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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위민넷'에 해당되는 글 86건

  1. 2008.11.03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 by 스윙보이
  2. 2008.11.03 브래들리 효과 by 스윙보이
  3. 2008.11.03 키코(KIKO : Knock In, Knock Out) by 스윙보이
  4. 2008.11.03 강력한 군주제를 열망한 얼음 제왕, 안나 이바노브나 by 스윙보이
  5. 2008.10.28 유럽남성들의 혼을 뺏은 마음스파이, 마타 하리(Mata Hari) by 스윙보이
  6. 2008.10.28 사랑하며 살았고 후회 없이 노래하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by 스윙보이 (4)
  7. 2008.10.28 헤도니스트 효과 by 스윙보이
  8. 2008.10.28 멜라민(melamine) by 스윙보이
  9. 2008.10.28 에토스(ethos) by 스윙보이
  10. 2008.10.28 로고스(logos) by 스윙보이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


미국 대선이 현지시각으로 4일 펼쳐집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버락 오바마 민주당후보가 존 매케인 공화당후보를 앞지르고 있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브래들리 효과'를 우려했던 오바마의 기세가 더욱 거세지는 형국입니다.

이는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승자편승)' 때문입니다.
어디에 표를 찍을 지 아직 향배를 정하지 못한 부동표가 유력후보에게 쏠리는 현상이죠.
즉, 선거 막판이나 표를 찍을 때 유력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행위입니다.

재미있는 것 중의 하나는,
객관성과 중립성이 생명이라는 언론도 기사를 보아하면, 이에 자유롭지 않아요.
특정 후보의 지지도가 올라가면 인기 상승이나 이에 편승한 관한 기사를 쓰려고 하고,
지지도가 하락하거나 패색이 짙은 후보는 가혹하게 다루려고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거 등을 앞두고 자주 쓰이는 이 용어(밴드왜건 효과)는,
사실 경제학에서 쓰던 용어입니다.

어떤 재화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 다른 사람들도 그 경향에 따라서 수요를 증가시키는 편승효과를 뜻하는데요, 1950년 하비 레이번슈타인(Harvey Leibenstein)이 처음 사용한 경제 용어랍니다.

실제 '밴드왜건(band-wagon)'은 대열의 앞에서 행렬을 선도하는 악대차로,
이 차가 연주하면서 지나가면 사람들이 호기심 등으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몰려가는 사람을 바라본 또 다른 사람들이 이를 뒤따르면서 군중들이 더욱더 불어나는 것에 비유하여 붙여진 이름이죠. 즉,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의사결정을 의미합니다.

(※ 참고자료 : 두산백과사전, 한겨레)

2008/11/03 - [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위민넷] - 브래들리 효과

Posted by 스윙보이

브래들리 효과

오는 11월4일 열리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알다시피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 후보와 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 후보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TV토론을 마친 지금 이 시점,
오바마 후보가 매케인 후보을 두 자릿수 격차로 지지율이 앞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할 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솔솔 나오고 있죠.

그러나 뚜껑은 열어봐야 한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옵니다.
그건 바로 '브래들리 효과' 때문입니다.
백인 유권자들이 여론조사나 출구조사 때는 흑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답변해 놓고선,
정작 투표날 투표장소에서는 백인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생각과 행동이 다른 경우죠.
몇몇 사례들에서는 그 차이가 최고 10%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브래들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사례 때문입니다.
1982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자리를 놓고 백인인 공화당 후보 조지 듀크미지언과 경합을 벌인 흑인 출신 민주당 후보 톰 브래들리가 여론조사에서는 크게 앞섰지만, 실제 투표에서는 결국 패배한 사례.

학자들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백인들이 자신이 인종차별자로 비칠 것을 염려해 여론조사원에게 솔직한 답변을 피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라고요.

이런 경우가 또 있었는데요,
더글러스 와일드 전 버지니아 주지사와 데이브드 딩킨스 전 뉴욕시장의 이름을 따 와일드 효과, 딩킨스 효과라고도 합니다. 딩킨스는 선거 4일 전까지 백인 후보 루디 줄리아니보다 14%포인트가 앞섰지만, 정작 투표에서는 2%차로 간신히 승리했습니다.

어쨌든 뚜껑은 열어봐야 알겠습니다.

