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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맞잡은 손이, AIDS를 예방한다

12월1일. 알다시피, '세계 에이즈의 날'(www.worldaidsday.org). 더구나 20주년이다. 그러나 역시, 별달리 부각되지는 않는다.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매체들은, 언제나처럼 '기본빵' 정도만. 대선(특히 BBK)이나 삼성이라는 거대한 먹잇감을 놓고, 돈도 안되고, 흥미도 제한될 소수자 이야기를 끄집어낼 이유는 없겠지. 에이즈 예방과 인권에 적당히 발을 걸쳐주면, '땜빵했다'고 자위하기도 하겠지.
(뒤늦게 알았는데, 감염인 단체, 보건의료단체 등으로 구성된 'HIV/AIDS감염인 인권주간 준비위원회'는 감염인이 주체로, 이를 지지하는 인권사회단체들의 연대가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지난해부터 '세계 에이즈의 날'을 '감염인 인권의 날'로 고쳐부르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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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편으로, 나는 불만이다. 이 땅에 에이즈 차별, 에이즈 편견을 확대재생산하는데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미디어들이, 반성과 성찰은커녕 '나몰라라'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뭐, 하긴 그게 에이즈에만 그렇고, 하루이틀 그리하였던 것도 아니긴 하다. 무지와 편견이 만든 차별 덩어리, AIDS는, 그 이름만으로도 아직 공포를 유발한다. 오죽하면, "환자치료보다 사회적 편견을 치료하는 게 더 급하다"(오명돈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고 말을 하겠는가. 한국에선, 에이즈 감염인을 격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10명 중 4명에 달한단다. 서유럽에서는 5% 수준에 불과한데.
☞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 '에이즈편견 가장 심한 한국'

에이즈가 등장하던 1980년대. 많은 미디어들은 부정확하거나 왜곡된 정보로 에이즈를 '천형'이나 '죽을 병'으로 몰았다. 즉, 에이즈를 하나의 '공포'로 몰아세워, 사람들에게 잘못된 편견과 차별의 인식을 콕콕 박아놓은 것이다. 만지기만 해도 감염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곧 죽을 것처럼. 격리와 통제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분리'하고자하는 작업에 절대 일조한 것이 바로 '미디어'다. '분리주의'를 책동한 장본인인 셈이지.

물론, 나 역시, 부정적 인식의 울타리에서 완전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주변에는 HIV/AIDS 감염인도 없고, 그들을 만나본 적도 없다. 나는 어쩌면, 관념적으로만 차별을 없애야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안의 차별과 편견을 한발짝이라도 몰아내기 위해서라도. 또한 감염인의 권리증진에 아주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기 위해서.

최근 감염인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실제 감염인으로서, 사회적인 편견 타파와 책임 등을 묻는 칼럼과 '커밍아웃'한 감염인의 일상을 다룬.
☞ 에이즈 감염인으로 산다는 것
☞ 에이즈 ‘낙인’떼고 직장생활 7년째 동료들 “감염 걱정·불편함 없어요”
☞ 에이즈보다 무서운 '에이즈 편견'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발 붙이고 있는 세계의 편견과 그로 인한 차별을. 미디어를 통해 잘못 각인된 부정적 인식과 편견이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을 멀찌감치 떨어지게 했다는 죄책감. 비감염인들이 손을 내밀어 감염인들의 손을 잡고, 편견의 껍질을 깨나가야 한다는 명제. 그들 역시 우리 사회가 보듬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 나는 다시, 떠올린다. 우리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그늘은, 결국 우리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며, 우리 스스로 그 편견을 깨는 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명제 말이다. 전세계에서 매일 6천명이 에이즈로 죽어갈 정도로 싸움은 아직 치열하지만,(☞ 매일 에이즈로 6천명 사망 "싸움은 여전히 치열") 우리 역시 편견과 아직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 한다. 사실, 에이즈보다 더 무서운 건, 에이즈에 대한 편견일지도 모르지.

HIV 감염인의 주요 사망 원인 중 하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한다. 감염인 자살률도 국민 전체의 자살률 보다 10배가량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사회적인 죽음이 그들을 생물학적인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추정도 가능하게 한다. 이는 우리에게 편견의 껍질을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편견으로 인해 누군가 피해받거나 상처를 입도록 해선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혹시 기억하는가. 영화 <괴물>에 나왔던 바이러스의 유포 과정과 차별의 현장. 기득권(지배자)에 의해 규정된 (괴물)바이러스는 사람들을 '바이러스포비아'(전염병공포증)로 몰아넣는다. 사람 사이의 간극은 커지고 분리는 일상화된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행렬 속에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따가운 눈총이 대번 날아든다. 그리고 소외. AIDS에 대한 우리네 시선과 다를 바 없다. 정부와 미디어에 의해 죽을 전염병으로 규정된 에이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정확한 정보의 전달보다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에이즈의 원인을 덧씌웠던 전력. 대중들에게 공포와 혐오를 덧씌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전형적인 기득권의 수법이다. 에이즈 전염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을 조장하고 동성애에 대해 폭력을 가하도록 만든 어떤 편견 역시 맞물린다. 편견 또한 우리 안의 '괴물'.

