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을이 끝났다. 9월29일부터 시작된다고 온 동네방네 오두방정 떨었던 나의 가을. 님의 부드런 고운 미소 가득한 가을이 오면? 개뿔. 지랄 옆차기. 10월5일, 나의 가을은 외마디 비명만 남기고 끝났다.
짧은 가을의 끝. 노떼 자얀츠는 끝내 준플레이오프를 통과하지 못했다. 가을의 시작과 함께 했던 2연승. 마취제이자, 모르핀이었다. 그만 흠뻑 취했다. 나의 가을이 충분히 길어질 것이라고 예단했다. 18년, 내 묵은 한(恨)을 풀어줄 절호의 가을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긴 겨울의 시작.
10월5일, 올 가을이 끝난 이날, 승리와 함께 축배를 들고 싶었다. 딱 3년 전, 강남역 실내포장마차에서 내 커피가 시작된 날이었다. 나는 커피를 하겠다고 다짐했고, 친구와 결의를 했다. 그때, '착한커피'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친구는 나가 떨어졌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 나는 커피와 함께 생을 버티고 견디고 있다. 삶의 미각에 묻은 커피향이, 생의 한 자락에 위치한 떨떠름함에 압도당하지 않고 있다. 어설픈 먹물로 생을 도배질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여하튼, 오늘은 그런 날이었단 말이다. '천하무적 야구단'을 만난 것도 행운이 될 거라고 착각했다.
그래, 울었다. 이미 기울어진 승부, 포기했다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마지막 가을의 밤하늘 한 번 쳐다보면서 눈물 한 방울 또르르르 떨어트렸다. 아는 형의 슬픈 예감이 맞았다. 비련의 주인공. 그래, 깨끗이 인정한다. 뚱산, 아니 두산은 강했고, 좋은 경기를 보여줬다. 집중력이 돋보였다. 준플레이오프다운 다섯 차례의 승부. 내 사랑, 노떼를 즈려밟고 올라갔지만, 나는 두산이 올 가을을 차지했으면 좋겠다. 노떼도 올 한해 고마웠다. 당신들 때문에 웃고 환호작약했으며 광란했다. 또한 애닳고 똥줄 탔으며 광분했다. 고맙다.
아 쒸, 신발! 이 가을 애가(哀歌)는 어쩔 수가 없다. 겨울이는 좀 더 버티다가 와야했다. 가을 애가가 아닌, 가을 찬가(燦歌)를 부른 뒤, 겨울 방가(芳歌)로 매끄럽게 이어져야 했다.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Don't Cry For Me Argentina), 가 아니다. Cry Baby, 다. 어제(10월4일) 40주기를 맞이한 재니스 조플린의 노래다. ☞ 분노․저항․자유의 이름, 재니스 조플린 (Janis Joplin)
굿바이, 나의 가을아...
마침 내일부터 기온이 뚝 떨어지는구나. 거참, 겨울하곤...
이제, 이 긴 겨울과 어깨동무하기 위해 필요한 건, 내 몸과 마음을 감싸줄 따뜻한 커피 한 잔, 그리고 바로 당신...
진실 누나의 작별로 떠들썩한 이 즈음.
누나의 작별은 개인적 비극으로만 끝날 수 없기에,
더욱 조심스럽고 더욱 안타까운 이 때.
나고 감. 삶과 죽음의 문제.
살아생전에는 '생일'이 기억되고 축하를 받지만, 죽음 그 이후에는 '사일(死日)'만 있을 뿐이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도 그렇다.
죽음으로 인해 더 가슴에, 심장에 콱 박혀버리는 어떤 사람들도 있다.
특히나 요절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여기, 이 사람도 그렇다. 뮤지션, 재니스 조플린.
사실 그의 음악에 대해 난, 잘 모른다.
그는 내게, 어쩌면 '짧고 굵게 살다'간 요절한 천재의 대명사에 가깝다.
그리고 활화산 같은 열정으로 살다갔고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는 정도.
길지 않은 활동기간에도 영원히 기억되고 회자되는 이름.
대개 그의 노래는 그가 숨을 거둔 10월4일을 즈음해 반짝 흘러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거야 당연하겠지.
죽음 이후, 그의 생일을 기억하는건 매니아가 아니고서야 힘든 거고.
죽음이 부여하는 그 애잔한 감상의 편린들은 사일에만 맥박을 치게 마련이지.
