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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위민넷

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용기 있는 언론인, 캐서린 그레이엄

뭉뚱그려 싸잡아서 매도할 생각은 없지만, (분명 그렇지 않은 소수도 있으므로!)
지금-여기의 많은 언론은 그들 스스로가 자처하듯,
‘사회의 목탁’이나 사회적 ‘공기(公器)’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그건,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박제된 역사에 지나지 않을런지도 모르겠다.

뭐 혹자는,
"기업의 ‘기획의도’대로 기사를 작성해주는 홍보 대행업체에 가깝다"고 혹평을 하는데,
이건 거의 진실에 근접한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계에 종사하는 내 어떤 동료들은 가끔 자조하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자 아닌 타이피스트일 뿐이고~"

전직 언론계 종사자로서,
능력도 하잘 것 없었지만,
그 같은 수렁에서 더 깊게 발을 빠트리지 않으려고 빠져나온 나로서는,
여전히 언론계에 대한 어떤 애정을 품고 있음에도,
지금의 언론계는 '절망'의 다른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다. 위험 수위 만땅.

믿고 존경할만한 언론(인)은커녕,
자본의 도구로서, 때론 권력과 결탁한 메신저로서,
악행의 자서전을 서슴 없이 집필하고 있는 저들은,
어쩌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 신세.

다른 무엇보다, 언론은, '철저히' 사회의 것이어야 함에도,
지금 내가 만나는 많은 언론들은 사주 혹은 자본가의 도구다.
 
또한 우리 사회는, 어인 일인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많은 언론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묻는데 인색하다.  

나는 언론이야말로 공공성을 담보한 '사회적 기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비현실적인 현실이 판을 치는 곳에서, 그런 생각은 비현실적인 상상에 가깝다.

소설가 김연수는 오늘 이외수의 《들개》를 문장배달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었다.
이 말은 요즘 찌라시를 접하는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 옮겨본다.

"요즘 저도 어쩐지 패북감을 느끼게 되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사람들과는 같은 언어를 쓴다는 자체가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게 아름다운 언어일수록 부끄러움은 더욱 커집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리나라, 정의, 법, 질서 같은 단어들을 들을 때 저는 차라리 영어나 불어, 하다못해 외계어라도 쓰고 싶어집니다. 말을 더럽혀 더 이상 그 말들이 아름답게 들리지 않을 때, 그 말들이 지칭하는 세계는 우리에게서 영영 사라지게 될 거예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말이 안 통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그 사실 때문이죠."


정말 나는, 직업생활 동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있는데.  
나는 내가 거친 언론(미디어)사 대표들 가운데, 진짜 언론인이라고 존경한 사람이 없다.  
이른바 '진보'가치를 품고 장사치에 가까운 인간(Oh!)도 봤으니, 신물이 날 만도 하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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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보니, 나는 <굿 나잇 앤 굿 럭>과 같은 영화에 열광했고,
곧 개봉할, 닉슨의 불법을 실토하게 만든 프로스트의 인터뷰를 다룬 <프로스트 vs 닉슨>과 같은 영화로 아쉬움을 대신하곤 한다. 이땅에 없는 현실을 스크린을 통해 상상하기.
 
그리고, 이런 사람을 가진 미국의 언론인에 대한 부러움도.
위민넷에 기고했던, 워싱턴 포스트지의 '캐서린 그레이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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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용기 있는 언론인,
캐서린 그레이엄(Catharine Graham)
(1917.6.16~2001.7.17)


주로 남성들이 주름 잡던 언론계에 우뚝 섰던 여성이 있습니다.
특히나 권력의 압력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불의로부터 자신의 신문사를 지켜냈던 언론인입니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의 멘토이기도 했다죠.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의 명예회장이었던 '캐서린 그레이엄(Catharine Graham)'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