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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04.11 11일의 봄 by 스윙보이
  2. 2010.09.11 9.11, 아옌데를 위하여 (떠나요, 둘이서, 9월의 칠레로~) by 스윙보이
  3. 2008.09.11 당신의 9.11은 어떠하신가 by 스윙보이 (2)
  4. 2007.09.11 9.11, 영원한 우리의 트라우마 by 스윙보이
한 달 전, 3월11일 오후 2시46분.
일본 동북부 센다이시 동쪽 179km, 해저 20km 지점에서 규모 9.0의 강진.
더불어 최고 38m에 달하는 쓰나미. 이어진 원전의 파괴까지.  

일본 열도는 흔들렸다. 결국, 흔들린 것은 이 세계였다.
아직 여진은 계속 되고, 어떤 삶이든 그 재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2001년 9월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붕괴가 일어났던 날로부터,
10년이 약간 미치지 못한 시간. 허나 11일의 비극이 다른 형태로 반복됐다.

어쩌면 누군가는 11일의 트라우마를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이 없는 상상이지만, 9.11과 3.11 그 재앙의 현장들에서 소중한 무엇을 잇따라 상실당한 누군가가 있다면... 끔찍한 상상이다.ㅠ

한 달이 흘렀고, 10주기가 다가온다. 4월11일.  
그 아픔에도 불구하고, 산 자는 살아간다. 웃고 떠들고 즐긴다. 더 많은 슬픔의 더께를 견디고 버티면서.  


흐드러지게 말간 봄날의 햇살 안에 연인들이 즐겁다.
봄날의 연인. 그들을 보고 웃음 한 모금 지었다. 

그래, 어떡하든, 봄이지. 11일의 봄. 연인들의 봄.
피어라, 웃어라. 햇살이 참 좋은 봄이다... 
Posted by 스윙보이

요즘 '칠레', 하면 무사귀환부터 바라게 된다.
알다시피, 지하 700m 갱도에 갇힌 33인의 광부 때문이다. 8월5일에 갇혔으니 한 달도 넘었다. 구출작업도 늦어졌다. 지난달 30일부터 시작됐는데, 3~4개월이 걸린단다. 다행이랄지, 8.8cm의 초큼한 구멍을 통해 외부와 소통하고 있다. 그들이 부디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면서도, 8.8cm의 구멍을 통해서만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엉뚱하고 미안한 호기심도 든다.-.-;; 

아울러, 그보다 더 험한(혹은 악랄한) 갱도에 빠진 우리를 생각한다.
칠레의 33인 광부는 구조된다는 기대라도 있지만, 현재의 내 심정은, 이땅의 갱도에선 아니다. 도리도리. 우리가 갇힌 갱도에는 8.8cm의 지름만큼도 안 되는 구멍이 있을 뿐이다. 하긴, 그거라도 어딘가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꽉꽉 막힌 화폐갱도에 갇혀 있다는 인식도 못하고 있으니까. 심약한 나는 궁시렁 대면서도 그 갱도에서 꾸역꾸역 지탱하고 있고. ㅠ.ㅠ

어쨌든 칠레를 와인으로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다.   
대한민국 자유무역협정(FTA) 최초 체결국인 칠레. 덕분에 싼값의 칠레 와인은 한국의 마트를, 한국의 식탁을 장악했다. 아니면,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하지만, 칠레는 와인으로만, 길이로만 떠올리는 건, 뭔가 부족하다. 한국의 지난 현대사와도 겹쳐지는 어떤 핏자국 때문이다. 인민들의 피, 말이다.


