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알다시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행한 세기의 명연설이지.
책 선물했던 거, 기억하지?
책 표지를 넘기면, 너에게 이 책을 선물하면서 건넨 나의 메시지가 또박또박 적혀 있잖아. 쿠쿠.
연설의 일부 내용과 형식에서 표절 의혹도 있지만, 오늘날,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에 이 연설 또한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거야.
오바마는 그렇게 연설 내용을 현실로 이룬 흑인이자, 흑인 노예들의 노역으로 만들어진 백악관에 입성한 첫 흑인 대통령이잖아.
그런데 오늘 왜 뜬금없이 마틴 루터 킹이냐고?
하하. 니가 놀랠만 하군.
그 킹 목사는 41년 전 오늘, 1968년 4월4일 암살 당했어.
그러니까 41주기. 아마 미국에선 그 이름이 널리 회자되고 있을 테고.
그럼, 지난 1월 오바마 대통령 취임 전날, '마틴 루터 킹 데이'는 뭐냐고?
아, 그건 킹 목사의 탄생을 기리는 공휴일이야.
실제 생일은 1월15일인데,
의회 표결에 따라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한거야.
사실 그건, 엄청난 거라고.
미국 시민으로서 국가적 공휴일에 이름을 올린 건 처음이거든.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날'이 있다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대통령들의 날'이고. '콜럼버스의 날'은 이탈리아인의 이름을 딴 거니까.
고로, 킹 목사야말로 미국시민으로서는 최초인 셈이지.
아, 뭐, 그를 들먹인 건, 오늘이 그의 41주기인 것도 있지만,
그의 명연설인 "I Have a Dream"을 인용할 일이 있어서지.
아마 너와 내가 함께 꾸는 (올해의) 꿈이 될 것이다. 우하하.
We Have a Dream!
2009년 4월4일. 바로바로바로, 프로야큐 개막!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순간. 드디어 시즌 개막이다.
모름지기, 봄은 야큐와 함께 오는 거지! 동의하지?
그리고, 진짜 우리의 드림. 무려 17년 전, 꿈처럼 만끽하고선,
당최 잡히지 않는 일장춘몽 같던 우리 '노떼 자얀츠'의 우승.
내가 원래 우승 같은데 목매는 인간은 아닌데,
올해만큼은 그 '뽕'을 좀 맞아야 겠어. 알지?
아, 가슴 셀렌다. 우리의 시즌이 이제야말로 본격 시작됐다.
오늘 히어로즈와의 개막전 보러 부산에 내려간 니 녀석이 부럽다.
나는 다음주를 기다린다. 즉, 잠실 개막전. 기다려라 엘쥐.
자얀츠가 간다. 내가 간다. 우리가 간다.
"모두 하나되어 함께 가자 정상으로"
오늘, 우리 한번 외쳐볼까요?
I(아이) Have(해브) a(어) Dream(드림)!!!~~~
노떼 자얀츠, 2009년을 부탁해~~~
사.랑.해.요, 노떼자얀츠~
참, 그래서 오늘 커피는,
진하고 강력한 블랙. 그러니까,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
에스프레소가 가장 진하게 나오는 시점까지 제한해서 끊어주는 깨끗한 맛.
같은 양의 원두로 보통 에스프레소보다 적은 양을 뽑아 잔맛이 없고 훨씬 진하고 풍미가 강하지. 4월4일의 커피, 옥희(오키)?~
'사랑'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사랑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늘 불만이라면 불만, 이상하다면 이상한 것이었다.
사랑은 살다보면, 저절로 주어지는 감정이라는 편견.
그러나, 알다시피, 세상엔 '사랑불능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어릴 적부터 그렇게 사랑사랑, 타령을 해대지만,
사랑에 대한 아포리즘은 넘쳐 흐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 고프다.
왜!일까! 딴 이유 없다.
사랑을 제대로 배우고 체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에,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사랑 안에 들어가 있으므로,
사랑만 제대로 알아도 기본은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최근 책을 통해 만난 두 사람의 '사랑학'에 적극 공감했다.
사랑은 그저 한 사람의 마음에 똬리를 튼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모름지기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고 사회적 소통이다.
