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혁명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2.11 혁명과 사랑의 마에스트로, 엠마 골드만 by 스윙보이
  2. 2007.06.13 [한뼘] 체 게바라, 생일 축하!!! by 스윙보이

혁명과 사랑의 마에스트로, 엠마 골드만(Emma Goldman)(1869.6.27~1940.5.14)

사랑과 혁명은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죠.
말하자면, 둘 다, 불온합니다.
혁명은 그렇다손, 사랑이 왜 그러냐고요?
하하, 사랑의 속성을 곰곰 생각해본다면 고개를 끄덕이실 거예요.
맞아요. 사랑은 모든 것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세계를, 우주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도 혹은,
달라지게 하는 것이 사랑이죠.

그것은 어쩌면 혁명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죠.
불온한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그 자체로 불온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혁명가의 사랑, 사랑의 혁명가는 온통 불온함으로 가득합니다.
기성세대와 지배세력이 해석할 수 없어 막연하게 공포를 가지는 그 무엇, 불온.
그것은 때론 세상을 바꾸고 뒤흔드는 힘을 발휘하기도 하죠.

여기 불온함으로 점철된 생을 꾸려간 사람,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이 있습니다.
혁명과 사랑을 생의 중심에 놓고 앞으로 앞으로 길을 거닐었던 사람.

먼저, 엠마를 지칭하는 타이틀 혹은 직업군을 한번 볼까요?
혁명가, 사회운동가, 노동운동가, 아나키스트,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편집자, 언론자유의 주창자.

휴우, 이거 열거하기도 힘드네요.
타이틀만 놓고 보자면 무겁고 진중한 짐만 짊어진 사람 같지만, No!
그는 즐겁게 혁명을, 사랑을, 불온함을 만끽하고픈 자유연애주의자이기도 했지요.

여러 차례 연설에서 언급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도 한 번 볼까요?
(글로 남아있질 않아 몇 가지 버전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만.)

"If I can't dance, it's not my revolution!
(만일 내가 춤 출 수 없다면, 그건 내 혁명이 아니다!)",
"If I can't dance, I don't want your revolution!
(만일 내가 춤 출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If I can't dance, I don't want to be part of your revolution.
(만일 내가 춤 출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다!)" 등.

어느 것이 정확한 말이었든,
그는 혁명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듯 보입니다.

엠마는 1869년 제정 러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러시아 혁명 전의 나라, 왠지 그와 어울리는 듯도 합니다만,
혁명가로서의 기질과 자유분방함은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DNA에 박혔습니다.
8살에 가족을 떠난 그는,
할머니와 고모가 있는 쾨니히스베르, 상페테르스부르그에서 생활했는데,
청소년 시절부터 그곳 대학의 급진주의자들과 사귀면서 사상을 확립해 나갔죠.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배다른 자매 헬렌 조도코프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로체스터의 방직공장에서 일하게 된 그는 노동운동과 여권에 대해서도 차츰 눈을 떴습니다.

1886년 5월 엠마의 사상과 평생을 좌우할 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어요.
메이데이(노동절)의 계기가 된 시카고의 '헤이마켓' 사건.
그해 5월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미국 노동자들의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고, 
아나키스트들 주동으로 경찰관의 노동자 살해 항의집회가 헤이마켓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 폭탄이 터지며 난투가 벌어졌고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경찰관 살해를 교사했다는 혐의로 무정부주의자 8명이 재판에 회부됐던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아나키스트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엠마는 급진주의자들과 어울리며 아나키즘의 실천과 전파에도 나섭니다.
알렌산더 버크만과 함께 1906년 아나키즘 기관지 <어머니의 대지(Mother Earth)>를 만들고, 이듬해에는 암스테르담의 무정부주의자대회에 참석합니다.
그는 죽어서도 시카고 헤이마켓 아니키스트 묘지에 무덤을 둘만큼,
뼈 속 깊이 아나키스트였습니다.
그는 아나키즘을 이렇게 정의했죠. "인간이 만든 법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자유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출하려는 철학이다. 아나키스트들이 거부하는 것은 '인간 마음의 지배자인 종교, 인간의 욕망을 지배하는 소유욕,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정부'다."

