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절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그냥 제겐 충격이네요. 사무실에 앉아 훌쩍거림과 함께 자판을 두드립니다. 창밖으론 비가 내립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땅으로 향하는 것이 진짜 비인지, 눈물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침 출근 길엔 분명히 비였건만,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물은 빗물 아닌 눈물인 듯 싶습니다.
7월의 시작부터 눈시울을 뜨겁게 한 소식은 에드워드 양 감독님의 타계 소식입니다.
에드워드 양 감독, 고이 잠드소서
이렇게 훌쩍 가 버리실 줄 몰랐습니다. 7년의 투병생활. 대장암 합병증. 향년 59세. 그렇게 아프신 줄도 몰랐습니다. 고인께서 투병생활 중임을 대중에 알리길 원하지 않았답니다. 언젠가 그의 영화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감독님의 <하나 그리고 둘>이 제게 던진 여파는 그렇게 컸습니다.
<고령가 소년살인사건> 등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으나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하나 그리고 둘>(A One And A Two) 이었습니다. 아마 그 영화가 국내에 개봉한 것은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 덕분이었을 겁니다. 2000년 53회 칸 영화제. 그리고 그 해가 가기전 국내 개봉이란 절차를 밟았고. <하나 그리고 둘>을 본 것은 아마 대학로에 위치한 '하이퍼텍 나다'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별다른 기대감 없이 망막을 열었던 영화. 그러나 보는 내내 빨려들어갔었습니다. 거의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에도 불구, 전혀 지루하지 않았을 정도로 내 모든 촉수와 뉴런은 스크린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내 오감도 활짝 열렸습니다. 이런 영화가 있나 싶게. 아니 그건 영화라기보다 하나의 현실이었습니다. 아프지만 묵묵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 별다른 클라이맥스도, 크게 굴곡진 이야기도 없는 흐름 속에서 나는 사람살이의 뒷모습을 봤습니다.
한 가족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들은 생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각자 거센 풍랑을 겪으면서 씨줄과 날줄 엮이듯 만나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각자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서 생의 통찰과 지혜는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사려깊고 차분한 시선.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다른 사람의 뒷통수를 찍어대는 어린 소년, 양양은 에드워드 양 감독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영국의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이런 말도 했었습니다. "전세계 영화 감독 중에서 현미경처럼 인간 삶을 관찰할 수 있는 이는 에드워드 양과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밖에 없다."고. <하나 그리고 둘>은 정말 그런 영화 입니다. 현미경처럼 인간 삶을 관찰하는. 보지 못하는 뒷모습 같은.
<하나 그리고 둘> 포스터
나는 <하나 그리고 둘> 덕분에 당시 날 붙잡던 미망에서 약간은 벗어날 수 있었고. 생을 새로 바라볼 수 있게 됐습니다. <하나 그리고 둘>은 내게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여진이 워낙 컸던 탓에 당시 나는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눴습니다. <하나 그리고 둘>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래서 당시 좋아하던 사람을 일부러 극장에 데리고 갔던 기억이 나네요. 덕분에 전 한번 더 보게 된 셈이죠. 그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상업영화에만 길들여진 그녀를, 에드워드 양 감독도, 하이퍼텍 나다도 몰랐던 그녀를, '좋은 영화'라는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갔었죠. 처음엔 지루해하던 그녀도 어느덧 그 영화에 빠졌습니다. 끝날 즈음엔 그녀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더랬죠. 전략은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너무 고마워했고, 나를 보던 시각도 약간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오~ 니가 이런 영화를...' 거의 이런 분위기. 웃기지만 여자친구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했던 기억.
그랬습니다. <하나 그리고 둘>은 내게 생에 대한 비타민이자, 좋은 미디어가 돼 주었습니다. 에드워드 양 감독님은 생을 탐구하는 저널리스트였고. 누군가 내게 내 영화리스트를 물을 때면 나는 <하나 그리고 둘>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영화를, 감독님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죠.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영화를 권했습니다. 꼭 보라면서 침을 튀기곤 했었죠. DVD도 샀습니다. 어느 해 <필름2.0>에서 부록으로 <하나 그리고 둘> DVD를 줬습니다. 그때 몇권을 샀습니다. DVD 때문에. 몇명에게 나눠줬습니다. 그리고 몇개 남겨뒀습니다. 내 좋은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서. 나는 가끔 생이 버거울 때면 <하나 그리고 둘>을 꺼내봤고, 생을 감식하는 그의 시선에 늘 탄식했습니다.
내겐 그런 감독님이었습니다. 에드워드 감독님은 <하나 그리고 둘>을 만든 이후, 이런 토로도 했다더군요. 대만 사회에 대한 고찰에 많은 힘을 기울여왔음에도, 나이를 53이나 먹은 후에야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역시 생이란 그만큼 풀기 쉽지 않죠.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이 우리네 사람살이임을.
이후 감독님의 <고령가 소년살인사건>도 봤지요. 영화가 좋긴 했지만, 당시 엄청난 무더위 속에서(에어컨 시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종로의 한 극장에 대한 기억이 우선이네요. 더구나 그 영화를 보기 위해 꽉꽉 들어찬 사람들의 열기 때문에 극장 온도는 더 올라갔던. 언젠가 쾌적한 환경에서 에드워드 감독님의 영화들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이렇게 가셨으니 에드워드 양 감독님의 회고전이라도 열려야 되지 않겠습니다. 그의 새로운 영화를, 생의 또다른 통찰을 볼 수 없음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흔적들을 통해 다시 우리네 일상의 뒷통수를 들여다 보고 싶네요.
감독님. 좋은 길 가세요. 당신의 타계 소식에 괜히 눈시울 적셔봤습니다. 하늘에서도 좋은 영화 만드실거죠? 저보다 먼저 그곳에 간 사람들을 위해 하늘에서의 <하나 그리고 둘> 역시 만들어 주세요. 저도 언젠가 그곳에 가면 감독님이 만든 영화를 볼 예비 관객이거든요. 집에선 다시 <하나 그리고 둘>을 꺼내봐야 겠습니다. 당신의 살아생전 흔적을 느낄 수 있겠지요? 그리고 평소 할머니에게 얘기를 않던 양양이 할머니 장례식에서 처음으로 읊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봅니다. 제가 감독님에게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머니 영전 앞에서 이야기하는 양양
"할머니 죄송해요.
할머니와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제가 하는 말은 죄다 할머닌 아시니까 안했어요.
할머닌 가셨는데 하지만 어디로 가셨죠? 아마 우리가 아는 곳일 거에요.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날마다 재밌을 거예요. 할머니 계신 곳도 찾겠죠.
그러면 모두에게 말해서 함께 할머니께 가도 되나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 특히 이름이 없는 아기를 보면.
할머니가 늘 늙었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저도 늙어간다고 말하고 싶어요."
할머니와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제가 하는 말은 죄다 할머닌 아시니까 안했어요.
할머닌 가셨는데 하지만 어디로 가셨죠? 아마 우리가 아는 곳일 거에요.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날마다 재밌을 거예요. 할머니 계신 곳도 찾겠죠.
그러면 모두에게 말해서 함께 할머니께 가도 되나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 특히 이름이 없는 아기를 보면.
할머니가 늘 늙었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저도 늙어간다고 말하고 싶어요."
안녕, 감독님...
에드워드 양을 만나다[1]
에드워드 양을 만나다[2]
"영화를 만드는 이유? 생의 경험을 나누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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