재현’의 상식적 관계를 무너뜨린 디테일. “재현은 모델과 상관없이 제 의지를 가지고 따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것이 나인가? 뒤통수를 보이는 저 머리인가? 아니면 거울 속의 얼굴인가? 그것도 아니면 캔버스 위의 얼굴인가?”(p.159)
 


이날, 나는 거울을 볼 자신이 없었다. 왠지 내 시선을 피하면서 독자적으로 표정을 낼 것 같아서. 복제가, 시뮬라크르가 나를 압도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살짝 궁금하다. 이 글을 쓴 나는 리얼일까. 아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리얼일까.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거꾸로 시대는 과연 리얼일까. 우리는 언제쯤 다시 거울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거울을 통해 인민의 아픔과 소외를 다독이고 눈 맞춰야 할 통치자가 등을 돌린 이 현실, 리얼일까. 인민에게서 등 돌린 통치자가 거울 속에서 우리에게 계속 등을 돌리는 모습이면 어쩌지. 사라진 통치자. 사라진 인민. 아, 이런 푼크툼의 순간이라면, 정말 싫다.   


[예스24 채널예스 기고 원문]
 
☞ [진중권 교수에 대한 다른 이야기] 디지털 인문학, 영화와 세계를 사유하다

Posted by 스윙보이
진중권.
20대 때 만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뭐랄까.
시원짜릿했고 통쾌했다. 정색하지 않고 신랄하고 재밌게 핵심을 콕콕.
특히나 이문열에 대한 나의 묵은, 정리되지 않은 무엇을 정확하게 찝어줬다. 

그리고 직장인 시절.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진중권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했던가, 그렇지 않던가, 그것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만, 그것이 첫 접촉이었다.

지난 3월. 
강연 형식을 띤 자리였지만, 진 교수를 만났다. 사인도 받았다. 야호~
그러고보면, 20대 나의 민무늬 정신에 주름을 새긴 인물들은 얼쭈 다 만나본 셈이다.
고종석, 김규항, 조병준, 진중권, 김수행...

노엄 촘스키옹도 돌아가시기 전에 만날 수만 있다면, 아...  

그리고 얼마 전,
3월 당시 진 교수에게 손수 사인을 받은 세 권의 책 가운데 하나를,
수다회 모임 게스트로 진 교수를 초대하고자 했던 친구에게 건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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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 세월이 흘렀다. 한때 모 방송국에서 일을 봐주던 한 친구는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를 간혹 본다고 했다. 담배를 피러 가면 진 교수도 같은 장소에서 흡연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일종의 담배 친구? 물론 친구는 진 교수를 알고 있지만, 진 교수는 친구를 모르는 상태. 당시 진 교수는 해당 방송국의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던 때였다. ‘(할 말 있)수다회’라는 모임을 종종 갖던 우리는 모임 때마다 ‘게스트’를 초청하곤 했다. 그냥 함께 수다나 풀자고, 이 풍진 세상, 우리만의 유희나 즐기면서 세상을 씹자고.

어느 날, 친구가 진 교수를 한번 초청해보자고 했다. 담배 필 때 종종 맞닥뜨리는데, 자기가 보기엔 외로워 보인다면서. 담배 필 때, 한번 말해보겠다고 했다. 뭐, 사실 별 기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만의 친목모임에, 당대의 논객이자, 이래저래 바쁜 양반이 초대에 응해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으니까. 뭐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까. 해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거사(!)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내 기억으로는, 해당 라디오 프로그램이 막을 내리면서 친구도 진 교수를 만날 일이 없어졌다. 약간, 아쉬웠다. 함께 담배를 피면서, 수다를 떨어대면서 담론놀이를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그냥 함께 놀고 싶었거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진 교수는 언제나처럼 ‘동번쩍 서번쩍’하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그를 책으로 처음 만난 것이 아마 10여 년 전,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였다. 정말이지, 통쾌하고 유쾌한 책읽기로 기억한다. 삐뚤어진 우파 이데올로그의 똥꼬 깊숙이 파고드는 유희에 과장하자면, 오르가슴이라도 느낄 정도였으니까. 여튼 이후에도 책을 통해 꾸준히 그를 만났다.

알다시피, 진 교수는 본디 미학자다. 논객보다는 미학자라는 정체성을 더 먼저 달았을 터이다. 그런데 나는 안타깝게도, 미학과 관련한 그의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 이 사회에 쏘아올린 각종 시론들을 묶어놓거나 논객으로서의 정체성에 가까운 책들은 읽어댔지만, 미학자 진중권은 다소 내겐 멀었다. 그의 미학 관련 책을 읽어본 주변인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가 어느 순간, 영화잡지 <씨네21>에 글을 연재했다. 눈이 갔다.