이들은 '사랑' 역시 배우고 익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정말이지, 왜 그리 반갑던지.^^
그들은,
한 명은 고미숙(《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저자)이고,
다른 한명은 목수정(《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저자)이다. 지난해 12월, 고미숙의 강연회를 찾았다.
주옥 같은 시간이었다. 행복했던 시간.
아래는 그 기록이고.
늦었지만, 지금에서야 올린다.
목수정의 사랑학에 대해서도 언급할 날이 있겠지만,
두 사람의 공통 분모는 사랑은 사랑하고 싶다면, 공부하라는 말씀.
완전 지당, 완전 공감.
최근에 읽은 책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고대 시대부터 사랑은 공부하는 것이었다는 증거.^^
"철학적 삶에 대해 플라톤이 주목한 또 하나의 사랑이나 욕구, 즉 에로스(eros)가 지닌 중요한 역할이다.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묘사한 소크라테스는 활력에 넘쳐 에로스의 요소를 철학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사랑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사랑은 우리에게 좋은 것인가? 우리는 자율성을 얻기 위해 우리의 사랑을 아주 작게 줄여야 하는가? 이것들은 오늘날 젊은 남녀들도 당연히 호기심을 품는 문제다." 《인문학스터디》(마크C. 헨리 지음 |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펴냄)
누군가의 말마따나, "사랑은 교훈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존적으로 하는 거다."
그리고, 실존적으로 하기 위해서라도, 사랑에는 '공부'가 필요하다.
부디, 우리, 제대로 사랑합시다. ^.^
세간의 어떤 말에 대한 불만부터 얘기해야겠다. 사랑(들)이 있‘었’다. 달이 차오를 때까지, 사랑했다. 그러나 헤어짐, 피할 순 없었다. 아팠지만, 쓰라렸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말,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 이렇게 말한다.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어이없었다. 췟, 그걸 위로라고. 인연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 위로의 대부분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전제로 한다.
말인즉슨, 이렇다. 인연이 아니라는 말 앞에는,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결혼에 이르지 못했으니’라는 말이 생략된 것이다. 아니, 사랑이면 사랑이지, 왜 결혼과 늘 연결 지을까.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는 이 엉성하고 빈약한 이데올로기에서 사람들은 왜 벗어나질 못하는 거지? 이상하다. 불만이다.
이런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해주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인연이 아닌 게 아냐. 인연이 딱 그만큼이었던 게지.” 인연이 아니라는 말, 나는 그것을 내 사랑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겼다.
사랑은, 연애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랬다. 한 세계(우주)가 다른 세계(우주)를 만나는, 일대 사건 혹은 사고. 이 엄청난 스파크, 파파파팍! 이 넓은 세상, 저 길고 긴 시간,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만난 우리 두 사람. 평행우주의 궤적이 어쩌다 공명하게 된 순간. 그게 사건사고가 아니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사랑사건 혹은 사랑사고. 나는 약간 과장해서, 그 사건사고들, 신문방송에 나야한다고 본다. 시시껄렁한 사건사고로 지면이나 전파 낭비 말고 이 일대 사건사고를 왜 싣지 않냐고!
오죽하면, 트루먼 카포티는 이런 말을 했을까. “세상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연인과 헤어진다면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춰야 한다.”
그리하여, 헤어졌지만 새로운 세계를 알려 준 그 사랑(연애)에 나는, 고마워했다. 물론 경우마다 사유와 충격의 깊이나 폭은 달랐을지언정, 나는 그 사랑(들)이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요소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내 안에 그들 있다!
다시 돌아가자. 그 불만이 있다손, 마냥 그들을 탓할 것만도 아니었다. 그들이 ‘배운’ 혹은 ‘훈육 받은’ 것이 그런 걸. 학교랍시고, 사회랍시고, 배워주지 않는다. 따라서 그건 사회구조적인 문제다. ‘사랑’을 제대로 알려주거나 공부하게 만들지 못한. 사랑이 중요하다고 시부렁거리면서, 정작 사랑을 공부하고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 못한 죄. 고작해야 영화나 TV드라마 등을 통해 왜곡된 사랑(연애)의 형태나 전달되도록 하고 말이야.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그래서 일단 시작은, 그런 통념에 유죄판결부터 내리고. 꽝!꽝!꽝!
