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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털 싱글스토리

<색, 계> 때문에 '보모'된 사연

발단은, <색, 계>(色,戒, 2007)였다.
어제, 내 오래된, 좋은 친구들과의 오랜만 만남. 지글지글 삼겹살과 술 한잔이 오가고, 묵은지 같은 우리들의 추억은 파사삭 삭았음에도 여전히, 입에 쫄깃하게 씹힌다. 오랜만이었지만, 명분도 있었다. 한 아해는 최근 책을 출간했고, 다른 아해는 다음 날이 생일. 또 딸아들내미와 어부인(우리의 후배되시겠다)을 모셔 온 아해는 얼마전 진급을 한 터였다. 뭐, 나만 온전한 객이었다고나할까. 어쨌든 모처럼 모인 5인의 촌아해들의 밤은, 알싸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5살 난 딸과 3살 난 아들은, 끊임없이 고기를 연호하며 재잘댔다. 좋았다. 화기애애했다. 그 놈의 <색, 계>가 입길에 오르내리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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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는 멀지 않은 진급아해의 집이었다.
간단한 맥주 입가심 정도로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애들은 약간 일찍 가서 재워놓았고, 이젠 우리들의 수다가 따따부따. 한번 잠들면, 그냥 담날 아침까지 골아떨어지곤 하는 애들의 무신경(!)을 믿고. 우리의 우렁찬 수다와 웃음이 펼쳐지는 와중에, <색, 계>가 어느 순간, 도마에 올랐다. 5명 가운데, <색, 계>의 가르침(?)을 사사한 사람은 나와 후배, 두 사람. 나머지 세명의 아해들은 <색, 계> 풍문만 듣고 있던 객잔의 손님들. 어허, 아해들은 <색, 계>를 보지 않고, 감히 체위(!)를 논하지 말라 했거늘.
 
<색, 계>가 뭐길래.
내가 보기엔, '지금-여기'의 <색, 계>는 잔잔하게, 그러나 뱀처럼 일상을 파고드는, 하나의 현상이다. 나는 눈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앞서 언급했듯, 나는 탕닥후(탕웨이 오타쿠)답게, 탕웨이의 매혹을 전파하는데 집중하고 싶었지만, 아해들의 관심은 그게 아냐, 아냐...뷁. 돌고 도는 풍문들은, 어찌된 일인지, <색, 계>에 대한 관음증만 키우고 있었더랬다. 뭐, 온갖 뉴스들도 한몫하지. 100만... 2번 보는 중년들... 체위 따라하다 부상당한 사람들... 와우, 바야흐로 <색, 계> 풍년~ 겨울이 뜨겁다, 뜨거워.
2007/11/25 - [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공존] - 볼수록, 또 보면, 자꾸만, 빠져든다, 탕웨이...

<색, 계>의 힘은 놀라웠다.
그 힘은 바로 추진력이었다. 이른바, '<색, 계>의 힘'. 신랑은 못보고, 친구와 둘이서만 보고 왔다는 후배는 계속, 옆에 있는 신랑에게 같이 보러가자고 부추기고. 그저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라, 책아해와 생일아해까지 덩달아 울렁울렁. 곳곳에 나부끼고 있는 <색, 계>라는 이름의 이 분진은, 한 조용한 가정을 덮친 것이다.-.-;  그저 운동 좋아하고, 맛난 음식 애들에게 먹이는데 신경 주로 쓰는 이 조용한 가정에. 영화래야 1년에 한번 갈까말까한 이 진급아해에게, 그것도 애들 영화만 보는 녀석인데, <색, 계>가 뱀처럼 파고든 것이다. 실컷 <색, 계>를 설파하며 침 튀기던 나는, 점점 이상한 기운이 닥치는 걸 느껴야만 했다. 그저, 술 기운에 안주 삼아 이야기되던 <색, 계>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봉기'가 일어났다. <색, 계>를 보러가겠다는 봉기. 이미 11시가 넘은 시각, 알싸한 술 기운, 애들의 존재, 그 무엇도 <색, 계> 봉기를 막을 수 없는 상황. 아뿔싸, <색, 계>가 뱀처럼 우리를 휘감았다! 이들을 알고 만난지도 어언 20년을 바라보고 있건만, 이런 얼척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결국, <색, 계>를 보러 나섰다.
희생양은 결국 나였다. 이 쉐리들, 객에게 결국 모든 것을 떠넘겼다. 각자 하나씩 핑계를 잡은 아해들은 내게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너는 이미 봤지 않느냐' '우리가 너의 탕웨이를 평가해주겠다' 등등 이 쉐리들 <색, 계>에 눈이 뒤집혔다. 졸지에 임시 '보모'의 책임을 떠맡았다. 근처의 극장으로 향하는 이들의 발길엔 주저함이라곤 없다. 이건, 그들이 <색, 계>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색, 계>가 그들을 땡긴 것이다. 아무리 자고 있다지만, 5살, 3살 난 애들을 싱글남에게 맡기고 가는 참사(?)를 저지를만큼. 이 못된 부모와 이 못된 삼촌이모. 결국, 난 집에 가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그들의 <색, 계> 관람을 위해. 임시 보모로서의 책임 완수를 위해. 덕분에 난 애들의 기침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면서, 잠에서 깨 지 부모를 찾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고문(!)을 당했다. 그 어설픈 선잠도, 쉐리들의 만행에 방해를 받은 지경. 영화 관람을 끝내고 돌아온 새벽 3시, 우당탕탕, 티를 낸다. 색, 계 블라블라... 탕웨이 블라블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아야 할 싱글남의 달콤한 잠은, 어디서 보상을 받나. ㅠ.ㅠ

살다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가 싶었다.
영화 한 편에, 아해들은 엉뚱한 추억을 하나 만들었다. 술 마시다가, 영화를 보러 가는 딴죽을 부리다니. 허허, <색, 계>의 힘, 아니겠는가. 애들에 꽁꽁 묶이다시피 한 일상에 약간의 균열을 내도록 도와준 셈인가. 팔자에도 없던, 임시 보모 역할도 해보고. 그러나, 역시 만만치 않더라. 애들의 기침 소리 하나에도, 어찌하는 것이 좋을지 머리가 복잡하던 걸 보면. 갑자기 깨서 엄마아빠 찾으면 뭐라고 해줘야 하나, 그 야밤에 펑펑 울어버리면 둘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애들 부모한테 전화를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아, 너무도 긴 밤이었다. <색, 계>도 혼자 보러갔더니, <색, 계>때문에 혼자 남아야 하는 이 묘한 상황을 어찌하리오. 허허, 싱글남에게, <색, 계>는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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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은 싱글남은, <색, 계>를 떠올리며, 탕웨이를 그리며, 이렇게 담배를 피워댔다는 사실, 후..............

뱀발. <색, 계>를 보러가는 아해들에게 '색, 계' '색, 계' 계속 그랬더니, 꼭 욕하는 것 같았다. 듣는 사람도 욕 같댄다. 우린, 그래서 앞으로 '쉐이~쉐이~'하지 않고, '색계~색계~'하기로 했다. 이 색계 같은 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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