진중권 교수와 영화. 그 조합이 어색한 사람도 있겠다. 대중적인 논객으로서, 미학자로서 정체성을 각인시킨 그에게 영화라니. 시사나 미학이 아닌, 영화라니. 물론 그것은 오해다. 영화는 시사와 미학을 모둠할 수 있는 좋은 테마다. 그의 연재물은 흥미로웠다. 영화비평도 아니었다. 그의 전공인 미학과 인문학이 어우러져 새롭게 접근하는 영화의 세계. 진중권이기에 가능한 시도. 이미 브랜드화된 진중권의 담론놀이는 1년여 지속됐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책이 나왔다. 이름 하여, 『진중권의 이매진』(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펴냄). 방가방가~

진중권을 만나다

지난 20일 서울 신림동 롯데시네마 신림관에 진중권이 떴다. YES24와 롯데시네마가 주최하는 ‘아름다운 책 人터뷰’ 3월의 두 번째 작가로 초대됐다. 『진중권의 이매진』출간과 관련한 독자와의 만남. 오래 전, 게스트 초대에 실패하여 대면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라도 그를 만나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논객으로서 대중에 널리 이름을 알린 그를 잠깐 소개하자면, 그는 미학을 전공한 학자다. 독일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으며 미학자로서의 목표는 철학, 미학, 윤리학의 근원적 통일성을 되살려 새로운 미적 에토스를 만드는 것, 예술성과 합리성으로 즐겁게 제 존재를 만드는 것 등이다. 한편 대중적 논객으로서 사회에 대한 다양한 글쓰기와 강연을 해오고 있으며, 촛불시위나 TV토론프로그램 등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상도 우리에겐 익숙할 것이다.

지은 책으로는 『미학 오딧세이』『현대 미학강의』『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춤추는 죽음』『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 2』『앙겔루스 노부스』『시칠리아의 암소』『페니스 파시즘』『호모 코레아니쿠스』『폭력과 상스러움』 등이 있다.

참고로, 그는 이미 다른 책 등을 통해 채널예스 독자들과 만난 바 있다.
[향긋한 북살롱]예술은 항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 『서양미술사』의 저자 진중권

이날 사회는 김혜리 씨네21 편집위원이 맡았다. 아래는, 충분하지는 않고 띄엄띄엄하지만, 이날 두 사람이 독자 혹은 관객들과 함께 나눈 디지털과 미디어와 영화를 아우른 시시콜콜한 담론이다. 내가 보기에도, 진 교수는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가 맞다.

디지털 기술이 만든 새로운 영화의 세계

김 위원이 진 교수에게 물었다. <베오울프>와 같은 영화가 실사, 애니메이션 외에 제3의 (영화)양식으로 떠오르고, <폴라 익스프레스> 등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캡쳐’라는 신기술이 영화의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자리 잡은 것에 대해.

진 교수는 “연극배우의 연기는 전체적이지만 영화배우의 연기는 파편적이다”라는 말로 운을 뗐다. “배우들이 스크린 앞에서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베오울프>를 보면 카메라 앞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 같다. 움직임의 다이어그램을 제공하는 것이다. <베오울프>에서 주인공은 난쟁이 연기도 했다. 배우의 사라짐 현상이 심해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디지털 분라쿠(文樂:실물 크기에 가까운 인형들이 까만 옷을 입고 작은 샤미센 반주로 영창되는 사설에 맞추어 연기하는 일본의 전통인형극)이거나 분라쿠의 디지털 버전처럼 보인다.”


<베오울프>에 대한 그의 의견은 책에서도 이렇게 정리돼 있다. “<베오울프>는 ‘제3의 장르’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려면 그의 실험이 기술의 시연을 넘어 (앞에서 시사한 것처럼) 매체에 고유한 미학성을 보여주어야 한다.”(p.64)

