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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근대문학의 개척자인 가난한 지폐모델,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5.2~1896.11.23) 

일본의 지폐 5000엔권에 보면 한 여성의 초상이 있습니다.
2004년에 새로 등장했는데, 이 여성에겐 놀라운 점들이 있었죠.
일본 제국대학 총장을 지낸 니토베 이나조를 대신했다는 것도 그랬지만,
불과 14개월의 집필활동으로 일본 근대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남겼으며,
24세에 요절했다는 점 등에서 화제가 됐어요.

그랬습니다. 당시 일본에선 지폐 등장을 계기로 '이치요 붐'이 일었어요.
각종 서적은 물론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그의 생이 그만큼 파란만장했기 때문이라죠. 히구치 이치요가 그 주인공입니다.
'히구치 나쓰'라는 본명을 갖고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배움에 대한 열의가 강해 와카(和歌), 고전, 서예를 비롯해 근대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기간도 영원할 순 없는 법인가 봅니다.
조숙하고 풍부한 재능을 가진 이치요였지만, 사춘기 무렵 잇달아 닥친 재앙이 그의 생을 억누르기 시작했어요.
15세 때 큰 오빠를 시작으로 2년 뒤 아버지를 떠나보냅니다.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고 어머니와 동생을 돌봐야했던 그는,
바느질과 세탁 등의 허드렛일로 당장의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치요는 그러다, 
소설출판업에 종사하던 급우의 성공을 보고 글쓰기를 생계수단 삼기로 마음먹었죠.
이윽고 1891년 도쿄 아사히신문의 기자 겸 전속작가인 나카라이 도스이의 제자가 돼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의 지도로 소설을 발표하고 문학잡지에 기고했으며, 문인들과도 교류를 시작했고요. 몰락한 가문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은 소설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였습니다.

여담이지만,
이치요의 스승이었던 도스이는 유일한 연인이자 첫사랑으로 알려져 있어요.
19세 소녀는 31세의 사별남에게 스승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되지만,
그가 다른 여성을 임신시켰다고 오해하면서 절교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절교선언은 마음과는 무관하게 이뤄진 것이었어요.
유명 작가가 된 이치요에게 문학 동료, 출판사 후계자 등이 구애했지만,
그는 차갑게 뿌리쳤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마음만 간직했습니다.
이치요의 일기가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지요.
심장이 멎을 때까지 도스이를 사랑했던 그 마음.

어쨌든 문단에 등단했지만, 생활고는 쉬이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생활고 타개를 위해 유곽 근처에 잡화, 과자 등을 파는 구멍가게를 열었지만,
이 역시도 오래가지 못하고 경영난 때문에 문을 닫았고요.
23살 되던 1895년, 가난에 폐결핵까지 그를 덮쳤지만,
이때의 구멍가게 경험을 바탕으로 『키재기』와 같은 대표작을 썼지요.
이어 죽음에 도달하기 전까지 『섣달 그믐날』『흐린 강』『13야』『갈림길』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시기를 '기적의 14개월'이라고 부릅니다.

이치요의 소설은 산업화 속에 사라져가는 전통사회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옛 도쿄의 시타마치(서민들이 사는 상공업지대)에 사는 여성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것으로도 유명하고요.
서민층의 정서에 밀착한 그의 작품들은,
가난 때문에 고통 받았던 그의 생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울러 그는 독특한 고전적인 산문체로,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의 애수 등 낭만주의적 색채의 문학세계를 일궜습니다.
15세부터 숨을 거두기 전까지 쓰인 그의 일기도 『신록의 그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근대문학의 걸작으로 일컬어지고 있어요.

한편으로 참으로 아이러니한 면도 있어요.
생활고 때문에 돈에 한이 맺혔을 법도 한 이치요가 지폐의 모델이 되다니요.
그런 속에서도 만개한 그의 문학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나는가 봅니다.

(※참고자료 : 재팬라이프(http://tojapan.co.kr/life/person.asp), 두산백과사전,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in, 숙명여자대학교도서관 세계여성문학관 사이트, 민단신문)

[위민넷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잉글랜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여성, 메리 1세(Mary I) 
(1516.2.18~1558.11.17)


앞서 잠깐 언급한 바 있습니다.
대영제국의 첫 막을 열었던 엘리자베스 1세를 다루면서,
그의 이름이 스쳐지나갔는데요.
메리1세.
엘리자베스1세의 전임이자, 잉글랜드 및 아일랜드 왕국의 여왕입니다.
재위기간은 1553년 7월19일부터 1558년 11월17일까지로 오래지 않습니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16세기에 남성 아닌 여성들이 연거푸 영국을 다스린 지배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메리1세의 본명은 메리 튜더(Mary Tudor)로,
아버지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은 정략결혼을 했으나 금실은 좋았다고 전해지는데요,
헨리8세가 아들을 내심 바랐던데 반해 캐서린이 메리를 낳고 계속 유산을 거듭하자,
결국 헨리8세는 가톨릭 대신 성공회를 만들면서 캐서린과 헤어지고 앤 볼린과 결혼한 역사가 있습니다.  


이 같은 역사 때문에 메리1세의 성장기도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헨리8세는 딸이라는 이유로 메리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고,
앤 볼린과 결혼하면서 딸 엘리자베스가 태어나자,
왕위 계승권도 메리에게서 빼앗아 그를 서녀로 강등시켰습니다.
그러다 헨리8세의 여섯 번째 오아비인 캐서린 파아에 의해 공주로서 신분이 복권됐지요.