2004년 11월, 미국의 이상한 선거방식 때문에,
전쟁귀, 부시가 대통령을 먹었던 즈음,
샌프란시스코에 레퀴엠처럼 흐르며 SF 사람들의 가슴 속에 콱 박혔다는 재니스의 어떤 노랫말. “자유란 잃을 것이 남지 않았다는 뜻의 다른 말일 뿐
(Freedom’s just another word for nothing left to lose).”
그러고보면 점점 이 사회는 무기력해져간다.
열광, 환희...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나 기쁨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강력한 '포스'는 어디에도 없다.
과연 누가, 무엇이, 이 세계를 열광케할 수 있나.
더이상은 '혁명'을 찾아볼 수 없는 세기.
금융자본의 크나큰 오류와 헛점에도, 세금을 게워 내 막아야 하는 위기의 시대.
결국 혁명도, 자본에 의해 덕지덕지 기워지고 상품화되는 세상.
'희망없는 가난'이 만연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암울한 자화상.
지금 '멜라민 공포'에 온 세상이 들썩거리긴 해도,
그 공포로부터 완전 자유로울 수 있는 자들은,
결코 많지 않다.
냉정하게, 그건 자본과 권력을 소유해야 가능한 거다.
지금 우리가 발붙인 이 세계에는,
'멜라민 과자'라도 어쩌면 감사해야 하는 아이들이 쌔고 쌨다.
공연히 말이 새면서 비약했는데, 다시 돌아가자.
장수하는 아티스트나 문화예술가들은 한편으로 억울할 것도 같다.
내 경우도 그렇지만, '요절'에 대한 이 과잉의 추앙을 떠올리면 말이다.
살아 있으면 그저 어쩌다 한번씩 관심을 두다가도 '죽음'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
특히 '요절'일 경우에는 더욱더 스폿라이트가 쏟아지니까.
그래도 어쩌겠는가. 살아있음에 감사해야지.
아무리 대중들이 '요절'에 대해 오버성 추앙을 해도,
그것을 곁눈질하며 억울해한다면,
그것도 볼썽사납지 않겠는가^^;
10월은 그렇다. 우울과 비극이 덕지덕지 나붙은 달이다.
그래서 간혹 요절에 대한 과잉 추앙을 해대겠지만,
요절한 천재, 할 말은 아니다만, 어찌보면 매력적이다.
하지만, 천재가 아닌 자들은 꿈도 꾸지 말 일이다.
산 자는 살아야 한다.
그것이 참인 명제다.
천재가 아닌 나는, 그렇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겠다'는 일념을 갖고,
쉴새없이 일상을 곁눈질하며 견.디.고, 버.틴.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고,
That's My Life!
10월입니다. 가을입니다. 하늘은 맑습니다. 바람은 시원합니다.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10월이, 가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때론, 누군가에게 10월은 우울을 태생적으로 안고 태어난 달입니다.
다른 누군가에겐 혁명의 달이기도 하겠고요.
그 10월의 초입에, 지난날 요절한 천재 뮤지션이 있습니다.
‘3J’라는 말 아세요? 음악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알 겁니다.
요절한 3대 천재 아티스트들에게 붙은 타이틀인데요,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지미 핸드릭스의 이니셜을 딴 것입니다.
그들은 묘하게도, 정말 묘하게도, 스물일곱의 나이에 작별을 고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죽기에 이른 나이란 없습니다.
누구에게든 죽음은, 태어남으로써 획득하는 권리입니다.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죽음.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이른 나이에 죽음’이라는 뜻의 ‘요절’로 일컫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죽음이, 안타깝고 아깝기 때문이겠죠.
10월4일, 로커이자 블루스 가수인, 재니스 조플린이 세상과 작별한 날입니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히피 문화의 대표자, 초기 블루스 록과 여성 록의 중심, 광기에 가까운 열정적 무대,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평생을 따라다닌 외모 콤플렉스”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짧은 활동기간 치고는 대단한 수식어 아닌가요.
스물일곱의 요절이 가져온 안타까움과 거부할 수 없는 매력, 그 강렬함 때문에 그렇겠지요.
어쩌면 그래서, 천재이고 싶은 자들은 어쩌면 요절을 꿈꾸는 지도 모르겠네요.
미국 텍사스주 포트아서에서 죽을 권리를 획득한 재니스는,
TV 대신 책과 그림에 관심을 가지도록 이끈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교육 아래, 독립적이고 지적인 자아로 자신을 단련시킨 그였지만,
사춘기 시절, 급격히 불어난 체중과 여드름, 색이 바래가는 머리카락 등으로 고민에 빠졌죠.