(※참고자료 : 위키백과, 한겨레)

Posted by 스윙보이

최근 급격한 환율상승에 따른 수출입업체들의 피해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특히 환율이 오르면(원화가치가 하락하면) 즐거워야 할 수출업체들도,
이것 때문에 '악'소리를 내는 곳이 많답니다.
환율변동에 따른 위험을 줄이고자 금융권에서 만든 파생금융상품인,
'키코(KIKO)'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키코는 수출입 시점과 결제 시점 사이의 환율 변동 위험을 피하기 위한 외환옵션 거래의 한 종류입니다. 이 상품은 환율이 미리 정한 범위에서 움직이면 유리한 가격에 달러를 팔 수 있습니다.
환율 변동이 크지 않을 경우, 수출입 업체로서는 환차익까지 얻을 수 있는 상품이죠.

그러나 여느 파생상품이 그러하듯,
환율변동이 클 경우 피해가 엄청 커질 수 있습니다.
환율이 만약 하한선 아래로 내려가면(녹아웃) 계약이 무효가 되고,
반대의 경우(녹인) 계약금액의 2~3배 달러를 시장에서 사들여 은행에 넘겨줘야 하는 맹점이 있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급격한 환율변동 때문인데요,
미리 정한 범위를 넘어서 환율 상승이 이뤄진 탓에 업체들은 울며겨자먹기로,
달러를 사들여 은행에 줘야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흑자도산 업체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 네이버 지식검색, 중앙선데이)

Posted by 스윙보이

강력한 군주제를 열망한 얼음 제왕,
안나 이바노브나(А́нна Иоа́нновна)

(1693.1.28~1740.10.17) 

러시아 제국 시대, 근대국가로서의 러시아를 일군 로마노프 왕조(Романов)가 있었습니다.
로마노프 왕조는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4년 동안 러시아 제국을 통치했었죠.
강력한 전제군주이자 대외 팽창정책을 펴던 이반 4세가 죽고,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귀족들 간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는데,
이를 평정한 미하일 로마노비치가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입니다.


이 로마노프 왕조의 강력한 군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안나 이바노브나입니다.
1693년 이반 5세와 프라스코비아 살트이코바 사이에 태어난 안나는,
왕실의 커리큘럼 하에 작은아버지 표트르 1세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1710년에 쿨란스키 공작과 결혼하고 공작이 죽은 후에는 주로 민타프에서 살았던 그는,
표트르 2세 서거 후 추밀원 의원들의 군주 권력 제한 조건으로 로마노프 왕조 4번째 군주로 제위에 옹립됐습니다.

그러나 안나는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추밀원의 조건에 동의해 옹위됐지만,
귀족 근위병의 의뢰에 따라 그 계약조건을 파기하고 추밀원을 1730년 4월 즉위했습니다.
그리고 원로원을 복구시키고 외국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강력한 통치를 꾀했습니다. 
안나는 이후 1731년 내각을 창설해 비밀경찰의 활동을 승인했고,
정권에 대항하려는 반대세력들을 숙청했지요. 
반면 정권획득에 도움을 준 귀족들의 특권을 넓혀줬습니다.
귀족의 국가봉사를 35년으로 제한하는 법안도 만들었지요.

냉혹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안나는 강력한 군주제 확립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고자 이단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어요.
이에 따라 러시아의 16개 도시에서 신학교가 개교되었고,
1735년에는 신성모독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아울러 군사개혁도 추진했는데요, 이 역시 군주제를 다지기 위한 노력이었죠.
표트르 1세 때 합병됐던 카스피 해 연안 영토를 페르시아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넘겨줬습니다. 
1735년부터 1739년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과도 거뒀습니다.
다만 소극적인 외교정책으로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으로 벨그라드와 체결한 국제조약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안나는 한편으로 문화적으로 큰 업적을 세웠습니다.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의 문화에 있어 중대한 업적인데요,
1738년 5월4일, 러시아 최초의 황실연극무용학교인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를 세웠습니다.
당시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프랑스의 발레 거장인 쟝 바티스트 랑데의 주창을 받아들여 발레의 확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산림보호와 보존에도 힘을 기울여 국가적인 벌채금지법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러나 안나 이바노브나는 과도한 세금으로 민심을 잃었고,
재위기간 10년이 지난 1740년에 사망했습니다.