한편으로, 잘못된 편견은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소외시킬 뿐 아니라, 스스로를 잠식시킬 수도 있다. 잘못된 정보와 편견으로 인해 전혀 감염경로가 아님에도, 'AIDS에 걸리는 것 아니냐'는 불안에 한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이는 생활에도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잠식할 수도 있다. 지식인에 올라온 질문의 유형을 봐도, 얼마나 편견이 만연해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위행위를 해도 에이즈에 걸리나요" 등과 같은 웃지 못할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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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이즈 포비아'가 불러오는 구조적 편견과 차별을 벗어던지는 일이다. 감염인을 사회에서 박멸해야할 벌레처럼 격리(분리)하거나 우리네 일상에 끼어들어선 안 될 외계인처럼 취급하는 것은 절대 능사가 아니다. 감염인들은 단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바이러스를 몸 속에 하나 더 품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약간 아주 약간, 다를 뿐이다. 감기 역시 바이러스인데, 감염인들은 감기 걸린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되레 감기는 공기 중으로도 전염돼 더 나쁜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겠다.

만약 감염인들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더불어 살지 못한다면, 그들을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가끔 접했다. 감염인이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뿌리고 다녔다는 이야기. 그러나 그건 그 사람만 탓할 것이 아니다. 그를 소외하고 차별한 우리 사회의 구조가 우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를 분리하고 소외시킴으로써, 막다른 궁지에 몰리게끔 만든 우리의 책임이다.
 
여기 이 사람들.

20여년 전 수혈로 에이즈에 감염됐지만 건강하게 살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크리스토 그레일링 목사. 그리고 당시 남자친구였던 그레일링 목사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고서도 사랑을 놓지 않았던 리젤 여사. 그들이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고, 크리스토 목사는 일갈했다. "에이즈는 전염병이 아니다." ☞ "수혈로 에이즈 감염 20년 두 딸 낳고 건강히 살아요"

그에 앞선, 2005년 세상에 없을 것 같던, 한 남자의 순정. 통속 사랑극, <너는 내 운명>.
얍삽한 계산 없이 사람을 대하던 그 남자. 사랑 앞에는 편견도, 차별도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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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빤 내가 밉지도 않아?
내가 더럽지도 않아?
나 벌레야, 벌레...

오빠 목소리 왜그래?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오빠. 사랑해 오빠.

-<너는 내 운명> 중에서-


남의 일로만 치부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내게도, 당신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 이미 그런 사례들도 접해 왔지 않은가. 수혈, 감염인 부모에게 바이러스를 물려받거나 예기치 않은 혹은 원치 않은 성관계 등등. '나는 에이즈랑은 전혀 무관하다'고 장담하지 말고, 그들 역시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임을. 한번 생각해보라. "내가 에이즈 감염자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예기치 않게 에이즈에 감염됐다면?"

비록, 12월1일을 맞아 글 쓰면서 관심도 촉구하는 모양새가 됐지만, 중요한 것은 감염인들의 권익이다. 지난해부터 에이즈예방법 개정안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는데, 최근 만들어진 개정안은 감염인을 특정시설에 강제수용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고 한다. 격리보호 조항은 지난 1999년 법안 개정 당시에도 인권침해 가능성 때문에 삭제됐는데, 이를 다시 넣는 건 한마디로 '역주행'이다. ☞ “에이즈예방법 개정안 입법 중단을”

또 이 날만 동정심을 갖는 것은 감염인들을 더욱 좁은 울타리로 가두는 격이다. 감염인들의 연대 요청에 비감염인들은 이를 뿌리치지 말고 함께 손을 내미는 것이 필요하다. 감염인은 두려움도, 공포의 대상도 아닌, 함께 살아가고 일상을 나눌 사람들이다. 병보다 무서운 편견을 치유하는 것이, 에이즈 예방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감염자들이 벌레가 아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감염자들을 세상 밖으로 격리하고 분리하고자 하는 자가 '진짜' 벌레. 최소한 인간은 못 되더라도, 벌레는 되지 말자, 는 것이 나의 다짐.  

대선을 코 앞에 둔 정국이다. 과연 그 잘난 대선 후보들께서는 혹시 에이즈의 날을 아시는지. 혹시 안다면, 표 획득용 쇼라 할지라도, 에이즈 감염자와 악수하고 서로 부둥켜 안으면 안될까나. 지난 2004년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이 감염자와 악수하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는데, 한국에서는 영 그런 소식은 안 보이네. 이것이 완전 정치쇼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이런 장면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진짜 쇼다운 쇼를 해라~
 
더불어, HIV/AIDS에 대한 편견을 푸는 것도 원인제공자였던 미디어가 해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뿌린 것을 거두는 자세. 최근 한 연구에서 치료를 제대로 받은 에이즈 감염인의 평균 기대여명은 35년으로 일반인과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매직 존슨도 아직 살아있다! 천형이라고, 현대판 흑사병이라고 생난리치던 그 미디어들은,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손 내밀어라, 미디어여.그리고 이제는 공포를 걷고, 감염인과 비감염인이 손을 맞잡도록 중개도 해라.

흠, 어때요? 당신도 함께 손 내밀어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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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해, 지금은 박동이 멈춘, 과거의 내 블로그에 <AIDS, 무지와 편견이 부른 차별>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재구성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