2010년 9월11일.
대한민국 국민인 내가 칠레를 떠올리는 건, 37년 전 그날 때문이다. 혁명적 사건이 좌절되고 말았던 그날.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해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이 총칼에 의해 피눈물 흘리고 말았던 그날. 이 한 맺힌 혈서적 유서를 보자.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내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1973년 9월11일 살바도르 아옌데


최근 칠레에선 아옌데 정권 탄생 4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1970년, 세계사에서 유래없는 일이었다. 소아과 의사 출신으로 뿔테안경을 낀 샌님적 외모를 지닌 살바도르 아옌데 씨는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무엇보다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남아메리카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의 실현이었다. 덩실덩실~
 


사회주의 정권은 33인의 광부가 갇힌 탄광과도 관련을 맺는다.
칠레의 노동운동은 광산촌 광부들에 의해 출발했다. 이들의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1917년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이 주도해 칠레 최초의 노동자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창당됐다. 이는 아옌데까지 명맥을 잇게 된다. 칠레는 와인이 아닌 구리가 왕이다. 세계에서 구리 생산이 가장 많다. 광업은 칠레에서 가장 큰 산업이다. 파블로 네루다도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쨌든, 아옌데는 사회주의 경제개혁을 시행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미국(인)이 선점하고 있던 구리광산을 전면 국유화했다. 구리광산의 수익은 사회적 자산으로 배당됐다. 은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토지 및 농업개혁이 실시됐고, 어린이에 대한 무료 우유배급 등도 시행됐다. 사회주의는 함께 잘 사는 방법을 고민했고, 당연히 있는 자가 아닌 없는 자를 위한 정책에 적극 앞장섰다.   

문제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열폭(열등감 폭발)이었다. 
사회주의 정권의 항해는 쉽지 않았다. 물가는 상상도 못할만큼 뛰었고, 생필품은 동이 났다. 1972~1973년 2년 연속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였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주의 경제개혁의 실패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농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칠레경제의 핵인 구리의 국제가격을 떨어트리고, 아우구스트 피노체트를 앞장 세워 군부 쿠데타라는 비열한 수를 뒀다. 1970년 9월11일, 미국의 하수인 피노체트는 산티아고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명박, 아니 겁박했다. 투항하라고.

하지만, 아옌데는 진짜 '리더'였다.   
속된 말로, 과장하자면, '식빵, 쪽 팔리느니 확 산화할란다!'. 그는 투항하지도 않았다. 망명을 택하지도 않았다. 그가 택한 것은 죽음.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총으로 그는 스스로 쾅!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모든 것이 압축된 그 말. 그는 칠레 속으로, 인민 속으로, 노동자 속으로 온전하게 스며들었다. 많이 다르긴 하지만, 이 땅에서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와 살짝 겹치기도 한다. 

그 이후의 참혹함도 아주 살짝 겹친다.
범죄자 피노체트가 1990년까지 17년 동안 독재적 대통령질을 해대는 동안, 3000여 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됐다. 역시 범죄자 출신의 통치자가 대통령질을 하는 대한민국, 선량한 시민들은 범죄자로 내몰리고, 힘과 돈 듬뿍 가진 범죄자들은 총리나 장관(후보)으로 임명되며, 똥돼지는 왜 그렇게도 꿀꿀대는지. 토 나와!


올해 초,  아주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아직 마음에 남아 있다. <칠레 전투:비무장 민중의 투쟁> 상영 얘기다. 지난 1998년 제3회 인권영화제를 통해 비로소 정식 소개된 이 영화는, 3부작으로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개혁과 최후, 노동자들의 투쟁 등을 다루고 있다. 지난 1월에 인권운동사랑방이 함께 보자고 했는데, 아 시간이 맞질 않아 좌절.

지난 2005년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제6회 전주국제영화제. <칠레전투>의 감독, 파트리시오 구스만이 역시나 연출한 <살바도르 아옌데>를 보지 못했다. 구스만 감독은 이렇게 말했단다. "바로 그 시기에 살바도르 아옌데가 더 좋은, 더 자유로운 유토피아를 나의 조국에 실현시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인생을 결정지은 인물이고,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뭣보다, 인민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아옌데.
또 다큐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자식들 저녁상을 준비하는 노인의 입을 통해 "그것은 정말 위대한 유토피아를 위한 꿈이었다." 인민의 입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저런 말은, 아마 직접 듣는다면 먹먹~할 거다.