메리1세의 별명은 섬뜩합니다. '블러디 메리(Bloody Mary, 피의 메리)'.
혹시 칵테일 이름으로 기억하실 분도 있겠지만,
이 칵테일 이름은 지금 얘기하는 메리1세에서 유래된 것이 맞습니다.
이 별칭은 헨리8세가 앤 볼린과의 결혼을 위해 만든 성공회와 개신교를 탄압하고, 가톨릭 복권정책을 편 데서 붙여진 것이죠.
어머니를 따라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성공회 성직자와 개신교 신자들 300여명을 처형했다고 전해집니다.

메리1세는 어쨌든 잉글랜드 최초의 여성 왕입니다.
한때 공주이자 왕위계승자였던 그가 아버지의 변덕(?)으로 신분이 불안정하기도 했지만,
이전에 남성들만 올랐던 왕위를 스스로의 힘으로 올랐던 아주 당찬 여성이었죠.
(신분 변동이 몇 번 있었는데, 한때 웨일스 공작의 지위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다.)

이복 남동생이었던 에드워드 6세가 1553년 15살에 요절하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자신의 아들과 결혼한 제인 그레이를 새 군주로 옹립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귀족과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켰죠.
결국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메리가 오면서 봉기는 가라앉고,
그는 스스로 왕위 즉위를 선언했습니다.

메리는 즉위하면서 자신의 결혼상대로,
신성 로마제국의 카를5세의 아들이자 11살 어린 펠리페를 선택했습니다.
에스파냐 왕자와의 결혼에 반대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이를 진압하고 펠리페와 결혼하면서 외교 강화와 영토 확장 등을 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펠리페가 본국에 귀환해 국왕의 자리에 오르는 등 두 사람은 오래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프랑스와 에스파냐 간 전쟁에 끼어들면서 대륙에 가지고 있던 영토였던 칼레를 잃게 되는 등 왕권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메리는 아이를 바랐지만 임신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몇 번의 봉기까지 겪으면서 지쳐갔습니다.

결국 난소 종양에 걸리고 만 메리는,
자신의 어머니를 쫒아낸 이의 딸이자 이복여동생이며, 평생 미워했던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1세)를 죽기 하루 전 후계자로 임명했습니다.
미워도 어쩔 수 없던 이 선택이, 대영제국의 시작을 알린 닻을 올린 셈이 됐다고나 할까요.
재밌는 건, 메리의 기일은 200여년 동안 압정에서 해방된 축제일로서 기념됐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 위키백과 )

[위민넷 기고]

 

[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위민넷] - 해가 지지 않는 영원한 잉글랜드의 왕, 엘리자베스 1세

Posted by 스윙보이

여성의 몸을 해방시킨 선구자, 마가렛 생거(Margaret Sanger)
(1883.9.14~1966.9.6)
아이 낳을 권리, 낳지 않을 권리! 여성의 몸을 해방하라!!


여성의 몸은 당연히 여성 자신의 것입니다.
피임은 여성 자신의 몸을 통제, 출산력을 조정할 수 있는 권리이며,
세계보건기구(WHO),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에서도 생식의 권리, 원하지 않은 아이를 출산하지 않을 권리, 피임선택권의 보장을 강조하고 있죠.

그런데 우습게도, 이런 당연한 논리나 원칙이 통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회나 가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생산과 육아를 통제하고,
이상하고 해괴망측한 의무 혹은 부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한마디로 여성의 몸은 온전히 여성의 것이 아니었던 거죠.
자녀 생산과 육아를 위해 여성의 몸을 식민지로 전락시킨 코미디 같은 시대.

그런 시절에, 이런 주장을 펼친 여성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스스로 자기 육체의 완전한 주인이 되어야 하고, 원하는 아이가 축복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
그는, 마가렛 생거입니다.
여성의 피임할 권리와 인간의 권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
그의 노력이, 여성의 몸을 여성에게 돌려준 것이 아닐까도 싶어요. 


마가렛의 사회운동가로서의 기질은 일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급진적 자유주의자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지성과 예술적 자질을 갖추고 위트와 매력이 넘친 아버지를 닮은 까닭인지,
그는 호기심이 많고 연애와 파티를 즐기는 한편,
토론과 논의·대화를 좋아했으며,
학교에서는 리더역할을 맡은 활달한 학생이었습니다.
반면 가톨릭 신자로 자상하고 가정적이었던 어머니에게선,
가정의 소중함을 새긴 듯 싶어요.
그의 집안에는 무려 11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가 16살 되던 해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어려서부터 여성의 자신의 몸에 대한 주인일 수 없는 현실을 접했던 마가렛은,
아버지와의 다툼으로 잠시 집을 나가면서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던 그는,
간호사가 좀더 보람되고 만족한 삶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나 봐요.
그리고 생각대로 간호사는 흥분과 극적인 사건들로 충만해 있었고,
1900년 건축기사인 윌리엄 생거와 결혼했고 세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다 몸이 쇠약해져 시골 요양원에서 있었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활달한 마가렛의 성정에 안정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는지,
뉴욕에 다시 돌아와 간호사일과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상태가 나아졌다죠.
남편과 함께 노동운동가 빌 헤이우드,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기자 존 리드, 작가 업톤 싱클레어 등의 진보주의자들이 펼친 토론의 장에 참석했고,
당시 노동운동에도 적극 힘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마가렛은 그 사회변혁운동에 여성들의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 한 트럭운전사의 아내가 아이를 유산하려다 제대로 된 방법이 없는 통에 사망하자, 이에 깊은 슬픔을 품었던 그는 산아제한 운동에 직접 뛰어들게 됩니다.
물론 산아제한을 여성의 인권이란 관점에서 해석한 최초의 시도였던 거고요.
1916년 에델 바이네, 페니아 민델과 함께,
브룩클린에 산아제한상담소를 최초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당시 이는 불법이었어요. 1873년에 제정된 컴스톡법은 산아제한에 대한 어떤 정보도 유포할 수 없도록 하고 있었죠.
이 상담소는 십 여일 후 강제로 폐쇄 당했고, 30일간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마가렛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불편부당한 현실 때문에라도.
19세기에 이미 피임기구와 피임약이 발명되고,
산업혁명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에 대한 대책(피임 등)이 강구되긴 했으나, 이는 유한계급에 한한 것이었고 일반 대중은 소외됐던 현실.
가난한 집은 성교육은커녕 아이를 임신하면 무조건 낳아야만 했어요. 반면 부잣집은 성교육은 물론 피임법도 배우는 등 돈과 힘으로 법의 테두리 밖에 있었죠.
그는 잡지 등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육체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억제할 권리, 즉 생명을 생성시키거나 그 생성을 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는 노동자들이 노동자답게 살기 위해선, 노동자 스스로가 '아이 낳기'를 결정해야 하고, 피임법을 가르쳐 주는 일은 '부도덕한 일'이 아니며,
그것을 '불법'으로 못 박는 법이야말로 '나쁜 법'이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신념은 그랬습니다. 사람답게 살 권리, 여성답게 살 권리, 어머니가 될 권리, 아이답게 살아갈 권리 등은,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누려야 한다고.