선천성연애결핍증 환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일생에서 겪을 연애와 사랑. 그러나 그게 쉽지만은 않다. 17세기 프랑스 사교계의 여왕, 니농 드 랑클로는 일찍이 말했다. “군대를 지휘하는 것보다 사랑을 할 때 훨씬 더 많은 재능이 필요하다.” “사랑은 굶주림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화불량으로 죽는 경우는 많다.”
알다시피, 사랑(연애)은 우리를 가장 빛나게 하는 관계면서도, ‘고차’방정식이다. 그러나 풀리지 않을 방정식이 아니다. 답은 있다! 그걸 구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 그렇지. 그래서 고전평론가이자 인문학자 고미숙 선생이 나섰다. “학교와 교회, 집 어디서건 입만 열면 사랑타령이고, 미디어는 온통 사랑과 섹스를 쉬임없이 쏘아대고 있건만 정작 사랑의 열정을 누려야 할 청춘들은 부르짖고 있었다. 저 20세기 초 루쉰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이 없는 비애를’, ‘사랑할 사람이 없는 비애’를.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를 쓸 때 그랬듯이, 나는 또! 분노했다.… 이 책은 이런 분노와 안타까움이 낳은 산물이다.”(pp.5~6)
고 선생이 운을 뗐다. 책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하겠단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책에 쓰지 못했단다. 이런 만남의 장점은, 책과 달리 거칠게 말해도 소통이 되니까 좋단다. 그리고 이야기는 술술 풀려나갔다. 사랑이, 연애가 그리되면 좋으련만, 쯧. 그래서 이하, 사랑탐구가 고미숙 선생이 전하는 사랑과 연애의 달인이 되는 법.
자신의 몸을 아는 것, 사랑의 필요충분조건 사실 책에 나온 고미숙의 처방은 간결하다. ‘사랑을 하고 싶다면, 공부하라!’ 물론 여기서 공부는, 자격증, 학벌과는 거리가 멀다. 존재에 대한 탐구가, 공부다! 이 자리에서 그는 거듭 강조한다.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고, 고민하고 짜증나게 하는데, 왜 공부를 하지 않는가. 공부의 관점에서 비췄을 때, 이 현상은 이상하다. 불경, 성경은 들어봤어도, 연애경, 사랑경은 들어보지 못하지 않았나? 사랑에는 분명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길이 있는데,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소통이 안 돼 사람들은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TV가 쏘아대는 드라마에서 그 불통을 익히 보아왔다. ‘사랑’한다는데, 이상하게 ‘불행’과 등가관계 같다. 사랑의 화신이라는데, 이거 웬걸, 저주의 화신 아닌가. 그 불행의 인과에는 불행하게도, ‘사랑’이라고 일컫는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왜곡된 사랑. 어떻게 된 일인가. 사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닌데. 따라서 그건 ‘참 사랑’이 아니다.
<연애시대>라는 드라마, 기억하는가. 감우성과 손예진이 나온 이혼 그 이후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 <연애시대>는 연애를 이렇게 표현했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일 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고 선생은 그러나 지금을, 장래희망을 지대로 펼치지 못하는 시대라고 진단한다. “아무튼 이렇게 ‘연애담론’이 흘러넘치건만, 역설적이게도 지금 같은 ‘연애무능시대’도 드물다.… 한마디로 다들 연애에 대한 갈증으로 애를 태우면서도 연애를 ‘지대로’ 하는 인간들은 천고에 드문 것이다. 참, 말을 할수록 억장이 무너진다.” 장래희망만 가지면 뭐하나.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고 선생의 충고. “사랑에 대한 오만과 편견만 제대로 알아도 사랑으로 몸을 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고 선생이 ‘사랑을 위해’ 강조한 것은 자신의 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 몸의 ‘오장육부’를 통해 그 사람의 운명이 나오고, 마음의 지도가 그려진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오장육부의 각 장기는 각자의 역할이 있고 정서를 갖고 있다.
가령 신장은 생명의 근원으로 이것이 약하면 뼈가 약하고 정력이 약해진다. 간은 결단력과 상관있으며 화를 내면 간을 다치게 된다. 고 선생의 말씀. “몸은 몸 상태 뿐 아니라 정서적 구조를 갖고 태어난다. 사람마다 슬픔이나 민감함을 느끼는 것이 다르고, 생긴 게 다른 만큼 오장육부도 다 다르다. 이것은 컴퓨터의 초기화 과정과 같다. 각자 존재의 리듬을 갖고 있는데, 자기에게 맞는 시대는 따로 있다.”