아옌데의 꿈은 아직 살아있으라.
칠레 인민의 피 같은 칠레 와인을 마신, 33인 광부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대한민국의 한 찌질한 청년이 바라는 바다. 사회주의정권 탄생 40주년 기념식에서 
아옌데 대통령의 딸인 이자벨 아옌데 상원의원 왈. "아버지의 이상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렇게, 나는 믿고 싶다. 아울러, <칠레전투>의 2부 끝장면, 이런 내레이션(자막)이 나온다. "아옌데는 죽었지만 칠레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글 머리에서 이 땅의 흉악한 갱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기대? 희망? 그 따윈 없다고 도리질을 쳤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까진 감출 수가 없구료. 혹시나. 정말로 혹시나. 지름 8.8cm도 되지 않을 구멍이라도.   

다른 9.11 이야기

덧붙여, 대개의 사람들 뇌리에 박힌 9월11일의 사건은, 그렇지, 2001년 9월11일. '9.11'이라는 이름의 아마도, 21세기 최초의 전인류적 트라우마. 어느덧 9주기가 됐다. 명복을 빈다. 

아울러, 1906년의 9월11일. 올해로 104주년이 된 셈인데, 무하트마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운동(사티아그라하)'를 본격 펼친 날이다.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지 말자며 평화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오늘 2010년의 9월11일. 예스24의 파워문화블로그 간담회에 갔다. 뭐, 오로지 떡밥(!)에만 관심이 있어서 간 속물적 인간인 나는, 늘 그러하듯 존재감 없이 떡밥만 먹고 돌아오긴 했는데, 한 분이 던진 한 마디가 영 불편해서 오늘 글을 이렇게 길게 늘여놨다. 

역시나 졸렬하고 편협한 포스팅인 셈인데, (내 승질이 못돼서 그렇다!) 물론 그 분의 생각과 다를 뿐, 그 분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비판은 해야겠다. 오해는 마시라. 그 분이 나쁘다는 뜻도 아니요, 그 분의 (정치적) 성향이 어떠한지는 모른 채 하는 얘기다.

자기 소개를 하는 과정에서, "문화(를 다루는) 블로그는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듣기 나름일텐데, 나는 그 뉘앙스가 더 정치적으로 느껴졌다. 정녕, "정치적이지 않다"는 말에 숨은 뜻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인 걸까, 궁금했다.

지금 이 엄혹한 시대, 문화·예술이 어떻게 정치에 휘둘리며, 정치적으로 억압 당하는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인 걸까. 인류사에서 문화·예술이 어떻게 정권과 기득권의 통치 도구로 이용됐으며, 문화·예술이 어떻게 기득권에 저항했는지를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문화'라는 말이 붙었다는 이유로, 정치색을 띠지 말라? 아주 협소한 의미의 정치를 갖다붙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은 자신의 글을 부정하라는 말 같아서 영 마뜩찮았다. 더구나, 물론 나는 잡문날품팔에 불과하니 '파워'니 '리더'니 하는 레떼르와는 동떨어진 블로거이나, 예스24에서 강조한 파워와 리더로서의 오피니언 블로거라면, 그런 말씀은 완전 의외다. 문화나 예술은 한 시대의 산물이요, 시대나 정치와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문화나 예술이든, 어떻게든 일정 부분 정치색을 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위대한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 말씀으로 그것에 대한 언급은 맺겠다. "작곡가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무심할 수 없다. 인간적인 고뇌, 압제, 부당함이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한다. (…) 고통이 존재하고, 오류가 존재하는 그곳에 나는 내 음악을 가지고 나아갈 것이다.”(『음악과 권력』 중에서
)


결론은 이렇다.
여름은 위태롭고, 커피향이 서서히 깔릴 즈음의 계절인 9월.
그 어느해 9월에, 나는 칠레 사람들을 만나고, 칠레의 공기를 흡수할 테다. 