물론 이런 마가렛의 외침은 당대 주류로부터 생뚱맞은 것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교회, 주정부와 검찰과 경찰 등의 권력은 그에게, '미친년' '마녀' '악마' '여성해방을 뒷걸음치게 하는 못된 년' 등의 악담을 퍼부어댔고요.

이 같은 갖은 탄압이 있었지만, 마가렛의 노력은 결실을 맺게 되죠.
1921년 미국산아제한연맹이 만들어졌고,
2년 후엔 직접 '산아제한 의료연구소'를 설립해 피임보급에 나섰습니다.또 1927년 제1차 세계인구문제회의(제네바)에선 국제산아제한기구가 최초 결성됐어요.
이즈음 보수적이던 의학계도 의사에게 피임처방권을 부여하는 '의사법'입법안 통과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1939년 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죠.
2년 후 마가렛과 미국가족계획협회는 새로운 피임법을 개발하고 피임약을 보급하는데도 힘을 쏟게 됩니다.


다만 빈곤과 다산이 모자 사망률을 높이고,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산아제한 필요성을 강조했던 마가렛도, 가족계획운동으로의 변화과정에서 후진국의 빈곤 원인을 인구문제로 단순 치환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가 노동자 윌리엄 생거와 이혼하고 부호와 결혼한 뒤,
어느 정도 보수화된 탓이 아닐까하는 분석도 있어요.
미국가족계획협회는 1960년대 낙태법 수정안이 사회문제화하자 반대편에 서기도 했어요. 통치이념의 하위개념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마가렛의 초창기 운동성 회복을 촉구하는 성명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피임조차 마음대로 못하고 여성의 몸이 억압받던 암흑기를 뚫었던 것도,
피임 등을 통해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도,
마가렛 생거의 확고한 신념과 끈질긴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어요.

누군가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일류 역사상 남자들로부터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여자이며, 살아생전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참고자료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마가렛 생거의 이유있는 반항』(버지니아 코니 지음/안정숙 옮김/형성사 펴냄), 『20세기 사람들』(한겨레신문 문화부 지음/한겨레신문사 펴냄))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만나다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프랑스혁명의 배후, 잔 마리 플리퐁(롤랑)(Jeanne-Marie Phlipon)
(1754.3.17~1793.11.8)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 단두대에 스러진 급진주의자


1789년 일어난 프랑스 혁명.
절대주의 왕정을 폐기하고 개인(시민)의 권리를 고양한 시민혁명이었습니다.
문명에 대한 비판과 인민주권론 등이 혁명의 기초가 됐으며,
인간의 자유․평등, 국민주권, 법 앞의 평등, 사상의 자유와 인권선언 등을 명시함으로써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을 다진 일대 사건이었죠.

이 혁명의 대열에 적극 동참했던 이 사람, 잔 마리 플리퐁(별칭 마농 플리퐁).
그는 프랑스혁명의 한 주역이자 실세였습니다.
그는 부유한 제판공 아버지를 둔 덕에, 다양한 책과 사상을 접하면서 자랐어요.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18세기 철학자․사상가들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죠.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는 1780년 리옹의 산업검찰관이었던,
훗날 혁명기에 내무장관을 지낸 장 마리 롤랑과 결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정치적인 동지였으며, 혁명이 터지자 정치운동에 적극 가담합니다.

정치에 강력한 집념을 가졌던 플리퐁은 당초 급진 민주주의자였습니다.
자코뱅당 지도자이자 파리코뮌 대표로 추대됐던 로베스피에르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사상적 교류를 했었죠. 혁명 전반기 입법의회 좌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식의 차이 등으로 로베스피에르와 멀어지게 되고,
1791년 자코뱅당에서 떨어져 나온 온건 부르지아 민주주의자들(훗날 지롱드당이라 불린)의 일원이 됐습니다.
그는 이때,
자신의 집을 이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면서 자연히 살롱을 열게 됐지요.

혁명의 중반기까지 지롱드당은 혁명을 주도했고,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1792년 롤랑이 내무부 장관이 됐는데,
플리퐁은 남편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정도로 실세였다죠.
그의 살롱은 흡사 지롱드 당의 사령실이나 다름없었고,
"장관은 롤랑 부인(플리퐁)이지 롤랑 자신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플리퐁은 롤랑이 국왕에게 보낸 항의문의 초안을 썼는데,
결국 이 문서 때문에 롤랑은 1792년 6월 내무장관직에서 해임됐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정치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았어요.
남편을 부추겨 1792년 9월 소집된 혁명입법기구인 국민공회에서,
온건 민주주의자 조르주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를 공격했습니다.
지롱드당과 자코뱅당 사이의 틈은 점점 커졌습니다.