그래서 단순하게 무정부주의로 아나키즘을 일컫는 것은 오류가 있는 것이죠.
엠마는 무엇보다 뛰어난 연설가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뛰어난 선동가였다는 말과도 통하죠.
인권, 특히 여권과 급진적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던 그는,
수시로 기득권과 지배세력을 뒤집어 놓는 과격한(!) 연설과 주장을 했습니다.
실업자가 정부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음식도 제공받지 못한다면,
식료품을 훔쳐서라도 배를 채우라고 말하던 것이 그였습니다.
지금-여기의 강력한 법치주의(?) 통치자가 들으면 까무러칠 일이죠.
그는 또 징병제도에 반대했고, 산아제한을 권장했으며, 언론의 자유를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어째 지금-여기의 이 땅 불합리한 현실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네요.

당연 윗분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죠. 엠마는, 명백한 사회 불순세력!
1916년 뉴욕 유니온 광장에서 가몬트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등,
산아제한운동을 펴다가 투옥되기도 했습니다(이 같은 운동 결과, 미국 아이오와에는 '엠마 골드만 클리닉'이라는 비영리 의료센터가 세워지기도 했죠).
이듬해에는 반전운동을 펼치다가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기도 했죠.
그 전에 말썽꾸러기로 그를 낙인찍은 미국 정부는 그의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했습니다. 찌질하기는. 그 정도도 감당도 못할 정부라니.
경찰과 언론은 그를 '미치광이' '빨갱이들의 여왕'이라며 혐오했고,
지지자들은 그를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 '반란 여성'으로 숭배했습니다.
그야말로 극과 극을 달린 인물이었던, 엠마!

이 무렵의 미국 정부도 참 쪼잔하죠?
당시 그런 분위기가 만연해 있을 때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뒤 보수화된 사회나 기득권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눈뜨고 못 보죠.
그들은 사회주의자나 급진주의자를 탄압하고 억누릅니다.
사회 안녕을 빌미로 자신의 입지와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인 거죠.
엠마는 그런 탄압을 피하고 혁명 기운이 충만한 그의 고향, 러시아로 떠납니다.
247명의 동지들과 함께. 때는, 1919년의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하진 않죠.
혁명의 기운이 넘실거렸던 러시아도 그의 이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고,
결국 러시아를 다시 떠나게 됩니다.
이 실망스런 경험을 담아 『러시아에 대한 나의 환멸(My Disillusionment in Russia)』(1923)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고요.
미국과 러시아를 떠난 그는 영국으로 넘어갑니다.
제임스 콜튼과 결혼해 영국 시민권을 획득한 그는,
유럽을 돌며 강연 등을 통해 아나키즘 바이러스를 뿌립니다.
또 1936년 에스파니아 내란이 일어나자 아나키스트를 도와 활약하기도 하죠.
그러다 1940년 캐나다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그의 생애는 막을 내립니다.

키가 작고 약간 뚱뚱한 모습에,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외모는 아녔지만,
엠마는 주변을, 청중을 격동시키고 매혹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끊임없이 인간을 탐구하고 공부하는 열정을 지녔던 그는,
허세 없이 편안하고 세련된 태도로 사람을 대하고,
개방적이면서도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대화를 할 때면 상대방에게 늘 즐거움을 선사하는 사람이었어요.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갖춘 덕에, 늘 서사가 끊이질 않았던 덕이었습니다.
3개국 이상 언어를 습득, 엄청난 다독가였으며,
기지와 해학을 갖춘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던 거죠.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혁명을 열망하는 자의 식견이 보인다'고.
각종 문학, 예술, 과학, 경제, 여행, 철학, 남성과 여성,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엠마의 뜨거움.
그는 어쩔 수 없는, 불온아였습니다.

참, 서두부터 사랑, 사랑하더니, 그 얘긴 어디 있냐고요.
운동에 가려 쉬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엠마에게도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호보 킹(뜨내기일꾼들의 아버지)'이라 불린 저명한 사회운동가이자 의사였던 벤 리트먼과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결혼제도에 반대하고 자유연애를 신봉한 자유연애주의자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람둥이'로 알려진 벤과 연애하면서 안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편지엔 이런 고민도 있었다죠.
"네. 나는 여자예요. 틀림없는 여자이지요. 그것이 내 비극입니다. 여성인 나와 결연한 혁명가인 나 사이에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서 나는 그리 행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그는 사랑의 열망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는 역량을 보여줬습니다.
자신의 정치활동에 감정을 불어넣으며 그는 진짜 공부하는 사랑, '호모 에로스'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혁명운동만큼 사랑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진정한 불온아.
"성적인 억압이 가해지던 시기에 엠마는 용감히도 남녀관계를 정치적 맥락에서 이야기하고, 황홀한 연애경험을 일상생활의 극치라고 이야기했다."(캔데이스 포크)