이것은 자신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20대까지 되는 일이라곤 하나 없었단다. 낯가림도 심하고 말 없는 왕따였으며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말을 못했다. 지금과 달리, 백수 없던 시절에도 출판사를 원했으나, 판판히 떨어져 백수로 지내기도 했다. 간신히 들어간 출판사는 교정만 보는 출판사였던 탓에 책 만드는 즐거움은커녕 10개월 동안 고역을 겪었던 경험.
다만 공부하는 운은 타고 났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인생은 오래 살고 봐야 한다. 한 시절에 승부가 났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존재의 리듬에 의한 정서적 구조가 삶의 흐름을 만드는 법이다. 균형을 잡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틈이 있고 균열이 있어야 세상에 나오는 법이다.” 틈과 균열을 메우기 위한 노력과 관리가 삶의 동선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에 대한 사랑탐구가 고미숙의 진단.
“마음은 ‘심리서’에 맡기고 마음을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뭐하나. 내 정서가 어디에 민감한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자기가 자신을 공부하지 않고, 심리서나 자기개발서만 보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이건 자기가 알고 있던 걸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점쟁이를 찾는 것도 의미가 없다. 몸도 자기 스스로 보고, 운명도 자신이 봐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알면 그 내공으로 인연을 만나게 되는 것이 이치다. 통찰하고 사유하지 못하면 병원을 가도 돌팔이를 만나거나 오진만 받는 경우에 걸릴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나를 치료하는 건 나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불균형을 알아차리면 벗어날 길을 찾게 되고 스승을 만나게 된다. 고난을 겪어도 역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내가 나를 통찰함으로써 내가 주인이 되는 길을 알 수 있다.”
연애의 적, ‘화폐’를 경계하라 고 선생은 우선 편견의 제거 또한 연애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봤다. 사람 인생이 계절의 순환마냥 봄-여름-가을-겨울을 차례로 겪는 것은 아니며, 특정 계절만 있으란 법은 없고, 계절 간 비교우위나 고정관념을 갖고 인생을 보는 것은 ‘틀린’ 것이다.
고정관념은 연애에서도 있다. 이팔청춘을 향한 사회가 만들어낸 구속도 그것 중 하나. 이팔청춘의 연애를 우리는, 왠지 무시한다. 머리에 피도 안 말랐다면서. 그러나 고 선생의 지론은, “이팔청춘에 결혼하는 게 가장 좋다!” 타고난 팔자를 자연스럽게 겪되 나이에 맞게 겪는 것이 가장 좋단다.
“자본주의가 도래하기 이전, 세계 모든 종족의 결혼적령기는 이팔청춘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 나이에 ‘대형사고’를 쳤고, 결국 동반자살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당시 계몽주의자들에게 그런 건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pp.93~94) 엄청난 속도로 추진된 근대화는 ‘성에너지의 국가적 몰수’라는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이 고 선생의 분석. 10대에 무슨 결혼이고, 섹스냐며 ‘버럭’하면서 ‘10대엔 공부’라는 고정관념이 형성된 것엔 이런 뒷배경이 있었다. 더 자세한 것은 책의 <20세기와 욕망의 배치>라는 챕터를 보시고.
무엇보다 고 선생이 지목한 사랑과 연애의 적은, ‘돈’이다. 돈이 영혼을 잠식하면서 파생된 사랑과 연애의 상품화. 돈은 우선 몸부터 예속시켰다. 오장육부의 장단점을 뭉개면서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났다. 돈이 원하도록 세팅되고 욕망을 주입 당하게 된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시대는 연애를 특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삶을 망각하고 연애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왜냐? 돈이 되니까! 고 선생의 한탄. “연애는 원초적 본능에 해당하고, 사랑은 다른 어떤 삶에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용해서 연애에 전문성이 필요한 것처럼 포장했다. ‘작업’이라는 말의 탄생에도 그런 사회적 배경이 있다. 사회가 원하는 리듬에 개인의 리듬을 끼워 맞추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고 선생은 비기(秘技)를 알려준다. “일체의 ‘~Day’를 거부하라!” 고 선생은 되묻는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나?” 가슴에 손 얹고 생각해보자. ‘~Day’를 챙기면 사랑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사랑인지.