그때 나는,
아옌데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만나고, (11일)
빅토르 하라를 노래(Venceremos·벤세레모스:우리 승리하리라)하며, (16일)
파블로 네루다의 시(詩)를 읊는다. (23일) 
칠레 와인, 그리고 칠레 커피를 곁들여서.
 
내 어느해 9월은, 칠레가 익어가는 계절. 
떠나요~ 둘이서~ ^.~ 
그리고 외쳐요. 벤세레모스!!!  



☞ 당신의 9.11은 어떠하신가
9.11, 영원한 우리의 트라우마

Posted by 스윙보이

오늘은, 9월11일.
날짜를 접하는 순간,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이, 바로 그, 9·11.
뉴욕에 자리한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이 힘없이 무너지던 그 광경.

그것은 아마, 21세기를 실질적으로 연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2001년 9월11일 이전까지는,
21세기가 진정으로 도래한 시점이 아니었던 듯 싶다.
그럼에도, 우리는 확인했다.
21세기가 왔다지만, 20세기의 야만이 현재진행형임을.
21세기가 우리에게 별천지를 선사할 것이 아님을.

그렇다. 그 9·11은 그렇게, 21세기의 인류의 첫번째 트라우마였다.
미국이 정의한 '테러'(분명 다른 입장에서는 어쩌면 '성전'이었을테니)의 이미지로 각인된.
불안과 공포를 무기로 권력과 대중의 보수화가 급격히 진전된.

하지만 그 9·11이 터지기 전까지,
9월11일은 아이러니하게도, 평화의 기념일이었다.
9·11이 터지기 전, 100여 년 전인, 1906년의 9월11일.
2006년 100주년을 넘어, 올해 102주년을 맞은 '평화의 9·11'.

그날은,
무하트마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운동'(사티아그라하)를 시작한 날이다.
간디는 21년간 남아공 생활을 했다. 1893년 변호사로서 소송사건을 맡아 남아공으로 건너갔다. 변호사였음에도, 그곳에서 그는 굴욕을 당했다. 인종차별. 기차를 탔다. 1등석 표를 샀으나 승무원은 3등석으로 옮기라고 했다. 막무가내. 거부했다. 끝내 내쫓겼다. 유색인종은 1등석에 탈 수 없다는 인종차별 정책 때문이었다. 그 얼토당토 않은 차별이 간디의 의식을 일깨웠다. 당시 남아공에는 7만여 명의 인도인이 있었단다. 그리고 하나같이 백인에게 박해를 받았다. 간디가 깃발을 들었다.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시작했다. 비폭력 불복종운동. 인도노동자 3000명이 엠파이어 극장에 모였다. 신분증명서를 소지하고 지문을 날인토록 한 법안(이른바 '외국인 지문날인법' 아닌가!)에 저항하는 의미로 신분증을 불태웠다. 차별에 저항한 것이다. 그깟 지문날인 신분증으로 사람이 사람을, 차별해선 안된다는 저항의 몸짓.

그것이 비폭력 불복종운동의 시초였다. 평화의 9·11.
간디의 이 운동은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인권운동과 남아공 흑백인종차별(아파르트헤이트) 철폐운동 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재밌는 역사다. 그리고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같은 날을 두고서.
차별에 저항하는 평화운동이 일어난 날과
미국의 '폭력 패권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계기가 된 날.
이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

인류역사에 또 하나의 9·11도 있긴 하다.
칠레의 독재자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1973년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반동쿠데타를 일으킨 날이 9월11일이었다.
바꿔말하면, 남아메리카 최초의 사회주의정권을 세운 살바도르 아옌데가 자살한 날. 아옌데는 대기업의 국유화와 농지개혁의 촉진,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국교, 분배 위주의 경제정책 등을 내세웠다. 칠레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선거에 의해 입성한 사회주의 민중연합정부였다.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아옌데가 집권한 칠레에 대해. "라틴아메리카의 해방과 독립, 투쟁과 전투의 진보운동 속에서 칠레는 20세기의 파리 코뮨이었다. 말 그대로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란>에서 문제제기하고,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정식화한' 모든 일들이 민중들의 힘에 의해 눈 앞에서 펼쳐졌다. 이것은 책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스펙터클이었다."