지금-여기의 하수상한 시절, 우리에게도 엠마 골드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만큼의 농담이지만,
엠마 골드만이 아니라면 목표물에 제대로 꽂힐 수 있는,
신발(?!)이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자료 : 『엠마 골드만(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캔데이스 포크 지음/이혜선 옮김/한얼미디어 펴냄)

[위민넷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체를 꿈꾸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세르나. 본명보다 훨씬 더 알려진 또 다른 이름은 '체 게바라'.
1928년6월14일 혁명가 '체'의 탄생일. 80년에서 한해가 빠진다. 그리고 10월이면 서거 40주기.
IT혁명이니 정보혁명이니 하는 따위는 사실 말 장난이고.
진짜 혁명은 체 게바라의 죽음과 함께 사그러들었다.
이 21세기에 혁명이란 가당키나 한 말인가.

언제부터인가 내 서명의 한켠엔 자리잡은 체의 일갈.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Seamos realistas, realisemos lo imposible!)

그리고,
아이들에게 보낸 체의 마지막 편지.
"세계 어디서든 불의가 저질러지면 그것에 깊이 분노할 줄 알아야한다.
그게 어떤 불의이고 어떤 사람에게 저질러진 불의이건 간에 상관없이.
이것이야 말로 혁명가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불가능한 꿈도, 분노하는 법을 차츰 잊고 있다.
꿈보다는 현실에, 분노보다는 타협과 무관심에 더욱 익숙해지고 있다.
한때 전복을 꿈꾸며 혁명의 역사를 가진 이들을 부러워했던 시절,
체는 정신이고 바이러스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체와 미디어

체와 미디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체의 살아생전, 쿠바혁명은 미디어의 힘을 적극 활용 혹은 이용하면서 본격화됐다.
현재의 미디어환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매스미디어를 통해 혁명은 힘을 얻었고 세를 뻗쳤다.

1957년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혁명에 불을 당긴 해.
1월 '라 플라타 병영 습격사건'은 최초의 승전보였다.
"게릴라군은 이 라플라타 병영 습격사건으로 다수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체 게바라 <쿠바혁명전쟁의 회고> 중에서)

그러나 쿠바 정부는 더 이상 게릴라군이 존재 않는다고 선전했고.
이에 혁명군은 2월 시에라 마에스트라 게릴라 기지로 허버트 매튜즈 뉴욕타임즈 기자를 불러
인터뷰를 했고 기사가 나왔다. 미디어를 통해 정부의 주장을 반박하며 뒤집은 것이다.
또 4월에는 미국의 방송도 활용했다. 인터뷰 장면이 방송을 통해 나갔다.
게릴라군의 존재감은 일거에 확대됐다. 세력 확장의 계기가 됐다.
혁명의 기운은 그렇게 고조됐다. 혁명이 미디어의 조력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여기의 많은 미디어는 체를 그저 상업적인 목적에 의해 소비하고 있을 따름이다.
살아생전 혁명의 기운을 고조시킬 수 있는 조력자였지만,
죽어서 체는 미디어에 의해 상업적인 상품으로 이용당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다.
상업적인 딜레마에도 불구, 맑은 눈을 지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미디어를 통해 체의 혁명적 이상을 수혈받고 각성을 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체! Happy Birthday Day

 
한 포털의 인물정보는 체를 '정치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체의 직업을 정치인보다는 '혁명가'라고 명명하련다.
체는 사실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도 포섭당하지 않았다.
체를 붙잡은 것이 있다면 그건 민중이었다.
민중을 위한 혁명과 이상국가의 실현이 체의 모든 것이었으리라.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음에도 체의 국적은 라틴 아메리카였다.
아니, 체는 국적따윈 없는 세계인이었다.

오늘 하루, 체의 생일을 축하해줘도 좋으리라.
그리고 사그러든 혁명의 꿈을 잠시나마 펼쳐도 좋으리라.

체! Happy Birthday Day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린 시절의 체


참조)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 Ernesto Che Guevara,1928~1967 )
Posted by 스윙보이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55)
함께 살자(공유와 공동체) (51)
식품 정의(페어 푸드) (8)
또 다른 미디어 (22)
이야기가 있는 풍경 (10)
미디어 소믈리에 (13)
놀아라, 직딩아~ (31)
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236)
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49)
저자와의 만남(기고) (2)
돼지털 싱글스토리 (82)
나는 당신을, 감탄한다... (45)
프로이트와는무관한불친절한.. (5)

달력

«   2018/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get rsstistory! Tistory Tistory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