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비극에 희생당한 사람들
그런데 9·11이 단순히 충동적으로 터졌다고 보는 사람 누가 있을까나. 비극이 똬리를 틀고, 쌓이고 쌓여 이룬 퇴적층. 결국 임계치를 넘어서면서 퇴적층이 와르르. 비극은 폭발했다. 9·11은 단순 테러의 현장으로만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속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있고 또한 꼬이고 꼬여있다. 물론 그 속에는 미국의 패권주의가 빚어낸 모든 정치적 관계의 연장도 들어있다. 음모론이 기승할 수 있는 환경은 충분하다.
음모론은 시대의 산물이다. 결국 음모론이 발발할 수 있는 환경을 제기한 주체는 있기 마련이다. 반성하지 못하고 “왜 우리만 미워하고 그래”라며 볼멘소리 했던 미국의 애국주의자들. 그들이 그런 목소리가 결국 ‘테러와의 전쟁’에 힘을 실었고, 이라크에, 아프가니스탄에, 레바논 등등에 피를 흩뿌리게 했다.
☞ 9·11의 이유 미국만 몰라
그러나 명확히 구분하자. 그 비극에 희생당한 사람은 부시도, 빈라덴도 아니다. 돌아온 슈퍼맨이 “항공교통은 그 어느 교통수단보다 안전하다”며 광고해줬던 비행기에 타고 있던 보통 사람들. 혹은 WTC에 있던 사람들. 그저 일상을 버티고 견디는 그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 그건 바로 우리의 삶.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풍경들이 더 밟힌다.
<플라이트 93>(United 93,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초반부. 여느 공항에서나 볼법한 풍경들이 제시된다. 누가 그 비극을 예상이나 한단 말인가. 그들은 그저 만나야할 사람이 있고, 자신의 목적지인 어딘가로 가면 그 뿐이다. 핸드폰을 들고 각자 통화를 한다.
그날도 여느 평온한 공항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탑승구를 알리는 표시가 켜지고..
아무도 균열을 예상하지 못하지만, 정작 균열은 평범한 일상에서 비롯된다. 테러리스트로 추정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기도와 제의가 있고, 그들 역시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는 말을 건넨다. 누가 그 상황에서 테러리스트와 보통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다른 얼굴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 역시 한 부모의 자식, 한 아내의 남편, 한 여인의 애인, 한 아이의 아버지, 한 사람의 좋은 친구이자 선후배이다.
<플라이트 93>은 그렇게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더라. 정작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가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목적지로 바꿀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누가 마지막이라고, 그 전대미문의 비극의 현장에 자신이 포함될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일상의 균열은 예고도 없이 그렇게 찾아온다. 비극은 일상에서 잉태된다.
서걱거리는 마음의 흔들림
나는 9·11을 접했던 첫 순간을 기억한다. 술 한 잔 걸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 지하철역의 TV에서 나오는 건물의 붕괴장면. 나는 처음엔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듯, 그런 일이 생겼나보다 했다. 한국에 있는 무역센터로 잘못 생각했었고. 그러나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미사일처럼 향하는 장면을 보고선 뜨악했다. 나는 그 (브라운관에 나온) 광경이 거짓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패권욕망국가 미국의 심장 한복판에서 미국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뭉갠 9·11의 충격.
그건 뉴밀레니엄에 대한 환상을 깨뜨린 첫 번째 사건이었다. 전쟁과 살육이 난무했던 20세기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란 소근거림. ‘평화’는 우리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세계는 전쟁천국, 일상은 위험의 지뢰밭.
영화 속 사건은 이렇게 얘기되고 있었다.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된 비행기는 4대. 2대가 WTC를 박아 무너뜨렸고, 1대는 미 국방성인 펜타곤을 들이받았다. 그런데 나머지 1대는 표적(국회의사당 추정)에 유일하게 빗나가면서 펜실베니아 외곽으로 추락했다.
