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창신동.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게 하고, 대한민국 산업화의 숨은 역군들이 살아 숨 쉬던 곳입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착취가 일상화된 공간에서 우리의 어머니, 누이들은 쉴 틈 없이 미싱을 돌리고, 재단을 했습니다. 그렇게 힘겨운 노동과 삶을 버텨야 했던 곳.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창신동에서 만들어진 옷을 입었을 만큼 이곳은 우리 모두의 삶의 결과 잇닿아 있습니다. 서울시는 지난 6월 이곳을 미래 문화유산으로 지정, 보존하기로 결정하기도 했죠.
그렇다면 그 많던 봉제공장들은 가동을 멈췄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미싱은 돌아가고 재단은 이뤄지고 있습니다. 창신동을 거닐라치면, 원단이나 자재를 싣고 가거나 야식을 품은 모터사이클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비탈진 언덕 길 곳곳에 자리한 봉제공장엔 ‘미싱 구함’ ‘재단사 구함’ 등이 붙은 구인광고 또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창신동 봉제공장은 여전히 고래처럼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런 창신동의 비탈진 언덕길.
마을 커뮤니티 공간 <뭐든지>가 지난 12월16일, 마을축제 같은 개관식을 가졌습니다. <뭐든지>는 지역을 기반으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주민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 공간입니다. 마을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러닝투런(키다리, 콩)’과 해송지역아동센터의 어린이, 부모, 그리고 활동가와 주민들, 청소년이 함께 손수 공간을 만든 거죠. 인테리어 회사에 맡기면 1~2주면 끝날 공사를 4개월에 걸쳐 서툴러도 다 같이 조금씩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이죠.
<뭐든지>는 주민들의 재능과 정성이 덕지덕지 묻은 커뮤니티 공간입니다.
우선 이곳은 문화와 소통을 위한 작은 마을도서관입니다. 도서기부, 마을사서의 재능기부, 자원봉사, 재정후원 등 주민들의 참여와 후원으로 운영됩니다.
또 무엇이든지 실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문화공간인 이곳은 곧 마을의 사랑방이기도 합니다. 주민들이 함께 삶을 나누며 일상을 돌아보며, 감각과 습관을 바꾸는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 실험이 이뤄지고 있고요.
이 공간, 아주 소중한 공간입니다. 창신동엔 미싱을 돌리고 재단을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는 부모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기 위해선 물론 부모의 관심과 애정도 중요하지만, 마을이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마을의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라는 말이 그것을 말해주잖아요. 그래서 창신동 주민들, 아이들이 자라나는 환경은 지역공동체 모두가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해송지역아동센터 자체 모금과 박원순 희망펀드 등으로 씨앗자금을 모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날, 많은 마을주민들이 모였습니다.
왁자지껄합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떠들고, 어른들도 자신들이 만든 공간이 아주 흡족한가 봅니다. 외부에서도 종로구청장을 비롯해 종로구 마을공동체 담당자들 등 많은 분들이 왔는데요. 다들 흐뭇한 미소를 띠고 개관식을 바라봅니다.
이곳은 이미 마을의 다양한 구심점이자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네요. ‘인형 만들기’와 ‘책으로 수다떨기’ 등의 부모커뮤니티 모임이 이미 진행되고 있고요. 마을청소년 빈이가 마을카페를 기획하고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창신동의 마을 변화가 이미 이뤄지고 있는 셈인데요.
중요한 것은 아이와 어른 모두가 <뭐든지>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합니다. 세대별 운영위원회가 꾸려진 거죠. 각자의 역할과 규칙을 정해 ‘함께’ <뭐든지>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투표권이 없다거나 어리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소외될 일은 없습니다. 이날 아이들이 직접 사회를 보고, 개관식을 이끕니다. 그 모습이 무척 대견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모습 같아서 더욱 뿌듯하고요.
창신동 주민이 <뭐든지>가 자랑스러운지 한 마디 거듭니다.
“창신동에는 삶을 다르게 구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직접 창신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돌봅니다. 함께 협동하면서 서로의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창신동 주민 파이팅!”
어쩜 그 모습이 그리 아름다워 보일까요.
“처음 오면 어려운 동네라고 하지만, 오면 올수록 정감이 오는 동네”라고 말하는 마을 주민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습니다. 작은 마을도서관을 중심으로 마을공동체가 자라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민들이 직접 페인트칠과 바닥공사를 했고, 필요한 물건은 집에서 가져와서 꾸민 이 공간은 다양한 용도로도 사용합니다. 다양한 문화 활동이나 마을 모임을 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
그리고 ‘책 아지트’로도 활용됩니다. 저마다 한두 권씩 가져와서 1000여 권이 모인 책 아지트는 따뜻한 스탠드와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고요. 세미나 책방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매개로 세미나 프로그램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또 마을청소년 ‘빈’의 정성이 들어간 커피와 코코아, 맛있는 간식을 판매하는 빈이네 카페. 작아도 쓰임새는 참 다양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뭐든지>는 주중에는 ▲도서대여 ▲책읽기 프로그램 ▲지역아동센터 아동 야간 돌봄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주말에는 ▲댄스 영화 인형 만들기 등 부모 커뮤니티 활동의 공간으로 다양하게 활용됩니다.
‘달극장’으로의 변신도 기대되는데요. 한 달에 한 번 심야극장으로 변신해서 가족과 친구와 함께 맛있는 야식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시간도 있다는 것! 한 달에 한 번 역시 새로운 도서 마련을 위한 바자회 ‘달 시장’과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작은 연주회 ‘달 공연’도 빠질 수 없습니다.
아울러,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배우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던 이곳의 역사. 12명의 어린이가 함께 창신동의 역사와 문화를 탐방하는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창신동에 또 어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지 곧 알 수 있을 텐데요. 서울의 미래유산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마을 주민도 말합니다.
“창신동에 와서 더불어 살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창신동 사람들만의 마을잡지도 만들어 갈 계획이라니, 우리는 보다 더 재밌는 창신동 이야기와 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뭐든지> 아래에 있는 마을예술가 ‘러닝투런’의 공간, ‘○○○간(공공공간)’에도 들러 매달 전시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예술매개 프로그램을 맛볼 수 있는 재미도 있습니다. 이날, <뭐든지>에는 뭐든지 가능할 것 같은 마을공동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뭐든지>를 찾아가 당신의 감각과 감수성에 새로운 바람을 넣어보는 건 어떠세요? <뭐든지> 운영시간은 주중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말(토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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