말이 이어진다. “돈이 안 들어야 ‘정성’인데, 다른 사람 있는데서 과시하려는 것은 정성의 표현이 아니다. ‘쇼’를 하라고 부추기는 것을 봐라. 남에게 표현돼야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는데, 이건 원초적 리듬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작업’ 이후를 생각해봐라. 레스토랑, 모텔, 유원지… 늘 비슷한 동선이고 반복이다. 꼬박 기념일을 챙기고 그러는데, 이건 그동안 (사귄) 인내에 대한 기념 같다. 100일? 곰이 사람이 되는 동안이니, 참 길지? (웃음) 너무 빈약하다. 사랑은 과시고, 받는 것이며, 받으면 놓지 않는 것이라는 개념, 즉 ‘소유’가 압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한편으로 ‘연애권장시대’다. 둘러봐라. 모든 것이 커플 위주다. 화폐 쓰라고 부추긴다. 사랑에, 연애에 돈 쓰지 않으면 관계형성이 되지 않을 것처럼 호들갑이다. “지금은 재물에 집중하도록 다그친다. 존재의 리듬은 재물로 한 번 왜곡돼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엄청 힘들어진다. 재산이나 소유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 몸이 열리고 솔직담백하게 다가서지 못한다. 왜냐. 몸 자체가 왜곡돼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만들면서 정작 원초적인 자기 것은 망각하도록 만든다. 결혼하면 재물만 덩그러니. 이혼할 때도 그게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몸이 열리는 사랑이 필요하다!”
과연, 우리가 미디어 등을 통해 접한 여느 이혼들의 쟁점은 언제나, 위자료 등 재산분할이다. 우습게도.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그렇게 계산할 줄 밖에 모른다. 고 선생의 한마디. “재산을 나눌 게 없는 사람들은 아쌀하게 헤어지고 별로 아쉬울 게 없더라!” 얼쑤~
끝나는 것도 인연의 한 줄기다, ‘시절인연’ 무엇보다 이 자리에서, 나는 말머리에 언급했던, ‘인연의 끝’에 대한 답을 얻었다. 시절인연. 그렇다. “시절인연이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어떤 강한 촉발에 의해 공통의 리듬을 구성하게 된 특정한 시간대를 뜻한다. 일종의 매트릭스 같은 것이다. 사랑은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다.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가 아니라, 내 안에 잠재하고 있던 욕망이 표면으로 솟구칠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욕망이 솟아오르려면 시절을 타야 한다. 시절을 타게 되면 아주 작은 촉발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pp.60~61)
존재의 리듬이 다 다른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이 사랑이요, 연애다. 우주의 시공간이 허락하지 않으면 단 하나도 할 수 없다, 는 진리! 고 선생 왈, “시절인연이 맞으면 스파크가 튄다.” 순정은, 그런 면에서 지구력과 연관이 있는 한편, 두 사람이 같은 지구력을 갖춰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러니 헤어짐 혹은 이별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삶의 궤적에 있어서도 변곡점은 어느 순간, 느닷없이 찾아온다.”(p.242)
고로, 이별은 계절의 바뀜과 같다. 그렇게 잘 살던 부부가 갑작스레 찢어지는 것도 삶의 어떤 궤적에서 찾아오는 변곡점이다. 고 선생은 그것을 ‘대운’이 바뀌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10년 안에 올 수도 있고, 짧게는 5년 안에도 오는 것.
사랑이 문턱을 넘어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장 오지 않는다고 안달할 필요도 없는 것. 우리는 그 사랑이 찾아올 동안 워밍업을 하면서 인연장을 구체적으로 조성하고 있으면 된다. “‘연애하고 싶어’, ‘연애가 안 돼서 미치겠다’고 이러지 말고, 물리적 장을 바꿔야 한다. 일상의 동선을 바꾸면 된다. 지점을 찾아내면 마디를 바꿀 수 있다.”