(※참고자료 : 위키백과, 두산대백과사전)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말하다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유럽남성들의 혼을 뺏은 마음스파이, 마타 하리(Mata Hari)
(1876.8.7~1917.10.15)

여기, 세상을 흔든,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을 들끓게 한 여인이,
1917년 10월15일 파리 교외 반센느 둑에서 사형 집행현장에 있습니다.
알몸인 채 눈가리개도 거부한 그는, 12명의 사수 앞에 섰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이중간첩노릇을 해, 프랑스군 5만명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이 사형집행의 이유.
총성이 울립니다. 피가 튀고, 당당했던 고개가 푹 숙여집니다.
채 마흔 살이 되지 않은 나이, 파란만장했던 '태양'(마타하리는 태양이란 뜻의 말레이어)이 지상에서 빛을 잃는 순간입니다.


그 사람, '마타 하리'.
본명은 마가레타(Margaretha Geertruida Macleod), 결혼 전 성은 젤러(Zelle)입니다.
무희이자 고급 창녀가 직업이었지만, 이면에서 '첩보수집과 유통'을 했던 사람.
훤칠한 몸매와 미모가 뛰어난 데다 매력적이어서 뭇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
그 뛰어난 외모 덕인지, 많은 애인이 있었고, 대부분 장교였습니다.
아마도 스파이노릇을 위한 방편이면서도, 때론 사랑에 빠졌겠지요.


마타 하리 이름 앞에는 '팜므 파탈' '요부' '(이중)스파이'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에 대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모든 것이죠.
실상 그가 했다는 첩보활동의 성격과 범위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 자료는 1916년 봄, 독일 영사가 그에게 프랑스 여행을 하는 동안, 어떤 정보라도 얻어오면 돈을 주겠다고 제의했다고 했다고 하고,
1917년 프랑스군에 체포된 뒤 몇몇 낡은 정보를 독일에게 제공했다고 인정하고,
앞서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에서 프랑스 스파이로 활동하는 데 동의한 적이 있었다고 진술하긴 했지만요.

마타 하리는 주체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남성들에게 포획되지 않고 자신의 무기를 활용해 남성들을 움직였습니다.
부유한 모자상인의 영애로 네덜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1895년 네덜란드 장교와 결혼해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아이 둘을 낳았지만,
1901년 이혼을 겪었습니다.
빈털터리로 유럽에 돌아온 그가 가진 것은, 아름다운 육체와 뛰어난 춤 솜씨였습니다.
물랭루주에서 무희로서 인도네시아의 발리댄스를 자극적인 몸놀림으로 선보이자,
(그는 대중 앞에서도 나체 출연을 하는 등 파격적인 '쇼'를 펼치기도 했다지요)
남성들은 이국적 매력 앞에 열광했습니다.
그의 춤은 파리의 유행이 됐고, 유럽의 대도시에서도 그는 이름을 떨쳤습니다.
상류사회에 드나들었고, 고위권력층들을 상대했다죠.
그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이런 환경은 그가 스파이 혐의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여담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군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핀업걸이 바로 마타하리였다고 전해질 정도입니다. 유럽(남성들)은 그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마타 하리의 발목을 잡은 셈이 됐습니다.
아름다운 무희에게 찬사를 보내고 황홀경에 빠졌던 남성들은,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선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가 필요했고,
마타 하리는 적절한 타깃이 됐습니다.
모름지기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내부스캔들은 치명적입니다. 
남성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고, 자리 보전을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겠죠.
그의 혐의를 조사하면서 거물급 인사들이 줄줄이 연계될 조짐을 보이자,
재판을 통해 일사천리로 사형을 결정짓고 집행했습니다. 전시상황을 핑계로.
마타 하리가 중요한 군사정보를 독일에 넘겼다는 증거도 없었음에도 말입니다.
어쩌면 남성들은 그가 다른 남성들의 마음까지도 훔쳤다는 점에서,
그를 스파이로 규정한 것, 아닐까요.
자신이 소유할 수 없기에, 자신에게만 마음을 주지 않았기에,
지질하게도, 차라리 그를 죽음으로 내몬.

한편 지난 1931년 전설적인 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마타 하리로 분한 <마타 하리>가,
1985년에는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마타 하리>가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참고자료 : 두산대백과사전, 주간한국 '역사속 여성이야기')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말하다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사랑하며 살았고 후회 없이 노래하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2.19 ~ 1963.10.11)


국민가수.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타이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조용필 정도의 가수에게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입니다.
어디 프랑스라고, 국민가수 없겠습니까. 여기, 이 사람이 그 주인공입니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그런 피아프의 생애를 그린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라비앙 로즈>도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배우 마리옹 코티아르가 피아프를 열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죠.

