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그렇게 날 부르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지칭했다. 야구를 할 때, 마운드에 섰을 때, 나는 본디 이름이 아닌, 이동원이었다.
맞다. 최동원 때문이었다. 금테 안경을 끼진 않았지만, 소년 이동원은, 최동원의 역동적인 투구폼을 따라 온 몸을 비틀면서, 힘껏 야구공을 뿌렸다. 최동원의 투구폼을 아는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나는 투구폼뿐만 아니라 표정도 따라했다. 앙 다문 입술로 눈 앞의 타자를 제압하겠다는 번뜩이는 눈빛.
비록, 나의 공은 대부분 그곳이 아닌 저 어딘가, 를 향했지만. 땡깡을 부려 마운드에 오른 포볼 공장장이었지만. 나는 그때만큼은 최동원이고 싶었다. 그렇게 강속구를 뿌려댔으면 하는 바람. 아리랑볼 같은 마구로 타자를 꼼짝 없이 묶고 싶었다.
야구소년에겐 다른 뭣이 필요하랴.
최동원.
동네에서 야구놀이 한답시고 꼼지락대던 야구소년에게 그 이름은 '야구 그 자체'였다. 그땐, 야구라고 쓰고, 최동원이라고 읽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1984년은 그런 해였다. 초딩 낮은 학년부터 야구 스크랩을 하던 내게 진짜 야구의 알싸한 맛을 알게 해 준, 진짜 부산 싸나이의 태도를 알려준.
불 같은 강속구도, 뽕삘 나는 아리랑볼도 없는 내가 야구를 하고 싶었던 건,
온전히 최동원 때문이었다. 그때 그 시절, 최동원은 야구의 다른 이름이었다.
2. 신은 부산에 최고의 팬과 최악의 팀을 주셨다.
노떼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팬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 문구. 최고의 팬?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겠는데, 사직 야구장에 가서 노떼 경기에서 자체발광하는 팬들의 모습을 보면 단박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최악의 팀이라는 지칭은 노떼 프런트 때문이다. 동원이 형의 이른 죽음에 노떼 역시 책임이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올해로 프로야구 30년. 노떼는 쌈썽 라욘즈(삼성 라이온즈)와 더불어 연고지나 팀이 바뀌지 않은 유이한 구단이다. 여지껏 꼴랑 2번 우승한 팀 치고는 팬들의 열광이나 응원은 다소 의아한 측면이 분명 있다.
첫 우승은 84년이었다. 열혈 그 이상의 폭풍팬들이 몸과 마음을 기댄 곳이 노떼다. 나도 노떼팬이지만, 그 생리는 참 묘하다. 애증 그 이상이다. 84년 우승으로 노떼의 건국 신화가 비로소 세워졌는데, 그건 동원이 형의 몫이 가장 컸다. 쌈썽의 져주기 추태로 노떼와 쌈썽이 한해 우승팀을 가리는 코리안시리즈에서 맞붙었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코리안시리즈를 앞두고 노떼 선수단이 결의를 다지는 회의를 했다. 당시 강병철 영감(감독)은 선수들에게 7차전까지 갈 생각하라는 말과 함께, 동원이 형에게 1, 3, 5, 7차전을 준비하라고 했다. 한 마디로, 그건 "너 죽어라"는 말이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혹사 명령이다.
그해, 정규시즌의 절반 가량을 나온 철완이었다지만, 동원이 형이라고 뜨악하지 않았겠나. 되물었다. "감독님, 너무 무리 아닙니꺼?"
(동원이 형의 1984년. 총100경기 중 51경기 출장, 284.2이닝 투구. 27승13패6세이브)
잠시 생각하던 강 영감의 답변이 또한 가관이었다.
"동원아,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이번에도 니가 해줘야겠다! 독이 들었지만 마셔줘야겠다)"
뭐라고 답했느냐고? 동원이 형의 반응은 짧고 굵었다.
"네, 알았심더. 한번 해보입시더." 독이 든 성배를 그는 기꺼이 마셨다.
나는 그 말을 했을 동원이 형의 앙다문 입술과 표정이 떠올랐다.
'완전연소'가 아니라면 차라리 사라지고야 말겠다는 승부사의 단호한 표정.