‘호모 쿵푸스’가 곧, ‘호모 에로스’ 그렇다면 그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고 선생은 역시나, 호모 쿵푸스. “서점 주변을 서성거려라. 백화점이나 인터넷 쇼핑몰에 서성거리지 말고. 몸의 균형을 바꾸기 전에는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 돈을 모아서 책을 사라. 책 사는 연습을 해라. 책을 가까이 두면 ‘인연장’이 생긴다. 대개 사람들은 삶의 50% 이상을 산만하게 쓴다. 대부분 시간을 멍청하게 보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실연을 당했을 때, 누군가에게 꽂혔을 때, 그리고 돈을 뜯겼을 때다. (웃음) 깨어 있으라. 그건 대단한 게 아니다. 멍청함을 집중시키면 된다.”
사랑의 종지부, 연애의 끝을 두려워해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를 극하는 것이 있어야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를 넘어지게 한 사람이 스승이고, 고통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연애를 한 시기로 못 박지 말고 인생 전체를 사랑으로 놓고 인생에 대한 자기비전을 만들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느닷없이 만나고, 느닷없이 헤어진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삶의 진리다. 이별을 하나의 단계이자, 수순으로 바라보는 것.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삶을 결정하듯이, 헤어짐의 내용과 형식이 사랑의 전체 여정을 결정한다. ‘모든 존재는 사라진다.’(정화스님)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랑은 이별을 향해 나아간다. 무상성(無常性), 사랑의 여정에 있어서 불멸의 진리는 오직 이것뿐!이다.”(p.242)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불멸의 사랑’이라는 망상 중의 망상에서 벗어나기!
지속이 반드시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식물인간으로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아니듯. 삶에 있어 생로병사가 당연하듯, 사랑도 생로병사를 겪는다. 올 것은 반드시 오고, 지나간 것은 지나가게 하라. 그것이 고 선생이 전하는 ‘호모 에로스’의 필요충분조건.
그리고 역시나 공부. “공부를 한다는 것은 검법이나 수영을 익히는 것과 같다. 매일 검으로 몇 시간씩 허공을 갈라야 하듯, 몸을 단련하는 치열함과 강도로 정서의 흐름과 사회적 관계가 일으키는 몸의 반응을 치열하게 익히는 것, 그것이 공부다.”
공부하지 않은 ‘사랑’은 모래성이다. 아니 ‘사랑’을 호명해선 안 된다. 사랑이 어디 그렇게 쉬운 것이더냐. 사람은 어지간해선 바뀌지 않지만, 사랑은 그 사람을 달라지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을 하려면, ‘연필’로 쓰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해야 한다. 사랑은 살아가는 시공간과의 소통이다.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닌 사회적인 사건사고! 더 넓은 세계로 입문하는 통로. “사랑은 궁극적으로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행위”(p.219)이며, 사랑은 그래서, 어떤 시대적 기준을 들이대도, 불온하다. 모든 것을 바꾸기 때문이다. 사랑이, 혁명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유다.
부디 당신의 사랑이, 연애가 당신의 삶과 유리되지 않길 바란다. 연애한다고 친구를 끊고, 사회적 관계망을 좁히는 것은, 연애가 아니다. “사랑의 능력에서 핵심은 사랑과 삶이 맺는 관계에 있다.”(p.260)
그리하여, 반복한다. 사랑에도 공부는 꼭 필요하다. 나는 사랑 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것이 망라돼 있다고 본다. 그래서 좀 과장하자면, 우리가 배우는 것에 ‘사랑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과목이나 학과를 만들어서 삶을 유린하지 말고, ‘사랑학과’를 만들어라. 물론 고 선생이 학과장을 맡아주셔야겠다.
고 선생의 일갈로 끝맺겠다. “흔히 연애가 시작되면,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릴없이 유원지를 헤매거나 한다. 한마디로 온통 소비를 통해서만 사랑을 확인하려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힘으로 일어선 자 힘으로 망한다고, 소비로 맺어진 연애는 반드시 소비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사랑만큼 소중한 감정도 없지만, 사랑만큼 부서지기 쉬운 감정도 없다. 10년 이상을 한 이불 밑에서 알콩달콩 살던 부부도 순식간에 파국을 맞이하곤 하는데, 하물며 처녀총각의 연애야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함께 책을 읽으면서 데이트를 하면 돈도 덜 들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높아진다. 또 책을 읽으면 주고받을 이야기도 자연 많아진다. 그러면 말하는 능력, 서사적 힘도 절로 붙게 된다. 일석삼조! 아니 사조!”(p.208)
이런 물병자리 하곤! 내추럴 본 쿨 가이니, 안드로이드니, 럭비공이니, 덧붙여 오덕후에 히키코모리, 동성애자라고 드리블 하다가 신인류 신상이란다. 하하. 별자리 운세를 힐깃 보다가 쿡쿡 웃어버린 물병자리 이야기.
