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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4월의 비극에서 생각하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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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버지니아텍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멀리 미국에서 날아온 이 비극은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세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만든다.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그이지만, 어떤 이유로든 그에게 총을 쥐게끔 만든 어떤 세계가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 세계에 발 딛고 있는 우리 또한 자유롭지 않으리라. 너무나도 쉽게 한 사람을 재단하고 질타하는 것은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처사다.

4월은 그렇게 잔인하다. 8여년 전 벌어진 콜롬바인 고교의 비극 또한 4월이었음을 되새긴다. 지난 1999년 4월 20일 미 콜로라도주 콜롬바인 고교, 13명이 총기난사에 의해 운명을 달리했었던. 거듭된 비극에도 미국은, 아니 세계는 깨우침과 무관한 듯하다. 그저 이 세계의 밥그릇 좀더 많이 차지하고자 발악하고, 패권국입네, 국익입네, 하면서 몽상에 빠진 국가나 양반들에게 세상은 그저 잘 차려놓은 밥상에 불과하다. 악화를 양화라고 믿고, 테러와 전쟁을 아전인수격으로 구획짓는 세계의 비극.

4월을 '잔인한 달'로 각인시켰던 T.S.엘리엇은 혹시 예언가 아닐까? <황무지>를 다시 읊조린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어느 수필가도 만물이 자기 피부를 찢으며 소생하는 계절, 그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며 그 '잔인한 4월'의 유래를 설명했다. 딥퍼플은 'April'이란 노래를 통해 잔인한 4월을 노래하기도 했다. 4년 전 만우절, 허풍선이 남작이 활개치는 그 날, '거짓말 같은 죽음'으로 세상과 이별한 '장국영'과 13년 전 한꺼번에 타버린 '커트 코베인'도 누군가에겐 어쩌면 4월의 잔인함을 심화하는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내 얘긴가...^^;;;

버지니아텍의 비극을 접하고선, 자연스레 떠오른 영화 두편. 미국의 총기소유 허용에 대해 메스를 들이댄 마이클 무어의 < 볼링 포 콜롬바인 >, 너무도 화창한 가을하늘과 총기난사의 현장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비극을 더욱 심화했던 구스 반 산트의 < 엘리펀트 >. 이 비극 또한 우리 시대의 역설이 아닌가도 싶다. '문명은 진화하지만, 비극은 더 커지고 있는.' 더 많은 4월의 비극을 담다간 심장이 견뎌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 눈먼 자들의 도시 > < 눈뜬 자들의 도시 >를 샀다. 두 책의 저자, '주제 사라마구'는 눈을 떠도 희망은 보이질 않는 시대를, 그 어느 도시에 빗대어 말했나보다. 그는 말한다. "신의 가호를 빌어봐야 소용없소, 원래 신은 날 때부터 귀머거리거든." < 아일랜드 >에서도 신은 능멸당한다. "신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을 두 손 모아 기도할 때 이것을 무시하는 작자"라며.

신의 있고 없고를 떠나, 믿음의 여부를 떠나 중요한 것은 신이 아니다. 비극을 감내하고 치유할 수 있는 건, 결국 세상에 발붙이고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 아닐까 싶다. 총기를 들고 난사했던 사람의 국적이나 인종, 민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비극을 애도하며, 비극의 도미노를 막을 수 있도록 이 세계에 발딛고 있는 우리들이 연대하는 일. 부디 다른 나라,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무감하지 않기를.


비극은 심화되고 파국은 점점 다가온다. 세계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나. 많은 미디어들이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막지는 못할망정 되레 이를 부추기는 것 또한 비극이다. 세상이 극도로 나빠지는 것은 막는 것, '착한' 미디어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지 않을까.


다시 한번 버지니아텍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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