알다시피, 동원이 형은 1, 3, 5, 7을 넘어 1, 3, 5, 6, 7차전을 나왔다.
1패가 있었지만, 4승을 거뒀고, 노떼의 첫 우승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미친 짓이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스포츠춘추의 박동희 기자가 물었다. 분명히 후유증이 왔을 텐데?
물론 이상이 찾아왔고, 무리는 대가가 있게 마련이라는 답변을 동원이 형은 내놓는 동시에, "후회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나는 뻑 갔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
이게 바로 동원이 형의 실체다.
그런 동원이 형이 최고의 팬을 낳았다.
노떼 팬은 동원이 형에게 일정부분 빚지고 있다.
노떼 팬들, 8888577 그 저주의 숫자를 뚫고, 지금도 미친 듯이 노떼를 열광한다. 왜냐? 그게 노떼 팬들이니까.
3. 1984년 최동원의 호투가 없었다면. 당신은 야구를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박동희 기자는 그렇게 물었다.
나는 답할 수 있다. 아니, 최동원 때문에 야구가 가슴에 팍 들어왔다.
세살배기 야구가 국민스포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최동원이라는 불멸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동원이 형은 피하지 않는 남자였다.
지승호씨의 표현이었던가. 단 한 번도 치사하지 않았던 남자, 라고 했다.
그도 홈런이나 안타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고 되레,
다음 타석에서 똑같은 구질의 공을 던지며 윽박을 질렀다. 칠 테면 쳐봐라.
동원이 형을 묘사할 때, 자존심이 강했다는 말을 빼놓질 않는다.
그 말도 맞지만, 나는 그것을 자존감이라고 봤다.
모르긴 몰라도, 자아존중감으로 충만한 야구인, 그리고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마지막 로망이 있었다.
4. 최동원 롯데 자이언츠 감독!
나는 그것을 강력하게 바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노빠(노떼 빠돌이)였다.
동원이 형 또한 그것을 오매불망 바라고 있었다.
선수협의회 결성 등으로 그를 쫓아낸 노떼.
그런데도 그는 고향팀의 감독을 꼭 한 번 하고 싶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팬들도 '최동원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원하고 있었다.
그에게 부산은 어떤 곳인가, 물었다.
"차를 몰고 부산 요금소에 들어서면 기분이 참 묘하다. 따뜻한 촉감의 무언가가 몸을 감싸는 기분이 느껴진다. 그러면 속으로 '이게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고향집에 찾아가 어머니를 뵙고 나를 기억하는 고향 팬들과 만나면 늘 뿌듯하고 고마운 마음이 생긴다."
고향을 위해, 야구를 위해, 노떼를 위해,
동원이 형은 그것을 하고 싶었고, 그것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노떼 구단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뒷끝 작렬이었던 것일까. 동원이 형이 그나마 코칭 스태프로 머물렀던 곳은 한화 이글스였다. 롯데 자이언츠가 아니라!
제기랄, 지랄한다. 노떼. 최악의 팀, 개버릇 남주지 않는구나.
5. 대한민국은 죽어서야 대접한답시고 깝친다.
그래, 어딘들 안 그렇겠느냐마는. 노떼의 호들갑은 넘사스러운 데가 있다.
노떼 자얀츠 구단은, 불멸의 야구인이 숨을 거둔 직후에도 대체로 묵묵부답...
팬들의 원성이 끓어오르고, 동원이 형과 노떼 구단의 불편한 관계가 널리 알려지자, 슬슬 움직이는 듯한 액션을 취했다.
그 높디높으신 신 회장님의 재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겠지.
바지사장 따위가 뭘 결정하겠나.
동원이 형의 등번호 11번을 이제야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고,
9월30일을 최동원의 날로 정해 추모행사를 준비한단다.
살았을 적, 제대로 영웅을 대접하지 않은 것이 찔렸는지, 팬들의 성화에 밀렸는지, 동원이 형을 명예감독으로 추대하는 방안도 검토한단다.
살았을 적에 노떼의 진짜 레전드, 한국야구의 레전드에 대한 예우나 제대로 하지.
노떼는 동원이 형이 암 투병할 때, 제대로 문병이나 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5. 노떼와 쌈썽은 둘 다 쪼잔하다.
