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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위민넷

타인의 고통에 삼투압한 세계의 지성,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에 삼투압한 세계의 지성, 수잔 손택(Susan Sontag)
(1933.1.16~2004.12.28)

미국 최고의 지성 중 한명인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미국이 나락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힘을 과시하고자 했던 미국의 패권욕에 제동을 걸고, 세계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고자 현실 참여와 감수성의 자극에 힘을 쏟았습니다.

2003년 10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독일출판협회는 수잔에게 "거짓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찬사를 하면서 '평화상'을 수여했습니다.

하나의 상징적인 일례입니다만,

수잔은 문학가이면서 현실에 끊임없이 삼투압한 운동가였습니다.
하긴, 문학이라는 것이 현실과 유리된 채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니,
문학과 운동이 분리될 수만은 없겠네요.
무릇 작가란 그렇잖아요.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기득권의 지배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마음의 목록을 지닌 사람'.

그래서 수잔은 에세이 작가이자 뛰어난 소설가이며 예술평론가였습니다.
느닷없이 혜성같이 등장한 그였습니다. 시기는 1966년. 서른 세 살의 알려지지 않은 평론가가 내놓은 문화평론모음집, 『해석에 반대한다』.

서구 문화평론계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이 신참내기의 책은, 서구 미학의 전통을 이루던 내용과 형식의 구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을 재기발랄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지요.

이런 내공은 수잔의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은 결과물이었습니다.
미국 뉴욕의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폐결핵으로 여의고 어머니와 계부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빠져 지냈고, 영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열다섯 살에 대학에 들어갔고, 열일곱 살 때에는 젊은 사회학도 필립 리프와 결혼했으며, 열아홉에는 아들을 낳을 만큼 빠른 생의 궤적을 그렸습니다.

이 와중에도 수잔은 자신을 향한 사포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버드대학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옥스퍼드와 소르본대학 등에서 수학하기도 했지요. 그는 철두철미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어요.
알코올 중독자였던 어머니를 닮지 않기 위해 평생 4시간의 수면을 삶의 규칙으로 삼고, 스물다섯에 이혼하면서 그는 남편이 준다는 양육비를 거절하고 강의와 기고로 고집스럽게 자신과 아들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1963년에는 첫 번째 소설 『은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수잔은 위기의 순간에도 쉽게 자신을 놓거나 굽히지 않았습니다.
40세 무렵 유방암에 걸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을 받았지만, 그는 2년 이상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은유로서의 질병』을 발표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질병은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임에도 불구, 학자나 작가들이 만들어낸 병에 대한 은유적 이미지가 환자들의 질병에 대한 투쟁을 방해하고 있다."

수잔은 고난을 질료로 삼아 앞으로 정진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진지하자, 열정적이자, 깨어 있자!'라던 그의 삶의 좌표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1만5000권의 장서를 보유할 정도로 독서광이었고,
글을 통해 벤야민, 아르토, 바르트 등의 유럽의 지성들과 대화했습니다.
생에 대한 성실하고 치열한 자세와 사회현실에의 참여는, 그가 뛰어난 외모, 화려한 학벌을 무기로 명성을 유지한 마스코트가 아님을 입증합니다.

수잔은 한마디로 문화적 아이콘이자 시대의 지성이었습니다.
작가, 문화비평가,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예술가, 사회운동가 등으로 끊임없이 변신하면서, 시대와 세계에 문화적 스타일과 감수성의 자극을 준 사람입니다.
길게 내려뜨린 머리카락과 뒤로 빗겨 넘은 일부 하얀 머리카락, 또렷한 눈빛 등은 그의 카리스마를 상징하기도 했죠.

예술적인 심미안을 갖춘 사회적 행동가로서, 그는 어쩌면 이성과 감성이 균질하게 배분된 행복한 경우입니다.
물론 그것을 위한 엄청난 노력과 실천이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요.
그의 저서로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비평 부문 수상작 『사진에 관하여』(1977), '전미도서상' 소설부문 수상작 『미국에서』(1999)를 비롯해 4권의 평론 모음집, 6권의 소설, 4권의 에세이, 4편의 영화 시나리오, 몇 편의 희곡 등이 있습니다.

수잔은 미국 펜클럽 회장(1987~1989)을 맡고 있는 동안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어요. 한국 정부에 김남주 시인 등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서였죠.

또 1993년에는 사라예보 내전에 대한 전 세계인의 관심을 촉구하고자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수잔은 9․11에 대처하는 미국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해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사회에 불어 닥친 반이성적 태도를 비판하며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고 언급하기도 했죠.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도 "사이비 전쟁을 위한 사이비 전전 포고를 그만두라"고 부시행정부를 공격하는 등,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수잔에게 붙은 이 타이틀,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 허투루 붙은 것이 아님은 대충 아시겠죠?
세 차례에 걸쳐 암과 싸워야했던 그도 결국은 힘을 잃고 마는 때가 오긴 옵니다.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수잔은 그렇게 갔지만, 만약 지금 살았다면,
『타인의 고통』에 적은 이 글을 다시 읊조렸을 겁니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맞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수잔이 떠났던 무렵도 이맘 때였죠. 연말을 앞둔 지금 이 시점.
경제위기니 불황이니, 마음을 오그라들게 하는 파도가 덮쳤지만,
튜브를 던져줄 수 있는 마음만은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세상엔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지요.
나와는 전혀 상관없고, 내 책임도 아닐 법한.
그럼에도 우리는 이에 무관심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선 안 될겁니다.
그들이라고 악의를 갖거나 큰 죄가 있어 그런 고통을 받는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 기억해야겠지요.
나 역시 아무런 악의 없는 누군가나 시스템에 의해 상처 입게 될 수 있음을.
내가 외면하면 언젠가 혹은 곧 나도 외면 받게 될 거라는 사실.
수잔 손택이 우리에게 알려준 '불편하지만, 잊어선 안 될 진실'입니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자신을 수련하고 닦으면,
저런 멋진 아우라가 나올 수 있는 걸까요. 정말 놀라워요.

※참고자료 : 『타인의 고통』(수전 손택 지음/이재원 옮김/이후 펴냄), 수전손택 공식 홈페이지(www.susansontag.com

), 여성신문

[위민넷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