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뒷좌석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나는, 본의 아니게 뒷자석 모녀의 이야길 듣게 됐다. 여자아이는 네댓살 정도. 사실, 버스 안에서 소리 크게 내는 사람들, 난 싫어.-.-
간단하게 재구성하자면,
아이는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인 후보 현수막을 보고 엄마에게 말을 던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 이명박이라고 하면 안돼요. 혼나요. 곧 대통령이 될 아저씨인데 그렇게 부르면 잡아가요.
음... 그러면 내가 대통령이 되면 되잖아.
그전에 우리 OO이 대신에 엄마가 잡혀갈텐데? 그러니까 대통령이 될 아저씨한테 그렇게 이름만 부르면 안돼요..."
뭐, 대충 이런 식의 모녀간 다정한(?) 대화였다.
특정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기정사실화한 어머니의 말도 약간은 거슬렸지만(뭐, 설혹 그것이 나중에 사실이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더욱 절실하게 느낀 감정은,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다'였다.
후보를 믿냐는 아이의 질문에,
어머니는 이런저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아마 당선을 기정사실화해서 얘기한 것도, 어떻게 답변할지 궁색해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사정이야 알 길은 없고. 물론, 그 질문의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다. 대통령으로 찍을 것이냐를 묻는 것인지, 액면 그대로 믿어의심치 않는다는 것인지, 아님 또 다른 뜻인지.
상상과 고민을 해봤다.
아이가 있었다면, 저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땅투기, 위장전입, 자녀위장채용, BBK 등 '종합의혹세트'를 짊어진데다 선거법위반의 전력, 맛사지걸 발언, 성장 이데올로기의 화신 등 당최 대통령이 갖출 덕목과 매칭되는게 없는 이 아저씨를 믿냐고 묻는다면. 답변이야 분명하고, 이유를 대지 못할 것도 없지만, 아이의 눈높이와 귀높이에 어떻게 맞출 수 있을 것인지, 나는 쉽게 상상답변이 나오질 않았다.
얼마전 읽은 글에서도,
그런 부모의 황망함과 궁색함이 나왔더랬다. 사회학자인 그는, 딸이 "아빠,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위장전입인가 위장채용인가 그런 거 무지하게 하고, BBK가 뭔가 문제가 많다며.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지지율이 제일 높아?"하고 물었을 때는 답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사회학자로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기성세대로서 미래세대에게 말을 잃었다고 탄식 뉘앙스의 말을 뱉았다.
자식 앞에 궁색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작금의 현실.
'착하고 바르게 자라라'라는, 대개의 아비, 어미들이 자식들에게 건네는 말은, 그저 농담일지도 모르겠다. 현실과는 유리된 교과서에서만 나열된. 의혹투성이의, 착하고 바르게 자랐다고 절대 장담하지 못할 양반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판국인데 무슨. 혹시, 앞으론 자녀들에게 이런 얘기가 횡행하는건 아닐까. '돈 많이 벌면 저렇게 대통령도 될 수 있는거야!' 뭐, 돈 많이 번 거야 좋다. 그것 갖고 트집잡고픈 생각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를 설명할 길이 당최, 난감하다.
원숭이 지지율은 웃겼다.
지지율에 전적으로 신뢰를 보내는건 아니지만, 그 숱한 의혹들에도 여전히 고공행진하고 있는 그 지지율. 한 기사의 댓글, "국민이 원숭이 지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지지율이잖아요"는 갑자기 현실을 '동물의 세계'로 인도한 듯 기시감을 줬다. 아이들에겐 설명할 길이 없어 난감했다지만.
솔직히, 누가 대통령이 되건, 이 질박한 땅의 대세엔 지장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체념적이라고 비난 혹은 비판을 쏟아부을지라도, 나는 그리 생각한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다고,(나는 정신수준이 네살배기 아이와 같아서 '이명박'이라 부른다 ^^;) 대한민국이 지옥이 된다든지, 희망이 절망으로 뒤틀어버린다든지, 세상이 쫑난다든지, 하는 생각은 않는다. 그저, 나의 부박한 생이 더 옹졸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ㅋ
한 선배는 메일을 통해, 올해의 대선풍경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없어서.
혹은, 그저 1인분의 생을 건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아니면, 세상이 흘린 찌꺼기를 아이에게 안겨다주지 않을 수 있어서.
뭐 그렇다고, 영애누나삘로 '싱글남이라 행복해요~'라고 속삭이진 못하지.^^;
진짜, 이런 이유로 아이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닥 달갑지 않다. 내 궁색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것 같아서. 그저, 아이들에겐 못내 미안할 뿐이다. 부디, 이 못난 삼촌을 용서하그라~
'돼지털 싱글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오렌지주스'에서 시작한다... (2) | 2008.01.04 |
---|---|
싱글남의 크리스마스 푸념 (0) | 2007.12.25 |
<색, 계> 때문에 '보모'된 사연 (0) | 2007.11.27 |
'재혼'보다는, 그냥 '결혼' (0) | 2007.11.22 |
[한뼘] 첫 눈 (2) | 2007.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