<플라이트 93>은 여기서 출발한다. 세 대의 비행기와 달리 허허벌판으로 추락한 비행기 안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지? 당시 이상스럽게도 허술했던 미국의 통제망을 뚫고 세 대는 표적에 도달했는데 왜 유독 한 대만? 72년 아일랜드의 비극을 다룬
<블러디 선데이>를 연출했던 폴 그린그래스는 이 비행기(유나이티드 에어라인 93, 이하 UA93)에 방점을 뒀다.
그래서 폴 그린그래스는 9·11의 의혹을 파헤치며 비극을 야기한 원인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그 참극의 순간. 어쩌면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의 비극에 뷰파인더를 맞춘다. 하나의 다큐같은 시선을 유지한 채. <플라이트 93>이 묘사하는 2001년 9월11일의 풍경은 실로 그럴 듯 했다. 우리가 브라운관 등을 통해 본 악몽의 현장 밖의 세계 말이다.
“우린 비행기‘들’을 탈취했다. 공항으로 돌아간다”며 테러의 시작을 알린 하이재커들의 음성부터 혼란은 본격화됐다. 20여년만에 발생한 하이재킹을 놓고 항공방제센터, 미군, 행정부 등은 곰처럼 허둥댔다. 어떤 이유에선지 전투기 출격 등은 재빨리 이뤄지지 않았고,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 최첨단 장비로도 비극을 막을 수 없었던 인간의 무능함이 거기에 있었다. 수수방관 혹은 무기력한 대처.
카메라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소란스럽다. 그 혼란을 따라가는 것이 버거울 즈음, 현란한 교차편집의 과정에서 UA93이 차츰 부각됐다. 그들의 불안이 들어온다. 지상의 허둥지둥과 반대로 그들은 죽음이 다가오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우리는 알고 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알지 못하는 그들. 내 눈엔 그것이 자꾸만 자꾸만 밟혔다.
그러다 하이재커들의 위협이 시작되고, 지상의 소식이 전파되면서 본격적인 ‘드라마’가 시작된다. 죽음을 앞에 둔 몸짓과 두려움을 담아서. UA93의 흔들림이 격해질수록 내 마음도 덩달아 요동을 친다. 비단 그건 죽음이란 목적지를 향해가는 승객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을 위협하는 하이재커들의 흔들림 또한 감지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위해. 그러나...
뒤죽박죽 아비규환. 그 와중에 하이재커들과 승객들이 각자의 신에게 올리는 기도는 묘한 감정을 동반한다. 결국 그들은 같은 대상을 향해 갈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누가 그들을 갈라놓고 이런 상황으로 몰고 갔을까. 죽고자 하는 하이재커들과 살고자 하는 승객들의 절규가 맞물리면서 나의 마음은 서걱서걱거렸다. 어찌할 수 없는 슬픔. 죽을 것이란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그들이 그 현장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헛된 바람.
결과론적으로 각자의 신은 누구의 간절한 기도도 들어주질 않았더랬다. 표적에 맞추고 싶었던 하이재커들의 기도도, 살고픈 승객들의 기도도. 역시나 “신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을 두 손 모아 기도할 때 이것을 생까는 작자”(영화 <아일랜드>)이다. 누구도 구원받지 못했고 비극만 덩그러니 남은 사건. 그들은 배신당했음을 알까. 아니면 평소 사람을 보지 않은 채 살아간 형벌일까.
그들은 한편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상기시켰다. 9·11 테러로 희생당한 사람들이 죽기 직전 가장 많이 했다는 말, “사랑해요.” 부모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그들은 이별을 고하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말을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테러리스트들 또한 비행기 탑승 전 그러지 않았던가. 그 모든 사연을 하나로 묶어주는 말. ‘사랑’.
그렇다면 그들은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을까. 혹 누군가에겐 편견과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맹목적인 질시와 공격을 가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들의 “사랑해요”란 말이 애틋하고 저릿하면서도 다시 한번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봤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들은 전화기에 대고 '사랑한다'는 말을 꺼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나는 어설프고 불안한 표정의 테러리스트들을 보면서
<천국을 향하여>(Pqradise Now, 1995)의 팔레스타인 출신 ‘하니 아부 아사드’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살인을 반대한다. 또 자살공격이 중단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난 자살폭탄 공격을 수행하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내게 그것은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다.”