피아프의 삶은 여러모로 극적이었습니다.
천재예술가가 짊어진 굴레가 그런 것처럼, 그 역시 굴곡진 삶을 살았는데요.
태어날 때부터 예사롭지 않아요. 
산기가 있어 자선병원으로 가던 어머니가 파리의 노동자 거리인 '벨베이르' 길 한복판에서 그를 낳았습니다. 경관이 그를 받았고, 빈민촌의 주민들이 구경하는 대낮이었습니다.
그때는 '에디트 조반나 가시옹'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시련은 그러나 곧 시작됩니다. 거리의 가수였던 어머니가 그를 버렸습니다.
외할머니, 할머니 손을 거쳐, 서커스 단의 곡예사었던 아버지와의 떠돌이 생활.
그러나 결국은 매춘부 소굴에 버려져야 했던 아픔.
다만 유일한 위안과 재능은 타고난 목소리였습니다.
오직 그 목소리와 14세에 만난 친구 모르몬이 외로운 그를 구원했지요.
노래를 부르면서 모르몬과 서로 의지하며 살던 그는 16세에 배달사환이었던 루이 듀퐁과 사랑에 빠져 이듬해 딸 마르셀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 2살 무렵 수막염으로 죽고 마는 비극.
다음 남자친구는 하필 또 포주였어요.
몸을 팔지 않기 위해 노래를 불러 번 돈을 그에게 상납해야 했던 소녀의 마음,
어때요, 헤아려지나요?

피아프에겐 역시 노래 밖에 없는 듯 보였지요.
에뜨또 광장 옆 트르와이용 거리에서 노래하던 18세의 그를 눈여겨 본 '쟈니스 카바레'의 지배인 루이 르플레 덕에 처음 무대에 올랐어요.
그것이 바로 프랑스의 국민가수, 피아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지요.
그때 루이가 그에게 준 새로운 이름이 '라 모메 피아프'(La Mome Piaf).
147cm에 불과한 그의 키를 고려해 파리 방언으로 '작은 참새' 혹은 '아기 참새'를 의미하는 이름을 붙여준 거죠. 루이는 피아프에게 기본 무대 매너를 가르치고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검은 드레스를 입도록 조언하는 등 피아프의 음악적 아버지 역할을 했어요.
그러나 루이가 폭력조직에 살해당했고, 시인이자 소설가, 작사가, 가수인 레이몽 아소가 피아프의 재기를 도우면서 새롭게 이름이 내세운 것이 '에디트 피아프'였습니다.

여하튼 쟈니스에서의 성공적인 데뷔 이후 피아프는 파리 전체에 화제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솟아오른 인기와 부에, 당연히 따르는 것은 애정사.
그의 숱한 애정사 가운데 이브 몽탕과의 연애도 한페이지를 장식합니다.
연하인 이브 몽탕을 발굴해 키워주고 직접 데뷔까지 시키는 헌신적인 애정을 쏟았지만,
(몽탕과의 사랑이 빚어낸 곡이 그 유명한 '라비앙 로즈'(La Vie En Rose, 장밋빛 인생)'입니다) 몽탕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연인을 찾아 갔지요.

피아프에게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어요.
무엇보다 권투선수이자 미들급 세계챔피언이었던 막셀 세르당과의 사랑은 애절하기로 유명합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의 세르당이었지만, 끌림과 매혹을 저지할 순 없었죠.
미국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세르당이 프랑스로 돌아가면서 잠시 떨어져 있게 되는데,
그 기간 주고받은 편지는 책으로 나왔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 사랑에도 비극이 닥칩니다.
1949년 미국에서 시합이 잡힌 세르당을 빨리 자신의 곁에 오라고 재촉한 피아프의 부탁이 화근이었습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르당은 세상을, 피아프 곁을 떠나고야 맙니다. 
그렇게 떠난 연인 세르당을 위해 피아프가 가사를 쓰고 부른 것이 '사랑의 찬가'이고요,
이 사랑을 다룬 것이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에디프 피아프의 사랑>(Edith Et Marcel, 1983)이었지요. 세르당 역을 그의 친아들이자 복서인 막셀 세르당 주니어가 맡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어진 연애사와 두 번의 결혼이 있었는데요,
그 와중에도 음악 뿐 아니라 술, 마약, 자살미수, 교통사고 등이 함께 했고,
영양실조, 모르핀 중독, 결핵, 간염, 관절염, 암 등 수십 가지 질병도 피아프를 따랐습니다.
1962년 21살 연하의 데오 사라포와 결혼했지만,
소화기 계통의 출혈이 심해 요양소 생활을 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를 지켜주던 사람은 사라포였다는군요.