혁명이 진전되면서 급진적인 경향도 커졌습니다.
1793년 자코뱅당의 주장이 관철돼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플리퐁과 롤랑은 반산악파(反山岳派) 입장을 표명했는데,
자코뱅당이 실권을 잡으면서 지롱드당이 의회에서 축출되고 공포정치가 시작됐습니다.

결국 플리퐁도 같은 해 5월 자코뱅 당원들에게 체포돼,
11월에 단두대에 오르고 말았습니다.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죠.
"오, 자유여, 너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악이 저질러지고 있는가."
노르망디로 피신 중이던 그의 남편은,
플리퐁의 처형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네요.
아내의 후광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최후였을까요.

플리퐁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고 엇갈리기도 하지만,
그가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이상이나 재기는,
당시의 시민혁명을 추동한 하나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참고자료 :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윌리엄 L.랭어 지음/박상익 번역/푸른역사 펴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말하다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은둔 속에 핀 예술혼,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1830~1886년)

그리고 1775편의 시


살아생전,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1800여 편에 달하는 시는 그저 혼자 내뱉은 독백 같았습니다.
사랑, 이별, 죽음, 영혼, 천국, 자연 등을 다룬 시는,
은둔생활 속에서 핀 꽃이었나 봐요.

그는 내내 고독했지만,
그 고독은 그의 모든 것이었던 시를 잉태한 동력이었습니다.

시와 고독을 평생 친구로 곁에 두고 지냈던 이 사람,
영문학사상 최고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입니다.
이상하고 의외의 일이죠?
그가 살아서는 별 볼 일 없는 시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에요.
하긴 별 볼 일 없다는 것도,
그의 시를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까닭도 있었겠지요.


에밀리를 얘기할 때, 가장 흔히 따르는 것은, 평생 독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독신으로 살았다는 것이 그닥 부각돼야 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을 인류보편의 것으로 인식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독신생활하면서 시 짓기에만 몰두하다시피 한 그의 행보는,
호사가가 아니더라도 입방아에 올릴 수 있는 호기심거리가 될 수 있었겠죠.
마치 시와 결혼한 듯,
자신만의 공간에서 치열한 문학적 열정을 불태운 그였기에,
보통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의 궤적은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에밀리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엠허스트에서,
변호사 아버지 에드워드 디킨슨과 에밀리 노크로스의 둘째 딸로 세상과 접촉했습니다.
잘 보시면, 그의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에서 하나씩 딴 것이죠.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 신학교에도 진학했지만,
그는 보수적인 청교도 신앙에 그닥 흥미를 느낀 것 같진 않습니다.
청교도 정신부활을 위한 '영적대각성운동'이 있었을 때도,
그는 되레 청교도 신앙과 종교적 구원에 대한 회의를 숨기지 않았으니까요.

에밀리를 에워싸고 있던 종교가 시작(詩作)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 반면,
한 만남이 그를, 그의 시상(詩想)을 일깨웠습니다.
설핏 짐작 가시죠?
맞아요. 역시나 사랑.
독신이었다지만, 설마 그가 사랑 한번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진 않으셨죠?
아버지가 하원으로 당선돼,
그의 가족은 1854년부터 이듬해까지 워싱턴에서 살았는데,
필라델피아의 한 장로교회에서 만난 찰스 워즈워스 목사를 만났습니다.
찰스 목사는 스승과도 같았습니다.
문학적인 설교와 칼뱅주의에 입각한 그의 웅변이,
에밀리의 머리와 마음을 흔들었던 거죠.
그것은 하나의 지적도전과도 같았고, 시작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편지를 주고받았고,
워싱턴을 떠나 다시 엠허스트로 돌아간 에밀리를 찰스 목사가 찾기도 했습니다. 에밀리는 여러 글에서 그를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적기도 했어요.

그러나 역시나 장벽은 존재했죠.
찰스 목사는 기혼자였고, 그가 1861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로 옮기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났어요.
에밀리는 그를 정녕, 사랑했나봅니다.
친구부부와 동생에게 실연의 아픔을 토로했고, 더더욱 시에 매달렸습니다.
사랑의 아픔 때문인지 시는 봇물처럼 흘러넘쳤고,
좌절된 사랑으로 둘 곳 없는 마음은 작품 속에서 영적인 결합을 이뤘습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였을까요.
실연을 겪고 난 뒤, 그러니까 30세 이후 은둔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흰 옷만 입고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뉴잉글랜드의 수녀'라는 별명도 그래서 지어졌습니다.
시작도 계속했으나, 그는 출판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생전에 불과 7편의 시만 발표했을 정도로,
그는 철저히 고립된 속에서 시와 함께 했어요.

물론, 에밀리에게 사랑이 한번만 거쳐 간 것은 아니지만,
그는 독신생활을 청산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아내를 잃고 홀로 된 로드 판사와도,
사랑을 나눴습니다.
두 사람의 서신에서도 서로 사랑했음이 충분히 드러나 있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독신생활을 버리지 못해,
그의 청혼을 거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요.
그러나 1884년 로드 판사가 죽자,
실의에 빠져 있던 에밀리는,
결국 건강 악화로 2년 뒤인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겪은 사랑의 아픔, 그의 전부였던 시도,
그를 더 이상 지탱시켜주지 못했나 봅니다.