김 위원이 <베오울프>를 통해 영화윤리의 문제를 제기한다. 실사영화는 아무리 여름용 오락영화라고 해도, 현실 등을 상기시키면서 스크린 속의 인간이 피를 흘리면 아픔을 느끼고 모욕을 당하면 슬픔을 느끼나, 퍼포먼스 캡처로 만든 영화는 안전판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을 이용하는 예술가가 어떻게 활용하는 가에도 달려있지만, 상당히 위험한 부분이 있다고 상기시켰다. 그렇다면 이런 기술 발전이 이야기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진 교수는 우리가 갖고 있는 서사의 틀이, 영화건, 드라마건,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 서사라고 지목하면서 <나비효과>를 예로 들었다. “<나비효과>는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서사의 실험은 재미있다. 주사위의 눈은 여섯 개지만 실현되는 것을 하나다. 그것이 플롯을 만들어간다. <나비효과>는 6개의 눈이 병렬진행하면서 잠재성의 축을 현재성의 축으로 옮겨놓는다. 재미있는 것은, 미래의 원인이 과거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인과관계를 뒤집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하, 그랬다. 그게 신기하지 않았던가. 그 전에 보아왔던 타임루프의 서사는 ‘과거 원인, 미래 결과’의 틀이었는데, <나비효과>는 신기했다. “<나비효과>의 구조는 하나의 플롯을 선형적으로 진행시키는 게 아니라, 다수의 플롯을 공간적으로 병행시키는 방식으로 짜인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 이미 대중의 일상이 된 하이퍼링크를 형식화한 것. 오프라인의 독서는 텍스트를 앞에서 뒤로 읽어나가는 선형적 글 읽기다. 인터넷 서핑은 다르다. 온라인의 읽기는 대개 비선형적으로 이루어진다.”(p.79)


진 교수는 <메멘토>와 <타임코드>의 예도 든다. “<메멘토>는 역행진행을 취하면서 데칼코마니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영화를 DVD로 실험을 해봤다. 거꾸로 돌리면 완벽한 선형적 서사다. 정말 재미없었다. <타임코드>는 못 봤는데, 듣자하니 4개 프레임이 동시에 나온다. 이건 CCTV와 비슷한데, 그래서 익숙하다. 나만 해도 TV를 보면, 스포츠, 뉴스, 드라마 등 몇 개를 동시에 본다. 그런 것들이 미디어의 변화로 인한 새로운 지각방식인데, 그걸 영화로 재현한 셈이다. 사람들이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촛불시위 때 방송을 했는데, 왜 그렇게 인기를 끌었는가 생각해보면 제가 잘 생긴 덕도 가장 중요한 이유고, (웃음) 부차적인 이유가 방송에 게임 포메이션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이미지를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지를 조작하고 싶어한다.”

그렇다. 미래영화의 모습. 상상해 본적 혹시 없는가. 인터렉티브 시네마라는 말은 어떤가. 진 교수는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의 생사여부를 둘러싸고 관객들이 선택하게 됐을 때, 맥이 끊기면서 재미가 없게 되는 경우를 들었다.

책은 <파렌하이트>를 예로 들며 이렇게 언급한다. “최근 미술에 이어 영화에도 인터랙션을 도입하려는 실험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이게 못마땅했던 걸까? 어디선가 어느 감독이 인터랙션 시네마에 대해 논평했던 대목을 읽고, 유쾌하게 뒤집어졌다. 관객이 매번 영화를 중단시켜 놓고 버튼을 눌러 플롯을 진행시켜야 한다면, 관객은 영화 속으로 몰입하는 데에 심각한 방해를 받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랙션 영화는 극을 중단시켜놓고, 관객의 의견을 물으며 태도를 결정하라고 다그쳤던 브레히트의 연극을 닮았다.”(p.82)


인터렉티브 시네마는 아직 멀다. 인터렉티브 시네마의 서사는 결정론적이 아니고 참가자 해위나 관객들의 행위에 따라 달라진다. 이럴 경우 컴퓨터가 병렬처리가 가능해지고 기존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양자컴퓨터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SF’라는 것이 진 교수의 언급.

영화의 촉각적 경험

그렇다면 관객들의 지각방식은 어떻게 바뀔까.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으로 규정한 바 있는데, 육체는 미디어와 기술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할까.

진 교수는 미디어 아트가 지닌 육체화와 탈육체화의 측면에 주목했다. 베냐민도 영화가 지닌 촉각적 지각에 주목한 바 있었다. 그는 <라이언일병 구하기> 초반부를 언급했다. 우리가 그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촉각적 경험을. 그것은 곧 1인칭 체험자 시점이라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종전까지 대부분 전쟁영화는 3인칭 시점을 취했다. <블랙호크다운>는 특별한 기법이 없음에도 트라우마를 느끼게 할 정도의 체험을 가능하게 했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촉각적 효과가 극대화한 경우라고 일컬었다.