타고난 목소리에 피할 수 없는 삶의 비극이 삼투하면서 애끓는 노래를 잉태했던 국민가수,
피아프는 사실 당최 종잡기 힘든 이였습니다.
자신이 낳은 아이보다 새로운 연인이 더 좋다며, 자신이 어릴 적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자신의 아이를 버렸고,
미래의 사랑을 위해 오래 살아야 한다며 전쟁의 참상을 외면했으며,
노래로도 어쩔 수 없었던 비극을 잊으려고 끝맺지 못할 뜨개질을 하던.
무대에서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관객을 압도했으나,
무대 뒤에서는 외로움과 비극으로 점철된 발걸음으로 완벽한 사랑을 찾아 헤맸던 사람.
오죽하면, 그는 "나는 나 자신을 망치고자 하는 불가항력적인 욕망을 지녔다"고 말하기도 했을까.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지은이, 실뱅 레네는 피아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초라한 검은 옷을 입은 자그마한 여자, 가녀린 어깨 위에 무거운 듯한 머리,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한 깊은 눈길, 누군가를 껴안으려는 듯 벌린 두 팔."


그렇다고 피아프를 동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는 늘 사랑하면서 살았고, 후회없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샹송의 여왕, 신이 내린 목소리, 불멸의 프랑스 목소리라는 타이틀이 그의 음악적 성취를 대변한다면,
그를 파산에서 건져낸 1961년 올림피아 콘서트에서 처음 공개했고,
<파니 핑크>의 메인 테마이자, <몽상가들>에서 엔딩을 장식한 이 노래,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는 그의 삶을 요약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그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검은 옷을 입고 노래하다 죽는 것이 소원이었던 여인, 에디트 피아프도 10월에 눈 감았습니다. 갑자기 어디에서 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인지 궁금한 그 계절에 말이에요.

(※ 참고자료 :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실뱅 레네 지음 / 신이현 역 / 이마고 펴냄), 위키백과, 씨네21)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말하다 (기고)

Posted by 스윙보이

헤도니스트 효과


헤도니스트(hedonist). '(심미적) 쾌락주의자'라는 뜻이죠.
'헤도니스트 효과(hedonist effect)'는 마케팅 용어의 하나로서,
가격보다 개인의 감성적 가치를 구매 결정의 우선 요소로 두는 소비 유형을 말합니다.
즉, 상품에 대해 소비자들이 상품의 미적 특성에 주목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요즘 소비자들은 예전처럼 가격 등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해당 상품이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얼마나 부합하느냐를 따지는 경우가 늘고 있지요. 혹은 상품의 소비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 흥분, 만족감 등을 상품 구매의 매우 중요한 판단 근거로 하는 경우도 많고요. 소비에 있어 미적 감성을 추구한다고 할까요.

따라서 정리하자면,
헤도니스트 효과는 감성적 가치를 구매 결정에 우선 요소로 보는 것입니다.
다른 제품보다 미적 특성이나 디자인 등의 감성적 요소가 뛰어난 제품은,
추가적인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구매하는 성향을 가진 소비 효과입니다.


기업들도 이 같은 소비패턴과 소비자들의 감성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제품의 개발에 있어 우수한 기능이나 가격보다는 디자인과 같은 감성적 요소를 더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디자인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죠.
아무리 좋은 디자인이라도 모든 사람에게 아름답다고 받아들여지진 않아요.
취향의 문제는 주관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케팅을 하는 사람들은,
제품 자체의 감성적 측면뿐만 아니라 구매 전 정보 수집에서부터 최종적인 소비에 이르기까지 전체 소비의 프로세스에서 소비자들이 어떤 포인트에서 어떤 느낌을 받을 것인지를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맞춘 상품개발과 커뮤니케이션, 최적의 유통 경로를 선택해야 하는 과제가 있는 거죠.

(※참고자료 : 한국경제신문, 책가방 블로그(blog.naver.com/yihyojin)

Posted by 스윙보이

멜라민(melamine)

요즘 눈만 뜨면, 멜라민 얘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단지 대한민국에만 국한된 얘기도 아니고,
전 지구촌이 '멜라민 공포'에 휩싸여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정도죠.