에밀리가 죽은 뒤, 그의 동생이 1775편에 달하는 시를 묶어 발표했습니다.
그의 시는 1890~1945년 동안 8권의 시집으로 묶여 출판됐고,
살아생전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시들은 20세기에 와서 제대로 평가를 받았어요. 그는 겉으로 보기엔 은둔자였지요. 가사 일을 끝내고 이층 방안에서 시작에만 몰두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시피 했으니.
그러나 시와 편지를 보자면 열정적이고 재치있는 예술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엔 친밀한 언어로 생과 죽음, 영원과 자연 등에 대해 무한한 상상과 사색, 사랑과 이별을 담았습니다.
그의 예술혼은 그래서 아직도 후세인들에게 전파되고 입에 오르내리는 것 아니겠어요?

(※참고자료 : 위키백과, 국민일보)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만나다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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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부인보다 인권활동가,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1884.10.11~1962.11.7)


232년 만이자 최초입니다.
미국에 ‘앵글로색슨계’가 아닌 ‘아프리카계’ 대통령이 나온 것이.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 당선자.
그가 혼자 잘나서 그렇게 된 걸까요? 물론, 아니죠.
노예로 미국 땅을 밟은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굴곡진 역사에는,
숱한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1619년 네덜란드 해적선이 버지니아에 계약제 하인들인 아프리카인 20여명을 떨어뜨렸고,
1662년 버지니아 주정부는 노예제 법령을 공표했어요. 아프리카계 노예잔혹사의 본격 시작.
1862년 링컨 대통령이 ‘군사적 이유’로 노예 해방 선언을 했고요.
그러나 알다시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차별의 역사는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미국 흑인들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제대로 일자리도 얻고 군대도 갈 수 있게 됐습니다.
한 사람의 노력이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엘리너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이에요.
당시 엘리너가 열성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을 위해 남편을 설득했고,아프리카계 미국인 옹호정책을 촉구한 덕입니다.
그를 가리키는 수사 중의 하나가, ‘흑인을 진정으로 사랑한 백인’이었을 정도였죠.
정작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엘레나의 이런 행동을 못마땅해 했다고 전해지지만요.
그래도 엘리너의 노력이 큰 힘을 발휘한 덕분인지,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민주당으로 돌아선 때가,
바로 루스벨트 시대였고 프랭클린은 3선이나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오늘날,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는 엘리너 루스벨트의 몫도 빠질 수 없다고.
그는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고 호감 가는 ‘퍼스트레이디’로 꼽히지만,
단순히 대통령의 부인으로만 기억될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는 소외받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노력한 활동가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지금은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더 가난하고 자리도 낮고 더 무식할지 모르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 지금과 반대로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더 나아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보다 좀 낮아 보인다고 우쭐대거나 깔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든지 남을 평등하게 대접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여성의 힘을 믿었죠. 그 역시 그런 여성의 힘을 충분히 발휘했고.
역시 이말. “여성은 티백과 같다. 뜨거운 물에 넣기 전에는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그런데, 엘리너가 처음부터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은 아니었어요.
그는 1884년 미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친척이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는 그가 뻐드렁니에 예쁘지 않다며 그를 창피해 했다고 전해집니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과 애정 결핍이 생길만 했죠.
다만 아버지는 그에게 더 없이 다정하고 사랑을 쏟아줬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일찍 세상을 뜨면서 집안은 몰락했습니다.
의존적일 정도로 모든 사람에게 공손하고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그였지만,
11세의 나이로 고아가 되자,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그는 끼니를 위해 중노동을 하며 빈곤을 경험했고,
돈을 ‘땀과 눈물의 종잇조각(engraved paper)’으로 부를 정도로 악착 같이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아마, 이때의 경험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식을 심어줬지 싶은데요,
우여곡절 끝에 영국의 앨런스우드에 들어가 수베스터 선생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갖게 됐습니다. 몸으로 겪은 체험에 체계적인 지식과 지혜가 덧붙여진 거죠.

우울함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여성이,
꿋꿋하고 용기 있는 여성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과도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엘리너는 늘 밝은 표정을 지었고, 낙관적인 세계관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다 21세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결혼했고,
프랭클린의 동반자이자, 후원자로서, 또는 사회활동가로서 역할을 다했습니다.

엘리너는 남편이 39세에 다리를 못 쓰게 된 이후에도 몸과 마음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대통령 남편을 대신해 6500㎞를 다니며 대공황 극복을 위한 뉴딜정책의 진척 상황을 점검하는, 대통령 부인으로서의 역할을 한 반면,
대통령의 정책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칼럼을 통해 신랄한 비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지금-여기의 대통령 부인과는 완전 딴판이죠?
무엇보다 그는 빈민이나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차별 받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서 남편을 끈질기게 설득했어요. 빈민 등의 문제에 있어 일부러 물의를 일으키는 발언을 해 사람들이 그들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도록 했다고도 하네요. 
프랭클린도 그런 엘리너에 대해 종종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여자라는 것을 세상도 다 알잖아.”

엘리너는 또한 낙관적인 세계관과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프랭클린과의 사이에 여섯 자녀가 있었는데, 한 아이가 눈앞에서 사망하는 비극을 겪고서도 그는 위로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다섯이나 있는 걸.”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된 남편이 농담 삼아 “나를 아직도 사랑하오?”라고 묻자,
웃으면서 엘리너 왈, “어디 내가 당신의 다리만 사랑했나요?”

엘리너 루스벨트는 그렇게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소극적인 대통령 부인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에도 나서 ‘공동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였고요.
소외받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올바른 일에 신념을 굽히지 않는 그이였기에, 최초의 여성 유엔 인권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끊임없는 연설과 회의를 소화하는 한편 칼럼과 편지를 계속 쓰면서 “내 생애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행복한 선언을 했다지요.

엘리너 루스벨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인생 이야기가 가치 있다면 그것은 재주 없는 한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듯한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의지 하나로 어려움과 싸워 결국 이겨 냈기 때문이다.”
어때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죠?