키워드 : 물병자리는 '개밥에 도토리'라기보다는 '개밥에 떨어진 플라스틱 조각'이다. 개밥과 도토리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는, 이 물병자리 인간들과 보통 인간들의 머나 먼 간격을 설명할 수 없다. 별자리 왕국의 'B형 남자'들이며, 인간의 자궁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창조된 '내추럴 본 쿨 가이'들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라서, 결과적으로 인간적이지 않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 같기도 하다. 그는 모든 사람의 예상을 럭비공 튀듯 비껴나간다.
연애지능 : 물병자리는 원래 별종(그래도 말종은 아니란다) 집합소다. 상당수는 <뷰티 & 긱>에 나올 법한 엇박자 기질의 '폭탄남'들이고, 아니면 폐쇄적인 오덕후 내지는 히키코모리들이며, 좀 괜찮다 싶으면 동성애 쪽이다. 하지만 이 세 종류가 아닌 물병자리라면, 단연 최고다! 그는 지적이며 친절하고, 권위적이거나 독선적이지 않은, 원시적인 마초맨에서 가장 먼 신인류 남자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여성들이 꿈꿔온 '핫한 신상'이다.
어때? 당신이 보기엔 나랑 매칭되는 게 있어? 갖다 맞추면 아귀가 맞아떨어질만한 것도 있는데, 그렇다고 저 설명(규정?)에 구겨넣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
혈액형도 '놀이'라면 상관 없다만, 혈액형으로 한 사람을 규정 짓는 것만큼 바보짓도 없다고 보지. (야박하게 말하자면, 그건 인간에 대한 이해나 사유가 부족하다는 뜻, 아닐까. 요즘은 단순놀이도 도를 지나치는 경우를 많이 봐서.ㅋ)
별자리로 누군가를 재단하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상대적으로 별자리는 좀더 복잡하다보니, 이걸 갖고 놀이를 하는 경우는 현격히 떨어지는 것 같아. 생각해봐. 혈액형을 묻는 경우는 허다해도, 별자리를 묻는 경우는 그닥 없지 않아?
어쩌다 이런 '별자리 운세'를 볼 때가 있는데, 기억나는 건 거의 없어. 같은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건데, 이만하면 정말 히트작이지.
한번더 생각하면 웃기잖아. 세상엔 숱한, 물병가게의 물병만큼 많은 물병자리가 존재할텐데, 그 사람들이 모두 같다고 생각해 봐. 그런 똑같은 사람들, 획일적이고 일률적인 그 사람들이 있다고? 어우, 토 나올 것 같아. 끔찍하고, 재미도 없어. 물병자리 사람들이 한결 같으면 어찌 되겠어! 그렇담, 에이브러험 링컨, 찰스 다윈, 예니 마르크스와 나는 같은 족속인거야? 나야 좋지만, 그 사람들이야 어디 좋겠어.^^;;;
그리고 혹시, 어떤 별자리에서 태어났는데, 등록할 때는 다른 별자리로 했다고 쳐봐. 그럼 그건 뭐가 돼? 궁금궁금.
그런데, 대체 이런 스테레오 타입화된 혈액형이나 별자리 이야기는, 누가 어떻게 만든 걸까. 쩝, 궁금증 천국이군.ㅋ
연말이다. 그게 핑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한 잔 술에 마음도 나눈다. 그리고 서로의 근황을 묻고 빛바랜 추억도 끄집어낸다. 한 살 더 먹는다는 비련(?)까지 곁들여서. 8명 중에서 나와 다른 녀석, 두 사람만 싱글이었다.