그렇다면, 멜라민이 도대체 뭐길래, 그렇게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을까요.
멜라민은 우선, 유기화학물질로서 열에 강한 플라스틱 원료의 생산에 사용됩니다. 플라스틱제품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죠.

그렇다면, 식품에는 사용할 수 있는가.
천만에요. 멜라민은 식품제조·가공에 사용할 수 없는 물질입니다.
여러 국가 및 국제규격식품위원회(CODEX) 등도 식품에 사용을 허용하고 있지 않고 있죠.
참고로 미국 FDA에서는 멜라민 및 관련 화합물에 대한 식품 및 사료의 내용일일섭취량(TDI)를 일일 체중 1kg 당 0.63mg으로, 유럽식품안전청은 0.5mg으로 적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TDI는 환경오염 물질 등 의도하지 않고 혼입하는 물질에 대해 평생 섭취해도 건강상 유해한 영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양을 뜻합니다.

따라서 유럽TDI기준 적용 시 멜라민성분이 137ppm 나온 '미사랑카스타드'를 먹을 경우,
몸무게 60kg의 성인은 낱개 40개 이상씩, 몸무게 20kg인 어린이의 경우 낱개 13개 이상씩 평생 매일 섭취할 경우 신장염, 신장결석 등의 유해영향 발생이 우려되는 것으로 평가됐다고 식품의약품안전청은 밝히고 있습니다.

중국의 문제가 된 분유는 고농도의 멜라민(최고 2563mg/kg)이 포함됐기 때문에,
유아사망 등 직접적으로 인체에 해가 된 경우입니다.

그러나 안심만은 하고 있을 수 없죠.
식약청은 멜라민 함유가 의심되는 제품을 수거·검사하고 있습니다.
수거 대상품목은 안전성이 확인될 때까지 판매를 일시 중지시킨 상태고요.
식약청 홈페이지(www.kfda.go.kr)에는 안전성이 확인된 품목과 판매금지 품목의 목록을 게재하고 있으니 참조하셔도 좋겠네요.

(※ 참고자료 : 식품의약품안전청, 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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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에토스(ethos) 

에토스는 고대그리스어입니다.
원어명으로는 'ēthos'이며, '성격'이나 '관습'을 의미하는데요,
특히 사회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통용되는 관습을 말합니다. 

고대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The Art of Rhetoric)'에서 에토스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 철학용어로서 널리 쓰이고 철학적 개념이 씌워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토스를 화자(話者)의 고유성품으로 정의했는데요.
동일한 행위 등을 반복함으로써 한 방향으로 키워지는 습관을 에토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화자 체형, 자세, 옷차림, 목소리, 단어선택, 시선, 성실, 신뢰, 카리스마 등이 이에 속한다고 봤습니다. 이에 따라 영혼의 선악도 자란다고 여겼습니다.

오늘날 에토스는 좀더 범위를 확장했습니다.
개인보다는 사회나 민족별로 특정 지어진 관습이나 관례 등을 뜻하게 된 거죠.
이는 또한 일시적인 감정의 격앙상태를 다룬 파토스와도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일부일처나 한 사람에게 애정을 집중하는 사회관례 등이 에토스가 될 수 있겠죠.

(※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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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윙보이

로고스(logos)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성(理性)을 갖고 있지요. 감성 혹은 감정과 대립되는.
철학이나 문학작품 등에서는 이를 '로고스(logos)'라는 용어로 쓰곤 합니다.
즉, 로고스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지성(이성)을 뜻합니다.
 
어원을 살펴보자면, 고대그리스어로 '말하다(legein)'의 명사형으로 '말한 것'을 뜻합니다.
고대그리스인들은 만물이 어떤 이성적인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로고스는 많은 파생적 의미로도 쓰여 고대철학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사물의 존재를 한정하는 보편적인 법칙, 행위가 따라야 할 준칙, 이 법칙과 준칙을 인식하고 이를 따르는 분별과 이성 등으로 활용됐지요.
말이나 글, 이야기나 연설 등을 뜻하면서 여기서 수사학이 발생하기도 했고요.
사물에 대한 설명(정의)이나 이유, 근거 등을 따지다보니,
논증과학이나 철학이 잉태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사물의 본질이나 인간의 분별이나 이성을 말하는 뜻으로도 쓰였지요.
인간은 말을 하기 때문에 '로고스를 가진 동물(이성적 동물)로 정의하는 한편,
사물의 존재는 감각에 의해 나타나지 않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 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Posted by 스윙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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