다시금 닥치는 것이 아닌가 심히 우려스런 공황의 계절.
대공황 시대를 극복한 훌륭한 여성의 덕을 입은 아프리카계 미국 대통령은 어떻게 위기를 돌파할까요.
더불어, 이제 엘리너와 같은 훌륭한 여성 대통령도 나와야 될 때가 분명 됐습니다.  아 물론, 여성의 탈을 쓰고 있는 유사남성주의자가 대통령이 되는 건 역시 끔찍하고요(박근혜 같은).
평화보다 전쟁, 커피보다 석유, 환경보다 토건에 목매다는 사내들은 이제 삼진아웃 시키거나 안드로메다로 보내는 건 어때요?

(※참고자료 : 『엘리너 루스벨트』(메리 윙젯 지음, 성우 펴냄), 엠파스 실시간 지식,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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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5 - [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 오늘, 나는 아프리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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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을 위무한 작가의 힘, 마가렛 미첼
(Margaret Munnerlyn Mitchell, 1900.11.8~1949.8.16)



스칼렛 오하라, 레트 버틀러, 비비안 리, 클라크 게이블, 남북전쟁,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이만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 있으시죠?
딩동~♪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맞추셨네요.
소설이든, 영화든, 아니면 다른 통로를 통해서든,
쉽게 잊혀 지지 않을 작품입니다.


그런데, 자칫했으면 이 작품과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처음엔 어느 누구도, 1037페이지 분량의 이 작품을 출판하려 들지 않았거든요.
이 거대한 대서사시를 잉태한 작가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었나 봐요.
때는 바야흐로,
1929년 대공황 발발 이후 불황의 만성화로 침체기에 있던 1930년대.

모두가 위험을 회피하려는 시기,
작가 지망생의 책을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죠.

그렇다고 힘들게 원고를 집필한 마가렛 미첼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원고 뭉치를 들고 이 출판사, 저 출판사를 전전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친 원고도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 질 정도였다죠.

그러던 어느 날, 역시나 인연은 우연처럼 다가오기도 하는 법.
미첼이 살던 애틀랜타의 지방신문에 이런 단신이 실렸습니다.
"뉴욕 맥밀란 출판사 사장 레이슨이 애틀랜타에 왔다가 기차를 타고 돌아간다."
기차역으로 바람처럼 달려가는 미첼.
다행히도 레이슨이 탄 기차가 떠나기 전이었고,
기차에 오르던 그를 잡고 말합니다.

"제가 쓴 소설입니다. 한 번만 읽어주세요. 읽어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바람과 함께 사라질 뻔한 레이슨을 만났으니,
바람과 함께 사라질 것 같던 소설이 바로 구원받았냐고요?

천만에, 아직 진행 중입니다.
결말은 대충 짐작이 가겠지만, 미첼의 끈질긴 구애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자, 다시 기차 안으로 들어가 보죠. 
볼 일 마치고, 돌아가는 피곤한 여정,
그 엄청난 페이지의 원고에 쉽게 눈이 가겠습니까.

레이슨은 어쩌다 원고를 받긴 했지만,
선반 한 켠에 이를 던져놓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기차를 타고 두 시간가량 지난 즈음,
승무원이 전보 한 장을 전해줍니다. 이렇게 씌여져 있습니다.
"레이슨 사장님, 원고 읽어보셨어요? 아직 안 읽으셨다면 첫 페이지라도 읽어주세요."
잠시 놀랐지만, 원고를 힐긋 쳐다보기만 했을 뿐, 역시나 관심 밖.
다시 뉴욕을 향해 시간과 기차가 흐를 즈음,
같은 내용의 전보가 그의 손에 놓이고,

그때도 시큰둥했으나, 다시 세 번째 전보가 도달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요. 귀찮아서 꿈쩍도 않던 그의 마음이 슬쩍 움직입니다.
'아니 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았길래 이토록 끈질기게 야단법석을 떨지?'
마침내 원고에 손을 갖다 댄 레이슨.
헉, 레이슨은 눈을 떼지 못하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고,
기차가 뉴욕에 도착, 다른 사람이 짐을 내릴 때도 그는 섣불리 일어나질 못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세상과 만나게 된 시발점은 이랬습니다.

또한 그렇습니다.
미첼은 원고를 레이슨에게 건네고는 그냥 집으로 가지 않았던 거죠.

우체국으로 향한 그는 거기에 머물며 시차를 두고 전보를 발송한 겁니다.
그의 열정과 끈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세기의 명작을 전파한 셈이랄까요.
레이슨은 작품에 감동 먹었고,
맥밀란 출판사는 이 책에 대해 자신 있었나 봅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5000달러의 선전비를 들여 초판 2만5000부를 찍었는데,
1936년 출판 첫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100만부 이상 독자와 만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서평. "미국 소설 가운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와 가독성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소설은 없다. 그야말로 최상급 소설이다."

또 이듬해는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지금도 해마다 20만 부 이상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됐죠.

아울러 세계 60여 개국 언어로 번역이 돼 국제적인 소설로 명성을 날렸고,
영화로도 제작돼 작품상을 비롯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한 동시에 엄청난 흥행과 영향력을 보여줬지요.
한편으로 당시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소설 주인공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였을 정도로,

소설과 영화의 인기는 대단함 그 자체였답니다. 
기차역에서의 그 짧은 인연이 만든 이 엄청난 파급효과. 
어쩌면 생의 한 순간, 병적인 유머센스가 발현된 것이 아닐까도 싶어요.


그렇다면, 그토록 강한 열정과 끈기를 지닌 미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변호사이자 역사학자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역사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군으로 참전한 외할아버지의 영향 등으로 남북전쟁에 대한 일화를 들으면서 성장했지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 남북전쟁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죠?

물론 집필을 위해 장시일에 걸친 방대한 자료 수집 또한 뒤따랐다고 하네요. 