다들 결혼을 했고, 아이(들)도 있다. 가업을 물려받아 2세 수업을 쌓는 녀석도 있지만, 거개가 가장 보통의 직장인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이른바 ‘정상성’의 범주를 관통한 존재들. 학교 졸업 뒤 직장 구하고 결혼을 치른 뒤 아이를 기르는 궤도. 어떤 나이에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틀을 충분히 잘 따라간. 그들은 늘 내게 묻는다. ‘결혼’ 언제 하냐고. 뭐, 별로 해 줄 말은 없다. 나도 모르니까. ^^;
그렇게 한창 주거니받거니 떠들다보면, 아이(들)과 아내 등 가족 얘기로도 화제가 휙 돌아가 있다. 자연스러운 경로다. 그들은 ‘가장’이고, 우리의 관심사는 예전과 달라졌다. 온전하게 우리 자신에게 집중했던 그때와는 완전 다르다.
그걸 못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세월의 흐름은, 나이듦은 분명 그런 것이니까. 어깨 너머로, 간접 경험을 통해,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로 나도, 어설프게나마 그 이야기에 끼어든다. 분명, 니가 뭘 아냐는 타박을 들을 것이 확실해도.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해서, 그것도 5년을 훌쩍 넘은 한 녀석이었다. 어떤 화제를 씹는 와중이었는데, 자신의 이야길 꺼낸다. 심각한 얘기의 와중도 아니었다. 녀석도 심드렁하게 얘기한다. 술도 걸쳤고 집도 머니까, 집에 안 들어가도 된단다. 아내에게 혼나지 않냐? 물었다. 아내가 ‘대놓고’ 그랬단다. “술 먹고 집에 안 들어오고 뭘 해도 좋으니, 돈만 많이 벌어와.” 말하자면, ‘돈 버는 기계’. 녀석도 순순히 인정한다.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눈치다. 그냥 그런 수순이 당연하다는 듯.
글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겠지만, 정말 의젓했다. 옆에서 다른 녀석들도 한마디씩 거든다. 역시나 당연하다는 듯. “정 때문에 살지, 뭐.” “아이만 없어봐라, 왜 계속 같이 사냐.” “그래도 내 와이프는 대놓고 그런 얘기는 안 해.” 그리고 녀석들, 주제넘게 충고도 한다. “사랑? 살아봐라.” “(결혼) 하려면 빨리 하든가, 아니면 하지 마” 등등.
숫제 그들은 자신이 아이 혹은 가정이라는 아름다운 동화에 현혹돼 유폐된 왕자처럼 말한다. 나의 제수씨들도 대상만 바꿔 똑같은 얘길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와 가정이라는 아름다운 동화의 꼬드김에 넘어가 자신의 진짜 생에서 실종됐다고.
사실 하나도 안 놀랍다. 사랑했다. 결혼했다. 애를 낳았다. 정 때문에 산다. 뭐, 귀에 딱지 얹히도록 듣던 레퍼토리다. 고만고만한 궤적의 널리고 나자빠진 쳇바퀴. 하긴 그들도 그걸 알면서도 바퀴에 올라탄 것 아닌가. “거의 모든 부부가 그렇게 서로의 어떤 면은 보여주지 않은 채, 서로 알아주지 못한 채,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물론 그렇지 않은 부부도 있지만, 그건 일종의 희귀종, 천연기념물이 아닐까 생각도 했다. 친구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아직 나는 돈 버는 기계는 아니구나, 하는 일말의 안도감이 감쌌을 뿐. 우리는 그렇게 술을 마셨다. 한 해를 들이켰다. 2008년도 그렇게 가고 있었다. 아마, 나는 내년에도 궁상을 떨게 될 것 같다.
슬라브적 감성이란 (제 느낌으론) 애수, 낭만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음악의 경우 애수를 자아내는 선율이 주가 된다고 할까요. 러시아 작곡가보다는 보헤미안 작곡가들(예.드보르작)에서 더 뚜렷하긴 하지만 러시아도 슬라브는 슬라브니까요^^;; 라흐마니노프는 낭만파의 거의 마지막 세대 작곡가로 난해한 현대음악에 좌절한 저같은 보수적인 청중한테 계속 사랑받는 듯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8l37utZxMQ
위의 링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것이고 시작부분만 들으셔도 아 이건 슬라브적이야 싶은 곡이라서 음질은 형편없으나 추천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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