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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마르크스와 캔디경제학

3월14일, '화이트데이'. '화이트'가 붙게 된 연유는 모르겠지만, 이날의 메인 테마는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선물)'을 주는 것이다. 한달 전, '발렌타인데이'의 테마(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에서 남녀의 위치가 뒤바뀐 상황이다. 어설프게 따지자면, 시차를 둔 물물교환인 셈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쓰인 용어에 대입하자면, '등가교환'이다. 물론, 상품의 가치와 가격이 일치하는 엄밀한 의미의 교환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와 가격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주 희소하다. 부등가교환을 통해 평균적으로 또는 관념적으로 등가교환이 성립할 뿐이다.

또한, 이 날은, '카를(칼) 마르크스'가 죽은 날이다. 1883년 3월 14일, 65세, 런던에서 세상과 맞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래, 세상이, 화이트데이는 기억해도, 마르크스의 기일 따위에 관심을 기울일 턱이 없다. 더구나, 마르크스를 정신적 영도자로 삼던 체제는 물론 흔적조차 차츰 소멸되고 있는 마당에, 이른바 '실용'이 '지금-여기'의 '이념'이 돼 버린 터에, '마르크스'는 그저 과거의 이름이다. 최근에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주목받은 건, 김수행 서울대 교수의 정년퇴임에 따른 후임 선정건 때문이었다. 학문 다양성 등을 내걸고 100여명의 국내 경제학과 교수가 마르스크 경제학 전공의 후임교수 임명을 촉구했고, 앞서 119명의 해외학자와 70여명의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생들이 이를 호소·지지했다.  ☞ "'실용'에 얽매여 학문 '위기' 자초하려나"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인 '마르스크주의(맑시즘)'가 대변하듯, '학자'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강하지만, 저널리스트이자 혁명가로서 당대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마르크스가 확립한 이론은, (사회)과학과 철학의 거의 전 분야를 망라한 지적 성채다. 독일의 고전철학(헤겔의 변증법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영국의 고전 경제학(리카도의 노동가치설),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혁명 이론)을 자양분으로 했다. (참고. ≪히스토리아≫(고종석 지음, 마음산책 펴냄))

그러나, 마르크스 경제학은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힘을 잃었다. 현실 정합성에서 낙제점을 받은 셈이다. (영국식)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 과정을 변증법으로 설명했지만, 현실에서는 반대의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 체제붕괴라는 파고 앞에 숨을 헐떡이고 말았지만, 사회 철학이나 문화이론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추상적 '인간'이 아닌, 구체적 사회 조건 내에서의 '인간'에 대한 사회과학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 속으로 파고드는 '경제학'을 고민하는 시선들. 누구나 '경제'를 이야기하며, 일상에서 합리적인 경제 동물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지고 있는 시대에 필요한 고민.(☞ 경제학의 시대, 경제학의 임무 / 이원재)

이와 함께,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지금 이 시대에 부각되고 있는 '희소성'.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임금은 더 오르지 않고, 이윤도 오르지 않고, 나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 상태라도 유지하려면 또 모두 죽도록 일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될 것"이라는 애덤 스미스(<국부론>)의 경고(정체상태론). 존 스튜어트 밀은, 그러나 이 순간에서, 사람들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역사에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므로, 이 상태가 우울한 상태가 아닌 '조화 상태’(harmonized state)'라고 해석했단다.(☞ ‘희소성의 시대’에 부쳐/ 우석훈)

경제학의 시대에, 나는 다시 경제를, 경제학을 생각한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로 대중들의 마음에 파고든 작자가, '실용'이라는 알맹이 없는 수사로 대중을 현혹하는 주술을 부리는 것이 내심 어이없지만, 나는 그래도, 혁명적 경제학(경제학적 혁명론)의 재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재래를 믿고 싶다.

가령, 이런 경제구조의 도래.

"희망은 없다. 정치가와 경제인은 대개 남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다. 고용주는 고용인의 일자리를 뺏고, 헐값으로 대체 노동력을 산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니라, 다수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 말이다." -켄 로치-


그래서, 이런 진짜 경제학이라면, 이렇게.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라면 먼저 쓰러져가는 빈민가를 돌아보아야 한다"(앨프리드 마셜 영국 경제학자)
"경제학의 목표가 많은 사람을 좀더 잘 살게 하는 것이라면, 먼저 가난한 이들을 보고 마음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교수)


진짜 '경제'를 살리겠다면, 마르크스주의처럼, 구체적인 '인간'과 결합된 '경제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빈곤을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능력과 노력, 선택의 문제로 보는, (국가가) 성장하면 가난은 절로 해결된다고 믿는, 척박하고 개념 탑재 안된 안드로메다인들의 경제 관념은 제발 그만. 초콜릿과 캔디를 나누는, 연인만을 위한 것도 좋지만, 소외되고, 생계가 불안정한 빈민과 함께 나누는 '캔디 경제학' 같은 것.  

그리고, 희소성의 시대에 부쳐, 우리의 경제학은 문학적 상상과 맞물려서 작동하길.

"...미국의 여성 도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연민과 공감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지를 질문했다. 그가 로스쿨에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시적 정의'(poetic justice, 1995)는 문학적 상상이 도덕적 감정을 키우는 밑거름이 된다고 주장을 한다. 유년 시절의 판타지가 성인이 되어서 도덕적 행위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으며 에누리 없는 합리성은 공감의 기제가 없기 때문에 도덕적 감정이 형성되지조차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판관과 시인이 일신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평론가 남재일-


마지막으로, 마르크스 125주기에 맞춰, 당신에게 권한다.
≪공산당 선언 : 젊은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입문서≫(강유원 지음, 뿌리와 이파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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