미첼은 당초 의학을 지망해 매사추세츠주의 스미스칼리지에 들어갔지만,  
어머니 사망으로 귀향하면서 학교를 접었고,
몇 해 동안 애틀랜타 저널에서 5년 여 동안을 기자로 일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요구하던 여성상에서 약간은 이탈하고자 했던 기질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1925년 광고대행업자인 존 로버트 마쉬(John Robert Marsh)와 결혼한 그는, 이듬해 발목을 다쳐 요양하는 동안, 남북전쟁과 재건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고 하네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집필 과정에 숨은 공헌자(조력자)도 있어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영감을 주고,
당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제한적인 활동이 불가피한 상황이 불러온 것도 있지만,
그의 문필과 필력을 칭찬하고 어려서부터 듣던 남북전쟁 전후의 이야기를 작품화할 것을 독려했던 그의 남편, 마쉬.
칭찬과 격려의 힘 또한 이 소설의 잉태에 무시하지 못할 힘을 발한 것 아닐까 싶어요.

그러나 미첼에게 소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단 한편이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첫 작품에 너무 많은 공력을 쏟아 부은 탓인지,
첫 작품의 엄청난 성공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직후, 이렇게 토로하고 맹세했다죠.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것 같다.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
150㎝의 단아한 체구로 위대한 스토리텔링의 흥미와 호소력을 보여줬던 그는,
1949년 그의 동반자, 마쉬와 함께 길을 건너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불황이 태양을 없앤 시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피폐해진 사람과 시대를 위로․위무하고 평정심을 유지하게끔 도와줬습니다.
당시 이 책의 선전 문구도 힘겨운 시절을 반영하듯,
"단 돈 3달러로 완벽한 휴가를."이었다죠.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Tomorrow Is Another Day)...


무엇보다 결정적 이 한마디 혹은 장면.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Tomorrow Is Another Day)."
모든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폐허에서,
스칼렛이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흙을 쥐고서 읊조린,
절망에서 건져 올린 희망의 한 조각.

(당초 미첼이 붙인 제목이 바로 이 대사였는데, 출판사에서 당시 '내일(Tomorrow)'이란 말을 붙인 책 제목이 많다는 이유로 현재의 제목으로 변경됐고, 주인공 이름도 당초엔 팬시 오하라였다가 출판사가 스칼렛 오하라로 바꿨다고 알려져 있어요.)
 
모름지기, 작가는 그렇지 않을까요.
평화와 호황 때보다 불황과 절망의 시절에 더욱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마가렛 미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아, 그렇다면 혹시 레이슨 사장과 마쉬도 필요할까요?

아참 며칠 후, 8일이면 미첼의 탄생 108주년인데요,
오랜만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거나 영화를 보는 건, 어떨까요.
당신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참고자료 : 위키백과, 완주신문, 『세계 영화계를 흔든 100대 사건』(이경기 지음/우리 문학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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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사회로부터 매장된 유능한 재능,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2.8~1943.10.19)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도 있지만,
결국 스승의 벽을 넘지 못해 소멸한 재능이 많은 것도 사실이죠.
여기 이 사람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스승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스승의 견제와 분노로 돌아선 사랑의 아픔에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사람.
그렇습니다.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입니다.


아마, 영화 <까미유 끌로델>(1988)을 통해, 그를 만난 분도 많으실 거예요.
인상적인 영화였죠.
로댕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한 예술가.
이자벨 아자니의 열연으로 새삼 알게 된 불꽃같은 예술혼.

등기소 소장 부부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난 까미유는,
부족함 없이 자라면서 예술적 재능을 일찌감치 드러냅니다.
조소에 소질을 보인 그가 12살에 만든 점토작품이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았을 정도였죠.
아버지는 그를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죠.
까미유를 미술학교에 보내기 위해,
자신은 일 때문에 지방에 남지만,
가족을 파리로 이사시킬 정도로 그를 아꼈습니다.

당대로선 쉽지 않은 일이었죠.
딸을, 여성을 쉬이 인정하지 않는 미술계의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말입니다.
다만, 어머니는 그의 예술성을 인정은커녕 증오할 정도로 보수성향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안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을 것임은 눈에 보입니다.
그럼에도 17세 때 조각가가 되기로 마음 지어먹은 그는 그렇게 가족의 희생을 요구하면서, 드물게 여학생 입학을 허용하던 아카데미 콜라로시에 입학, 창작열을 본격 싹틔웁니다.

재능과 미모, 목표의식과 강한 의지를 두루 갖춘 까미유는,
19세에 로댕을 만나 이듬해 그의 제자 겸 조수가 됩니다. 어쩌면 비극의 시작.
로댕의 <지옥의 문> 제작팀 일원으로 첫 작업을 함께 하면서,
까미유는 탁월한 상상력과 섬세한 솜씨를 발휘하면서 로댕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죠.

24살의 나이차는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까미유는 로댕의 뮤즈가 되는 듯 보였지요.
로댕의 예술적 영감을 북돋는 것은 물론, 연인으로서 말이죠.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되지만은 않습니다.
까미유는 로댕의 아내로서 예술적 동반자가 되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로댕은 그렇질 않았죠.
여성 편력(이사도라 덩컨도 로댕을 사모했으나, 로댕은 그를 모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이나 이전부터 곁에 있던 로즈 뵈레 때문인지,
그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고,

까미유의 재능에 경쟁심을 갖게 되면서 외려 까미유를 견제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비슷한 작품을 남겼는데요.
로댕의 일부 작품이 까미유의 것을 표절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습니다.
로댕의 <키스>, <가라테아>가 까미유의 <사쿤달라>, <밀단을 진 소녀>와 유사하다는 이유.
자신의 명성에 더 이상 먹칠을 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로댕은, 손을 씁니다.
까미유 작품이 전시회에 출품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이런 관계라면, 파국은 결국 불을 보듯 훤하죠.
그럴 때 까미유의 선택은, 하나죠. 로댕을 떠나는 것.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한가요.
더구나 때는 19세기 후반, 여성이 예술가로서 위풍당당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제대로 허용하지 않을 시기죠.
이 같은 사회적 억압과 옛 스승이자 연인의 견제까지 어우러지다보니,
그의 날개가 제대로 펼쳐질 수 있었을까요.
재능과 불꽃같은 예술혼으로 조각에 몰두한 까미유였지만,
분노가 잠식한 영혼은 쉽사리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육체마저 망가지기 시작하죠.