양준혁에게 성대한 은퇴식 치뤄줬다고 '역시 삼성~'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던데,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를 알면, 절대 그런 말할 수 없다.
쌈썽이 그렇게 하는 건, 분명 바람직하고 잘한 일이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선수들의 진짜 권익이다.
노떼와 쌈썽이 최근 돌아가신 두 레전드(최동원, 장효조)에게 행했던 작태는, 두 재벌의 실체와 다르지 않다. 두 레전드가 노떼와 쌈썽에서 선수생활을 했다는 것 자체가 참 아이러니한 면도 있다.
두 구단은 노조를 용납하지 않으며, 직원들의 권익 따위, 그들의 (육체, 감정)노동 따위로 깝치지 말고 백기 들고 투항하라는 식이었다. 구단을 대표하는 선수를 트레이드한 건 팬들을 무시하고 우롱하는 처사였다.
노떼는,
선수들 권익을 위해 선수협의회 결성에 앞장 선 최동원을 삼성으로 트레이드했으며, 쌈썽은,
역시 선수협 결성에 나서고 연봉문제로 늘 부딪히는 장효조를 롯데로 보냈다.
고향팀을 떠나 몸에 맞지 않는 유니폼을 입자니, 열정이 자연 식어갔을 거다.
진짜 문제는 이들로부터 야구를 앗아갔다는 거다. 병이 안 생기고 배겨?
두 쪼잔한 재벌들이 그들에게 암을 발병할 바이러스를 투하한 셈이다.
이 연놈들은 나중에도 비슷한 트레이드를 통해 선수들에게 괘씸죄를 부여한다.
나는 선수협 문제로 간판타자 마해영을 트레이드한 노떼 때문에,
노떼를, 마침내 야구까지 한때 버렸던 적도 있다.
이 개새끼들, 야구판에서도 암적인 존재들이고,
사회에도 그렇다. 쌈썽이나 노떼는 같은 피가 흐르는 족속들이다.
부산하면 최동원이었고, 최동원 하면 부산이었다. 노떼하면 최동원이었고, 최동원하면 노떼였다. 그런 부산 남자가 갔다. 하늘에선 공을 만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슬픔은 고스란히 남은 자들의 것이다.
지난 14일 저녁 세브란스 병원을 뺑과 함께 찾았었다.
동원이 형이 환하게 웃는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이 울컥 나오려고 했다.
나도 한때 저런 부산 남자가 되고 싶었다.
홈런 따위 맞아도 괜찮아. 난 너와 정면 승부를 하겠어. 어디 칠 수 있으면 쳐봐라.
그날, 뺑과 나눈 얘기였지만,
동원이 형은 한국 야구사상 '최고의 투수'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강렬하고 최고의 기억을 안겨준 투수는 없다.
선동렬도 박찬호도 하지 못한, 류현진과 김광현도 하지 못할, 전무후무한 투수.
그는 한편으로 스토리텔러였다.
이보다 더 짜릿할 수 없는 환희의 순간을 만들어낸 동시에,
역경과 비난, 좌절이 범벅된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맞다. 최동원이니까!
그는 다시 태어나도 1차전에서 7차전까지 던질 테고,
트레이드를 거부할 것이며, 먼길을 돌고 돌아 노떼 감독이 되는 순간을 기다릴 것이다. 단 하나 바뀐다면, 그가 최동원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된다는 것.
동원이 형이 진짜 '부산 싸나이'였던 것은, 실력 때문은 아니다.
1980년대 후반 올림픽이다 뭐다 흥청망청 거품이 부풀던 시절,
당대 최정상급 투수는, 야구만 잘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을 불태우지 않았다.
당연 야구만 잘해도 충분했을 테지만, 스스로의 필요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주변을 볼 수 있었던 눈을 가졌던 것이다.
1988년 해태 타이거스의 투수 김대현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선수 보호는 물론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동료들이 보였다. 아, 이래선 안되겠구나. 팬들에게 좀 더 좋은 야구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좀 더 야구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러면 안되겠구나.
이른바 있는 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만 신경을 쓰지만, 이 부산 싸나이는 달랐다.
한 달에 20만원을 받는 2군 선수들의 애환이 시렸다.