책에서는 이런 설명이 추가된다. “<라이언일병 구하기>는 영화사에 일찍이 없었던 ‘폭력의 현상학’을 구현한다. 이는 효과를 내는 기술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기억을 조작하는 미학의 차이다. 가령 <지상 최대의 작전>의 관객은 전투를 ‘밖에서’ 관찰하게 하나, <라이언일병 구하기>는 전장을 객석으로까지 연장해 관객을 불현듯 그날 오마하 해변의 전장에 처하게 만든다.”(p.125) “영화 매체의 촉각성으로 상처를 주어 역사를 트라우마로 기억하게 하는 것. 거기에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성취가 있다.”(p.128)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이렇게 설명된다. “이 영화는 뜨겁다. 고해상의 이미지에는 공간적 빈틈이 없고, 초당 24장의 프레임은 이미지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지운다. 맥루언의 말대로 정보의 밀도(해상도)가 높으면 관객의 참여도(상상력)은 떨어지는 법. 이미지가 뜨거우면 상상력은 식는다. 중세의 목판화는 차갑다. 관객에게 앙상한 뼈대의 빈틈과 간극을 스스로 채우라고 요구한다. 이미지가 차가울 때 상상력은 뜨겁다.”(p.133)


진 교수의 이날 선언 중 하나를 꼽자면, 우리가 이미 사이보그라는 것이다. “차나 자전거를 탈 때 우리 신체는 그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렇게 기계와 이미 접속된 상태다. 사실상 사이버다. 인간은 이미 사이보그화 돼 있을지 모른다.” 이에 대한 예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스파이더 맨>을 들었다.

“‘사이보그’라는 낱말은 그 사이에 심보그(symborg)라는 신조어로 전환했다. ‘symbios’와 ‘organization’의 합성어인 심보그는 한마디로 인간과 동물, 신체와 기계, 가상과 현실의 공생관계 위에서 살아가는 유기체를 가리킨다.… 생명 자체가 실은 다른 생명체와의 공생을 통해서만 탄생하고 존속할 수 있다는 얘기. 이 자연현상을 인공적으로 수행하는 존재가 바로 ‘심보그’다.”(p.100) <스파이더맨>은 그래서 ‘심보그’ 선언이다. 내게 2개의 주체가 존재하는 것.


리얼리즘은 저해상으로부터?

김혜리 위원에게 지난해 가장 충격적인 영화 중의 하나가 <클로버 필드>란다. 최고의 괴수는 형식이고, 특수효과는 마케팅이라는 이야기. 예전에는 고해상이 몰입의 전제였는데, 지금은 그렇다면 달라졌다는 얘기? 진 교수의 대답은, “고전적 리얼리즘의 개념이 살아있는 것이 저해상”.

어느 정도 고해상의 영상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이제 고해상을 연출․합성․허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영상을 되레 리얼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 “영화에 초점조차 안 맞는 저해상의 영상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대중에게는 그런 동영상에 대한 취향이 생겼기 때문일 게다. 흔들리고, 초점이 안 맞고, 해상도가 떨어지는 영상에 대중이 열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캘리포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때 휴대폰으로 찍은 동영상을 생각해보라. 시각이 제한되어 있어 범인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나, 거기에는 영화나 방송의 카메라로 전달할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과 진실성이 있다.”(p.142)


정말, 그 같은 저해상의 리얼리즘을 이용한 것이 바로 <클로버 필드>의 핸드헬드 카메라였다. 괴물의 습격 앞에서 벌벌 떠는 캠코더. 그것에 몰입됐던 경험, 당신도 갖고 있진 않은가. 몰입에 반드시 고해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디지털 대중이 사용하는 영상의 전략을 본격적으로 영화 속에 도입하는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이 흔들리는 저해상의 불량한 영상을 대중이 기꺼이 참아주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의 일상적인 영상 취향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관에서만은 다른 영상을 보고 싶어하는 이는 거기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다.”(p.143)

영화는 진화한다

그렇다면, 이런 디지털이나 신기술들이 영화사를 바꿔놓을까. “최초의 몰입 영화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였다. 이상한 장치는 가망이 없다. 사람들이 번거로워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영화가 계속 진화하고 있지만, 현실이 주는 감동을 넘지 못한다. 과거에도 뉴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없애지 않았다. 서로 전략을 차용하면서 진화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게임을 차용하고, 게임은 영화를 차용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것이다.”

진 교수에 따르면, 대중의 이미지 취향은 이미 변했다. <워낭소리>만 봐도 그렇다. 감동은 원래 피사체에서 오나, 피사체를 조작했음에도 사람들은 속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다. 아마 우리의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진화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방향성을 갖든, 어떻게 변화하든. 아마도, 고민은 계속 될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새로운 상형문자의 시대다.… 디지털은 영화로 하여금 제 언어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p.29)


진 교수의 강연은 그렇게 유익한 시간이었다.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영화를 기대하게 만든. 영화 안에서 나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새로운 기술이 주는 사유를 만날 수 있다. 이루지 못했던 게스트 초청은 몇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렇게 만났다. 영화와 만나는 디지털 인문학이 즐거웠던 이유. 나의 영화도 계속 진화한다. 당신의 영화는 어떤가.

