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뚱그려 싸잡아서 매도할 생각은 없지만, (분명 그렇지 않은 소수도 있으므로!)
지금-여기의 많은 언론은 그들 스스로가 자처하듯,
‘사회의 목탁’이나 사회적 ‘공기(公器)’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그건,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박제된 역사에 지나지 않을런지도 모르겠다.
뭐 혹자는,
"기업의 ‘기획의도’대로 기사를 작성해주는 홍보 대행업체에 가깝다"고 혹평을 하는데,
이건 거의 진실에 근접한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계에 종사하는 내 어떤 동료들은 가끔 자조하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자 아닌 타이피스트일 뿐이고~"
전직 언론계 종사자로서,
능력도 하잘 것 없었지만,
그 같은 수렁에서 더 깊게 발을 빠트리지 않으려고 빠져나온 나로서는,
여전히 언론계에 대한 어떤 애정을 품고 있음에도,
지금의 언론계는 '절망'의 다른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다. 위험 수위 만땅.
믿고 존경할만한 언론(인)은커녕,
자본의 도구로서, 때론 권력과 결탁한 메신저로서,
악행의 자서전을 서슴 없이 집필하고 있는 저들은,
어쩌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 신세.
다른 무엇보다, 언론은, '철저히' 사회의 것이어야 함에도,
지금 내가 만나는 많은 언론들은 사주 혹은 자본가의 도구다.
또한 우리 사회는, 어인 일인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많은 언론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묻는데 인색하다.
나는 언론이야말로 공공성을 담보한 '사회적 기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비현실적인 현실이 판을 치는 곳에서, 그런 생각은 비현실적인 상상에 가깝다.
소설가 김연수는 오늘 이외수의 《들개》를 문장배달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었다.
이 말은 요즘 찌라시를 접하는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 옮겨본다.
"요즘 저도 어쩐지 패북감을 느끼게 되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사람들과는 같은 언어를 쓴다는 자체가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게 아름다운 언어일수록 부끄러움은 더욱 커집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리나라, 정의, 법, 질서 같은 단어들을 들을 때 저는 차라리 영어나 불어, 하다못해 외계어라도 쓰고 싶어집니다. 말을 더럽혀 더 이상 그 말들이 아름답게 들리지 않을 때, 그 말들이 지칭하는 세계는 우리에게서 영영 사라지게 될 거예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말이 안 통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그 사실 때문이죠."
정말 나는, 직업생활 동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있는데.
나는 내가 거친 언론(미디어)사 대표들 가운데, 진짜 언론인이라고 존경한 사람이 없다.
이른바 '진보'가치를 품고 장사치에 가까운 인간(Oh!)도 봤으니, 신물이 날 만도 하다. 젠장.
그런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보니, 나는 <굿 나잇 앤 굿 럭>과 같은 영화에 열광했고,
곧 개봉할, 닉슨의 불법을 실토하게 만든 프로스트의 인터뷰를 다룬 <프로스트 vs 닉슨>과 같은 영화로 아쉬움을 대신하곤 한다. 이땅에 없는 현실을 스크린을 통해 상상하기.
그리고, 이런 사람을 가진 미국의 언론인에 대한 부러움도.
위민넷에 기고했던, 워싱턴 포스트지의 '캐서린 그레이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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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용기 있는 언론인,
캐서린 그레이엄(Catharine Graham)(1917.6.16~2001.7.17)
주로 남성들이 주름 잡던 언론계에 우뚝 섰던 여성이 있습니다. 특히나 권력의 압력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불의로부터 자신의 신문사를 지켜냈던 언론인입니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의 멘토이기도 했다죠.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의 명예회장이었던 '캐서린 그레이엄(Catharine Graham)'입니다.
캐서린이 일약 자유언론의 수호자가 된 것은, 2개의 사건 덕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언론사에 길이 남을 사건들. 1971년 베트남 전쟁에 관한 기밀문서 보도사건(펜타곤 페이퍼스)과,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 건에서 뉴욕타임스의 최초 보도 후,
닉슨 정부는 언론들에게 더 이상의 보도는 하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캐서린은 이런 압력을 받아들이지 않았죠.
브래들리 편집국장과 기자들이 취재한 후속보도를 기사화하도록 했습니다.
맞아요. 언론의 역할을 명확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의 우리는 기사와 회사의 이익을 바꿔먹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지요. 그러나, 그는 그런 악질 언론사 사주가 아니었던 거죠. 그의 평소 철학 때문이었습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드러내고 그것이 더욱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 것이라는 철학 말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더욱 파장이 컸습니다. 역시 편집국을 믿고 받아들인 그는, '보도하면 젖가슴을 세탁기에 넣어 짜겠다'는 닉슨 측근의 협박을 듣고, 각종 제재에 시달리면서 방송 허가권 갱신까지 포기하면서,
기자들을 믿고 밀어줍니다.