동원이 형은 야구선수협의회를 추진했고 초대 회장이 됐다.
그것이 그를 마운드에서 내려가게 한 결정적 이유가 됐지만,
그는 부산 싸나이의 기질을 결코 버릴 수 없었다. 야구계를 은퇴하고,
1991년 초대 광역선거에서 부산 서구 지역구에 출마했다.
어쨌든 그 판에서도 그는 남달랐다. 대통령 병에 걸린 김영삼의 중고등학교 후배였지만, 3당야합으로 이뤄진, 부도덕한 민자당 후보로 나서지 않았다. 3당야합에 반대하고 노무현이 주도한 꼬마민주당의 후보였다. 민자당 후보로만 나서면 당선 확정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진짜 부산 싸나이였다.
"선수협 등을 거치면서 사회적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어요. 그래서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꼬마)민주당 후보로 당선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시에 민자당에서도 제안이 있었지만 민주당을 택했어요. 그것도 일종의 반골기질 이었는지 모르죠. 하지만 그래야 진정성을 이해 받을 것 같았어요."
당시 노떼 자얀츠 구단 주식의 일정 부분을 시민 공모주로 바꿔 시민구단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동원이 형은 그런 싸나이였다.
선거에서 떨어진 뒤, TV예능프로에 패널로 출연하거나 의류사업 등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야구판에서 멀어진 야인 생활을 했던 영웅의 시련.
지승호씨의 표현은 딱일 것이다. 단 한 번도 치사하지 않았던 사내.
불이익이 충분히 예상됐던 일 앞에서도 그는 무릎을 꿇거나 피하지 않았다.
아마 홈런을 맞고도 똑같은 공을 던져댈 정도의 배짱과 자존감을 갖춘 최동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부산 싸나이가 갔다. 노무현에 이이서 최동원도 갔다.
바보 같았으나 영웅이었던 부산 싸나이들.
그라운드만 지배했던 것이 아닌, 누군가의 마음을 지배했던 영웅, 최동원.
누가 그들의 향기를 이어줄까 두리번 거렸더니,
대번에 레이더망에 걸리는 부산 남자(들)가 있다. 안문조.
안철수요, 문재인이요, 조국. 넓게는 박원순까지. 이른바, 부산(경남) 남자들.
물론, 그들은 각기 다르다.
프레시안은 최동원, 노무현을 '아들 삼고 싶은 남자'라면,
안철수, 문재인, 조국은 '사위 삼고 싶은 남자'라고 표현했다.
재밌는 표현 같은데,
글쎄 나는 마초향 나는 앞선 남자들에게 더 끌린다.
최동원의 강속구에 꽂힌 내 유년시절의 기억 때문이리라.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동원'이라고 스스롤 지칭하지 않는다.
야구를 하기보다 보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한 나이가 됐고,
내 이름에 더 책임을 질 나이가 됐다.
그럼 같은 부산 남자인 너는 어디냐고?
에이, 부산 남자가 딱 저 두 부류만 있는 건 아니다.
영웅을 추모하고 떠올리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남자를 지지하는 소시민도 있다.
그러니까, 아들도, 사위도 아닌,
친구 삼고 싶은 남자, 애인 삼고 싶은 남자, 그게 바로 나다. 하하하.
부산 싸나이들이 가고, 부산 남자들이 온 시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만, 가을에 내 피를 끓게 해줄 것은 이것.
가을야구. 지독한 습관이며 운명인 노떼 자얀츠의 가을야구다.
동원이 형을 위해서라도 세 번째 우승(V3)을 해야 할 때다. 나의 30대를 빛내달라.
나는 부산갈매기다~ 끼룩.
안녕, 나의 우상, 나의 영웅, 나의 야구, 나의 부산, 동원이 형...
당신 덕분에 행복했던 시절이 있어서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의 혼과 불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걸 보니,
당신은 어쩌면 행복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내게 야구였고, 부산이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조만간 개봉하는 <투혼>과 조승우가 당신 역할로 나오는 <퍼펙트 게임>.
전자는 노떼 자얀츠와 부산이, 후자는 당신과 선동렬의 혈투(?)가 벌어지는 야구영화니만큼 당신을 다시 기억할 것 같아요. 보고 싶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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