로댕에 대한 배신감에 우울증에 시달리고,
"로댕이 나의 재능을 두려워 해 나를 죽이려 한다"는 강박증까지 덮쳤습니다.
밤마다 로댕의 집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던 까미유는,
결국 정신병원으로 보내졌고,
30년 동안을 이곳에 머물다 비극적인 삶을 마쳤습니다.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까미유의 동생, 폴 끌로델은,
"그녀는 로댕에게 모든 걸 걸었고, 그와 함께 모든 걸 잃었다"고 말해,
로댕의 그늘에 가린 누이의 삶을 애통해했습니다. 

전 사실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명예와 찬사를 받은 로댕의 것에 비해 뛰어났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럴만한 안목도 위치에 있지도 않으니까요.
다만, 이런 생각은 들어요.
한 재능 있는 여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한 사회적 상황도,
그를 비극으로 몰아갔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참고자료 : 두산백과사전, 위키백과,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미유 끌로델』(정금희 지음/재원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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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최초의 여성총리, 인디라 간디
(1917.11.19~1984.10.31)


인도의 주요한 국제관문이라면, 인디라 간디 공항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인도 뉴델리로 가려면 이 공항에 도착하게 되죠.
이 공항의 이름은, 인도 최초의 여성 총리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여성의 이름을 따 국제공항을 명명한 것은 거의 드물지 않을까 싶은데요.
과연 어떤 사람이 길래, 그렇게 명명됐을 정도일까요.

우선, 인디라 간디는 마하마트 간디와 혈연관계는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이자,
인도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입니다.

그의 성은 결혼하면서 훗날 하원의원이 된,
남편 페로제 간디의 성을 따른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그는,
12살 때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리틀 인두(작은 인도인)'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로 당찬 아이였습니다.

인도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그는,
스위스, 영국 등에서 수학한 뒤 21살 때인 1938년, 아버지 네루를 따라,
인도국민회의파에 입당해 반영(反英)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인디라는 정치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독립 후 아버지 비서실장 역할을 한 것을 비롯,
1959년 인도국민회의파 당수가 됐습니다.

그러다 1964년, 아버지 네루가 사망한 뒤,
샤스트리내각에서 공보장관을 지낸 그는, 

1966년 소련 샤스트리가 사망하자, 인도의 제3대 수상이 됐습니다.
인도 최초의 여성총리로서 마침내 오른 것이죠.

집권 초기, 인디라는 경제 안정에 주력하면서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차츰 강권통치를 자행한데 있었습니다.
시크교도들의 독립운동을 무력진압하고,
정권유지를 위해 야당을 탄압하는 등으로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은 데다,
아버지의 17년과 딸의 11년 등 28년 장기 집권에 싫증을 느낀 인도인들의 반(反) 간디분위기로 1977년 총선에서 참패, 정계를 떠났습니다.
그러다, 집권당인 인민당이 국민의 신임을 잃자, 이를 빌미로 정계복귀한 그는,
1980년 총선에서 승리, 다시 수상으로 취임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총리시절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시크교도의 독립을 억압했던 인디라의 전력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1984년 10월 31일, 시크교도인 경호원의 피격으로, 암살당하고 말았던 거죠.
평소 방탄조끼를 입고 있다고 알려졌던 그는,
카메라 앞에서는 이를 입지 않았는데, 암살범이 그 때를 노렸습니다.
눈 깜짝할 새에 인도 최초의 여성 지도자는 눈을 감았습니다.

(※참고자료 :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인)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말하다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실버미스(Sliver Miss)

앞서, '골드미스'를 말씀드렸는데, 이번에는 '실버미스'입니다.
대충 감은 오시죠? 골드(금)에 이은 실버(은).
물론, 이것은 마케팅적 필요에 의해 생겨 타깃이 된 '골드'에 비해 마케팅에선 찬밥 신세죠.
골드미스나 실버미스 모두, 올드미스에서도 분화된 계층이라고 할까요.
그 기준은 바로, 돈(연봉 등)에 의한. 한편으로 씁쓸한 용어가 아닐 수 없죠.

일단 실버미스를 마케팅적으로 정의하자면,
싱글 여성인 것은 골드미스와 공통점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직장에, 소득이 3천만원 안팎으로 구매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여성을 뜻합니다.
사회적, 그것도 돈에 의해 갈라지는 양극화의 한 표현인 셈이죠. 

실버미스 역시 골드미스 마냥 건강이나 문화에 대한 욕구는 분명 클 겁니다.
그러나 대개의 현실은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골드미스가 부각될수록, 어떤 실버미스는 자괴감에 빠질지 모를 일입니다.
기업들에게도 실버미스는 레이더망에서 벗어나 있죠.

기업들의 이윤을 향한 달음박질을 막을 순 없겠지만,
세상에는 아무렴, 실버미스가 훨씬 더 많고,
여성들에 대한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음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극소수인 골드미스의 웃음과 환상 뒤에는 대다수 실버미스의 비애와 눈물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참고자료 : 위키백과, 헤럴드경제)

위민넷 - 키위, 지식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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