[예스24 채널예스 기고]

☞ [진 교수에 대한 다른 이야기] 진중권이 건네는, ‘사라진 주체’에서 보는 푼크툼의 순간

 
Posted by 스윙보이
지난 1963년 8월28일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DC 링컨기념관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세기의 명연설(물론, 표절 의혹이 있긴 하나)을 한 날이야.

그리고 46년이 지난 2009년 8월28일,
나는 건국대학교 새천년관에서 'F4'를 만났어.
워워, 구준표, 윤지후, 소이정, 송우빈 '따위', 아니지.
내 가슴을 팔딱팔딱 뛰게 만들고 뇌 속을 하얗게 만들어 버린,
지금-여기의 판타지도 아닌, 망상도 아닌, 손발 오그라들게 만드는 F4.

20대 내 민무늬 정신에 주름을 새긴 분 중의 한 분인,
김규항 샘을 비롯한, 
우석훈, 진중권, 홍기빈 샘!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괴짜사회학》출간기념 대담회 “괴짜 학자들, 한국사회를 뒤집어 보다”

이날 F4를 만난 가슴 뛴 기록은, 

조만간 이곳에 다시 긁적이겠으나,
아, 정말이지 오르가슴을 잔뜩 느낀 날이었다오.
질질 쌌지, 쌌어.


4시간을 넘어서 진행된 이 오르가슴은,
뻥 튀겨서 세기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일이 아닐까나, 혼자 생각했쥐.

다른 무엇보다,
킹 목사의 명연설이 있던 날,
46주년이 되는 이날, 나는 F4를 통해 또 하나의 용기와 위안을 얻었어.

이날을 관통하는 어떤 포인트.
"새로운 삶을 선택할 용기가 있는가"
"새로운 삶에 대한 선택이 우리 사회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니가 알다시피, 난 찌질한 장삼이사다보니, 
작은 산들바람에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휘휘 나풀거리잖아.
그것이 당연하다고, 인간적이라고 여기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윤활유가 필요하고,
남루한 꿈이라도 토닥거려줬음 좋겠거든.

이날의 감동폭발은 이것.
끝나고 사인을 받으러 갔더니,
김규항 샘이 어흑, 우리 본 적 있지 않냐며,
어렴풋 기억을 해 주시는 거 있지. 완전 초감동!ㅜ.ㅜ
한 5년 전 일산에서 김규항 샘과 커피 한 잔을 나눴고, 
《예수전》 출간기념 강연회에서도 뵌 적이 있었지.
이 불초소생을 어렴풋이나마 떠올려주시다니,
아, 듁어도 조아조아효~

돌아가는 길,
버스 안에서 나는 벅찬 가슴을 안고 혼자 중얼거렸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히히. 8월28일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 책이 바로, 《괴짜사회학》!


이 녀석도 좋은 가벼ㅎㅎ


이렇게 F4의 흔적을 담았기 때문이라지...^.^


우석훈 샘은 이렇게 말해줬어.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 난 어느새 '우리'가 돼 있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지 말자규! 버티고 견디자규!!



홍기빈 샘은 이렇게. "좋은 생각, 좋은 인연!" 아무렴, 우리는 그렇게 연결된 인연인 걸~ 좋은 생각을 갖고!


참, 내 인생의 현재 진짜 F4는,
고종석, 김갑수, 김규항, 조병준 샘이야.^.^

나는 운 좋게도,
네 분을 직접 눈 앞에서 알현했더랬지. 흐흐.
 ☞ 조병준 그리고 임종진
고종석 선생님을 만난 날,
커피 한 잔, 이야기 한 자락을 버무렸던 풍경, 보실래요?

언젠가, 이 F4를 모시고,
나의 커퓌하우스에서 이 분들을 알현할 기회가 온다면,
나는 또 질질질 흥건하게 싸고 말테오!

덧붙여,
진쑤기(왕지혜)도 함께 있으면 나는 죽어도 좋으련만!
줄 수만 있다면 목숨까지 아깝지 않을,
바로 그 사람 오직 한 사람!
아, 오늘이 마지막회인데,
가슴이 아포 아포..ㅠ.ㅠ

참, 넌 니 인생의, 지금 F4는 누구니?
갑자기 궁금해져쏘!


 
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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