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대한 어느 이야기.
부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무서운 존재다.
그 상대적으로 박탈된 것의 충족을 위해, 어떤 이들은 '필요 이상의 것'을 무리해서 손에 넣는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과정에서 어떤 죄책감이나 죄의식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남들이 하니까 한다는, 개성이나 판단력을 상실한 '따라쟁이'들만 있을 뿐.
이 땅의 많은 장관들이나 될 뻔 했으나 되지 못한, 될 수 있는 고관대작들께서도 대개 그러하드만.
아래 글에서 '도쿄'를 '서울'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서울도 이미 '더러움'에 오염돼 있다. 서글픈 풍경이다.
"... 가난은 비교할 것이 있을 때 비로소 눈에 띈다. 이 동네에서는 생활보호를 받는 집이나 그렇지 않은 집이나 사회적인 지위는 달랐어도 객관적으로는 어느 쪽이 더 여유 있게 사는지 별반 눈에 띄지 않았다. 부자가 없으니 가난뱅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쿄의 엄청난 부자처럼 유독 두드러진 존재만 없다면, 그 다음은 죄다 토토리 키재기 같은 것이어서 누구든 먹고 살기 힘든 정도가 아닌 한, 필요한 것만 채워지면 그리 가난하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도쿄에서는 '필요한 것'만 가진자는 가난한 사람이 된다. 도쿄에서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져야 비로소 일반적인 서민이고, '필요 과잉한 재물'을 손에 넣고서야 비로소 부유한 사람 축에 낀다.
'가난하더라도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부자, 그것도 대단한 부자이다. 하지만 부자라도 언제 가난해질지 모른다고 겁을 내며 사는 사람은 헐벗은 겨울 같은 법이다.'
<오셀로>에 등장하는 이런 대사도 도쿄라는 무대에서 듣게 되면 관념적이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로 다가온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정말 그 말이 꼭 맞는다는 생각이 절절히 든다.
필요 이상으로 지니고 사는 도쿄 시민들은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가난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그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 아이들, 계단 위에서 앉아 원가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낮잡은 적이 있었던가? 돈이 없어서,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스스로를 '가난하다'고는 전혀 생각했던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가난하다는 서글픈 자조 같은 것이 그 동네에서는 눈곱만큼도 떠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100엔'은 가난하지 않지만 '할부로 사들인 루이비통 지갑 속의 전 재산 1000엔'이라면 그건 슬프도록 가난하다.
개발 붐을 탄 패션빌딩에 들어선 어중간한 레스토랑에 줄을 서면서까지 기어들어가 어중간한 식사와 어중간한 와인을 마신다.
착취하는 측과 착취당하는 측, 무시무시한 승부가 명확히 색깔별로 분류되는 곳에서 자신의 개성이나 판단력이 함몰되고 마는 모습에 빈곤은 떠도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 이하로 비춰지는, 그런 도쿄의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가난하고 슬픈 것이다.
'가난'이란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결코 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도쿄의 '볼품없는 가난'은 추함을 넘어 이미 '더러움'에 속한다..."
-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릴리 프랭키 지음) (p47~48) 중에서 -
도쿄의 엄청난 부자처럼 유독 두드러진 존재만 없다면, 그 다음은 죄다 토토리 키재기 같은 것이어서 누구든 먹고 살기 힘든 정도가 아닌 한, 필요한 것만 채워지면 그리 가난하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도쿄에서는 '필요한 것'만 가진자는 가난한 사람이 된다. 도쿄에서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져야 비로소 일반적인 서민이고, '필요 과잉한 재물'을 손에 넣고서야 비로소 부유한 사람 축에 낀다.
'가난하더라도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부자, 그것도 대단한 부자이다. 하지만 부자라도 언제 가난해질지 모른다고 겁을 내며 사는 사람은 헐벗은 겨울 같은 법이다.'
<오셀로>에 등장하는 이런 대사도 도쿄라는 무대에서 듣게 되면 관념적이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로 다가온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정말 그 말이 꼭 맞는다는 생각이 절절히 든다.
필요 이상으로 지니고 사는 도쿄 시민들은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가난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그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 아이들, 계단 위에서 앉아 원가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낮잡은 적이 있었던가? 돈이 없어서,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스스로를 '가난하다'고는 전혀 생각했던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가난하다는 서글픈 자조 같은 것이 그 동네에서는 눈곱만큼도 떠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100엔'은 가난하지 않지만 '할부로 사들인 루이비통 지갑 속의 전 재산 1000엔'이라면 그건 슬프도록 가난하다.
개발 붐을 탄 패션빌딩에 들어선 어중간한 레스토랑에 줄을 서면서까지 기어들어가 어중간한 식사와 어중간한 와인을 마신다.
착취하는 측과 착취당하는 측, 무시무시한 승부가 명확히 색깔별로 분류되는 곳에서 자신의 개성이나 판단력이 함몰되고 마는 모습에 빈곤은 떠도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 이하로 비춰지는, 그런 도쿄의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가난하고 슬픈 것이다.
'가난'이란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결코 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도쿄의 '볼품없는 가난'은 추함을 넘어 이미 '더러움'에 속한다..."
-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릴리 프랭키 지음) (p47~48)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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