그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자, 외모 콤플렉스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자신에게 못되게 구는 상대에겐 사납게 달려들 정도로 성격도,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조금씩 누그러들었다지만,
아웃사이더로서의 기질은 그에게 평생 갖고 간 천성이었습니다.
어쨌든 17살 무렵, 클럽 등에서 블루스를 노래하며 음악과 본격적인 동거를 한 재니스는,
스물 두 살이던 1965년,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패니(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라는 샌프란시스코 블루스 밴드에 들어가면서 음악적 재능을 꽃피웠습니다.
밴드 멤버로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1967)에 참여, 밥 딜런의 매니저였던 앨버트 그로스만의 눈에 들어 이듬해 명반으로 인정받는 <Cheap Thrills>를 발매했습니다.
이 앨범, 폭발했습니다.
인기순위 1위에 오른 것은 물론, 거침없는 음악스타일 덕분에 그는 록의 우상으로 떠올랐습니다.
이후 여러 밴드를 오가며 활동한 재니스는,
1970년 새로 조직한 ‘풀 틸트 부기 밴드(the Full Tilt Boogie Band)’와 앨범을 녹음하던 중 헤로인 과용으로 구름의 저편으로 갔습니다. 사후 발간된 이 앨범 <Pearl>은 1960년대 명반 중 하나로 꼽히죠.
재니스는 1960년대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가 입은 히피풍의 옷은 ‘재니스 조플린 룩’으로 일컬어졌고,
(물론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걸치고 입었는가가 아니라,
그가 가졌던 ‘분노, 저항, 자유’를 담았는가, 라고 할 수 있겠지요.)
관습적인 제약을 과감히 탈피하고 거친 목소리와 거침없는 몸놀림은,
당대의 탈출구 없는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당겼습니다.
그는 백인 가수로서는 독특한 영적인 노래를 부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재니스의 생애는 스크린에서도 재현됐습니다.
배트 미들러가 주연한 영화 <The Rose>(1979)가 그랬죠.
르네 젤위거가 그의 노래와 동명의 영화인 <Piece of My Life>를 찍기로 했으나,
아직 완성됐다는 소식은 없네요.
그는 사후인 1995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도 이름을 새겼습니다.
여담이지만,
2004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는 재니스의 노랫말이 흘러 다녔답니다. “자유란 잃을 것이 남지 않았다는 뜻의 다른 말일 뿐(Freedom’s just another word for nothing left to lose).” 대선에서 부시에게 패배한 뒤였습니다.
미국 진보진영의 상징 도시이자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존 케리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던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진보세력의 한탄과도 같은 것.
당시의 한 기사는 전하고 있었습니다. 허탈감과 무력감, 송두리째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상실감, 분노와 고립감으로 그들이 재니스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시를 허한 풍경 속으로 밀어 넣었다고.
드디어 올것이 왔군요..재니스 조플린. LP로 카세트 테이프로, CD로, MP3로 제 인생에 존재하는 재니스 언니. 어느덧 그녀보다 훌쩍 나이가 많아진 나. 그녀는 경험하지 않았던 인생을 나는 겪고 있구나, 대충이라도 버텨내고 있구나 생각하면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하고..재니스 조플린의 음악에 대해서는 할말이 너무 많아 오늘은 그냥 갑니다^^ 근데, 스윙보이님의 여성에 대한 애정은 어디서 기인하는 건지 궁금해집니다.
아! 난나님께는 재니스 누님이 그런 존재였군요.
마음 속 누군가보다 훌쩍 나이가 많아지고,
그럼에도 내 자신이 이 흉포한 삶을 버티고 견디고 있음에 감사하고 대견스러워 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제겐, 그 존재가 리버 피닉스 형이랍니다...ㅎㅎ
흠 글고 저의 여성(성)에 대한 애정은,
어쩔 수 없는 끌림이 아닌가 싶은데요.
아름다움에 대한 미혹과 더불어,
이 엄혹하고 슬프며 너저분한 세상을 만든 것이 수컷(성)이라면,
여성(성)만이 이 세상을 덜 슬프고 덜 엄혹하며 덜 너저분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지요.
글고 더 정확하게는,
'여성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미욱하지만 제가 가진 사람과 세계에 대한 관심 정도지요. ^.^
아울러,
이 블로그 내 등장하는 대부분 여성들은,
제가 위민넷에 기고하고 있는 허접한 글입니다.^^;
물론 그 대상은 제가 정해서 썰을 풀고 있는 거구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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