테러든, 전쟁이든, 어떤 명분을 들고 나오든, 그것들은 명백하게 나쁘고 악하다. 그들 역시 악을 행함에 있어 왜 흔들림이 없었겠는가. 종교적 신념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건데 그들의 악행을 추동했을까. 나는 아직 모르겠다.
<플라이트 93>은 내게 테러에 희생당한 사람은 물론 테러를 행한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끔 만들더라. 그들 모두 어쩌면, 생존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마냥 희생자들 보면서 슬프라고 강요하거나 그날의 긴장감을 만끽하라는 말만 건넨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우리가 본 건, 뉴스에 나온 껍데기뿐이다. 그래서 <플라이트 93>의 시도는 반갑다. 사건의 발생과 전달 사이에 생긴 갭을 메우기 위한 시도. 사소할지 모르지만,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알지 못하는 기록. 그것이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 <플라이트 93>은 그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기억할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또한 단순히 가해자와 희생자의 편가르기가 아닌 그들에 대한 총체적인 애도와 연민이 따라줘야 한다는 것도. 물론 <플라이트 93>의 재현 방식에 대한 비판도 따른다.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정치적이고,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다. 더구나 2001년 9월11일을 담아낸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정치적 의도를 배제했다고 하나, <플라이트 93>은 우리에게 세계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무너진 WTC의 현장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을 기억할 것을.
감독은 9·11 당시 ‘UA93’에 탑승했던 사람들의 전화를 받았던 친인척들을 직접 영화에 참여(혹은 출연)시키는 등 그랬을 법한 사실에 무게를 싣기 위해 노력했단다.
9·11은 분명 비극이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음이 나는 참으로 어이없다. ‘정의’를 앞세우고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상화한 미국의 전쟁광 카우보이들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이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9·11에 의해 엉뚱하게 튄 얼룩.
9·11 때 희생당한 사람들은 카우보이들이 내세우는 ‘정의’에 그닥 동의할 것 같지 않다. 종교적 신념과 전쟁에 의한 광기. 되레 그들을 희생으로 몰아넣은 그 ‘광기’의 얼룩을 지우길 원하지 않을까.
미국과 그들의 우방국(이라 불리는 꼬붕)이 싸우는 것이 테러와 전쟁을 야기하는 구조적 현실이 아님은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다. 알려져있다시피 석유와 패권을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계속한다면 또 다른 ‘9·11 희생자’는 앞으로도 계속 생길 것이다. 우울한 현실 예감이다.
그러니 부디 전혀 예기치 못한 비극에 부디 자업자득이니 하면서 통쾌해 말라. 어떤 비극의 기원을 향한 증오는 바람직하되, 그것을 즐기는 태도는 아니다. 그건 ‘괴물’이나 할 짓 아닌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 서로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작은 몸짓, 발언 하나가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9·11은 미국 혼자의 비극이 아니다. 당신이 살고, 발붙이고 있는 세계, 당신의 인연들이 촘촘히 얽히고설킨 채 사는 세상의 비극이었다. 기득권자들의 그 잘난 신념과 정의에 희생당한 이들을 향한 추모. 이것이 나는 9·11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비극은 나와 우리의 일이 될 수도 있었고, 앞으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들은 물론 유족들에게 9·11은 아직 끝나지 않은 테러다. 시커먼 연기는 계속 피어오르고 전쟁의 포성은 이곳저곳서 울리고 있다. 우리에게도 9·11은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이라크 파병. 9·11을 둘러싼 논란과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우리도 껍질이 하나씩 벗겨질수록 우리의 입장을 바꿀 필요도 있을 터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비록 작은 추모 뿐이지만,
다시 돌아온 그날을 맞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을 떠올려본다.
다시 한번 당신들의 명복을 빕니다...
<플라이트93>의 포스터(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