닉슨은 결국 물러나야 했습니다. 당연히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 때문이었죠. 캐서린은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도 딥 스로트가 누구인지 정말 알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은 우드워드 기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정말 알고 싶은 거냐'면서도 얘기하지 않았다. 나도 기자들이 취재원과 한 약속을 보호해야 할 것 같아 다시는 묻지 않았다."
캐서린이 그렇게 지킨 워싱턴 포스트에 대해 이런 얘기도 있어요. 영국의 신문 발행인 노스크리프트 경이 한 말이죠. "모든 미국 신문들 가운데 소유하고 싶은 것은 '워싱턴 포스트' 뿐이다. 그것은 이 신문이 국회의원들의 아침 식탁에 오르는 신문이기 때문이다."
발행부수만 놓고 보자면, 워싱턴 포스트는, USA투데이나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뒤지는데도,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만큼 워싱턴 포스트가, 신뢰와 믿음의 언론으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죠.
용기 있는 언론 사주였던 캐서린은,
어떤 성장과 굴곡을 넘으면서 이런 철학을 갖게 됐을까요. 그는 1917년 뉴욕에서 기자 출신인 어머니와 부유한 유대계 이민의 후손이자 은행가인 아버지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교양과 학식을 갖춘 재원으로 성장한 그는 1938년 시카고대학을 졸업한 뒤 샌프란시스코 뉴스에서 기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 전에,
1933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세계은행 초대 총재를 지낸 아버지는 1933년 파산상태의 워싱턴 포스트를 경매를 통해 82만5,000달러에 인수한 상태였죠. 그도 1939년 4월부터 워싱턴 포스트에 몸을 담아 기사를 썼습니다.
그러다 캐서린은 변호사인 필립 그레이엄을 만나 결혼을 했고, 1945년 그의 아버지는 사위인 필립에게 최대 주주 자리를 넘겨주면서 경영을 맡겼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캐서린은 그닥 의식화된 여성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남편은 그를 수시로 무시하고 정신적으로 학대했고,
심지어 회사의 기자와 바람을 피워 이혼을 요구했음에도,
그는 남편을 우상처럼 대했어요.
자서전에 언급된 남편과 그의 관계는 이래요. "나는 남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절대군주 앞의 신하와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남편이 나를 만든 듯한 기분조차 들었고 남편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그의 남편, 필립은 한편으로 뛰어난 경영능력을 발휘, 당시 별 볼 일 없던 워싱턴 포스트를 뉴욕 타임스 다음 가는 유력지로 성장시켰습니다. 신문을 정치에 이용한, 좋게 말하자면, 정치적인 역량이 뛰어났던 사람이었나 봅니다.
매카시즘이 득세하던 50년 전후의 보수주의 시절에, 워싱턴 포스트는 좌우 양 쪽에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우파는 진보에 좌익이라고,
좌파는 보수적이고 시민의 자유보호를 소홀하다고 공격한 거죠.
이에 필립은 자유주의자에서 보수적인 반공주의자로 변신하면서,
워싱턴 포스트를 유지한 것으로 캐서린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남편이 1963년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이,
캐서린에겐 어떤 계기가 됐습니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그로선 원하건 그렇지 않건,
경영 일선에 직접 나서야 했습니다.
또 글로리아 스타이넴과 같은 여권 운동가와 교류하면서 점차 주체적이고 의식화된 '언론경영자'로서 바뀌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언론사 문화를 정착시켰어요. 사실보도를 중시하고 공정보도를 밀어주며 합리적인 경영시스템을 구축해 나갔죠. 물론 그도 권력과 유착관계를 가진 적이 있고,
편집국 일에 불편부당하게 참견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미덕은, 지금-여기의 언론 사주와 다른 점은, 실수를 인정하고 개선에 나섰다는 점입니다. 기자들에게 불이익이 주지 않았으며,
미국 최초로 옴부즈만 제도를 도입키로 했습니다. 독선적이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그것을 회사 이익과 개인의 부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어요.
되레 언론의 역할을 위해 공익과 결합해 힘을 발휘하기도 했죠.
앞서 든 예입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캐서린은 1974년 여성으로서는 처음 AP통신의 이사로 선임됐고, 이후 미국 신문출판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경영능력에서도 캐서린은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신문이 재정적으로 자립해야만 바른 말을 할 수 있고 공익도 있다'는 경영관을 갖고, 그는 신문, 잡지, TV, 케이블 등 미디어 기업으로 워싱턴 포스트 컴퍼니를 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1993년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한 뒤, 1997년 『개인의 역사(Personal History)』를 펴내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2001년7월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그는 수술을 결국 사망하고야 말았습니다. 그가 타계하자, 워싱턴 포스트는 '용기, 영향력, 겸양의 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워싱턴 시장은 조기를 걸게 하는 한편, '사업가이자 활동적인 시민 지도자'로 평가했습니다.
캐서린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언론 사주인데도 시민 지도자로 평가받았으며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신문 사업에서 출중한 능력을 발휘한 사업가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알고 있는 참 언론인이었습니다.
참고로, 12월26일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하야한 뒤 미국의 제38대 대통령이 되었던 제럴드 포드가 사망한 날(2006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