당연 미국은 아옌데 정부를 싫어했다. 칠레에 대한 경제권을 비롯한 지배권이 약화될 것이므로. 쫀쫀한 미국은 경제원조 거부, 친미파 장교들에 대한 군부 지원을 했다. 피노체트가 수혜악당이었다.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아 반동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는 장렬히 전사했다. 직접 권총을 들고 끝까지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에게서 선물받은 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하나의 9·11은 그랬다.

하긴 이 유구한 역사 속에,
9월11일에는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더구나 개인의 역사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을 터.
지구상 60억명의 개인에겐 60억개의 9·11과 각자가 바로보는 9·11이 있을 터.
당신의 9·11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 혹시 오늘이 당신 생일이라면, 축하한다.^^

9·11. 나는 어떤 보통사람들을 생각한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그 사람들.
2년 전 9.11을 다룬 영화, <플라이트 93>에 그 사람들을 엿봤다.
그리고 그때 아래와 같이 긁적였다.
나는 오늘도 그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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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과 보통사람들

지금 9·11은 특히나 설명을 원한다. ‘(무슨 목적으로)왜’부터 ‘누가(주축이 되어)’ ‘(폭탄 테러를)어떻게’ 등 저 너머에 있(다고 믿)는 ‘진실’ 혹은 ‘음모’를 길어내고 싶다.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그 사실에 가린 ‘진실’은 무엇일까. 왜 5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9·11 의혹은 풀리지 않는 걸까. 과연 우리에게 9·11은 무엇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판도라의 상자'를 열려는 사람들

21세기에도 야만의 역사가 진행될 것임을 예고한 9·11. 사건 발생 직후 제기된 다양한 의문점들은 현재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음모론. ‘9·11 이야기’는 태평양 건너에서도 관심집중이다. 한국의 방송에서도 이 거대한 음모론을 다루더라. 지난 5일 방송된 < PD수첩-9·11 음모론, 미국의 자작극인가>(MBC)에 이어 9일의 <그것이 알고 싶다-9·11 미스터리:테러인가, 거대한 음모인가>(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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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9.11. 오늘 날짜기도 하지만, 이미 고유명사화된 단어. 그렇게 9.11은 20세기에서 21세기까지 관통한 모든 세계인들에게 씻길 수 없는 트라우마다. 벌써 올해 6년. 그 이후,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이 세계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인류는 여전히 비극을 잉태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슬픔과 비극으로부터 그 무엇도 배우지 못하는 인류의 고된 업보다. 오로지 주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복수?

최근 미국의 여론조사에서도 9.11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조사 대상자의 81%가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9.11'을 꼽았다. 그리고 91%가 미국 내에서 그 같은 사건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71%는 개인적인 묵도 등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 미국인 81% "'9.11'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

나 역시 개인적인 묵도와 이런 글로나마 희생자들을 멀리서나마 추모한다. 얼마전에도 그래서 9.11의 자장에 속한 영화를 선택해서 마주했다. <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 2007). 보는 내내 마음이 서걱거렸다. 기회가 된다면 봐도 좋겠다. 상처 받은 영혼들이 서로를 감싸는 연대의 힘. 타인을 어떻게 보듬을 수 있는지 생각할 기회도 준다.

내년에도 9.11은 여지없이 돌아올테고, 세계는 또 어떤 일들을 벌려놓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냥 우리는 살아갈 뿐이고, 이 엄혹한 세상을 버티고 견딘다.
그래도 당신에게 다행이라는 말을 건넬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뭐? 바로 사랑.
뭐 굳이 연애하란 얘기는 아니다. 너무 좁게만 생각은 말고, 좁게 생각해도 그만이고.ㅎ
삶이라는 치명적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이 사랑이란 말?  
글쎄, 대답은 당신의 몫. 더 이상 묻지마~

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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